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피터
대단한 영화다. <패왕별희>는 수많은 영화와 이야기에 영감을 불어넣은 원천이자 위험을 무릅쓰고 제작된 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부끄럽게도 영화를 전공했음에도 걸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을 많이 보지 않은 나는 뒤늦게 <패왕별희>를 만나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최근에 감상한 일본 영화 <국보>부터 우리나라의 <왕의 남자>까지 여러 작품이 떠올랐다.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남성 예술가의 이야기,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의 정체성 혼란 등 많은 공통점이 있구나 생각했다. <패왕별희>가 현재까지 걸작이라 칭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젖어 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떤 부분들이 나를 멈칫하게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단 가장 몰입을 막았던 것은 남자 예술가 주인공 캐릭터였다. 이미 많이 보아서 질릴 대로 질려버린 것일까? 끔찍한 시대에 태어나 갖은 풍파를 겪은 것은 안쓰러웠지만, 계속해서 펼쳐지는 자기 연민의 향연을 지켜보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버리고 간 매춘부 엄마, 예술가가 되기 위해 버텨야 했던 비인륜적인 학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억압하는 권력까지 캐릭터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넣기 위해 모든 요소를 동원한 듯했다. 주인공 청데이는 누가 봐도 불행한 캐릭터지만,
이제 그런 캐릭터를 그만 보고 싶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묘사도 마음에 걸렸다. 여성은 어머니가 아니면 매춘부라는 구시대적인 시선이 이 영화에 그대로 묘사된다. 와중에 공리가 연기한 주샨이라는 캐릭터는 흥미롭다. 시종 예민함을 표출하면서도 권력에는 수동적인 청데이와 남자다움과 힘을 과시하면서도 결국엔 힘에 무릎 꿇는 시투, 두 명의 남성 예술가와는 달리 주샨은 가장 현실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본인의 아이를 유산하고 아편에 취해 쓰러진 청데이를 엄마처럼 보듬어 주는 장면과 시투에게 버림받고 절개라는 이름의 자살을 택하는 장면처럼, 틀에 박힌 구시대적인 표현에서 얼굴을 찌푸리게 되었다.
이 영화를 20대 시절에 봤다면 감상이 완전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보며 오열했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여자 주인공의 불행한 인생을 전시하는 불행 포르노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패왕별희> 또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만큼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것이 파멸하는 것을 지켜보는 관음적인 시선이 조금 느껴졌다. <패왕별희>가 공개될 당시에는 중국 공산당의 심기를 거스르는 용기 있는 작품으로 보였겠지만, 지금 시점의 내가 보기에는 너무 고루하게 느껴졌다. 극중 시점과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 갈만한 내용임에도, 내가 최근 여러 가지 이슈로 날이 서 있던 탓인지 크게 몰입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클래식(고전)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영원할 것 같았던 색채도 바래질 수밖에 없다. 천카이커 감독은 문화대혁명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예술가 선배들을 기리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 진취적이고 멋진 시도였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 낡아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옛것들을 분서갱유 하자는 극단적인 결론은 아니다. 나도 천카이커 감독처럼 선배들의 발자취에서 배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패왕별희>를 보고 느낀 것처럼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며 고치고 좋은 부분은 배우는 자세를 가지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