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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Feb 09. 2021

결혼 고발, 그리고.


“세상 고생은 여자만 하나? 읽을 가치가 없는 책. 페미는 돈이 된다는 철학에 충실한 불쏘시개.”


전자책 리뷰  첫 글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화나게 한 걸 보니 이 책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걔가 그러라고 하디?


결혼 후 첫 명절에 큰집에 가지 않겠다는 말에 돌아온 답이다. 


저자가 들은 그 말을 정확하게 나도 들었다.


남편은 대기 근무에 걸렸고 시 큰집에 나 혼자 보내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가 들은 말이다. 결혼하자마자 들은 말이었는데 당시 화가 나기보다는 두려웠다. 미움을 받게 될까 봐.


그 후 ‘며느라기’를 자처한 나는 남편 없이 그의 큰아버지 집에 가서 명절 설거지를 하는 삶을 10년간 살았다. 너 결혼하고 이상해졌다,라고 시부가 남편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30년을 효자로,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온 아들이 어른이고 뭐고 부모도 상관없는 천하에 막돼먹은 자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겪은 세월이, 그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 결혼 고발>  사월날씨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체험을 하나하나 들어 가부장제와 결혼제도를 고발하지만, 개인적 에피소드들로만 채워진 에세이는 아니다.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확한 조사 결과나 수치를 요구해오곤 하는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숫자들이 있다. 


그중 한 예를 들어보자면, 암에 걸렸을 때 배우자의 간병을 받는 비율이 남성은 86.1 퍼센트인데 비해 여성은 36.1 퍼센트이며, 식사 준비의 경우 남성 환자의 88.3 퍼센트가 배우자의 도움을 받는데 비해 여성은 13.9퍼센트만 도움을 받는다. 여성 환자의 63.9퍼센트는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며 이는 남성 환자의 7.1퍼센트만이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는 수치에 비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남성들은 돌봄을 받는 것에 익숙하고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나는 남편보다 가사노동을 더 잘 안다. 그래서 비효율적이거나 때로는 완전히 틀린 남편의 행동을 목격한다. 게다가 남편은 웬만해서는 알아서 움직이지조차 않는다. 스스로 적응하고 나아지길 기대하며 지켜보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알려준다. 그간의 답답함이 섞인 말이 남편에게 지적으로 들렸는지, 남편이 말한다. “그것 좀 모를 수도 있지, 왜 화를 내요? 친절하게 알려줘야 나도 할 마음이 들 거 아니에요!” 나의 인내심이 애를 쓴다. 스스로  나아지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사람의 반복되는 잘못을 보며 참아왔는데, 그 답답함을 누르며 겨우 말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더 상냥하라는 주문이다. 자기 몫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인데도 알려주는 내게 맡겨놓은 것처럼 감정노동까지 요구하며 당신은 어떻게 그리 당당할 수 있는가.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다. 그러나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알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나. 특히 고정된 성역할 때문에 배우자가 부당하게 가사노동의 짐을 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게 당당한 일이 될 수는 없다. ‘네가 친절하게 알려주면 해볼까 싶지만, 아니면 하기 싫어져. 내가 안 하는 건 화내는 네 탓이야’라는 건 너무도 비열한 태도다. 가사노동에 대해 달갑지 않은 마음을 상대 탓으로 돌리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중략)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며 무한한 칭찬과 인정으로 가사노동에 참여하게 만들라고. 그래서 여자들은 고민한다. 남편이 가사노동을 잘 배우고 수행하도록 어떻게 독려해야 하는지 다양한 방법을 연구한다. 그런데 과연 효과적인 방법이 존재하나? 아니 그 전에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여자들은 언제까지 밥 안 먹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남편 엉덩이를 두드리며 청소기를 쥐여줘야 하나? 남편이 기분이 상해서 마지못해 시늉만 하던 자기 몫의 가사노동까지 포기해버릴까 봐 우리는 언제까지 전전긍긍해야 하나?





가사노동은 어떤가. 


"남편은 시키면 하지만 답답해서 그냥 내가 해"


내가 자주 하던 말이다. 이 말에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그가 스스로 성장하여 답답하지 않을 만큼의 빠르기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왔는지가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했을 때 '그래도 시켜서 하는 게 어디냐', '그 정도면 착한 거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책의 예와 나의 삶을 하나하나 다 비교하여 적을 수 있을 만큼 저자가 듣거나 겪은 상황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일로 여기지 않는 남편의 태도가, 내가 겪어온 일과 너무나 비슷하여 놀랐다.



내가 들은 말들이 평범한 말들이었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들을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고, 불쾌했으며, 화가 났다. 참기 싫어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을 때 고집 세고 불편한 건 다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매일 안부전화를 강요받던 시절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너의 부모에게 전화는 네가 알아서 해라, 로 올 수 있었으나 나이 든 부모님께 야박하게 구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마음의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감정을 무시하지 못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나 자신에 분노한다. 내가 착해서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이 일들은 모두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시작이 틀렸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잘못된 요구를 하던 그의 부모님이나 그가 하지 않았고 내가 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을수록 관계도 함께 무너졌다.

그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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