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된 건 나였다

조용히 불린 이름

by 낮은목소리

구조조정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어떤 알림음도 없었고, 누구의 감정도 소리로 터지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정돈된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렸고, 평소보다 더 깨끗한 회의실로 안내받았을 뿐이었다.

회의실 문은 언제나 그렇듯 무겁고 조용히 닫혔다. 의자에 앉자마자 커피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누군가 미리 타놓은 커피였다. 마시지 않았고, 마실 수도 없었다. 그건 이미 자리를 잃은 사람이 마시기엔 너무 따뜻하고, 너무 다정한 냄새였다.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을 때, 문득 몇 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첫 출근 날, 어깨를 펴고 앉아 있던 그때의 나. 모니터에 뜬 회계 시스템 화면을 낯설게 바라보며 스스로를 "사회인"이라 부르던 순간. 이 자리에 앉아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믿던 그 짧고도 단단한 다짐.

나는 국세청에서 3년을 일했다.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 속에서 한 계절, 한 계절을 통과했다. 새로움에 긴장하던 시기, 익숙함에 무뎌지던 시기,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리를 지키는 일이 버거워지기 시작한 시간들. 그것은 단순한 직장의 시간이 아니었다. 사회인이자 공무원이자 직장인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의 마음이 쌓여가던 과정이었다.

매일 아침,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컴퓨터를 켜는 일이었다. 시스템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고, 나만이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엔 민원인의 목소리에 함께 떨렸고, 나중엔 그 떨림을 감추는 법을 배웠고, 결국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이 익숙함이라고 착각했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무감각이었다.

일이라는 것은, 때로는 무겁게 느껴질 때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일상이란 이름 아래 감정이 마모되고, 내가 단순한 기능으로 축소되어 가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 의미는 점점 흐려진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흐릿한 감정 속에 있었다. 퇴근 후에도 남는 서류들, 모니터에 반사된 내 얼굴을 외면하게 되는 저녁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름이 아닌 사번으로 불리는 것 같았던 날들.

회의실에서 나온 후,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참 조심스럽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아닌 말 같았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 이렇게 공허할 수 있구나 싶었다. 위로는 정리가 아니라 연결일 텐데, 이 말은 마치 선을 그어놓는 느낌이었다. 이곳까지가 당신이고, 그 다음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나는 그날 천천히 책상을 정리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고,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리된 파일들,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안내 책자들, 나만이 기억하는 메모들. 책상 아래 서랍에는 아직도 잘 굴러가지 않는 펜이 있었고, 커피 얼룩이 묻은 종이컵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버리지 않은 물건이라기보다, 놓고 있었던 기억들이었다. 그 작은 것들을 하나씩 들어올릴 때마다,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출발 전에 직원용 주차장에서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출근 중이었고, 누군가는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중이었다. 그 흐름에서 나는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사실이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공무원이란 이름표를 떼어낸 자리에 무언가를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은 공백이어도 괜찮았다. 어떤 자리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는 것이 더 온전한 경우도 있다. 내가 지금 마주한 이 빈자리도, 어쩌면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한 여백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시 펜을 들었다. 담당자라는 이름이 아닌, 나라는 사람으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불러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던 손으로, 이제는 내 마음을 적어보려 한다.

정리된 것은 책상이었고, 업무였고, 매뉴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조용한 나를 꺼내어, 글이라는 방식으로 천천히 다시 살아내는 중이다.

정리된 건 나였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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