승준
어제는 눈앞에서 보행자 신호등의 파란 불이 꺼지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반대편에서 버스가 오면 어쩌지, 마음을 졸이면서 얼른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집으로 가는 버스가 맞은편 도로에 진입했고 버스도 자신의 파란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야, 얼른 바뀌어라.’ 속으로 되뇌이면서 다른 도로의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는 나의 신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버스가 떠나간 뒤에야 내 신호가 돌아왔고 나는 한참을 더 기다린 후에야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눈앞에서 떠나간 버스를 다시 기다리고 있는 일은 허무하다. 보행자 신호가 반짝이고 있다면, 나는 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파란 불의 의미는 ‘가도 됩니다.’라고 알려져 있다.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버스를 자주 놓치다보니 내가 이해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것 같다. ‘꼭 지금 건너야 합니다. 놓치지 마세요!’
내게 필요한 버스를 잘 타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만약 차들이 건너편 도로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멈추기 시작한다면, 보행자의 신호가 올 차례이다. 적당히 거리를 보고 뛰어갈지, 아니면 느긋하게 걸어갈지 결정해야 한다. 심지어 버스 번호를 혼동하지 않고 잘 확인해야 한다.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과제 마감이 3일 남았다면 퇴고를 시작해야 하고, 은행 적금이 빠져나가는 날짜에 맞게 돈을 준비해두어야 한다. 열심히 써둔 레포트를 다른 강의 때 제출하거나, 적금 계좌가 아닌 다른 예금 계좌에 입금하는 실수도 피해야 한다. 몇몇 시의적 행동은 뚜렷한 마감 기한이 있다. 그래서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둔다면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다. 파란 불이 꺼지는 시점이 표시되어 있는 신호등처럼, 기한에 맞춰서 할 일을 미리 해둔다면 걱정의 많은 부분을 덜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내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파란 불이 켜지는 시점이 언제인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파란 불만 쫓아다니다가 빨간 불이 남은 도로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닥쳐온다. 조급하고 걱정이 많아질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마음은 느려진다. 앞으로 안내해 줄 파란 불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은 점점 더 심해져서 나를 보살필 시간보다 주변 상황과 눈치 보기에 바쁘다. 고민은 허황되고 어이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려져서 마음을 괴롭힌다. 그럴수록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지금의 나와 모든 준비가 끝난 미래의 나 사이에서 오는 괴리가 크게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질수록 지금의 나는 더 보잘 것 없이 작아졌다.
자학적인 생각의 반복을 끊기 위해 발견한 엉성한 대답은 조급한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급해서 방방 뛰는 마음에 고삐를 물리고, 목표를 정해보자. 그렇게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마음의 무게 중심을 다시 내게로 돌리고, 내 파란 불을 단단하게 바라볼 용기를 얻기 위해서.
저번 주 은사님을 찾아뵈었다. 데스크 자리를 봐주시던 선생님 두 분도 몇 년 전과 다름 없이 그대로 업무를 보고 계셨다. 그동안 잘 지내셨느냐고 안부 인사를 드렸다. “그럼, 그냥저냥 잘 지내지. 너는 어쩜 그대로니, 애가. 나이만 들었네. 잘 지내?” 10년 전과 다름 없는 인사에 기분이 좋아졌다. “네, 잘 지내죠. 답답해서 찾아왔어요.” 데스크 선생님들은 “그래, 답답한 게 많겠구나.” 하시면서 이것저것 질문하셨다. 나는 괜히 신이 나서 별로 고민해본 적도 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학점이 괜찮은 편이어서 지역인재 전형으로 공무원을 준비해 보려구요. 그런데 공무원 시험에 한번 발 들이면 고개를 돌리지 못할 거 같아서 고민이에요. 잘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께서는 “여태까지 잘 해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할 거라고 믿는 게 맞지 않을까? 지금까지 잘 못 할거라고 생각하고 해온 건 아니잖아?” 하셨다. 급한 마음이 차분해지는 대답도 아니고, 실수하지 않게끔 도와주는 대답도 아니었다.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좋은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고산지대 같았다. 고민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고 타인의 대답은 아주 작은 실마리만을 남겨주었다.
더운 날씨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여러 신호등의 파란 불을 보았다. 신호등의 규칙은 언제나 ‘정지, 그 다음 진행’이다. 혼자서 고민하고 대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되든 간에, 급해지지 말고 실수하지 말자. 눈 앞의 파란 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잘못된 버스를 타는 실수 만큼은 저지르지 말자. 빨간 불만 켜는 신호등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보행자 신호가 반짝이고 있다. 전과 달리, 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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