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피터
입시 가이드북에도 없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도 전혀 몰랐던 ‘영화과’에 가겠다고 홍대병스러운 선택을 한 어린 시절의 나는 냉정하고 차가운 결의 영화를 높게 쳤었다. 눈물을 짜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한국식 신파에 정반대되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작품 같은 차갑고 정돈된 스타일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집안의 막내아들로 부족한 것 없이 사랑받으며 자랐기에, 안전하게 스크린 속 영화로만 차가운 현실을 접하고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고 가족을 벗어나 혼자 살면서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온 나는 비교적 작은 파동에도 남들 이상으로 흔들리고 힘들어했던 것 같다. 다정함도 체력에서 온다는 말처럼 나는 점점 더 차가워졌고 MBTI에서 T를 추구미로 삼게 되었다. 갈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어갔고, 짜증만 늘어갔다.
실제로 차가운 세상을 조금 맛보아서일까? 지금은 예전만큼 차가운 영화들이 끌리지 않는다. 잘 만든 영화를 보면 예술적으로 채워지는 느낌은 들지만, 감정 소모가 심해 현실 생활에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나의 부족한 에너지로는 현생을 살아가기도 벅차서 이제는
차가운 영화들이 감당되지 않는다.
이렇게 지쳐가던 중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우주 배경, 착하지만 찐따미 넘치는 몸짱 너드 주인공 그레이스, 무해하고 귀여운 돌덩어리 외계인 로키, 감동적인 종을 뛰어넘는 우정 이야기까지 나의 모든 취향을 저격하는 영화였다. 특히 영화가 펼치는 인류애 아니 생명애의 메시지는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영화의 빌런(?)으로 볼 수 있는 100% T 인간 스트라트조차도 인류의 존속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인류애가 있으면서 없는 지독한 인간이다.
사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오랜만에 만난 취향 저격 따뜻한 이야기에 나는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남들에게 관심 가지지 않고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던 나의 마음과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외골수 너드임에도 운동은 열심히 했는지 문제없이 우주로 바로 던져진 주인공 그레이스를 보면서 나도 체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다정함은 체력에서 오기에, 내 한 몸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는 건강이 나빠질수록 남들에게 차가워졌던 것 같다. 사회성은 조금 떨어져도 구김살이 없던 그레이스처럼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면 예전의 친절했던 마음이 조금은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마음의 정화도 필요하다. 매일 넘쳐나는 끔찍한 소식들과 무미건조하고 배려 따윈 없는 서울 생활에 지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산산이 깨져버린 지 오래였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만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 장담하던 사람들에게 나도 은근슬쩍 동의해 버렸었다. 그 시선으로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그레이스와 로키의 첫 만남을 그렸다면 서로 총구부터 겨누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레이스와 로키는 조심스럽고 배려 넘치게 첫인사를 나누었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이런 따뜻함을 판타지로 여기지 않았던 예전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계절의 변화 때문이었을까? 유독 재미없고 무심한 일상을 보내던 나에게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되어주었다. 영화를 보고 철없이 차가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따뜻한 인류애를 믿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껏 가시 돋치고 예민해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니 조금 슬퍼졌다. 완전히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처럼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