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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ul 19. 2022

7 SUJUNG :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다

2022.04.13. @안국역


시그니처 아이템의 의미 ─
사두, 사두, 사두』(주제)
실체와 무게가 있는, 열심을 담아 쓴 첫 책이에요. 독립 출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만들어냈기에 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글이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웃음).




얼마 전 영감 뉴스레터 <인스피아>에서 ‘결정불안 사회’를 읽다가 이 대목에 걸려 멈췄다. “우리를 둘러싼 선택 강박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진짜’ 선택지들에 대해 궁리해보는 것. 모든 것을 붙잡으려고 초조해하기보다는 많은 것들이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정말 내 마음에 닿는 것을 즐겨보려고 하는 해찰.” 어딘가 익숙했다.


일상을 이루는 가볍되 반복되는 선택부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신중하되 어려운 선택까지, 무수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삶에는 피로감이 존재한다. 이를 무릅쓰고 결정한 다음에는 몸소 겪어야만 하는 순간이 펼쳐진다. 선택과 결정, 그리고 체험. 내가 고여있지 않도록 해줄 거라는 기대감으로 달라질 모습을 상상하고, 그로써 한 뼘 성장하리라고 예단하는 종류가 한 축이라면, 다른 축은 어쩔 수 없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종류다.


수정 님의 삶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표지 하나 없는 광활한 대지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본인을 지켜줄 울타리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울타리가 되어줄 존재를, 장소를, 이름을 찾아 떠나면서 필터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 같은 듯 보여도 ‘나만은 다른 걸 아는, 나만을 위한’ 울타리여야 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에 걸쳐 어느 정도 견고하게 세웠다고 여길 즈음, 필터를 교체해야 한다는 신호가 왔다. 무소속은 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무소속 기간을 보내야겠다고 선택한 계기가 궁금해요.

계획 세우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고 인생 전체에 대해서는 더 그래요. 무소속으로 지낸 지 11개월 됐는데, 11개월 전 마음과 지금은 또 달라요. 계획적으로 구체적인 이유를 토대로 실행하는 분도 있지만 뭐랄까, 저는 상황이 잘 맞아서 무소속으로 지내보게 됐어요.


갭이어 같은 건가요?

네, 일한 지 5년이 막 지난 찰나에 휴직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5년간 일하면 1년을 무급으로 쉬는 형태인데 다행히 여러 가지 면에서 수월하게 흘렀고, 운이 좋아서 무소속 기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저는 반드시 지금 휴직을 써야 한다고 여겼어요. 왜냐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못하는 사유만 늘 테고, 코로나19로 깊이 깨달은바, 기회 있을 때 빨리해야지, 나중에는 없어지고 바뀔 테니까요. 저한테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1년 쉬어보기로 했어요. 정한 기간이 끝날 즈음에 일을 그만두고 싶으면 그러고, 아니면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고요.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무작정 저질렀죠. 물론 돈이 부족해서 제 마음과 달리 급하게 복귀하면 안 되니까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 놓고요.


그렇게 지내보시니까 어때요?

벌써 무소속 마지막 달이에요. 오락가락 혼란의 연속이죠(웃음). ‘아 진짜 미치겠다. 너무 돌아가기 싫다’ 그러다가 좀 있으면 ‘아니야 나에게 월급을 준다는데, 너무 감사하다, 얼른 가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고, 다시 ‘얼른 돌아가겠다니 미쳤어?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다’ 하는 식이에요(웃음). 날씨 좋으면 서성거리면서 ‘지금이 너무 행복한데 한 달만 지나면 지금의 내가 얼마나 부러울까?’ 지금을 즐기자, 이 순간을 기억하자’며 현재를 보려 해요.


무소속으로 지낼 기회를 나에게 주면서 새로이 알게 된 점은 뭐예요?

아무래도 관점의 변화죠.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소도시로 다시 돌아갔는데, 당시에는 그 상황을 패배라고 여겼어요. 청소년기에는 말 그대로 고향을 탈출하려고 아등바등 기를 썼거든요. ‘난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는 다시 안 온다, 두고 봐라’ 하는 마음으로 떠났고, 7년 정도 서울에 살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게 성에 차지 않았어요. 내가 되려고 했던 게 이런 모습은 아닌데, 밀려나는 느낌이랄까요? 누가 뭐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창피했어요. 특히 제 친구들한테요.

지금이야 저마다의 삶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편이라 당시에 늘 박탈감을 느꼈거든요. 다들 결과가 좋고 잘 되는데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창 시절에는 딱히 희망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면서, 여기 아닌 곳을 자꾸 떠올렸어요. 어릴 때 하던 고민을 서른 넘어서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것 또한 내 선택으로 온 곳이고,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나는 지금 이곳이 좋다, 지금의 나를 위해 과거의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해준 것 같다’로 관점이 바뀌었어요.



그 변화에 이른 게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 덕분인 것 같나요?

그럼요. 친구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었거든요. 한 번은 아는 언니가 집을 열흘 정도 비우는데 고양이를 봐달라고 부탁해서, 밥 챙겨줄 겸 가서 부산을 여행했어요. 아는 사람을 중심으로 목포에 한 열흘, 서울에 열흘 머무는 식으로 각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죠. 그때마다 생각했어요. 단지 여행한다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살면 어떨까? 나 하나만 책임지면 되는데’라는 기준으로 여기 사는 내 모습을 그려봤고요. 결론은 매번 제가 지금 사는 곳이 참 좋다는 거였어요.


지금 사는 곳의 어떤 점이 좋아요?

음, 7년 정도 서울에서 살았지만 막연하게 서울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서울에서 살아야 맞지 않나 생각했어요. 젊은 층보다 노년층 인구가 더 많은 지역에서 이렇게 고요하게 지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거든요. 그러던 중 서울에 있는 일자리를 추천받았는데, 막상 기회가 오니까 내가 꼭 서울에 살아야 하나 싶더라고요. 현재의 저와는 맞지 않는 곳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어요.

과거에는 서울에 머물지 못하는 걸 밀려났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의 삶이 저 자신을 위해 잘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이전보다 마음이 편하고 어딜 가든지 얼른 돌아가고 싶을 정도예요. 한 친구가 저더러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내심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돌아온 거 아니냐고, 은연중에 해결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거 아니냐고. 지나가는 말로 던진 건데 그 말이 오래 남았어요. 정말 해결하고 싶은 게 있는 거 아닐까?


그 질문의 답은 해결하셨어요? 계속 고민하는 중인가요?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중고등학생 때 집이 학교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데, 요즘처럼 교통서비스가 잘 돼 있지 않아서 기사님들이 버스정류장에서 저를 두고 지나쳐갈 때가 많았어요. 일찍이 손을 들고 버스를 쫓아갔을 때도요. 그게 너무 서러웠던 기억이 나요. 그럴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매사 무력한 일투성이였죠.

어릴 때는 내 선택이 아닌 것들 속에서 모든 게 속박처럼 느껴졌어요. 내가 발붙인 장소를 탈출해야 하는 공간으로 여겼고요. 이제는 그때처럼 무기력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내가 살고자 하는 곳에 살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고, 집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꾸며놓고, 운전도 하면서, 닿고 끊는 모습을 저한테 확인시켜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유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청소년기까지는 경제력도 없고 나의 재능도 알지 못하는 데다 대체로 자립할 수 없는 시기잖아요. 그래서 학업을 그만둬도 될 것 같다고 선택하신 게 놀라웠어요.

학업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학교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 결단을 내린 건 본인을 더 믿어서가 아닐까, 결국에 내가 나를 살린다는 희망을 본인에게 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요?

그건 용기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달리 표현하면 ‘있을 용기가 없다’에 가깝죠. 도저히 못 있겠고 이렇게는 살 수가 없는 상태인 거지, 용기 내서 벗어나자는 게 아니었어요. 다음 스텝은 당연했죠. 입시를 치르는 비평준화 고등학교였는데, 입학 전에 이대로만 하면 아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연락을 받은 기억이 나요. 그때만 해도 제가 붙잡아야 하는 유일한 동아줄처럼 느껴졌어요. 미성년자인 제가 인생을 변화시키기에 달리 별 수를 생각할 수 있었겠나 싶네요.

학교도 싫고 집도 싫은데 당장 갈 데가 없고, 우선 이름 있는 대학에 가면 과외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생활 정도는 꾸릴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목표를 정한 거죠. 새벽 2시까지 커피를 마시면서 울면서 공부하고, 다시 7시까지 학교에 가서 꾸벅꾸벅 졸고, 어느 날은 변기 위에서도 깜빡 졸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인생은 늘 유예하는 것이자 견뎌내는 것이었고 뭔가는 ‘그 후’에나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타이르는 것이었는데요. 나날을 견디다가 죽고 싶어졌던 것 같아요. 더는 탈출까지 참을 수 없을 상태에 다다르자, 제가 견딜 수 없는 부분까지 다 견딜 필요 없이 다른 방법으로 대학에 가면 된다고 여겼어요. 시기를 엿보다가 고1 마치고 자퇴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당시에는 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을 저지른 마냥 학교며 집에 난리가 났지만, 나중에는 수락하셨어요.


중간중간 ‘탈출’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싶어요.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쓰지 않고 나를 계속 더 나아가게끔, 나를 던지면서 단련시키는 식으로 오셨다는 게 일종의 ‘구원’처럼 보이거든요. 20대라도 힘들 것 같은데 10대면 오죽하겠어요.

전 반대로 그때니까 할 수 있었고 다시 하라면 절대 못 할 것 같아요(웃음). 휴직과도 비슷해요. 아는 게, 가진 게, 챙겨야 할 게 늘면 선택하기 힘들잖아요. 아무것도 몰랐고, 달리 선택지가 없다고 여겨서 과감할 수 있었나 봐요. 어쨌든 그렇게 하고 나니까 후련했어요. ‘왜 고민했지? 당장 할걸!’이란 생각을 자주 했고 자퇴를 결정한 이후부터는 소위 명문 대학 진학에 집착했어요. 제 존재와 선택에 대해 더는 ‘양해’를 구하거나 ‘해명’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지금이야 내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자퇴라고 하면 안 좋은 짓을 저지른 거 아니냐는 시선과 그에 수반되는 해명 과정이 필요했어요. 왜 타인에게 내 인생과 선택에 대해 이렇게까지 동의받아야 할까? 내 존재를 설명하는 게 너무 지겹고 지긋지긋했어요. 그러다 어디서는 ‘너 내신 잘 받으려고 그랬구나? 서울대 가려고 하는데 내신이 안 나와서 자퇴했구나?’라는 식으로 알아서 좋게 해석해 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딱 하나만 이루면 되니까 오히려 심플하게 느껴졌어요. ‘대강 그렇게 말하면 되네? 명문 대학에 가면 자퇴했다고 색안경을 끼는 게 아니라, 그럴만했겠다고 자연스럽게 여길 테니 더는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라고요. 그땐 그런 상황과 결심이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목포에서도 살 수 있고, 제주에서도 살 수 있고, 서울에서도 살 수 있고, 아무거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뭘 해야 할지 더 모르겠어요(웃음).



본가로 돌아갈 때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고향을 스스로 떠나온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듯해요. 뒤로 안 돌아보거나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으니까.

17살 때 치를 떨면서 고향을 떠난 이래로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 긴 시간 참고 견뎌 왔거든요. 마침내 대학에 갔을 때는 고시원 생활을 드디어 끝냈다는 혼잣말을 문득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힘들었어요. 동시에 내 인생에서 뭔가 성취해냈다는 감각에 벅찼어요. 앞으로는 견디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에 가니 친구들과는 생활 환경부터 다르다는 게 체감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은데, 미친 듯이 공부해서 학과 수석을 거의 놓치지 않았고, 학기를 마치고 A+ 성적을 못 받으면 교수님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따로 문의할 정도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해왔는데 졸업할 즈음에는 이제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마구 달려왔나 싶게 막막했어요. 고군분투해왔음에도 현상 유지만 겨우 할 뿐이고, 좀처럼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고향으로 가는 게 패배라고 생각했나 봐요. 친구들이 뭐 하냐고 연락할 때 쉬이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 말도 들었어요. 왜 그런 거 하냐고, 겨우 그거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냐고. 맞받아칠 힘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패배감에 휩싸이는 정도가 심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당장 뭐가 안 되더라도 계속 시도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미뤄두고 학업을 이어 나가거나 취업 준비하는 기간을 일정 기간 이상 가질 수 없다고 느꼈어요. ‘어디서 시작하는지가 중요하니까 잘해야 해, 한 번에 붙어야 해, 과연 한 번에 할 수 있을까?’ 그런 압박감으로 살았다 보니 항상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죠.

특히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에서 월세와 생활비 등을 감당하며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일들도 많았고요. 생활비나, 여러 가지 면에서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포기하는 심정이라 괴로웠어요. 고향에서 몇 해를 보내고 나서야 ‘삶이란 걸 꼭 견디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여전히 뭐가 돼야 할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삶도 꽤 괜찮은 거 아니야?’ 어떤 타이틀을 성취하는 방향이어도 좋았겠지만 돌아보면 나한테 좋은 방향으로 선택해 준 것 같다고 느끼게 됐어요.


선택의 순간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있다면요?

내가 내 눈치를 보고 선택하는 건지, 남(사회)의 눈치를 보고 선택하는 건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구분하기 쉽지는 않지만, 남의 인정을 받는 선택 말고,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해요.







여행을 좋아하신다고요. 마침 독립출판하신 책 『사두, 사두, 사두』의 주제는 명상이잖아요. 서로 연관이 있어 보여요.

여행은 저에게 있어서 글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좋은 거예요. 때때로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들 하잖아요. 아마 저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니 저를 아이 대하듯 제일 잘해주자고 마음먹었어요. ‘나를 여기 보내줘 보자!’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삶의 순간순간 해볼 수 있는 걸 제게 해주고 싶어요. 나를 객체화해서 생각하는 메타인지가 발달해 있는 편이고 새롭고 낯선 공간에 혼자 가만히 두는 걸 좋아해요. 친구들이 그만 좀 하라고 말할 정도로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데다, 가장 흥미로운 탐구 대상은 저라고 여겨서 관심이 커요. 그래서 틈나는 대로 여행을 다니곤 했는데, 코로나19 이후로는 멀리 이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해외여행 대신 내면의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해요.

휴직 전엔 일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한데도 참 답답했어요.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편이라 개선 방안을 개진하거나, 부서 내 개선이 어려우면 부서 이동을 제안하며 돌파구를 찾곤 했죠. 어느 시점에 다다르자, 문제란 외부가 아닌 내 마음에 달렸으니, 마음을 곧이 대해야 행복하다는 걸 알았어요. 신기하게도 그즈음에 만나는 사람마다 명상 얘기를 하더라고요. 마치 누가 이끌 듯이! 나더러 명상가라는 건가 보다, 그럼 가야지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위빠사나 명상 수련을 떠났고 그 기록을 책에 담았죠.

1년으로 기간을 명확히 정한 휴직이니만큼 다시 돌아갈 때 마음이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여행 갔다 오면 집도 새롭게 느껴지듯 복직 후의 마음이 휴직 전과 똑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옛날처럼 버스 안 태워주면 계속 기다리거나 걸어가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 줄 수 있으니까, 명상이 그 방법이 될지 시도해 본 거예요.


여행과 명상은 낯선 시선으로 보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그럴 때 나의 새로운 면이 보여서 좋은 걸까요?

음, 인생에 이런 것도 있다는 걸 저 자신에게 끊임없이 알려주고 싶은 마음 같아요. 알프스산맥 같은 데서는 ‘이런 것도 있어. 이 지구에!’라고 감탄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외국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이런 문화가 있단 걸 보여주고 싶죠. 탐구하는 자세로 여행을 대해요.


마치 탐험가처럼!

TCI 검사라고, 기질과 성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심리검사가 있어요. 저를 알고 싶어서 해본 결과 상위 1%의 호기심이 있다고 나왔거든요. 탐구심이 그렇게 높은 줄 몰랐는데 그 결과를 확인하면서 지나온 일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됐어요(웃음).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제한적일 거예요. 한정적인 내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 자문하면, 그간 남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데 에너지를 많이 썼기 때문에 이제는 나만 나를 좋아하고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수정 님과 비슷하게 한정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분산해 쓸지 골몰하는데요. 체력이 없으면 감정에 잘 휘둘린다고 봐요. 긍정적인 감정이면 그나마 낫죠, 부정적인 감정은 견디고 감당하면서 즐길 만한 수준으로 반전시킬 힘이 필요하잖아요. 체력이 받쳐주지 않을 때는 그에 침잠되는 느낌이랄까요. 수정 님은 소위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떻게 소화하시나요?

사람들을 만나면 그런 질문을 곧잘 했어요. 외로울 때 다들 어떻게 하냐고. 저마다 외로움을 다루는 방법이 달랐어요. 옆에 있는 의자 같은 거라고 표현한 친구도 있고, 그냥 늘 있는 거라거나, 외로운 적 없다는 친구도 있고….

한때는 혼자 달리지도 못했어요, 너무 외로워서. 나갈 때는 신나서 나가니까 괜찮다가 돌아올 때 사무치게 외로운 거죠. 아마 체력이 빠져서 그랬나 봐요(웃음). 이제 저는 외로움을 그저 항상 존재하는 구멍이라고 여겨요. 그걸 꼭 채워야 할까요? 그냥 있구나, 하고 말아야지 거기에 주목하면 구멍이 더 커지죠. 채우려고 할 때 문제가 일어나요. 제가 구멍의 존재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될 때면 부러 딴생각 하고 딴 거 많이 하는 이유예요.

하루는 정신의학과에 가서 혹시 저도 상담을 좀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때 아주 좋은 답을 들었어요.



어떤 말이었어요?

상담받으러 안 다녀도 된다고, 살만하면 굳이 받지 말래요. 모두가 불안,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걸 해결하려고 살아온 시간을 되짚어 어린 시절에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잖아요. 누군가에게는 그런 과정이 더 안 좋을 수 있으니 묻어두고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사는 거라고요. 굳이 하고 싶으면 하는데 헤집을수록 더 안 좋을 수도 있다고, 지금 건강하니까 모든 걸 문제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어요.

나오면서 되게 가벼웠어요. ‘아, 문제를 안 풀어도 되는구나!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다 풀 필요는 없겠다!’ 불안에 집중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죠.


수정 님이 불안하실 때는 언젠가요?

경제적인 불안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실존적인 불안이 제겐 더 까다로워요. 어쩔 수 없는 불안, 내가 살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이잖아요. 알프스 꼭대기에서 안전하게 경치를 바라볼 때도 일순 불안하다고 느끼면 그 후로는 온통 불안한 쪽으로만 생각이 쏠리니까요.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게 방법이에요. 어떨 때는 왜 불안했는지 원류를 찾아가는 것도 도움 되지만, 대부분의 인생에서는 그냥 다 불안하지 뭐, 하는 식으로 뭉툭하게 바라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코로나19 직전에 떠난 포르투갈 여행 덕도 있어요.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포르투에서의 여행 마지막 날, 아무리 기다려도 리스본행 기차가 오질 않아 전전긍긍했죠. 기차 시간이 임박했는데 올 기미는 없고 날은 춥고… 알아봤더니 파업했대요. 이 비행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나 까마득했어요. 일단 버스 편이라도 있을까 싶어 기차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탔죠. ‘bus station’이라는 말이 택시 기사님에게 잘 전달되지 않아 한참을 답답해하다가 ‘bus!’ 하면서 몸짓을 동원한 끝에 겨우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어요. 도착해보니 버스 자리를 맡으려는 현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더라고요. 과연 내 자리가 남아 있을지 막막했어요.

어쩌면 가장 불안한 상황에 맞닥뜨린 건데도 삽시간에 놀랄 만치 차분해지면서 이런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나 왠지 탈 수 있을 것 같아, 뭔지 모르겠는데 탈 거야. 그런 뒤에 한국인이 있는지 찾았어요. 그분에게 어떻게 가냐고, 표 구했냐고 물었죠. 진작 표를 구하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말에 다시 불안에 휩싸일 뻔했지만, 곧 또래로 보이는 포르투갈 현지인을 발견했어요. 정중하게 다가가 영어와 몸짓으로 오늘 반드시 버스를 타야 한다고 설명했죠. 그 마음이 통했는지 곧 출발하려는 버스 기사님에게 포르투갈어로 대신 사정을 설명해줬고요.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젓던 기사님도 결국 타라고 손짓해 주셔서 무사히 공항까지 갈 수 있었어요. 밤이고,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믿을 건 저 하나뿐인 상황에서 내심 정말 무서웠거든요. 결국 해결책을 찾아낸 경험을 통해 ‘나는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안 좋은 상황에 비참하게 나를 놔두지 않는다는 믿음’을 확신했어요. 돌아보면 번번이 풍족하게 살지 않았고 계속 불안하고 외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마냥 그 상황 속에 내버려 둔 적이 없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나 좋아요.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불안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 얼마든지 발생하죠. 오늘 버스 타고 오는 길에 전쟁이나 총격 사건 등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사고들을 뉴스로 접했어요. 그런 사건들에만 집중하면 세상을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불안이고 살 수가 없어 보여요. 기후 위기도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저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면서 이 세계가 그런 모양이라는 걸 인지하고 그래도 살아가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보는 수밖에.


그 어떤 말보다 가장 희망적인 말이네요.

오늘 인터뷰하기 전에 제 인생이 어땠는지 돌아봐야겠다 싶어 사진첩을 들여다봤어요. 트위터 계정 마음함도 한번 쭉 보면서 사람이 참 많이 바뀐다고 느꼈어요. 왜, 핸드폰이나 웹하드에서 ‘1년 전 오늘’을 보여주잖아요? 불과 1년 전과 사뭇 다른 현재를 보면서, 또 1년 후에는 제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기대감이 들었어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시고 글도 쓰시죠. 글은 언제부터 쓰신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며 사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어요. 작가란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때부터, 글을 쓰면서 무아지경으로 몰입하는 순간을 느끼게 됐을 때부터요. 제가 생각한 대로 글을 써 내려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이런 표현이 있었음을 알 때, 머리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방금 쓴 글에서 발견하게 될 때, 가슴이 뛰었어요. 그때부터 글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딘가 막혀 있고 걱정되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으로 간주했어요. 지금도 제겐 그거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거밖에’라뇨(웃음).

이제는 의심하지 않는 단계라는 의미로요. 대학 다닐 때 현역 작가나 비평가이신 교수님들이 몇 분 계셨어요. 다른 학과 교수님인 건 따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제 글을 봐주실 분이라고 생각하면 써온 글들을 제본해서 갖다 드리곤 했어요. 바쁘시겠지만 꼭 시간 내어 읽어달라고, 괜찮으시면 조언도 부탁드린다고 덧붙이면서요. 대개 바쁘다고 하시니 집요하게 읽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글 쓰는 것 외엔 안중에 없고, 그런 한편으로 내가 글을 써도 될지, 재능이 있을지 의심하는 시기가 있잖아요. 이제는 재능이 있을지 없을지, 내 글이 좋은지 나쁜지 의심하지 않아요. 쓸 수 있고 쓰고 싶으니까, 쓸 때마다 너무 괴로운 동시에 너무 즐거우니까 쓰는 단계랄까요.

현재의 직업을 택한 배경에도, 보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크게 자리했고요. 적은 에너지를 투입해 직장 다니고, 글 쓰는 데 제 에너지를 다 쓰는 삶을 살고자 했는데 변수가 생겼어요. 성향에 맞든 안 맞든 제가 하는 일이니까 직업적으로도 허투루 않고 잘 해내고 싶다, 기왕이면 최고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생긴 거예요. 뭔가 잘못됐죠(웃음). 돌아보니 고향에 내려와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잘 쓰는 사람 대신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데 더 노력해왔더라고요.


그러면 쉬면서 글을 더 많이 쓰셨겠어요.

네, 글만 집중해서 읽고 쓰고 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쉰 것도 있어요. 그러다 책 한 권을 독립 출판하게 됐고요. 제가 언제나 글 쓰려고 하는 걸 아는 친구들은 앞으로 어떤 글을 쓸 거냐고 묻곤 해요. 그러면 딱히 글 쓰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가 왠지 정곡을 찔린 기분이 되어서, 그냥 뭐 특별한 주제가 있나, 인생에 관해 쓰는 거지, 이렇게 대충 말해요. 친구는 뭔 소리냐고, 저는 모른다고, 결국 안 쓰냐고, 안 써, 하는 루트에 싫증이 났어요. 한 건 없으면서 맨날 무엇을 쓸 거라고 말하는 제가 가증스럽고 자격지심이 일었고요.

아무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괜히 ‘나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인데 결국은 직접 쓴 책 한 권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사고가 흘렀죠. 이 또한 글을 쓰지 못하는 저 자신을 해명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싫었어요. 계속 쓰는 사람이 작가라는 말처럼 실체 없는 일에 선문답하듯 하는 대화를 그만하고 싶어서 책을 쓰게 된 거예요. 만지고, 씹어보고, 감각할 수 있는 실물을 만들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면 다시 한번 ‘왜 나는 글을 못 쓰고 있으며 책 한 권 낸 적이 없는지’ 해명할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말하고 보니 열아홉, 스무 살 때 하던 사고방식과 패턴이 비슷하네요.


저는 수정 님의 최근 2년 정도를 봐온 거잖아요. 책이나 블로그를 보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명상은 목적이 아니고 빌미였다 싶어요.

완전히 맞는 표현이에요. 이제 저 자신에게 선물한 시간과 에너지도 많겠다, 뭔가를 써야 하는데 그럼 뭘 쓰지? 갑자기 거창한 뭔가를 쓰자니 그렇고. 마침 온전한 묵언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던 명상 수련에서 돌아왔을 때, 마음이 들끓어서 지금 안 쓰면 안 된다 싶었어요. 계획에 따라 차근히 하기보다는 마음이 들불처럼 확 일어났을 때 몰두해서 일해내는 편이거든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앞서 계획을 세우는 편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미래를 낙관할 수 있고 나의 앞날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상충하지 않나 하는 의문도 생기거든요. 지금 수정 님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뭔가가 있나요?

돈은 별로 없으니까 아닌 것 같고(웃음), 직장인가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다 저한테 ‘넌 이 직업과 너무 안 맞는다, 여행사를 다니거나 혼자 글 쓰는 등 네 거 해야겠다’라고 말해요. TCI 검사지에서도 호기심, 탐구심, 인내심이 상위로 나오고, 타인 연대감이나 규칙이 하위로 나와서 깨달았죠. 지금 직업은 제 성향과 상당히 상반된 일이라는 걸. 그런데도 검사지를 해석하는 선생님은 이 직업을 참 잘 고른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역할은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나중엔 그걸 뛰어넘게 해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곤 했어요. 울타리 없이 먼저 뛰어나오는 건 성장이 아니라 방황이거든요. 제 최초의 기억이 사거리인지 오거리인지 길을 잃고 엉엉 우는 모습인데요. 사방이 뚫려있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생존, 실존적인 불안이잖아요. 긍정적으로 보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강한 거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한없이 불안하고 방향을 알 수 없어 한 발짝도 제대로 뗄 수 없는 거거든요. 지금까지의 삶은 틀이나 울타리를 누군가 만들어주지 않으니까 저만의 울타리를 찾고 만들어 온 과정이랄까요? 울타리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로이 사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그걸 가능케 하려면 뛰어넘을 울타리를 먼저 만들어야 했어요.

처음에는 외부에서 울타리를 찾았어요. 선생님이라든가, 나를 도와줄 사람. 고시원 살 때 저를 착취하지 않고 좀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의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들도 제겐 울타리였고, 특히 존경할 만한 어른들을 울타리 삼아서 지금까지 왔어요. 제 딴에는 집 밖에서 부모를 찾은 셈이에요. 생활면에서 아는 게 부족하다고 늘 느꼈기 때문에 기본기를 알려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 항상 나보다 더 많이 아는 타인에게 배우려고 했죠. 선생님, 교수님, 직장 상사에 이르기까지… 지식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니까 좋아하고 심지어 존경한 거예요.


선생님이나 교수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게 이 경험에서 비롯된 걸까요(웃음).

하지만 결국 그분들은 저의 부모가 아니잖아요. 처음엔 무조건 존경스럽고 선한 모습만을 부각해서 봤다가 나중에 그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들에 깜짝 놀라고 실망하길 반복해왔어요. 좋은 면도 있지만 안 좋은 습성도 그 사람에게 동시에 있으니까요.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고요.

타인에게 제멋대로의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깨달았어요. 저를 포함해 사람은 불확실하며 누구나 명암을 가지고 있고, 계속 변하는 존재들이라고요. 저 또한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로서 나를 봐주길 바라니까, 누군가가 저를 두고 어떠하다고 단정 짓거나 판단할 때, 그것이 칭찬이든 비난이든 어려워하는 편이에요.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고 저 역시 믿을 건 나뿐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종교도 아니고.


마침 얘기하셔서, 종교가 있으신지도 궁금했어요.

종교가 있어 봤다가 지금은 없는데요. 부모님이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었던 것처럼 종교도 불교와 기독교로 극명하게 갈렸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정립이 안 되고 항상 불안했달까요. 언제는 아빠와 함께 절에 가서 절하고, 언제는 엄마와 함께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식인 거죠. 분열적인 시기였어요. 현재의 안정적인 직업을 택한 것도 믿는 구석을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성향상 안정 지향성보다는 새로운 일을 탐험하는 일이 더 잘 맞지만, 외려 안 맞기 때문에 선택한 거라는 설명을 듣는데 일리 있더라고요. 일정한 틀이 있는 지금의 직업 대신 탐구심과 호기심이 높은 제 성향을 기준으로 직업까지 선택한다면 오히려 막막하고 방황했을 것 같아요.


나 자신에게 울타리 지어주고, 뛰어넘는 거라니. 틀로 인해서 너무 답답하고 싫지만 개선할 구석을 찾는 것처럼 역으로 필요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내가 뛰어다닐 최소한의 배경 같네요.

타인을 무언가로 삼기에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아요.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 등 여러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관계는 계속 변하잖아요. 지금은 제 울타리가 되고 또 뛰어넘게 해주는 사람들과의 순간, 빛이 비치는 삶의 순간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해요. 어렸을 때부터 써온 블로그 제목도 이렇게 바꿨거든요. ‘Neither here Nor there(여기도 저기도 아닌)’에서 ‘Slice of life(인생의 단면)’로요.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곳에서 막막해하지 않고, 어딜 가든 가지 않든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어요.





수정 님의 책 『사두, 사두, 사두』에는 위빠사나 명상 센터에서의 다섯 가지 규칙, 실라가 언급되는데, 그중 ‘거짓말 금지’는 과장하거나 누락하는 행위도 포함하고 있어 지키기 몹시 어렵다고 한다. 사실이 아닌데 꾸며낸 말은 주로 청자를 향하곤 한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등 이유는 숱하다. 오죽하면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 묵언이 도움 될 거라고 할까.


그와의 인터뷰를 복기하며 거짓말을 곱씹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이 쉽고 달콤할 때, 거짓말하지 않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특히나 타인을 속이는 건 쉬워도 나를 속이는 건 어려울 때,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건. 내게 그는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살아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 ‘그래, 한번 해봤으니 됐다’ 하는 태도로 모든 일을 적당히 대하지 않았나 싶었다. 내가 정말로 그 안에 온몸을 던져 넣어본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었을까. 늘 인생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한두 발자국 떨어져 모가지만 길게 뺀 채 구경만 하며 살아왔구나.” (87쪽) 명상에서는 생각이 구름 같다고 한다. 흘러가고 모양도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의미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비슷하다. 변화하는 나를 관찰하고 화두를 찾는다. 기본 전제인,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말이다.




수정 님을 더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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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촬영   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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