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씨의 이야기다. 30분 일찍 출근 한 그는 바쁠 것도 없는데 연신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 전날부터 그의 직장상사는 저기압이다. 그의 무의미한 키보드질은 꼬투리잡히지 않겠다는 생존의 몸부림이다. 출근한 상사는 일을 핑계로 자기 감정을 쏟아낸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는 힘껏 죄송하단 표정을 지으며 굴복을 표현한다. 오늘의 첫 턴이 그렇게 끝난다.
살얼음판과도 같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A는 돈을 쓸 곳을 찾아 헤맨다. 그가 찾은 곳은 적당히 값비싼 옷을 파는 백화점 2층 매장,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연거푸 고개를 좌우로 내젓다가 급기야는 종업원의 태도를 탓한다. 담당자를 부른다. A는 돈을 지불할 의사를 여러 번 밝히고 나서 자기가 돈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했음을 이야기한다. A를 상대한 종업원은 오늘 A가 자기 상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굴복의 의미로 A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48만 6천원 짜리 옷을 6개월 짜리 할부로 긁고 가게를 나선다. 오늘 A를 상대하다 진이 빠진 종업원 B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다.
갑질이 유행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갑질의 폭로가 유행이다. 시대가 해괴해져서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의 대가로서 엄청난 중력의 스트레스를 치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스트레스에 대해 그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 고이다 못해 넘쳐 흐르는 스트레스를 폭력의 형태로 서로에게 전가해왔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는 위치 맺기에 몰두했다. 만나면 서로의 나이를 묻고 지위를 묻고 어떻게든 고하를 만들어냈다. ‘억울하면 성공하라’ 같은 말로 폭탄돌리기 게임을 정당화 시켰다.
이 게임은 시대가 정체되기 전까진 유지된 것 같다. 실제로 억울하면 성공할 방도가 있었고 더럽고 치사하면 몇 년만 참으면 되기도 했다. 우리가 공유했던 폭력은 나름 공평한 법칙을 지키고 있었기에 불만의 목소리를 지울 수 있었다. 시대는 점점 불공평하게 변했다. 두 번의 커다란 경제위기를 겪고 난 뒤, 우리는 희망을 꿈꾸는 법을 잊어버렸다. 다니던 사람들은 잘려 나갔고 다녀야 할 사람들은 뽑히지 않았다. 이들은 더 이상 과거의 룰을 참아낼 필요가 없었다.
시대가 불공평했음을 인지한 세대들의 성장과 함께 소셜미디어와 같이 개인의 목소리에 커다란 스피커를 달아줄 장치들도 나타났다. 안온했던 권력에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갑질은 폭로되기 시작했고 부당함은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균열을 낼 수는 없었다. 어느 한 곳을 손보거나, 폭로된 어느 한 대상을 두고 심하게 욕지거리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부분은 아니었다. 더욱이 외화되지 않는 일상적인 갑질들은 조금씩 사그라들긴 해도, 아직까지 굳건했다. 특히, 친밀하거나 외피를 단단히 둘러 싼 단체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갑질’은 쉬이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고, 꺼내봤자 조직 내부의 문제라거나 어쩔 수 없는 ‘사회 생활’ 의 한 부분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갑’이라는 건 원래 계약서 서류에나 등장하는 말이다. 임대차계약 정도를 제외하곤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 등을 제공받는 쪽을 갑이라 부른다. 이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계약을 두고 움직이는 모양새가 계약의 본질적인 내용실현만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갑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갑과 을의 관계’가 원래 그렇게 폭력적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함이다. 한 사람의 생활 범위 안에 무수히 많은 갑과 을이 존재한다. 갑과 을의 폭력적 네트워크는, 위에서 설명했듯 얽혀있다. 우리는 결코 단일하게 ‘갑과 을’어느 한 존재로 호명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를 서로 공유해야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다.
갑질을 중재할 기구와 장치들도 필요하다. 형식적으로 있는 기구들과 요식적인 절차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개개인의 인식이 사회가 새로 정립해야 할 새 기준에 미달한다면, 그 기준을 선제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공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좋다. 누군가는 ‘더러워서 피하고 말지’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더러워서 피하게’ 하는 방식으로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갑질은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며, 우리 사회가 깊게 안고 있는 유서 깊은 ‘위 아래’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일단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안에 갑질을 얼마나 유서 깊은 지,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행동 중 어디서부터가 갑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