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가 글 쓸기로 한 날

by 낮은목소리



그날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 하늘은 흐리지도 맑지도 않았고, 바람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조차도 특별할 것 없는 리듬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도 그날은 나에게,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마치 오래된 책 속에서 한 문장이 조용히 빛나듯, 내 기억 속에서 그날의 조용한 결심이 가끔 나를 불러 세운다.

그날 나는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노트북을 켰다. 딱히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뭔가 적어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없다. 단지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조용한 웅성임은 생각보다 더 깊고 또렷했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무시해왔다. 그렇게 살아야 했으니까. 규율과 시간, 책임과 효율이 우선인 일터에서는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글 쓰는 이유'를 묻는다. 처음엔 대답을 못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자주 쓰는 단어들을 다시 읽다가 깨달았다. 나는 그 단어들 사이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나를 가둬둔 무언가로부터 조금씩 풀려나고 싶었던 것 같다. 쓰는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역할도, 직책도 아닌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그런 변화의 시작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나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그 순간.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누군가의 시선도 없었다. 오로지 나와 내 손가락, 그리고 빈 화면. 그 하얀 공간이 이상하게도 나를 환영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괜찮아. 여기는 네가 해도 돼."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랐다. 그냥 내 이름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그때의 장면이 내 머릿속을 떠돌았고,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멈췄다. 다시 썼다. 지웠다. 또 다시 썼다. 그렇게 한 문장을 완성하는 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과는 또 다른, 정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오래된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절대 거창하거나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지나온 평범한 날들, 잊히고 지워졌던 조각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매일 밤 자리를 펴듯 노트북을 펼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커피를 끓이고, 불필요한 조명을 꺼둔 채, 화면만을 밝힌다. 그 빛 아래에서 나는 글을 쓴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쓰고 나면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가 읽어준다면 참 고마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가 쓰기로 결심한 그날은, 어쩌면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과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사이의 틈을 처음으로 알아챈 날이었다. 세상은 내게 늘 조용하고 책임감 있으며, 성실한 누군가이길 요구했다. 나는 그에 맞춰 살아왔다. 하지만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조용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인 동시에, 외롭고 두려우며, 때때로 무력하고 흔들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나를 사랑하려고 글을 썼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그 감정들은 때로는 새벽에 찾아오고, 때로는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오후에 문득 고개를 든다. 그런 감정들이 말을 걸 때,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 노트북을 열고, 내 안에서 일어난 작은 파문을 조용히 기록한다.

내가 쓰는 문장들은 종종 너무 길거나, 너무 느리고, 너무 조용하다. 누군가는 쉽게 지나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괜찮다. 나는 내 속도로, 나만의 리듬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글이 내 하루를 살게 해준 것처럼, 언젠가 내가 쓴 이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에 아주 조용히 머물 수 있기를,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날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는 오늘도 쓰기로 한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로. 누군가의 눈에 맞춰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흐름을 따라.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낮은 목소리로, 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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