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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양병설의 기시감과 흔들리는 원화

by 퀀트대디

'지금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요즘 원달러 환율을 보고 있으면, 마치 조선 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든다. 나라의 운명이 흔들릴 징조가 짙게 깔려있는데도, 정작 무대 위에 있는 권력자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자신의 조직과 집단이 쌓아온 이해관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위기는 이렇게, 늘 조용히, 그리고 예고된 방식으로 찾아온다.

# 위기를 직시한 자와 위기를 외면한 자

임진왜란이 터지기 훨씬 전, 율곡 이이는 다음과 같이 이미 명확하게 주장했다.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전쟁이 터지기 전에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단순한 군비 증강이 아닌 국가 시스템 전반을 다가올 위험에 대비시켜야 한다는 충언이었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은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눈앞의 당파 싸움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고, 당장의 정치적 유불리가 국가의 장기적 존망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했을 때 조정이 한 일은 나라를 지키는 것도, 백성을 보호하는 것도 아닌 도망뿐이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신의주로 피신했고,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결국 백성들과 지방 의병들이었다. 위기를 사전에 대비하지 않은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치러야 할 몫으로 돌아온 것이다.

2025년 한국 경제는 16세기 조선의 상황과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지금 대외 변동성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원화는 시스템적 약세에 빠져 있다. 하지만 정작 정부와 한은의 스탠스는 금리 인상이라는 정공법은 외면한 채 눈치만 보며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형국이다.

# 답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은은 절대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 금리를 올리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여기서 금리를 올리는 순간, 지난 15년간 쌓아 올린 부동산 버블이 한꺼번에 터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계부채와 레버리지 규모, 편중된 자산 포트폴리오 구조는 금리 인상에 극도로 취약한 상황이다. 기준금리가 여기서 단 0.5~1%만 올라도 연쇄 디폴트 압력이 발생할 수 있고, 주택 가격의 조정은 불가피하며, 금융 시스템은 일순간에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즉, 금리를 올리면 그들은 즉각적으로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충격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 속 대부분의 정부 시스템은 미래를 위해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희생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대의(大意)란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허황된 이상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또 선조의 모습이 겹친다. 조정은 국가적 위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먼저 챙겼고, 그로 인해 민중은 고통받았다. 지금 한국의 정책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정면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하기보다는 단기적인 충격을 회피하려고만 하며 그 무엇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우선시한다.

# 언제나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

금리를 못 올리니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선택한 다른 방식은 바로 달러를 직접 시장에 공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등장하는 카드가 바로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이 가지고 있는 해외자산을 매각해 달러를 확보하고 '전략적 환헤지'라는 명목으로 그 달러를 시장에 매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율 안정화 방안은 표면적으로는 '외환시장 안정에 기여한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민연금이 들고 있던 해외주식이나 해외채권을 강제로 환전해 달러를 공급하는 구조다. 문제는 당연히 이 과정에서 국민의 노후자산 가치가 희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략적 환헤지는 달러 매도 시점을 잘못 잡으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 갉아먹을 수 있고, 또한 좋은 흐름을 보이고 있는 해외투자 부문의 비중을 강제로 줄이는 것이기에 장기적인 수익성과 포트폴리오의 안정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결국 손해는 나중에 연금을 받을 국민들이 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정책이다. 이 또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숱하게 봐왔던 장면이다.

# 민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DNA

그렇다면 왜 자꾸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조선 시대 조정도, 2025년 현재의 대한민국 정책 당국도, 위기를 미리 대비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단순히 제도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조선인의 문화적·역사적 DNA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복지부동하는 태도"

"단기적 이익이 언제나 장기적 안정보다 우선시되는 집단적 중우정치 구조"

"위기 신호가 발생해도 당장의 불편함만을 회피하고 보려는 본능"

한강의 기적을 이룬 위대한 민족이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한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6·25 전쟁 직후 한국은 소위 굶어뒤지기 직전이었다. 위기의 순간 한민족은 저력을 발휘한다. 문제는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개념이 한반도 문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꼭 직접 털려봐야 정신을 차린다. 이런 집단적 행동 패턴은 한반도의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항상 반복되어 왔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과 제도가 계속 변해왔어도, 이러한 조선인의 DNA 속에 뿌리박힌 고질적 행동 패턴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 본격 각자도생의 시대

금리라는 것은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하고 국가 경제가 휘청이기 시작해야 비로소 강제적으로 끌올당하는 것이지, 한은이 금리를 선제적으로 인상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치 이자 연체를 버티다 버티다 끝끝내 못 버텨야 경매로 부동산 매물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선인은 자본주의를 창조한 종족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금융의 근간에 자리한 불확실성과 위험 관리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펼쳐지면 우리는 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지금 한국 경제는 분명히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위기가 현실화된 후에 더 큰 비용을 치를 것인가. 십만양병설을 외면한 대가는 참혹했다. 물론 그 대가를 치른 것은 왕도 대감마님도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며,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 옛날 조선이 그랬고, 대한제국이 그랬으며, 1997년이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각자도생뿐이다. 외환위기든, 부동산 조정이든, 구조적 저성장이든 한국 경제는 앞으로도 여러 번 더 흔들릴 것이다. 그때마다 정부는 국민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먼저 지킬 것이다. 이건 정치적 비판이 아닌 '역사가 반복해서 증명해온 사실'이다. 98년 IMF 때도 이미 우리는 아나바다라는 같잖은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스스로 살아남을 준비를 하는 선택을 말이다.

Fool me once, shame on you

Fool me twice, shame o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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