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상, 단단한 어른이 되기 위한 몸부림
독립출판물로 만들었던 <어른의 일>을 가나출판사와 함께 고치고 덧붙여 다시 만들었어요.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어서 낯설고 어이없지만 나 빼고는 다들 그럴듯하게 잘하는 것 같은 ‘어른의 일’을 만날 때마다 썼던 글입니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은 단단한 어른이 되기 위한 to do list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특히 이런 분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상상하며 만들었어요.
-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자꾸만 질문하게 되는 사람
-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뭔지 찾아보고 싶은 사람
- 취업과 결혼이 꼭 해야 되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사람
- 바쁘긴 한데, 뭘 위해서 사는지는 모르겠는 사람
- 부모와 떨어져서 사는 걸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
-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끼는 사람
-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디 많이 읽어 주시고 소문도 많이 내주세요 :)
[프롤로그]
돌이켜보면 참 굴곡 없는 인생이었다. 커다란 성취도 심 각한 실패도 없이 심심할 때쯤 나타나는 고만고만한 요철을 지나왔더니 어느덧 장성한 나이였다. 딱히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이미 ‘어른’으로 분류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도 내가 어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하나도 어른스럽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라니. 내가 어른이라니!
상상해온 어른의 삶은 대하드라마는 아니어도 미니시리즈 정도는 될 줄 알았다. 어른씩이나 되었으니 꿈꿔왔던 소설가가 되었거나 초고속 승진을 하며 업계에 획을 그은 커리어 우먼이 되어서, 서재와 드레스룸과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큰 유리창에 탁 트인 전망을 갖춘 집에 살 줄 알았다. 시간이 나면 영어로 된 소설을 읽거나 첼로를 켜고 왈츠를 출 줄 알았다. 유난스러운 열애 끝에 결혼해 서른 즈음에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내 몫은 일일시트콤이었다. (매일 방영할 만큼 흥미로운 일이 자주 생겨 나는 것도 아니니, 말하자면 ‘격일 시트콤’쯤 되려나.)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면접에서 미끄러졌고, 겨우 얻은 방 한 칸의 지분은 내 몫보다 은행 것이 더 컸으며, 취향이 없는 미지의 영역을 만나면 주눅이 들었고, 소개팅은 매번 실패였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을 살다가, 때때로 오목하거나 볼록한 요철 같은 에피소드를 만날 때면 글을 썼다. 어른이 되고 내게 요구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그때마다 쓴 글들을 모아놓으니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준 적이 없어서 나로서는 하나하나가 다 낯설고 어이없는데, 어쩐지 나 빼고는 다들 그럴듯하게 잘하는 것 같은 ‘어른의 일’이었다.
출근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대다수의 ‘어른’들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취업준비생 시절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근하는데, 나는 갈 곳이 없다니.... 나도 어디론가 출근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출근은 나에게 일, 직업, 직장, 수입 등등과 같은 말이 되었다.
독립은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 영역이었다. 모든 어른이 독립을 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독립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 경제적으로 벗어나 홀로 서면서 남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부동산, 대출, 살림과 같은 무거운 단어와도 가까워졌다.
취향은 출근과 독립이 시작되자 보상처럼 주어진 권리였다. 어린 시절 나의 취향은 곧 엄마의 취향이거나 아니면 가성비에 따른 무언가였다. 하지만 출근과 독립으로 돈과 공간 이 생겨나자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저절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던 취향은 뜻밖에도 가만히 있으면 절대 생길 리 없는 영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연애만큼 ‘어른의 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영역이 있을까.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잘하게 될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연애는 가장 잘 해내고 싶었음에도 도무지 그 길이 잘 안 보였다. 이 정도면 제법 단단해졌다 싶을 때조차 연애는 보란 듯이 나를 무너뜨렸다. ‘와아 어른 못 해 먹겠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 모든 ‘어른의 일’들을 겪으며 힘겨운 순간도 많았지만, 그래도 주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글쓰기 덕분이다. 글 쓰는 일만이 괴로운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다. 나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미리 보기’와 ‘다시 보기’가 됐으면 좋겠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주제에 마음을 할퀴어놓는 숱한 ‘어른의 일’의 힌트가 되어도 좋겠다. 한편으로 이 책이 편하게 틀어놓은 브이로그 같았으면 좋겠다. ‘어? 저 사람도 저렇게 사네. 나도 그런데.’ 하면서 웃었으면 좋겠다. 쓰면서 내가 위로받았던 것처럼 내 글이 누군가 걷는 울퉁불퉁한 길에 조금이나마 힘이 된다면 오늘도 전반적으로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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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손혜진 #어른의일 #출근독립취향그리고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