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준
책을 읽을 때 맨 앞장이나 맨 뒷장을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이건 전공으로 인해 생긴 버릇이다. 내 전공은 철학이다. 이렇게 학적인 서적은 저자(또는 역자)의 이력을 자연스레 보게 된다. 그가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쓰지만 그건 착각이겠지). 칸트나 헤겔처럼 널리 잘 알려진 학자는 재미 없다. 모두가 다 아는 정도는 아닌, 국내 연구자의 이력을 보는 일이 제일 재밌다. 이 사람은 이렇게 공부를 했겠구나, 대학원 생활 중 생활고를 겪었을까, 아르바이트는 얼마나 했을까, 그래서 지금은 학문을 연구하며 잘 살고 있을지 이런 내용이 주된 관심사이다.
물론, 책에 저자의 이력만 적혀 있지는 않다. 출판사, 출판사 주소, 메일 주소 등등 자질구레한 정보를 볼 수 있다. 식료품으로 치면 영양 성분표 내지 생산지가 적혀진 부분 같은 역할이다. 요즘 나는 이 중에서 'O판 O쇄'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이는 책의 출판과 관련된 정보이다. '~판'은 책의 내용이나 편집이 변경된 횟수이고, '~쇄'는 책을 발행한 횟수이다. 가령 2판 1쇄라면 책의 내용이 바뀐 첫 번째 발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
널리 잘 알려진 책이라면 판, 쇄에 적힌 숫자가 아주 휘황찬란하다. 두 자리 수의 숫자가 쇄에 적혀 있고 판의 숫자가 꽤 높다. 이런 책의 정보는 얼마나 책이 시간을 걸치며 변화했는지를 볼 수 있는 지표이다. 그런데 가끔 1판 1쇄에서 멈춰 있는 책을 만나게 된다. 이런 책을 보면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왜 이렇게 안 팔린 것일까? 이 책을 만드는 데 고생했을 텐데 속상하겠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재밌거나 의미 있는 내용을 담은 책일수록 그 아쉬움은 더한다.
학업에 강한 회의감을 느끼던 시절 나는 학교를 쉬고 일을 했었다. 그때 서점에서 1년 가까이 일을 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지역에서 나름 알려진 서점이었다. 나도 학교를 다니며 그곳을 많이 이용했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을 때 무척 기뻤다. 처음에 일을 배울 때야 많이 힘들었지만 그 시기를 지난 이후에는 일에 매우 만족했다. 아마 휴학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곳에 눌러 앉아 직원으로 더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 주된 일 중 하나는 서가 정리였다. 검색대에서 확인할 수 있게끔 책이 제 위치에 놓여 있는지 조사하고 동시에 손님이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게 서가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이었다. 하루에 많게는 천 권 가까이 정리해야 하는 터라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래도 평소에 알지도 못했을 수많은 책의 이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 규모가 큰 곳이 아니었음에도 정말 많은 책이 있었고, 그 중에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책도 정~말 많았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인 부분이 있어서 눈에 잘 띄는 곳을 주로 보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서가 맨 아랫칸이라든가 구석진 서가에 있는 책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진 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책이 마냥 낭만 가득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나의 인연은 서점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젠 중단되었지만 18년 여름부터 20년 초까지 친구들과 독립 출판 준비 모임을 운영했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서 만난 사이였다. 관심사와 관심의 정도는 각기 달랐지만 책과 문화를 사랑한다는 점만큼은 모두 동일했다. 처음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을 주고 받는 데서 시작했는데, 내가 18년에 가입하면서 독립 출판을 준비하여 우리만의 책을 만들자는 구체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잡지를 만들려고 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여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학생의 지갑 사정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로 거창한 일을 하려고 할 만한 의지가 우리에게 없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출판은 미뤄두고 1년여 간 글을 쓰며 서로의 글을 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출판 대신에 메일링 서비스를 운영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결과물은 작은 메일링 서비스였지만 그 준비 과정은 작지 않았다. 모임에 임하는 자세는 꽤 진지했기에 독립출판 관련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하고 출판 관련 비용을 여러 방면을 조사하여 준비하였다. 나와 친구 1명이 같이 명동에서 진행한 프리즘오브 출판팀의 강의를 듣고 오기도 하였고, 다 같이 독립 서점을 살펴 보기 위해 서울에 모인 적도 있었다. 끝내 우리는 각자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출판 과정을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런 경험을 통해서 출판이 단순히 글 하나 쓰고 뚝딱 끝나는 일이 아니란 점을 알았다. 치열한 과정을 거쳐서 나왔음에도 세상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구석에 놓이는 수많은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을 배워도 보고 직접 팔기도 하면서 책 너머의 세상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확실한 점은 책도 결국 상품이고 책 만드는 일도 노동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잊혀진 책, 팔리지 못한 책의 정보는 1판 1쇄에서 멈춘다. 1판 2쇄는 참 의미가 깊다. 그 책은 독자의 선택을 받아 빛을 조금이라도 보았기에, 더 많은 독자를 만날 기회가 적어도 한 번이나마 더 주어진 것이다. 1판 3쇄, 4쇄... 그 너머로 가는 일은 아직 까마득하겠지만 그래도 이 작은 한 걸음이 저자와 출판사에게는 참 남다르리라 생각한다. 노력이 인정을 받은 것도 같고 이 일을 조금은 더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느껴지지 않을까.
작은 한 걸음이 중요한 법이다. 2쇄가 3쇄가 되고 1판이 때로는 2판이 되듯이 작은 일도 하나씩 쌓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물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도 1판 2쇄를 찍기 위해 노력하는 글쓴이와 출판사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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