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일평생 일해 오신 분이다. 딸도 많고 재산도 많은 집의 차녀로 태어나 설움은 받고 교육은 못 받았다고 하셨다. 엄마 바로 밑 이모부터 대학을 다녔는데, 큰이모랑 엄마에게는 그 시절 흔했던 '여자가 대학가서 뭐하려고'가 적용되서 엄마는 고등학교도 못 마치셨다고 한다. 그 대신 갓 성인이 된 엄마는 이불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말단 공무원과 결혼해서 자식 셋을 낳았고, 결혼한 순간부터 죽 시어머니를 모셨다. 6식구의 의식주가 공무원의 쥐꼬리만한 월급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엄마는 이불가게를 20년 넘게 운영하셨다. 주말 아침이면 집 옥상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넓은 비닐을 펼쳐 놓고 이불을 꾸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 가만 보면 우리 엄마는 집에서 살림만 할 수 없는 체질이다. 더 이상 엄마가 일을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이 핀 이후에도 엄마는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이따금씩 크게 아프셨는데, 그 이유로 몇 달간 집에서 쉴 때면 눈에 띄게 까칠하고 짜증이 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환갑이 훨씬 넘은 지금도 계속 일을 하신다. 자식들은 이제는 좀 쉬라는 말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엄마에게는 쉬는 것이 벌 같이 느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그 이불가게 20년은 엄마에게 고난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린 내 눈에도 이불가게 일은 너무 고되어 보였다. 일단 무게와 부피가 큰 이불은 여자의 몸으로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가 운반이나 배달 등을 도와주시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옛날 사람인 아버지의 도움은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옛날 사람인 아버지가 집에서 손 하나 까딱이지 않았음은 쉽게 예상이 되는 일이다. 할머니가 우리 3남매를 돌봐주시긴 했지만, 기본적인 살림은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입버릇처럼 '나는 잠자는 낙으로 산다'라고 이야기하던 엄마의 모습이 참 싫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낙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삶이 너무나 안쓰럽다.
이런 엄마가 요리를 잘 했을 리가 없다. 사실 엄마가 뭔가 음식을 만들어 준 기억이 별로 없다. 늘 할머니가 해주시는 정체불명의 요리들과 냉동식품들을 먹고 컸고, 내가 초등 고학년이 된 이후로부터는 볶음밥이나 라면, 계란말이 등의 요리는 할머니보다 내가 더 잘 했다. 장녀로서의 책무성까지 더해져 나는 항상 저녁이 되면 할머니의 지휘 아래 밥을 볶거나 라면을 끓이거나 계란을 구웠다. 밑반찬은 김치에 나물 몇개. 그조차도 할머니가 한 음식인 경우가 많았으니, 엄마 밥에 대한 로망은 적어도 우리 남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말이면 이따금씩 엄마 컨디션이 좋을 때 엄마 나름의 특식을 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백숙을 닭 기름이 둥둥 떠있고, 떡국에 들어간 굴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편식이 허용되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닭 기름 둥둥 뜬 백숙은 끝끝내 거부했었다. 아버지의 호통을 감내하더라도 그것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도 물에 빠진 닭(삼계탕이라든지, 백숙이라든지 등등)을 싫어한다.
그런 엄마의 요리실력은 명절이 되면 반전 매력을 발휘했다. 이상하게 엄마의 요리는 명절에만 맛있었다. 아마 엄마가 잘 하는 요리들은 가격대가 좀 있어서 명절이나 되야 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이었나 보다. 여러 명절 음식들이 있지만, 그 중 엄마가 실력을 발휘하는 분야는 크게 3가지. 갈비찜과 나물,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문어숙회'였다.
장담하건대, 우리 엄마의 문어숙회는 세계 최강이다. 야들야들하게 삶아낸 문어를 얇게 썰어서 접시에 넓게 펼쳐서 소금 넣은 기름장과 함께 내 오는데, 한입 베어무는 순간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에 1차로 놀라고, 그 녹아 없어지는 식감에 2차로 놀라게 된다. 문어는 흔히 질길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엄마의 문어 숙회는 몇 번 씹지 않아도 그냥 식도로 꿀떡 넘어간다. 단맛도 저렴한 사카린의 단맛이 아니라, 씹을수록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기품 있는 단맛이다. 거기에 문어 특유의 감칠맛까지 더해지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이끌림으로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의 젓가락이 문어숙회로만 향한다. 그 덕분에 엄마는 밥 먹다가도 몇 번이나 문어를 썰러 부엌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 문어숙회의 극상의 맛을 가장 극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우리 남편이다. 결혼 전부터 나에게 '장모님에게 씨암탉을 기대하지 마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남편(당시 남자친구)이 우리집에서 엄마의 문어숙회를 먹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다. 내가 시어머니께 A/S요청까지 했을 정도로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연신 튀어나왔고, 그의 젓가락은 오로지 문어숙회만 집중 공략하고 있었다. 엄마는 예비 사위의 복스러운 먹방에 신이 나서 계속 문어를 썰어댔다. 그날 문어숙회의 맛에 힘입어 과식을 하고 만 우리 남편 덕분에, 엄마는 아직도 큰 사위가 대식가이신줄 안다. 사실은 먹는 걸 귀찮아하고 고기반찬만 많이 먹는 소식형 편식대마왕인데.
결혼하고 남편과 문어숙회 전문점에 가서 문어숙회를 먹어본 적이 있다. 나름 인터넷에서는 꽤 높은 평점을 받는 가게였는데, 한 입 먹는순간 너무 맛이 없어서 깜짝 놀랬다. 질기진 않았지만 엄마의 문어숙회만큼 부드럽지도 않았고, 엄마의 문어숙회만큼 달지도 않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그 고혹적 단맛이 없는 문어숙회는 놀랄 만큼 아무 임펙트가 없었다.
그뿐인가, 결혼하고 처음 간 시댁 차례상에 올라갔던 문어숙회 역시 맛이 없었다. 'Not delicious'가 아니라 'No taste'의 의미로. 심지어 문어숙회를 찍어먹을 기름장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오로지 초장에만 찍어먹는다! 문어숙회에 초장이라니, 이 무슨 경천동지할 시츄에이션인지! 남편에게 슬쩍 물어보니, 본인은 문어숙회를 기름장에 찍어먹어 본 게 우리집에서 처음 겪은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의 그 맛에 홀랑 빠진 남편은 그 때 이후 계속 문어숙회를 기름장에만 찍어 먹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그 문어숙회는 아마 '의무감'이었을 거다. 아버지의 주식투자 실패로 인해 가진 돈을 전부 날렸던 우리집을 5년만에 일으켜 세웠을 정도로 경제적 활동에 재능이 있었던 엄마에게 요리를 비롯한 집안 살림이란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응당 짊어졌던 당시의 사회적 무게일 뿐이었을 것이다. 남존여비가 상식처럼 통용되던 시대에, 남존여비의 끝판왕을 구현하는 경상도 시골의 종가집에서, 한 끗 차이로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나고 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충분히 교육받을 여유가 있는 집안 살림을 지켜보면서도 본인은 교육받지 못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했고, 어쩌다 보니 가난한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되서 마음 편하게 살림만 하고 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안일을 남편과 분담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기에, 좀 더 잘 먹고살기 위해, 자식들에게 이 힘든 삶은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엄마는 정말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해 왔다. 그런 엄마에게 문어숙회를 만드는 일인들 뭐 그리 즐거웠으랴. 그래도 맛있다고 잘 먹는 자식들을 보며 더 공을 들였을 그 문어숙회는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지금의 맛에 이르렀을 것이다. 결국 문어숙회 맛의 비결은 엄마의 굴곡진 삶, 그 속에서 찾은 작은 기쁨의 구현일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자란 우리 3남매는 엄마에게 집안 살림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김치도, 육아 SOS도, 각종 밑반찬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성격도 외모도 모두 다른 우리 남매들이지만, 단 하나 공유하는 생각은 바로 '엄마 괴롭히지 마라'.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서 협의한 적은 없지만, 이것은 암묵적 룰이다. 우리 남매들은 정말로 절실히, 이제라도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시대적 흐름에 맞춘 아버지의 긍정적 변화까지 더해져, 요즘 엄마의 삶은 꽤 괜찮아 보인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헬스 PT를 받으시고, 수영을 다니시고, 등산 모임을 나가신다. 그리고 일주일에 3~4회, 지겹지 않을 정도로 일을 나가서 생활비를 벌어오신다. 그리고 본인 역시 그런 삶에 굉장히 만족하고 계시는 듯 하다.
그래도 명절에는 모이니까, 엄마도 그 때는 잠자던 실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명절 상에는 어김없이 문어숙회가 올라온다. 여전히 찐 생선은 맛이 없고, 돼지고기 수육에는 비린내가 나지만, 그 문어숙회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는 극상의 맛으로 우리를 맞이해 준다. 이제는 6이 된 3은 물개박수를 치며 그 문어숙회를 싹싹 비워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신난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리 역시 마음 한 켠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쩌다보니 3남매가 모두 엄마를 닮아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지만, 장녀인 나라도 저 문어숙회 비법만큼은 반드시 물려받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 전수되지 않고 사라져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