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와 키보드 사이 - 그 어디쯤
나는 지금도 가끔 관제탑 꿈을 꾼다. 창문 너머 하늘은 늘 흐리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맑다. 무전기에서는 혼선이 섞인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뭔가를 지시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가슴 어딘가가 묵직해진다. 깨고 나면 한동안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그건 단순한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아마도 내 마음속에 여전히 떠 있는 어떤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공군기지에서 관제사로 일했다. 누구나 겪는 군 생활과는 조금 달랐다. 내 하루는 수많은 항공기의 이착륙과 함께 시작되고 끝났다. 각기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이들이, 정해진 경로로 안전하게 떠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나는 하늘의 교통을 지휘하는 사람이었다.
그 역할은 생각보다 무겁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판단 하나가 수십 명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 모든 감각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했다.
‘감정은 방해가 된다.’ 훈련을 받으며 가장 먼저 배운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참 잘 따랐다. 상황을 빠르게 읽고,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모든 가능성을 계산했다. 불안이나 긴장은 침착함이라는 이름으로 덮었고, 몸보다 마음이 먼저 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내 안엔 점점 공백이 늘어갔다. 모든 것이 절도 있고 정확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사람을 어딘가에 잠시 두고 온 것 같았다. 친구들과 웃으며 나눴던 대화의 감정도, 어린 시절 꿈꿨던 소년의 마음도, 어딘가 먼 기억처럼 흐릿해졌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말 대신 단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바로 쓸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 저장된 표현들이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노을이 진하다.” “지상보다 하늘이 더 조용하다.” 그런 문장들이 하루 중 문득 떠올랐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것은 생존과는 무관한, 하지만 내게는 생존만큼 중요한 ‘무언가’였다.
첫 글을 썼던 날을 기억한다. 전역을 앞두고, 관제실에서 내려와 사무실 구석에 앉아 낡은 노트북을 켜고 멍하니 타자를 쳤다. 그건 대단한 글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보여줄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처음으로 관제사라는 직책이 아닌, ‘사람’으로서 나를 마주했다.
그 후로 나는 계속해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제되지 않은 조각들이었다. 긴장을 풀 수 없는 습관 때문에, 문장도 자꾸 끊겼고 글 속의 나도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쓰고 싶었다. 관제탑 위에서는 하지 못했던 말들, 무전기 속에 담기지 않았던 진심들, 그 모든 것을 글 속에서 비로소 꺼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군 생활을 하나의 챕터로 말한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하나의 책 전부에 가까웠다. 그 시절을 통해 나는 지키는 법을 배웠고, 포기하지 않는 법도 익혔다. 그리고 그 가장 깊은 구석에서, 나는 ‘표현’이라는 욕망을 발견했다.
지금 나는 관제탑 위가 아니라,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마음속엔 더 이상 날아다니는 전투기가 없지만, 여전히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돌고 있다. 그 기억들 중 어떤 것은 무겁고, 어떤 것은 따뜻하고, 어떤 것은 아직도 해석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내 마음속 활주로에 서 있는 그 기억들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도록. 불안정한 감정들이 충돌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간격을 조정하며 문장을 놓아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겐 여전히 낯선 일이다. 관제탑에서처럼 명확한 절차도 없고, 실수 하나가 바로잡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자유가 있다. 이 글은 무전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되고, 정확하지 않아도 되며, 어디로 향하든 괜찮다.
그 자유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회복하고 있다. 예전엔 누군가의 비행을 지켜봤다면, 이젠 내 내면의 비행을 따라간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이 여정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기록들이 쌓이면 나는 다시 한번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땐 지금보다 조금 더 담담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최선을 다해 살았고, 지금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