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메신저 시장은 후발주자가 진입하기 매우 까다롭다.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메신저의 특성상 좋은 기술력을 갖춘 메신저가 새로 등장하더라도 그걸 쓰기가 쉽지 않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으면 ‘메신저’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신저 시장은 한번 구도가 잡히면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시장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후발주자는 상당수의 사용자가 같이 메신저를 갈아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메신저 시장은 기존에 충분한 사용자를 확보해 놓은 글로벌 IT기업(왓츠앱, 페이스북)이 차지한다.
그러나 글로벌 IT기업의 공세를 막아내고 자국 기업의 메신저를 사용하는 나라도 일부 있다. 대표적인 게 한국이다. 한국의 대표 메신저인 카카오톡의 국내 점유율은 무려 94.4%(2018년 기준)나 된다. 한국인들에게 ‘카카오톡’은 곧 메신저를 의미하는 대명사다. 카카오톡의 성공 비결을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첫 단추를 잘 꿰맸다는 점이다. 카카오톡은 2010년 초 처음 모습을 공개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가 이뤄지기 전이었다.
카카오톡 출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SMS을 통해 소통했다. 통신사는 그 대가로 한 건당 2~30원를 받았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자메시지를 ‘공짜’로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스마트폰을 구입한 사람들은 제일 먼저 카카오톡을 설치했다. 어떤 이는 카카오톡을 위해 스마트폰을 구입하기도 했다. 카카오톡은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율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IT 기업이 되었다.
한국과 비슷한 사례를 베트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트남의 IT기업 VNG는 2012년 메신저 ‘잘로’를 내놨다. 잘로는 2019년 현재 시장 점유율 80%를 점하며 베트남의 국민메신저로 자리매김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국과 비슷해보인다. 그런데 잘로는 카카오톡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카카오톡은 시장이 막 형성되려던 시점에 빠르게 선점한 사례라면 잘로는 후발주자로서 원래 있던 서비스를 추월한 사례라는 것이다. 그리고 잘로가 추월한 서비스는 바로 한국의 ‘카카오톡’과 ‘라인’이었다.
현지화 실패한 ‘카톡’, 보폭을 맞춘 ‘잘로’
국내에서 시장을 빠르게 선점한 카카오톡은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일본과 중국, 싱가포르 등에 법인을 세우고 현지 시장 공략을 꾀했다. 베트남에도 진출했다. 2013년 한때 점유율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베트남 시장에 문을 두드린 것은 카톡뿐만이 아니었다. 해외 공략에 나선 네이버의 라인 역시 베트남에 진출했다. 한 때는 이 두 업체가 베트남 모바일 메신저 시장의 1~2위를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잘로의 도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응우옌 VNG(잘로의 모기업) 부사장은 한국 메신저 업체들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국내 메신저 업체가 베트남에 진출했을 당시 한국에는 이미 4G망이 구축된 상태였다. 스마트폰의 기능 개선도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게 패착이었다. 카카오톡은 한국처럼 잘 갖춰진 인프라에서는 문제없이 작동했지만 베트남에서는 데이터 소모량도 크고 무거운 메신저였다. 응우옌 부사장은 "우리는 잘로의 기능을 단순화하는 대신 느리고 품질이 낮은 이동통신 환경에서도 메시지 전달이 수월하게 이뤄지는 데 집중했다"면서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기능은 부족해도 확실하게 동작하는 우리 메신저 쪽으로 사용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잘로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은 이유는 또 있다. 베트남 기업이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잘로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보이스 메시지’를 전면 배치하는 강수를 두었다. 심지어 이 기능을 강조하는 광고도 만들어냈다. 이건 실책이 아니었다. 성조가 많아 자판으로 일일이 치기 힘든 베트남어의 특성을 공략한 것이다. 보이스 메시지를 사용하면 번거롭게 타이핑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잘로는 이렇게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과 결합해나갔다. 추격자 잘로가 시장 1위를 차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이버-카카오톡 양강구도의 한국, 독점을 꿈꾸는 베트남의 잘로
한국인들의 인터넷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서비스 업체를 둘 꼽으라면 거의 이견 없이 카카오와 네이버로 모인다. 그런데 이 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력 사업 분야가 다르다. 먼저 네이버는 콘텐츠와 쇼핑, 정보 검색 등을 주력으로 삼는다. 맛집을 검색하기 위해서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네이버를 이용하고 물건을 사기 위해서도 네이버에 접속한다. 웹툰과 기사를 보고 날씨와 부동산 정보를 검색하고 특정 지역을 가기 위해 경로를 검색하는 행위 모두 네이버를 통해서 이뤄진다. 말 그대로 ‘포털 서비스’다. 네이버는 최근 몇 년간 검색엔진 기능이 구글에 밀리면서 검색 분야를 사실상 포기한 대신 협력사와 사용자들이 구축한 생활 정보를 검색 정보 상단에 밀어 올렸다. 네이버의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카카오는 메신저 기반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긴밀한 대화를 나누며 약속을 잡는다. 사람들은 네이버에서 자기가 쓸 물건을 사지만 카카오톡에서는 선물할 물건을 찾는다. 네이버 페이는 쇼핑몰 결제를 쉽게 만들었지만 카카오 페이는 친구에게 돈을 송금하게 편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에게 네이버는 ‘포털사이트’였으며 카카오는 ‘메신저’였다. 이 둘은 적어도 사용자에게는 별개의 서비스였다.
그런데 베트남의 시장상황은 조금 달랐다. ‘네이버’ 같은 종합 포털 사이트대신 뉴스나 게임 등 한정적인 범주에 국한되는 포털사이트가 존재했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사이트를 옮겨 다녔다. ‘생활 플랫폼’에 비견될 만한 서비스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잘로를 서비스하는 VNG는 인터넷 검색 포털과 온라인 게임, 음악 서비스, 온라인 뉴스, 전자상거래, 소셜미디어 등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VNG는 잘로를 통해 더 큰 꿈을 펼칠 기회가 있었다. 자사의 여러 서비스들을 잘로에 잘 심어낸다면 베트남의 ‘Only one’ 생활 플랫폼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잘로를 사용하면 카카오톡과 같은 듯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앱 안에서 바로 대중교통 정보를 검색하고 예매할 수 있다. 항공권이나 호텔 예약도 가능하다. 쇼핑도 잘로에서 직접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정부와의 협업을 통해 버스 도착 시간이나 약국 위치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도 내놨다. 이는 보통 한국 사람들이 ‘네이버’를 통해서 하는 일이다. 잘로가 지향하는 서비스 방향은 이를 테면 ‘카카오톡’ 안에서 ‘네이버’를 쓰는 것이다.
잘로의 미래, 한국 업체의 기회
잘로가 생활 플랫폼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잘로를 통해 대중교통 시간을 확인한다. 이후 잘로를 통해 뉴스를 보며 음악을 듣는다. 회사 회의일정을 잘로를 통해 공유하고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잡기 위해 잘로에 접속해 식당을 예약한다. 집에 들어가서는 잘로를 통해 웹툰을 보다가 필요한 물건이 생각나서 쇼핑 탭에서 구입한다. 사용자들은 이 모든 과정을 한 개의 앱을 통해서 할 수 있다. 잘로는 이 모든 행위를 자사의 서비스를 통해 제공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구현된다고 해도 잘로가 모든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당부분은 ‘중개’에 그칠 것이다. 그리고 그게 플랫폼 업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잘로는 카카오처럼 인터넷뱅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잘로의 ‘은행’ 탭을 들어가면 베트남신한은행 같은 현지 은행이 연결된다.
한국의 뷰티 업체 비엣메이트는 잘로 내의 쇼핑 탭인 ‘잘로숍’과의 계약을 따냈다. 현지 진출 장벽이 한층 낮아진 셈이다. 비엣메이트는 이제 따로 현지 영업망을 구축하는데 애쓰지 않아도 된다. 잘로숍에 입점하는 순간 수많은 잘로 이용자가 잠재 고객군이 되는 셈이다.
플랫폼 사업자 잘로는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제휴와 MOU를 진행할 것이다. 응우옌 부사장은 "한국과 베트남인들은 재능이 뛰어나고 근면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면서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O2O 등의 분야에서 한국 기업과 협업을 통해 동남아 시장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로의 꿈은 베트남과 아세안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업체에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Veyond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