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댕동'
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유독 진우의 표정은 그들과 사뭇 달랐다. 무언가 확고한 의지를 다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랄까.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시험 문제 하나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진우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진우는 가방안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이팅! 우리 아들..'
엄마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이다. 어제 오늘 그 메시지를 벌써 몇 번째 들여다보고 있는지 모른다. 시험을 코앞에 둔 지난 밤이 되어서야 진우는 엄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상희는 애써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였으나 필시 복잡한 심경을 숨기기 힘든 듯 얼굴에 그늘이 가득 드리웠다. 당장 며칠전이었다면 진우는 상희에게 떠나지 말라고 온갖 투정을 부렸을 것이다.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내가 잘할테니 한국에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그러나 진우는 마침내 깨달았다. 지금의 엄마에겐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을.
“미안해. 진우야. 시험 앞두고 괜한 걱정끼치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숨겼는데 이미 다 알고 있다니 내가 정말 널 볼 면목이 없어. 그치만 엄마가 우리 진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그것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진우는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눈물만 삼켰다. 당장 내일이면 엄마가 같은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이미 그 사실을 인정하고 보내줘야 한다고 믿었으나 가슴이 머리와는 다르게 반응했다. 상희는 오랫동안 다 큰 아들의 어깨를 감싸안고 작게나마 흐느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선물상자를 진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엄마, 이게 뭐에요?”
“응, 진우가 대학 가면 주려고 준비한 거였는데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네.”
진우는 상희가 건넨 선물상자를 풀어 보았다. PCS폰, 얼마전부터 한국에도 출시되고 있는 개인용 핸드폰이다. 공중전화가 아니라 휴대용으로 들고 다니며 전화를 할 수 있다니 참 편리한 세상이다. 친구들과 대리점에 진열되어 있는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언젠가는 자신도 문명의 이기를 몸소 경험하고 멋드러진 사회의 구성원이 되겠노라 다짐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어..엄마 이건.”
“그래, 이제부턴 그걸로 엄마랑 편하게 통화 하자. 엄마가 멀리 있지만 언제나 진우랑 함께 있을 거야. 알겠지? 내일 시험 잘 쳐야 해. 우리 아들.”
갖고 싶었던 핸드폰이지만 진우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있을 거라고? 손 닿을 수 없는 저 멀리에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람. 그러나 진우는 마음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갖가지 원망을 애써 억누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리 떠나는 엄마에게 그 정도는 해 줘야 당신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우는 학교 시험장밖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에 엄마가 먼 이국땅으로 떠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진우는 오히려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자신이 지금부터 열심히 살아야만 언젠가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진우의 걱정과는 다르게 몇 개월이 지나도록 진우의 통장엔 예금이 넘쳐났다. 상희는 진우에게 계속해서 돈을 부쳐 주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말이다.
“엄마, 나 이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어서 괜찮아요. 이렇게 부쳐주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냐, 대학생도 되었으면 책도 사야 하고 강의도 들어야 하고 얼마나 돈 들 일이 많겠어. 아저씨 사업이 잘 돼서 진우에게 돈을 더 보내 주라고 남편이 신신당부를 했어. 정말이야.”
상희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다행이다. ‘엄마, 그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나 안 보고 싶어?’ 진우는 입밖으론 꺼내지 못한 그 말을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였다.
“알았어요. 엄마.”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다. 진우는 매일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련한 기억에 사로잡혔다. 20살이나 먹은 다 큰 청년인데.. 엄마와 떨어져 사는 이 삶이 이제는 좀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이 점점 더 가중되는 것만 같다.
“그럼 여름에 한국에 들어오는 거지? 아니면 내가 가도 되는데..”
“안 돼. 엄마가 갈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알겠지?”
아들의 방문을 극구 만류하는 상희의 목소리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진우는 상희의 바람과는 다르게 어떡해서든 엄마를 만나러 미국에 갈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한번씩 목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상희의 부재를 제외하곤 진우의 일상은 그 누구보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모든 사람이 알만한 명문대 신입생, 드넓은 교정에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시간을 함께 할 때면 언제나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만 같다. 이렇게 똑똑하고 허우대 멀쩡하게 잘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만 하겠지. 진우도 어느새 그 일상에 젖어들어 매일매일에 충실한 하루를 살았다. 시험때가 되면 남들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밤을 새며 공부에 매진했으며, 방과 후엔 친구들과 모여 공을 차고 운동에 열중했다. 물론 그 때마다 자신의 곁엔 지수가 함께였다. 진우에게 있어 지수의 존재란 여자친구이기 이전에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하나뿐인 보호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진우는 매일매일 이어지던 상희와의 연락이 어느새 일주일에 2,3번,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이 될까말까 할 정도로 뜸해져 버렸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여름방학이 되자, 진우는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돈으로 미국 연수를 떠날 계획을 세웠다. 물론 남들처럼 순수하게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그보단 상희가 어떤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옆에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희가 살고 있는 LA인근 대학 중심으로 관련 서류를 찾아 보았다. 어느새 진우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상희가 어떤 반응을 할는지 짐작이 간다. 처음에는 왜 굳이 이 먼곳을 찾아 왔느냐며 자신을 나무라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구보다 아들을 반기며 안아 줄 것이다. 갑작스런 아들의 방문에 조금이라도 당황하지 않게 진우는 상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 연거푸 핸드폰 착신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상희의 핸드폰은 벌써 며칠째 응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말고사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어서 미쳐 인지하지 못했는데 상희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엄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그러나 무작정 상희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외엔 진우에게 별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애초에 엄마의 핸드폰 번호 외에는 엄마 남편의 전화번호도 그들이 살고 있는 집주소도 전혀 알지 못한다. 알았다 한들 그 아저씨에게 전화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며칠이나 지났을까. 방학이 된 후 엄마의 연락을 기다린지 열흘이 다 되어서야 진우는 드디어 상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진우는 반가운 내색은 뒤로 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왜 이렇게 연락이 늦었냐며 상희를 다그쳤다.
“엄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음성은 진우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Hello, Is this Park? Sang hee's son?"
영어로 말하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핸드폰 수화기에서 들려 오자 진우는 당황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 여보세요. 누구세요?”
그러자 한참동안 어수선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어색한 한국어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박진우씨 되시나요? 김상희씨 아들분?”
“네, 맞아요. 그런데 누구시죠?”
진우는 순간적으로 상희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엄마의 핸드폰으로 낯선 남자가 멀리 이국 땅에 있는 자신에게 전화를 할 리가 없다.
"혹시, 우리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에요? 여보세요. 어서 대답 좀 해 봐요.”
남자의 한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 여기는 미국 LA 남부 경찰국 순찰부서입니다. 그게 말이죠. 어젯 밤에 김상희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병원인데 연락이 되는 가족분이 박진우씨밖에 없어서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시다뇨?”
진우는 지금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이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우는 방금 자신이 들은 얘기를 부정해 버렸다. 분명 미국 경찰이 잘 못 알았을 것이다. 엄마에게는 미국에 버젓이 가족이 있는데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할 리가 없잖은가.
“잘못 아신 거 같아요. 가족이 없다뇨? 정말 우리 엄마가 맞아요?”
“네, 맞습니다. 혹시 언제 이 곳에 오실 수 있으신가요? 사망자 확인을 해야 해서요.”
“말도 안 되는 얘기 좀 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가 왜 죽어요. 엄마에겐 미국에 가족이 있단 말이에요. 지금 잘 못 알고 전화하신 거 같아요.”
“음..”
무언가 분주하게 자료를 찾는 듯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뇨. 김상희씨가 맞습니다. 그리고 박진우씨가 말씀하신 가족분들은 연락이 되지 않아요. 이제 가족이라고 할 수가 없거든요. 1달 전에 이혼신고가 되어 있어서 김상희씨에겐 미국에 법적인 가족이 없어요. 시신처리를 위해서라도 빨리 결정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곳으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진우는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면 방금까지 어느 미치광이가 자신에게 이상한 소리를 했다며 상희에게 일러줄 작정이다. 상희는 그럴 리가 있냐며 환하게 웃을 것이다. 진우는 이 불길하고 재수없는 꿈에서 깨어나고자 자신의 뺨을 힘차게 내려쳤다. 아프다. 미칠 듯이.. 얼굴의 통증이 희미해질 쯤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눈물이 흘렀다. 진우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