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헤일메리, 두 번째 관람

이번엔 마음 놓고 메모하며 볼 수 있었다.

by Quaerens

https://brunch.co.kr/@questioning05/24


첫 관람 후 적은 글입니다. 첫 글은 굵은 주제들에 대해 깊이 들어가며, 이번 글에서는 영화를 보며 적은 많은 메모들에 대해 넓고 얕은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들어가며


일주일에 같은 영화를 두 번 관람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러나 영화관 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대학생 할인으로 4000원을 아끼긴 했다!). 단순히 영화를 한번 더 볼 수 있어 좋았던 게 아니었다. 이번엔 자세한 메모를 마음껏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관람할 때 핸드폰 앱에 메모하는 것을 시도해 보았으나 - 화면 밝기를 최소로 낮추어도 밝아 굉장히 눈치가 보였으며, 메모하는 사이 중요한 장면이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영화 시작 5분 만에 관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장면이 지나가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이미 한번 봤으니까, 지나가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핸드폰에 메모하는 것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따라왔다. 일단 너무 느렸다. 작은 핸드폰을 쓰기 때문에 타자가 느렸다. 아무리 두 번째 관람이라 해도 이 타자 속도로는 영화 소리만 들으면서 핸드폰을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키보드를 써야 하나? 이건 더 미친 짓이다! 조용한 장면에서 집중하고 있는데, 타닥타닥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면 나는 음료수를 그 사람 머리에 쏟아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심지어 팝콘과 과자로 더럽혀진 키보드는 영화를 다 보고 닦아야 할 것이니와 나중에 그 키보드로 타자를 칠 때마다 나의 손에 과자 냄새가 묻을 것이 분명했다.


더 큰 문제는 핸드폰을 다크 모드로 한 다음 밝기를 최대로 줄여도 밝았다는 것이었다. 조조 시간대여서 옆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영화관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므로 굉장히 눈치가 보였다. 내 자리는 꽤나 아래쪽이어서, 내 위에서 관람하는 사람들의 시야엔 희미하게 번쩍이는 핸드폰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이번에 첫 관람일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들을, 나는 두 번째로 보니까 핸드폰으로 메모하겠답시고 방해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메모장을 사는 것이었다. 마침 영화관 앞에 문구점이 있었다. 문구점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뒷면이 딱딱한 메모장을 구매했다. 그리고 가장 싼 400원짜리 0.5미리 사인펜을 구매했다. 이때 검은색 사인펜을 구매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적어도 밝은 색, 아니면 형광색을 샀어야 했다. 색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최소한 굵은 펜을 샀어야 했다. 글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나오는 밝은 장면에서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으나 대부분 내가 쓰는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한 장에 한 두 개의 메모만을 적었다. 내가 썼던 글씨가 안 보였기 때문에, 내가 썼던 글씨 위에 또 글씨를 적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 메모장을 확인하니 상당한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었다. 글씨가 엉망인 것은 당연했다.


여하튼, 이 글은 내가 영화를 보면서 적은 메모를 정리하고 흥미로운 메모일 경우 더 이야기하는 구조이다. 글의 순서는 메모의 순서이며, 메모의 순서는 영화의 진행 순서와 같으므로 머릿속에서 영화를 다시 재생하며 읽으면 좋을 것이다.


글의 첫 부분에서 밝혔듯 굵은 주제들에 대한 깊은 글을 읽고 싶다면 첫 글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큰따옴표로 되어 있는 것은 메모 내용이다.


1. "약간의 기억 상실"


처음에 로봇 팔 친구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그레이스에게 약간의 기억 상실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그레이스의 기억 상실은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이를 들으니 오묘하게 웃겼다. 그레이스가 상실하고 있는 기억은 '아 맞다' 정도로 끝날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2. "Good Luck 은 누가 써줬는가? 그레이스의 짐은 누가 싸준 걸까?"


그레이스의 짐에는 굿 럭이라고 누군가 쓴 글씨가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잔디 위에서 엎어져 주사에 놓인 다음, 지구에서 12광년 떨어질 때까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저 굿 럭은 누가 써준 걸까? 그레이스의 짐은 애초에 누가 싸줬을까? 칼? 소설엔 아마 나왔겠지만 영화엔 나오지 않아 궁금했다.


3. "생명이 배터리를 초월하는 최고효율의 에너지 저장 메커니즘을 만든 것. 아스트로파지의 제 3자 생성설. 고도문명의 에너지 저장기술을 사용한 것?"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든 의구심이었다. 생명이 저렇게 진화한 에너지 축적 기술을 이용하려면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어떤 환경에서 진화해야 할까? 자연 발생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스트로파지를 만든 문명은 왜 만들었고, 어떻게 되었을까? 실수로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문명은 이미 멸망한 걸까? 아니면 문명을 분별하기 위해 훨씬 고도의 문명이 만든 걸까? 아니면... 한 문명이 에너지를 우주에서 긁어모으기 위해 파견한 로봇들일까?


4. "아스트로파지가 핵분열보다 효율적인가? 왜 굳이 아스트로파지를 연료로 써야 했을까?"


왜 꼭 연료가 아스트로파지여야만 했을까? 핵연료보다 더 효율이 좋기 때문인가? 그러면 아스트로파지는 E=mc^2 보다 질량당 많은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 되는가?


5. "로키 우주선을 처음 만날 때, 타악기가 많이 사용된다. 로키가 돌이라서 그런가?"


두 번째로 보니 더 잘 들렸다. 노래가 특히 두드리는 귀여운 타악기들이 많이 사용되었었다. 로키가 돌로 된 생명이라 그런 듯하다.


6. "로키가 지구인이 산소로 숨을 쉬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이어지는 메모의 내용이다 :


"우주선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 이유가 이거구나. 그럼 우주복 입은 걸 보고 산소로 호흡하는 걸 아는 건가? 신기하네. 아니구나. 이건 회전해서 중력 만들려고 돈 건데. 산소 호흡이랑 압력을 우주복 입은 그레이스만 보고 안 거임? 음파로 볼 수 있어서? 아! 투명한 헬멧 안 공기를 보고 압력을 안 거구나!"


그렇다면 에리디언들은 초음파로 공기의 성분까지 볼 수 있는 것일까. 질소와 산소의 성분, 대기의 구조, 기압까지 알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7. "'웃는다'는 개념이 외계인도 존재할까?"


처음 만날 때 로키는 줄자를 갖고 논다. 재미를 느끼고 유머도 그레이스와 어느 정도 통한다. 생존에 있어 유머라는 개념은 꼭 필요한가? 행복과 웃음, 장난에 대한 진화적인 내용을 공부해보고 싶어졌다.


8. "로키의 시점에서 바늘 소리가 크게 들리는 디테일을 처음 알았다! "


그레이스가 로키에게 숫자를 소개하려고 시계를 가져왔을 때, 로키의 시점으로 전환이 되며 시곗바늘 소리가 부각되어 들린다. 영화를 처음 볼 땐 다른 데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디테일이었다.


9. "그레이스는 사실 언어학 박사인가?"


그레이스가 로키와 대화하며 일종의 번역기를 일일이 완성한다. 서로 바디랭귀지가 통한다 한들 단기간에 '식당에서 주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 해독에 성공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그레이스는 언어학 천재인가? 아니면 컴퓨터에 내장된 AI가 도와줬을까? 심지어 로키는 번역기 없이 그대로 그레이스의 말을 알아듣는다. 얼마나 지능이 높은 걸까?


10. "전 인류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서 같이 과학 연구하는 게 보기 좋다."


거대한 적은 일시적 동맹을 만든다. 전 인류가 멸망할 상황이 놓이자 모든 국가가 협력해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는 작중 상황처럼 말이다. 물론 희망찬 상황은 아니지만, 정치적 종교적 갈등 없이 모두가 협력하여 연구하는 것을 보니 뭔가 뿌듯했다. 영화를 보기 전 학교에서 Cern에 대한 세미나를 듣고 와서 그런지 더더욱 와닿았다.


11. ""짝"이라는 개념"


에리디언들에게 짝이라는 개념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암석 생명들이라 그런지 염색체 구조 자체가, 번식의 방법 자체가 지구상 생물들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소설을 읽어보면 해결될 문제 같다.


12. "과학적 기술과 이론은 인간이 월등하다. 왜?"


전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로키 종족은 음파로 물체를 인식하기 때문에 빛에 대한 연구가 더뎠을 것이며, 광전효과부터 시작된 여러 양자역학적 이론에 대해서도 부족했을 것이고, 감각이 주는 직관이 부족해 상대론에 대한 사고 실험을 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3. "왜 타우세티 갈 때 로키 우주선을 안 썼나?"


그레이스가 로키의 우주선을 타도, 그 반대여도 한 명은 죽는다. 서로 호흡하는 공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구 없이 개체 자체에게 생성능력이 있는 것은 로키뿐이다. 그레이스의 우주선에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도구가 없지만 로키는 가능했다. 그렇게 로키는 자신만의 햄스터볼을 만들어 그레이스의 우주선으로 간 것이다. 그레이스에게 우주복을 만들어주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마지막에도 나왔듯이 이동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두 우주선을 같이 운용했으면 둘 다 죽을 뻔한 상황도 나오지 않았을 텐데. 의아했다.


14. "로키는 사슬 재료를 어디서 가져왔지?"


이것도 소설을 읽으면 될 것 같다.


15. "로키가 영상 통화가 아닌 '기록' 임을 알게 된 순간. 그레이스의 "반강제적" ''.<brave>"


그레이스는 로키가 단어가 없다고 하며 용감함을 풀어 설명하자 그건 멍청한 거라고 대꾸하면서 컴퓨터엔 brave 라고 입력한다. 그리고 이 용기는, 환경이 만든 반강제적 용기이다. 그레이스의 용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선 첫 번째 글에서 자세히 적어 놓았다.


16. "아스트로파지 2백만이 로키에게 남은 이유는 상대성이론을 몰라서!"


몰랐는데, 이것도 소설에서 설명해 주는 내용이었다.


17. "연구소 폭발장면이 왜인진 모르겠는데 제일 좋다!"


본능인 것 같다. 슬픈 장면이지만 뭔가 터지고 충격파가 휩쓰는 것은 시각적 청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18. "아스트로파지가 타우세티 행성에서 온 거 아닌가?"


이어지는 메모의 내용이다 :


"설마. 아스트로파지의 우주적인 분포를 분석하면 시작점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타우세티 표면에 지적 생명이 살아있었으면 그레이스의 우주선을 어떻게 봤을까."


아스트로파지가 별들을 향해 나아간 분포를 분석하면 가장 중심에 있는 곳이 아스트로파지의 발원지가 될 것이다. 별들이 고르게 분포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그럼 그 근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스트로파지의 이동속도는 상당히 느릴 것이다. 그렇다면 아스트로파지의 전파는 생각보다 매우 오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19. "왜 그레이스는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했지?"


그레이스는 로키가 다시 반복하면 된다고 했을 때 왜 다음 기회는 없다고 했을까? 그냥 로키 우주선으로 다시 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이것도 소설에 정답이 나와있을 것 같다.


20. "로키가 타들어 가는 장면에서, 잠깐잠깐 안 보이게 한 연출이 오히려 긴장도를 올려 집중도를 높였다."


장면이 잘 안 보이게 함으로써 긴장감을 높이고 궁금증을 부추겨 장면에 대한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정말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었다.


21. "로키도 원랜 영웅이 아닌 소시민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주변에서 영웅적 인물을 보며 동경하다 그레이스를 구하며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 아닌가?"


로키가 그레이스의 미션이 편도 여행인 것을 안 순간 그레이스에게 용감하다고 칭찬한다. 여기에서 미루어 보아 로키도 그렇게 용감하고 영웅적인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레이스가 강제적인 상황에서 영웅적 기질을 발현했듯, 로키 또한 그레이스가 죽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그레이스를 살리며 영웅적 기질을 발현했다. 두 인물은 각각의 종족이 비슷한 상황에 놓였고, 비슷한 임무를 하러 왔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 서사 또한 비슷하다는 것이 두 번째 관람에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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