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EU가 2018년 11월 체결했던 FTA(EVFTA)가 지난 2월 EU 의회를 통과했다. 이제 남은 것은 베트남 의회의 비준절차인데, 베트남 정부가 이 FTA 체결을 손꼽아 기다려온만큼 올 5월 있을 베트남 정기국회에서 무난히 통과될 전망이다. EU 의회 기어트 부르주아(벨기에) 의원은 “베트남은 아세안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무역경제국가 중 하나이며 EVFTA는 EU가 개발도상국과 체결한 가장 포괄적이고 야심찬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평가했다. 베트남 상공회의소 부 띠엔 록 회장(Vũ Tiến Lộc)은 “EVFTA는 ‘서구로 통하는 고속도로(Western highway)’와 같으며, 금융·기술면에서도 베트남과 세계를 연결시켜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글로벌 가치사슬 편입 가속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베트남은 FTA 발효 직후 약 65% EU 제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하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무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EU는 발효 직후 약 71% 베트남 제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하고 나머지는 7년 동안 점진적으로 무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양국의 관세 철폐로 인한 효과도 크다. EU는 베트남입장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큰 수출시장이다. EU도 아세안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 베트남이 중요한 파트너다. 베트남 기획투자부는 이번 FTA로 인해 2025년까지 베트남 GDP의 4.5% 증가, 대 EU 수출의 42.7% 증가를 전망했다. EU와 베트남은 이번에 FTA만 타결한 게 아니라 투자보호협정(EVIPA)도 같이 맺었다. 이로써 베트남 정부는 EU의 기술과 투자유치도 같이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FTA는 지난 2012년부터 협상이 시작돼 약 9년간의 노력 끝에 결실을 맺었다. FTA 자체가타결된 것은
지난 2015년의 일이지만 서명이 미뤄졌다. 협상을 가로막았던 가장 큰 걸림돌은 노동조건에 대한 협상이었다. EU는 베트남에 국제노동기구(ILO)의 노조활동 보장협약(87호)과 강제노동 금지협약(105호) 준수를 요구했지만 베트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텼다. 협상은 그렇게 4년 동안 종이에만 머무른 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4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베트남은 결국 EU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EU의 요구사항인 ILO의 규정, 정확히 말하면 결사의 자유와 단체 협상권 보장을 승인했다. 이는 베트남으로서는 아주 큰 변화이자 결단이다. 베트남은 한국과는 다른, 공산국가이기 때문이다.
EU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경제공동체다. 그러다 보니 EU와의 FTA 협정은 조금 특별한 과정이 수반된다. 소속 국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규범’이 있어야 한다. 매 건마다 모든 분야에서 소속국가의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면 협상 진행에 큰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EU는 베트남과의 FTA 협상 뿐만 아니라 한국, 캐나다와의 협상에서도 ILO의 노동 기준 준수를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것이 EU가 내부적으로 합의한 규범(EU trade agreements)이기 때문이다. EU가 FTA 협상에서 내거는 조건에는 ‘노동’만 있지 않다. 환경이나 기후변화 문제 같은 조건도 포함돼 있다. 이른바 ‘지속가능발전’ 규범이다. 이 규범에 따르면 EU와 FTA를 맺는 나라는 국제노동규범과 환경규범을 이행해야 하고 관련 법들을 정리해야 한다. 또 기후변화를 방지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U와 FTA를 맺었던 한국, 그리고 협정 비준을 앞두고 있는 베트남을 포함해 중앙아메리카, 콜롬비아-페루-에콰도르, 조지아, 몰도바, 싱가포르,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이 조건에 승인했다.
그런데 EU가 이런 조건을 내건 이유를 단순히 그들이 사회문화적으로 선진국이기 때문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바로 이 조건을 준수하는 것 자체가 EU 각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EU는 이미 경제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해 수많은 조건들을 합의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앞서 언급한 지속가능발전 규범이다. 이미 이를 준수하는 유럽국가들은 그에 대한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미준수 국가의 경우 추가적인 비용을 치러야 한다.
노동 분야를 예로 들자면 베트남 당국은 ILO의 기준을 따르는 순간 노조와 단체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복수노조도 허용해야 한다. 베트남의 노조는 현재 공산당 산하 베트남노동총연맹(GVCL)의 통제 하에 운영된다. 사실상 ‘관급’ 단체다. 여기에 복수노조가 생기고 그들과 단체협상을 해야 한다면 정부의 노동통제력은 줄어들게 된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근로시간, 작업장 환경, 노사관계, 노동 계층 간의 차별 문제, 아동노동 문제 등 다양한 분야를 개선해야 한다. 이는 곧 노동비용의 전반적인 상승을 의미한다. 임금이 오르면 상품경쟁력은 하락하게 된다. 값싼 노동력이 주된 강점이었던 베트남으로서는 손해다. EU가 내건 ‘지속가능발전’의 함의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EU의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받아들이며 FTA를 체결했다. 이러한 행보는 분명 중국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EU는 중국과의 FTA 협상 개시 과정에서 중국의 노동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최근 불거진 홍콩 시위 문제와 신장위구르 자치구 인권 탄압 문제도 함께 도마 위에 올랐다. EU의 입장에 대해 중국 측은 자신들이 EU의 최대 교역국인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다. 13억짜리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엄청난 교섭 우위를 갖고 있는 중국에게 아직 국제규범을 준수할 동기가 없다. 중국과 EU 양측은 아직 협상을 개시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측면에서 베트남의 행보는 중국과 분명히 다르다. 국제규범을 따른다는 단기적으로는 손해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EU와 중국의 FTA협상이 진행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국에 대한 EU의 ‘불신’ 때문이다. 투명하지 않은 나라와의 교역은 여러 위험을 내포한다. 자신들이 준수하는 기후변화 대책, 노동조건 등을 상대국이 지키지 않는다면 교역 공정성이 깨질 수 있다. 기술 유출의 위험도 있다. 국제사회와의 폭넓은 교류를 위해서, 또 글로벌 가치사슬의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위험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베트남은 지금 그 전환의 첫 단추를 끼웠다.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쟁 우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베트남의 결단도 주목할만하다. 임금상승에도 불구하고 국제교역에서 우위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 생산성을 높여야 하고 조금 더 복잡한 산업에 손을 대야 한다. 저임금 국가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산업경쟁력을 확보하고 부가가치를 높여 고소득 국가가 된 게 바로 한국이다. 베트남이 차근차근 밟아가야 할 노선이기도 하다.
한국은 베트남과 EU의 FTA 체결로 반사 이익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바로 FTA에 포함되는 ‘원산지 규정’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로 FTA를 맺은 A국가가 B국가로 의류를 수출하는데 실제 이 의류의 원단이 몽땅 이웃나라인 C에서 생산되었다면 B국가는 FTA를 맺지 않은 C국가에 관세 혜택을 주는 꼴이 된다. 따라서 FTA를 맺을 경우 우회수출을 막기 위해 (수출품의 성질에 따라) 원재료도 FTA 체결국에서 만든 것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번 베트남-EU 간의 FTA에도 섬유와 의류 부문에 원산지 규정이 적용됐다. 베트남은 대표적인 의류 생산기지로 인도에 이은 세계 2위 규모의 섬유, 의류 수출국이다. 2018년 기준 수출액만 약 360억 달러에 달하며 EU에도 약 42억달러(2018년 기준)를 수출했다.
문제는 베트남이 의류 완제품을 생산에만 머무르며 원단의 상당부분을 외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단 점이다. 베트남에 원단을 수출하는 대원모방의 김석만 대표는 “의류의 최종 생산 과정에는 설비가 별로 투입되지 않는다. 재봉틀과 노동력만 있으면 생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원단 생산에는 노동력보다는 설비, 장치가 더 중요하다. 베트남이 원단을 수입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베트남이 수입하는 원단의 상당수는 중국산(57.8%)이다. 그러나 중국산 원단을 사용해 생산한 의류는 EU에 수출할 때 관세(12%) 면제 혜택을 받지 못한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원단을 EU에서 수입하면 원산지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EU 원단은 가격이 너무 높아서 원가 상승을 동반한다. 베트남에서 생산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베트남의 원단 제조기술이 충분하지 않다.
우회로가 있다. EU와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원단을 수입할 경우(교차누적 : Cross Cumulation)에는 원산지 제한을 받지 않는다. 원단을 생산할 수 있고 EU와 FTA를 체결했으며 베트남과 교류를 지속해온 나라로는 한국이 있다.
한국은 베트남의 2대 원단 수출국(15.9%)이지만 중국과의 격차가 크다. 이번 EVFTA로 베트남의 한국산 원단 수요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현지에 원단 생산 공장을 설립 하는 방법도 있다. 베트남 정부는 EVFTA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2025년까지 220억 달러 이상을 목표로 섬유 원부자재 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아상역, 한세실업 등 베트남 현지에 생산 거점을 가지고 있는 국내 의류기업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기업들은 한국 등지에서 원단을 들여와 베트남에서 봉제공정을 거친 뒤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EVFTA 체결로 이들 기업들은 유럽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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