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 국립대학 한국학 과정에 재학중인 '다니엘라' 인터뷰
코스타리카는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한다. 코스타리카에는 군대가 없다. 또한 2012년에 삶의 질 세계 1위를 달성했다. 히말라야의 부탄과 함께 코스타리카는 삶의 질과 행복도 순위에서 세계 1위 아니면 2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의 절반 가량인데도 불구하고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를 시행하는 복지국가이기도 하다.
코스타리카 국립대학(UCR)에는 한국학 과정이 있다. UCR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던 다니엘라(24)는 이번 여름 한국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한국에 방문했다. 다니엘라는 전태일을 아는 코스타리카인이며 또한 ‘야광 토끼’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뮤지션의 노래까지 찾아 들을 만큼 한국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이다.
다니엘라가 이야기를 나눈 이 자리는 시종일관 웃고 떠드는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나누었던 이야기는 제법 진지했다. 다니엘라에게 전해 들은 코스타리카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료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새로웠다. 한국을 열심히 공부하는 다니엘라도 ‘실제 한국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때로는 놀랐고 때로는 공감했다.
* 티카(Tica)와 티코(Tico)는 코스타리카인을 부르는 애칭이다.
코스타리카는 2012년 영국 NEF에서 발표한 행복지수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혔어요. 동의가 되나요?
= 맞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어요. 저는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운 좋게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열심히 일하면 신분상승도 할 수 있어요. 코스타리카는 군대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에요. 그리고 모두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한국만큼 사는 것에 대한 압박이 심하지 않아요. 때때로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난 것을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노동 환경도 괜찮은 편이에요.
아닌 부분은 어느 것이 있나요?
= 코스타리카는 아직 발전할 것이 많이 있어요. 지하철도 없고 대중교통도 불편해요. 정부의 부정부패도 심각한 편이에요. 고쳐야 할 문제들도 많아요. 그런데 보통은 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요. 뇌물 같은 것도 비일비재하죠. 어머니는 제약회사와 약국을 감시하는 공기업에서 일하는데, 하루는 괴한이 총과 가족사진을 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더라고요.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달라는 협박인 거죠.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한다고 했어요.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문제나 걱정거리를 회피한다고도 할 수 있나요?
=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겪었지만, 그 독립을 우리가 직접 쟁취한 것은 아니에요. 1948년에 내전을 겪었고 우리는 군대를 없앴어요.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지금 주어진 행복이, 그리고 군대가 없는 상황이 가져오는 평화가 계속 이어지길 원해요. 무언가 싸우거나 복잡해지는 상황을 맞기 싫은 거죠. 그래서 문제를 회피해버리는 경향이 있죠.
일종의 국민 정서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 네 그렇게 볼 수 있죠.
실제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회피, 외면 같은 단어들이 자주 나왔다.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해도 사람들의 비난이 일주일 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행복지수 1위 이면에는 ‘분쟁을 두려워하는 낙관주의’가 있었다.
코스타리카 정치 역사상 커다란 사건이 두 번 있었어요. 그중 하나가 아까 말씀하신 내전이고 또 다른 하나가 1870년 과르디아 장군의 군부독재 통치에요. 아시다시피 한국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20년 가까이 군사독재가 이어졌어요.
그런데 한국에는 그 고도 성장 기간이 박정희의 군부 정권 때문이라며 찬양하고 향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코스타리카에서는 어떤가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군사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과르디아 독재 시절에도 공은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이 드신 분들도 군사독재 시절을 향수하지 않아요. 정확히 따지면 그 시절이 특히 힘들었던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군부 독재 시절이라기보다는 역사의 한 맥락으로 인식하죠.
그러면 군부 독재를 막을만한 장치 같은 건 따로 있나요?
= 아니요 그런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코스타리카의 사회 시스템을 신뢰하는 거죠. 특별히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군부 독재가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요. 하지만 한국의 군부독재는 코스타리카와는 많이 달랐어요. 한국의 군부 독재를 공부했을 때 굉장히 놀랐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죠.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건가요?
= 1948년 칼데론의 기독사회통합당이 선거에 패배했는데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어요. 이에 반발한 피게레스는 시민군을 조직했어요. 40여 일간의 전투 끝에 피게레스가 승리했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지만, 이것을 ‘내전’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조금 의문이에요. 기간도 길지 않았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희생자의 수도 비교적 적은 편이었어요.
내전을 일으킨 칼데론은 역사적으로 안 좋은 평가를 받겠네요?
= 그렇지 않아요. 저희 외할아버지는 칼데론을 지지하셨어요. 반대로 저희 아버지는 피게레스를 좋아했고요. 양 대통령 모두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했고, 정치적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피게레스가 조금 더 진보적이었지만요. 칼데론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아요. 내전을 일으킨 피게레스도요. 양 대통령 모두 공과가 분명히 있거든요. 우리는 그것을 개별적으로 판단해요.
피게레스가 집권하고 군대가 폐지되었어요. 결국, 폭력으로 만들어 낸 권력이 군대와 폭력을 종식했어요. 일종의 아이러니인데요. 이것에 대해서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 딱히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결과적으로는 폭력이 사라진 셈이니 좋은 것 아니겠어요?
군대가 사라졌는데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전쟁을 두려워하지는 않나요?
= 저희는 군대 대신 외교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전쟁이 난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어요.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분쟁을 회피하려고 해서 더욱 그럴 거에요. 전쟁이 난다는 것은 아마 그때 가서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분명히 그들은 자기 삶에 만족했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삶을 위협하는 많은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사회에 대한 신뢰와 방관. 그 어딘가쯤에 코스타리카인들이 있었다.
코스타리카는 인구 480만 명에 1인당 국민소득(구매력 기준) 1만3천 달러로 한국의 절반인 코스타리카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아파서 병원을 찾을 때도 금전적 부담이 없다.
흔히들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에 관해 이야기하면 보통 스웨덴 등 부유한 나라를 떠올리면서 우리는 아직 ‘시기상조’이며, ‘부자 나라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코스타리카의 사례는 우리의 관성적인 사고방식에 의문을 갖게 한다. 코스타리카는 우리보다 낮은 국민소득의 나라인데도 세계에서 손꼽는 행복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행복 지수 세계 1위 코스타리카가 천국은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코스타리카의 최저임금은 바로 옆의 과테말라와 니카라과, 멕시코 등 주변국보다 높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최저임금의 절반에 못 미친다. 물론 그 최저 임금으로 생활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코스타리카인이 아니라 니카라구아, 과테말라 등 주변국에서 들어온 이주 노동자라고 한다. 게다가 통계 수치만 보자면 빈곤층 비율이 인구의 17.8%로 14%대인 한국보다 약간 높다. 그리고 수도 산호세의 물가도 매우 높아서 서울의 물가와 불과 27% 차이난다고 한다.
한국은 교육열이 높다고 알려졌어요. 하지만 높은 교육열이 단순히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는 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미가 되고요. 낮은 사회 계층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돼요. 그리고 낮은 계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실패한 사람’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코스타리카에서는 어때요? 코스타리카에서도 대학을 반드시 가려하나요? 그리고 대학을 가지 않으면 먹고사는 데 문제가 많은가요?
= 코스타리카에서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점원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규정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좋은 대학 나왔다고 상류층으로 보지도 않고요. 코스타리카 사람들을 크게 3 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기업을 운영하거나 사회 요직을 차지한 상류층, 좋은 직업과 자산을 가지고 있어서 먹고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는 중산층,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이요.
상류층은 보통 대학을 가지 않거나 아니면 해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요. 그리고 돌아와서 자기 부모가 운영하는 기업에 들어가거나 부모 직업을 물려받아요. 당연히 생활에 지장이 없죠.
오히려 중산층이 교육에 더 열을 올려요. 중고등학교 자녀에게 많은 돈을 쏟으며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려고 애쓰죠. 코스타리카는 국립대학이 소위 ‘명문대’인데 국립대학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 진학해요. 그렇게 국립대를 졸업한 중산층 자녀들은 다시 좋은 직업을 갖게 되죠.
저소득층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사립대학에 진학해야 하는데 사립대학 등록금은 매우 비싸요. 결국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좋은 직장 갖기를 단념하죠. 그래서 코스타리카는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아요. 고등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만든 국립대학은 오히려 저소득층이 아닌 중산층 이상이 혜택을 보는 거죠.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분명 먹고사는 데 문제가 있고, 힘들게 살아야 해요. 가처분소득이 거의 없어서 부모에 얹혀사는 사람들이 많죠. 하지만 이미 ‘대학을 갈 수 있는가?’ 여부가 부모의 소득에 의해 정해져 있죠.
중산층이 자녀들에게 많은 돈을 쏟았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했어요.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높기는 하지만 상위권 대학을 나와야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런데 상위권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여부는 사교육 정도가 크게 좌우해요. 집에서 사교육을 시켜 줄 형편이 되지 않으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없는 상황이 굳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코스타리카에는 사교육이 없잖아요. 교육의 차이가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건가요?
= 코스타리카의 공립 고등학교는 학비가 전액 무료에요. 하지만 여유가 된다면 공립학교 대신 사립 고등학교를 보내려고 해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커리큘럼이 많이 다르거든요. 코스타리카에서 영어는 매우 중요해요. 아시다시피 코스타리카는 지리적으로 미국과 인접해 있어요. 그리고 산업도 미국과 큰 관련이 있죠. 영어를 해야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사립 고등학교는 영어나 외국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죠. 그런데 사립학교는 학비가 매우 비싸요. 그래서 자녀를 사립학교로 보낸 부모는 아이들이 반드시 좋은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죠. 일종의 투자 개념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사립학교도 고급 사립학교와 일반 사립학교가 나뉘어요. 고급 사립 고등학교는 학비가 매우 비싸서 부유층 자녀들만 갈 수 있죠.
디자인을 전공한다고 하셨는데요. 한국에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는 소득도 낮고 근무환경도 힘든 편이에요. 코스타리카에서도 직업에 따라 소득과 근무환경에 차이가 나나요?
= 코스타리카도 비슷한 편이에요. 보통 공학 계열을 전공하면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편이에요. 저처럼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면 보통 공학 전공자의 절반 수준의 급여를 받아요. 순수 미술을 할 경우는 사실상 먹고사는 일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돼요. 그래서 제가 디자인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 조금 반대했어요. 비싼 돈 들여 사립학교를 보냈는데 돈을 충분히 벌 수 없는 학과에 가려고 했으니까요.
근무환경이 직종마다 차이 나지는 않아요. 법으로 규제하거든요. 저도 종종 야근하는데 한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에요. 저녁 여덟 시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이 가끔 있을 뿐이에요.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2009년을 기점으로 하락세가 지속하고 있다. 대학 졸업장이 갖는 경제적 가치가 대학을 보내기 위해 투자해야 할 돈보다 낮아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싼 학원비를 충당해야 명문대학을 갈 수 있는 한국과 비싼 사립학교에서 배워야만 국립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코스타리카. 대학에 진학해도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한국과 국립대학을 갈 수 없으면 사실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월급 적은 직장을 가져야 하는 코스타리카. 두 나라는 다르지만 닮아 있었다.
월드팩트북 조사를 보면 한국의 출산율은 1.25명으로 전체 224개 나라 중 219번 째로 낮아요. 또 우리나라 통계청 조사를 보면 초등학교 입학생 숫자가 8년 만에 2/3로 줄었어요. 한국은 참 ‘아이 낳기 힘든 나라’예요.
젊은 사람들이 취업하기 힘들 뿐 아니라 취업을 해도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가처분소득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해요. 결혼할 여유도, 아이를 키울 여유도 없어요.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어떤가요? 코스타리카에서도 아이를 않낳으려 하나요?
= 코스타리카에서는 아이를 하나만 낳아 키우면 버릇 없이 자란다는 생각이 강해서 외동이가 별로 없어요. 중산층의 경우 둘에서 셋 정도 낳아 기르는 것 같아요. 많이 낳지는 않아요. 중산층은 자녀들을 보통 사립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데 학비가 비싸서 많은 아이를 보낼 여유가 없는 거죠.
오히려 저소득층이 아이를 많이 낳는 편이에요. 특별히 자녀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않거든요. 게다가 요새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요. 엄마가 되는 고등학교 여학생들도 늘어나는 추세에요. 코스타리카는 가톨릭 문화권이기 때문에 피임에 대해 부정적이에요. 아이 낳는 일을 축복이라고 여겨요. 아마 그런 문화적인 이유가 클 거예요.
저소득층이 많은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교육과 의료가 무상으로 제공되기 때문인가요?
= 아니에요. 아무리 의료와 교육을 국가에서 책임진다 해도 코스타리카의 물가가 정말 높은 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생활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요. 당연히 아이가 많아지면 힘들어져요. 저소득층이 아이를 많이 낳는 이유를 코스타리카의 복지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저는 오히려 “일단 낳으면 신께서 책임져 주신다”라고 말하는 코스타리카 사람들 특유의 낙천적 생각 때문이라고 봐요.
하지만 과연 다니엘라의 말처럼 코스타리카인들의 낙천적 태도 하나로 우리보다 높은 출산율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950년대의 그 가난한 시절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는 아이들을 한 집당 5명씩 낳았다. “일단 낳으면 애들은 알아서 큰다”는 사고방식이 당시만 해도 지배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직 도시화가 덜되어 농촌의 마을 공동체와 자연의 품에서 아이들이 자라나던 시절인 까닭에 요즘의 우리 세대처럼 ‘돈을 들여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원 같은 곳에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마을공동체와 대자연이라고 하는 ‘무료 육아 인프라’가 당시에는 있었던 것이다.
코스타리카의 풍부한 대자연과 그리고 아직까지 유지되는 마을 공동체적 삶이 코스타리카인들의 낙천성과 높은 행복 지수의 또 다른 이유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 국가라면 낙태가 금지되어 있겠네요?
= 코스타리카는 법으로 정한 가톨릭 국가에요. 사람들은 낙태를 아주 큰 죄라고 생각해요. 살인과 맞먹는 죄라고 느끼죠.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그걸 곱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굉장히 인기 있는 좌파 정당이 있었는데 선거 기간에 ‘낙태 허용’이라는 이슈를 꺼냈어요. 그러자 엄청난 비판을 받고 선거에서 참패했어요.
한번은 TV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에게 “낙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어요. 대통령은 “우리 정부와 우리 정당은 낙태를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나 개인의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허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 대통령은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죠.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않하는 것도 아니에요.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낙태를 하고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낙태는 안된다’고 말해요. 그런 점에서 조금 이중적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이 아이를 갖는 경우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돼요. 법으로 보장된 출산 휴가(근로기준법상 출산 전과 출산 후를 합하여 불과 90일)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업주가 많아요.
심지어 아이를 가진 여직원에게 퇴사를 요구하기도 해요. 그렇게 힘들게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보육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싼 돈 주고 사립 보육시설로 보내야 해요. 코스타리카에서는 임신한 여성에게 보장하는 제도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아이를 가진 코스타리카 직장인은 임신 기간에 7개월 휴가를 사용할 수 있어요. 그중 석 달은 유급 휴가에요. 이때 받아야 하는 정기검진, 의사와의 상담, 약값은 모두 무료이고요. 아이를 낳은 직후에도 마찬가지로 석 달간의 유급 휴가를 줘요.
한국처럼 아이를 낳는다고 별도의 수당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보육 시설이나 유치원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코스타리카에서도 아이 가진 직원을 해고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정말 흔치 않은 경우죠.
의료 복지가 정말 잘 준비된 것처럼 보여요. 한국도 의료보험 제도가 잘 마련된 나라 중 하나지만 국민건강보험의 보장 범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보험을 많이 들어요. 코스타리카에도 사보험이 있나요? 무상 의료를 시행하는 나라 중에서 ‘의료의 질’ 문제를 겪는 나라들도 꽤 있던데, 그런 문제는 없나요?
= 정말 특수한 병에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코스타리카에서는 몸이 아플 때 돈 쓸 일은 없어요. 그리고 직장 다니는 사람이 병가를 낼 경우 석 달간 유급 휴가를 받을 수도 있고요. 의료와 관련된 돈을 개인적으로 지출할 일이 없으니 사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죠.
대신 코스타리카에도 문제는 있어요. 큰 병에 걸렸는데도 해당 지역 병원에 전문의사나 의료기기가 없는 까닭에 진료를 3년 동안 기다리며 대기해야 할 때가 있어요. 심지어 영영 치료 못받는 경우도 있어요. 최근에 이런 문제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국가 의료보험제도를 개인부담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부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동의하지 않아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코스타리카는 분명 ‘천국’은 아니었다. 여전히 돈이 개인 삶의 많은 부분을 좌우했고 그래서 상당수 사람들의 삶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낙천적 국민성’ 때문에 그들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을까?
코스타리카는 아직 충분한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의료와 어린이 보육, 산모 보호 등에서 충분한 복지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 노동시간, 근무시간도 우리보다 훨씬 짧았다. 우리와는 달리 낙오자들, 실패자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높은 행복 수준은 바로 그 ‘사회적 배려’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코스타리카는 2011년 UN의 개발프로그램 중 '환경 지속성' 평가에서 전세계 나라들 중 유일하게 다섯 개 기준에서 모두 합격했다. 또한 2009년에는 신경제 재단에서 발표한 ‘친환경 국가’에서 제1위로 이름을 올렸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이미 2007년에 ‘세계 유일의 탄소배출 중립국이 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나라는 일찌감치 ‘지속가능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무분별하게 산업을 육성하는 대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적 개발을 택했다. 대부분의 전기는 화석연료가 아닌 천연자원을 통해 생산한다.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가 곳곳에 존재한다. 행복지수 세계 1위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코스타리카의 ‘지속 가능성’은 그런 일반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군대를 없앴고 그 돈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용한다. 우리보다 낮은 일인당 평균 국민소득인데도 사회보장 제도를 일찍부터 정착시켰다. 교육과 의료처럼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을 국가가 책임진다. 코스타리카는 자본과 산업이 아닌 사람에 주목한다.
우리나라 보수 세력과 그 경제학자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인데도 코스타리카는 경제 성장에서도 높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IMF는 “코스타리카가 20년 동안 위기 없이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이야기했다. 최근의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도 코스타리카는 연 5%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코스타리카는 최근 ‘관광산업’으로 주목받고 있어요. 특히 코스타리카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하는 ‘환경친화 관광(Eco-tourism)’이 유명해요. 정부가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기 때문인가요?
= 일단 정부가 적극적으로 에코 투어리즘을 추진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민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만큼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을 거예요. 코스타리카는 일반 가정이 에코튜어리즘에 더 적극적이에요. 이게 경제적 이득이 된다는 걸 알았거든요. 실제로 에코 투어리즘 덕택에 코스타리카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어요. 정부도 열심히 마케팅을 하고 있어요. 코스타리카가 가진 빼어난 자연환경과 효과적인 광고가 좋은 시너지를 내는 것 같아요.
2005년 기준 코스타리카의 관광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1%이다. 그리고 약 13.3%의 사람이 이 분야에 종사한다. 코스타리카의 관광산업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바나나, 커피의 수출액을 합친 것보다 많다.
전기의 90% 이상은 화석연료가 아니라 천연 에너지에서 만든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까닭에 전기료가 아주 비싸거나 전기 공급이 모자라지는 않은가요?
= 풍력 발전소와 수력 발전소에서 대부분의 전기를 생산해요. 그래서 전기료가 비싸긴 한데, 하지만 코스타리카의 물가를 고려할 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에요. 이따금 전기 공급이 모자랄 때가 있어요. 수력 발전소가 많은데 비가 오지 않으면 아무래도 발전소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거든요. 그럴 때는 전기 공급을 통제하기도 해요. 하지만 국민들이 그 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크게 불만을 갖지는 않아요.
코스타리카는 2004년에 석유를 발견했잖아요. 그런데 개발하지 않고 있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나요?
= 그렇지는 않아요. 매장량이 적어서 시추해봤자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개발하지 않은 거예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또 모르죠.
한국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많이 있어요. 한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이 싸고 안전하고 깨끗하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로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코스타리카에서는 어떤가요? 코스타리카에서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이야기하나요?
= 코스타리카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절대 고려 대상이 아니에요. 어떻게 원전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저와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해요. 한국사람들이 원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아직 원전 사고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아아닐까요.
대다수 한국인은 원전을 폐기하면 전기 생산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이는 곧 산업과 가계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연구 결과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소의 전기 생산단가는 분명 저렴하지만, 핵연료의 후처리 비용과 대규모 참사 사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보다 더 비싼 가격이라고 한다. 우리는 후세대가 치러야할 막대한 비용을 알면서도 당장은 싸다고 여기면서 오늘늘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 가능 개발’이라는 개념은 우리 세대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내 자녀와 손자 손녀들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정치적 투표일이 축제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투표일 이전에 17세 이하의 청소년들은 실제 후보자들에게 모의 투표도 한다고 하던데요.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청소년들의 투표 결과를 확인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한다고 해요. 다니엘라도 이 ‘청소년 모의 투표’에 참가했나요?
= 큰 선거가 있을 때, 코스타리카 학생들은 실제로 학교나 방송국에 모여 모의 투표를 해요. 물론 이 투표 결과가 실제 선거에 반영되지는 않죠. 모의 투표를 마치고 나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에 관련한 수업을 진행해요. 후보자의 정책을 두고 서로 토론하기도 하고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설명을 듣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학생일 때는 모의투표를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별로 활성화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투표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제게 투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각 정당의 정책은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어요.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교육을 받은 셈이죠.
코스타리카는 투표 날 정말 시끄러워요. 꼭 축제 같아요. 집 앞에는 지지하는 정당의 현수막을 걸고 차에는 깃발을 꽂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아다녀요. 이 광경은 매번 볼 때마다 저도 신기해요.
다니엘라는 코스타리카를 사랑했다. 그가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저 그곳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코스타리카의 자연환경을 사랑했고, 그 제도를 사랑했고,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녀는 인터뷰 종종 이야기했다. “지금의 코스타리카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나는 더이상 코스타리카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거예요”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코스타리카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코스타리카가 걷는 새로운 길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높은 국민소득과 커다란 경제 규모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코스타리카에는 분명 존재했다.
종로 한복판, 간판도 없는 조용한 카페에서 다니엘라와 나와 한국의 대학생은 반나절 넘게 수다를 떨었다. 서로의 비슷함에 안도하고, 서로의 차이점에 놀라며 그렇게 다른 듯 같은 우리를 배워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