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교육은 이 사회 곳곳을 횡행하고 있다.
그런 급훈을 본 것 같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면 마누라의 얼굴이 바뀐다." 어느 고3 교실에 걸려있었을 그 급훈이 처음 인터넷에 돌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맞아 맞아' 하며 공감했던 것 같다. 최근 몇년 동안 그런 짤이 다시 돌았을 때는, 다행이 누군가가 비판했던 것 같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중형이 내려지지 않으면 판사를 두고 인터넷 댓글에선 그렇게 이야기들 한다. "네 딸이, 네 마누라가 당해도 그렇게 판결할 거냐"고. 판사가 정말 그 형을 내릴 때 얼마만큼 실책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남자로 상정된 그 판사를 욕하는 대신 그의 여성가족을 도구로 삼아 비난한다.
더 심한 이야기도 본 것 같다. "위안부가 당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본 여성에게 그렇게 하자"고. 이건 그래도 누군가가 욕을 했던 건 같다. 너무 노골적인 이야기기도 했다. 이정도나 되어야 사람들이 잘못된 걸 인지한 것 같았다.
나는 어릴 적 여성이 성공 후 얻게 될 전리품이라고 배웠다. 앞에 적어둔 그 급훈은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예쁜 여대생을 따먹고 싶지 않냐? 그러면 지금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담임선생에게 들었다. 교실은 내게 여성이 어떤 인격체라는 이야길 해주지 않았다. 성공은 남성들만의 것이었고 성공한 남성들은 여성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실제로 공부에 동력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돈을 잘 벌면 편히 살수 있다'는 말보다 더 구미가 당겼을지도 모른다.
전리품이라는 표현은 정말 끔찍하지만 딱히 달리 말할 방법도 없다. 내가 받은 교육은 실제로 그랬다. 내가 그렇게 배웠다는 걸 고백하는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이해할 여지가 있겠냐는 이야긴 절대 아니다. 뼛속 깊이 여성을 재화로서만 인식하는 이 쓰레기같은 문화는 이미 교실에서부터 이루어졌고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이야길 하고 싶어서다. 어쩌면 교실 이전부터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사람을 보는 대신 물건으로 취급하는 교육은 이 사회 곳곳을 횡행하며 누군가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
'누군가의 딸'로서 선거에 동원된 어떤 여성은 성상품으로서 널리 소비되었으며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포토타임을 가져야 했고 또 성희롱에 가까운 모욕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란 자, 대통령 후보에 오른 자가 과연 그걸 몰랐을까? 어쩌면 그도 너무 나이브해서 '예쁘면 다 그래'란 말로 어설프게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대의'를 위해 조금만 희생하자'는 말로 무마시켰을지도 모른다. 물론 밝혀진바는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일어난 일은 그의 아버지의 승인아래 딸이 포토타임을 갖다 일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딸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 여성을 '획득'하고자 성공에 몰두하는 남성, 오늘 그가 당한 변을 두고 '지켜주지 못했다'며 장인어른을 운운하며 아쉬워하는 어떤 댓글러들. 당했던 역사가 화가 난다며 다른 울타리의 여성에게 복수하겠다는 광인들. 어디에도 주어로 여성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배제된 자들은 오늘 어디선가 희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거나 전시된 상품으로서 점잖은 품평을 당해야 한다.
"미의 대가"라던가 "남성의 본능"이라는 말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물건취급했으며 또 일상을 억압했는지 다시금 느끼게 되는 날이다. 정말 화가 많이 나는데 또 가슴 한켠에서는 죄스러운 마음도 든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갔다"는 이야기에 심청이의 효심 대신 불쾌감을 느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