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되찾아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로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어이 학생."
"거기 38번 일어나서 읽어봐."
아마 내 이름을 잃어버린 게 이때쯤이었을 거다. 우리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엄마는 '승호엄마'로 수십년을 살다가 애들이 다 커버린 요즘은 '스타 사장'으로 불린다. 내가 학생신분을 벗어나고부터는 '백 주임'이나 '백 차장'으로 불렸다. 요새는 "네 허프포스트코리아입니다"라고 전화를 받는다.
이상한 일이 많다. 아마 이건 내 기준에서 이상한 일일 거다. 지난번 선거 때, '문재인의 시절도 언젠간 적폐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떤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내게 쌍욕을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당신이 지지하는 심상정이 적폐가 된다고 이야기하면 수긍할수 있겠냐"고. 나는 정말 당연하게 "네, 그게 제 바람인걸요"라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그게 참 화났나보다. 그래서 화가난답시고 '정의당'과 '심상정'을 모욕했지만 나는 솔직히 그게 도무지 화가나지 않았다. 나는 그 광경이 너무 이상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백승호'라는 이름을 걸고 글을 쓴 뒤에도 많은 사람은 나를 '레이블링'을 했다. 쟤는 어디 지지자다. 어디와 연루되어있다. 한남이다(이건 맞지 뭐). 진신류다. 메갈이다. 일베다. 뭐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싶어하는게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고싶어했다. 그 거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면 나를 알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누구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렇게 단일하지 않다. 거울을 보면 편하겠지만, 그 모습이 내 일상 전체를 비추진 않는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제대로 나로 살아본 적이 없고 나는 우연한 기회에 나로 살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우리가 택한 손쉬운 방법은 나를 위탁하는 길이었던 것 같다. 집단에 나를 맡겼다. 그리고 그게 내가 되었다. 그래서 더 쉽게 상처받는다. 더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문득, 이름을 되찾아주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당원이 아닌, 어느 지지자가 아닌, 어느 회사 사원이 아닌, 누구 엄마나 아빠가 아닌, 어느 학교 학생이 아닌 바로 당신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이 소속한 어디가 잘못되어도 당신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말을.
문익환은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열사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내가 416 연대에서 받은 달력에는 매 날짜 밑에 생일을 맞이한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름을 되찾아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