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로 출근했다. 국세청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 안에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전화를 받고, 수많은 숫자와 용어 속을 오갔다. 처음엔 그 익숙함이 좋았다. 같은 사람들, 같은 공기의 흐름, 익숙한 키보드 자판의 촉감. 누군가는 반복이라 부를지도 모르는 그 일상은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그 안정 속에서 스스로를 붙잡았다. 흔들리는 날들 속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이 책상과 내가 매일 만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처음 공무원이 되었을 때 나는 설렜다. 적어도 내 일의 끝자락 어딘가엔 누군가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내가 처리한 문서 하나가, 어떤 사람의 세금 문제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해줄 수 있고, 내가 남긴 메모 하나가 그 사람의 다음 결정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세청이라는 조직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치밀했다. 정해진 규정과 절차 안에서, 나도 조금씩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굳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책상과 사람 사이, 그 좁은 공간 어딘가에서 나는 점점 말이 줄었고, 표정이 사라졌고, 감정이 닫혀갔다. 동료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업무로만 채워졌고, 점심시간에도 나는 보통 혼자였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기보단, 효율적으로 일하고 조용히 하루를 마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건 거울을 보는 기분과는 조금 달랐다. 책상 위엔 서류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모니터엔 누군가의 납세 정보가 떠 있었으며, 커피잔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었다. 어깨가 조금 굽었고,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으며, 시선은 마치 '해야 할 일'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내 일에 의미를 묻지 않게 됐을까. 처음 그 자리에서 느꼈던 '보람'이라는 단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사실 그보다 더 오래된 시간이 있다. 캐나다 공군으로 복무하던 시절, 밴쿠버 근처의 조용한 섬에서 4년간 근무했다. 그 섬은 늘 안개가 자주 끼었고, 바다 냄새가 공기 중에 스며들어 있었다. 외부와 단절된 듯한 그 공간은 한편으론 평온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속 깊은 감정을 꺼내기엔 너무 적막했다. 그곳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폭발 사고를 겪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 순간의 충격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렀다. 몸은 생각보다 빨리 회복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완벽했던 건강도 무너졌다. 누구보다 튼튼하다고 자부했던 몸이 흔들렸고, 그와 함께 마음도 무너졌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상담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처음엔 상담실 문을 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망설이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문을 열면, 나는 더 이상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앞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나의 약함, 혼란스러움, 그리고 무너진 감정의 잔해를 이야기해야 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목소리는 자주 떨렸고, 내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은 늘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상담사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속 한 구석엔 끊임없는 저항이 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걸까?” “정말 도움이 될까?” “이건 약함의 증거가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아주 작은 변화들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고, 감정을 말로 옮기는 그 행위 자체가 내 안에 갇혀 있던 것들을 조금씩 꺼내주는 느낌이었다. 눈물은 예고 없이 흘렀고, 말은 자주 막혔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시간이 치유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 시기를 지나면서 외적인 모습까지도 피폐해졌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어딘가 그늘졌고, 눈빛은 항상 피로해 보였다. 예전의 건강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사회 속에서의 작은 대화, 짧은 인사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고, 세상이 내게 낯설게 다가왔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국세청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람들을 마주하고, 서류를 검토하고, 정해진 규정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그 멈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잠시 멈춘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에서, 조용히 노트북을 켰다. 일에 지친 날이든, 감정이 무딘 날이든, 하루를 정리하고 나면 남는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그 공백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그건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 조직 안에서 묻히고 쌓인 내 말들,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지만 드러낼 곳이 없던 내 '의지'였다.
글을 쓰면서 나는 조금씩 나를 회복했다. 문장을 통해, 나는 다시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공무원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놓쳤던 감정들, 외면했던 나의 가능성들이 글 속에서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공무원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매일 밤,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기록한다. 이 기록들이 누군가에게 닿지 않더라도 괜찮다. 다만, 이 글들이 나 자신에게만큼은 분명하게 닿기를 바란다.
책상과 사람 사이, 그 좁고도 넓은 공간 안에서 나는 다시 나를 찾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는 다시 써내려간다. 낮은 목소리로, 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