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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1. 2021

슬로단 고르보비치, <아버지의 길>

책임의 순례

슬로단 고르보비치(Srdan Golubovic), <아버지의 길>(Otac) - 책임의 순례     

“나는 처음에 읍장의 결정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다시 한번 충분하게 설득력을 발휘해 읍장의 결심을 꺾고 자기 관점을 요구했다. 밖의 마을은 끌어 오르며, 오로지 길고 획일적이고 무자비한 재잘거림에 전념하고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최근 국제 영화계에 소개된 세르비아 영화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단 그들의 영화는 정치성이 짙다. 최근 국제 영화계에 공개되는 세르비아 영화들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전쟁, 코소보 전쟁 등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반성하며 바라보곤 하며,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회, 공동체에 발생한 중대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정치적인 소재에 주안점을 두고, 세르비아 영화들은 그 '길'을 서서히 따라간다. 2010년대 후반에 주목받은 세르비아 영화인 오그녠 글라보니치의 <더 로드>와 미로슬라브 테르지치의 <스티치>가 그렇다. 

①먼저 <더 로드>의 연출은 단순하다. 그저 우직하고 치열한 롱테이크로 트럭 운전사 스테파노비치의 여정을 여실히 담아낸다. 그 여정은 비밀스럽다. 트럭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또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관객들에게 그 정보는 제한된다. 실제로도 그렇다. 영화의 시대상은 코소보 전쟁으로, 전쟁 당시 무수한 선전들이 추악한 진실을 가리고 있었으니, 스테파노비치가 트럭에 품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리고 영화는 정치 권력이 은폐하고 차단하는, 트럭이 싣고 있는 학살된 희생자들의 주검이란 진실을 묵묵히 추적해나가며 목적지를 따라간다. 글라보니치는 왜곡되고 끊겨버린 역사의 길을 재건하고 다시금 밟아나가 희생자들의 진실을 밝혀내며, 또 우리가 누구와 어떻게 동행하여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되묻는다. 

②그리고 <스티치>에서는 엉키고 꼬인 실뭉치를 풀어내, 선명하게 드러난 근원을 찾아 나서는 극이다. 이는 90년대에 세르비아의 산부인과에서 집단으로 발생한 신생아 바꿔치기 및 돌연사 사건에 기반을 둔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기이한 비극에 섣불리 답을 내리지는 않지만, 본 사건으로 인해 뒤엉킨 천륜을 다시금 찾아 나서고 헤집어진 끈을 풀고자 한다. 이렇게 최근 세르비아 영화에서는 국가, 제도, 사회, 역사에 의해 가로막히고 붕괴한, '길'을 걸어 나가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의 영화감독인 슬로단 고르보비치의 신작, <아버지의 길>에서도 이 같은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1972년 베오그라드 태생의 슬로단 고르보비치는 세르비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 프레드렉 고르보비치의 영향을 받아, 그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는 2001년 <빗나간 과녁>이란 작품으로 데뷔하였다. 슬로단의 관심은 역사, 사회, 정치에 기인하며, <빗나간 과녁>은 유고 전쟁 이후의 상흔을 추적한다. 그는 1992년 하계 올림픽에서 유고 전쟁으로 인해 독립 참가한 유고의 사격 선수들이 은메달 한 개와 동메달 두 개를 수상하며, 국가의 암울한 시기에 희망이 되었던 영웅들의 말로를 추적한다. 사실에서 출발한 영화는 허구지만, 영웅의 말로나 전쟁 이후 군인들의 비참한 삶이라는 점은 진실이다. 영화 속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고 국가의 영웅이 된 이고르, 그 이후에는 전쟁까지 참전하지만, 참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마약에 의존하고 살아간다. 더욱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영웅이자 참전군인은 민영화로 인해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영화에서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시점을 구현한 숏들은 이를 반영한다. 이렇게 국가를 위해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과 전쟁 이후 헌신짝처럼 버려진 개인들의 말로를 추적하며, 중요한 것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형제애'의 회복,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짊어질 수 있는 정신임을 환기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는 거칠고 투박한 리얼리즘에 가깝지만, 아로노프스키의 <레퀴엠>을 연상케 하는 리드미컬한 줌인과 교차편집을 이용해서, 흡사 사격선수의 시선을 구현한다. 그리고 12년 만의 복귀작인 <써클즈>에서도 역사에 관한 그의 탐구가 묻어난다. 건조한 문법을 바탕으로 한때는 광장에 다 함께 모여 있었지만, 전쟁 이후 12년이 지난 작금에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발카나이즈'를 개개인의 군상으로 보여준다. <빗나간 과녁>에서도 민간인 피해자가 이민을 하게 되듯, 본 작품에서도 희생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피해를 고찰한다. 그것은 원을 이루며 반복된다. 가해자들은 반성할 줄 모르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도망친다. 유고 전쟁의 피해자였던 보슈냐크인은 작금에는 여성으로 뒤바뀐다. 더욱이 난민, 이민자인 그들이 낯선 땅에서 공권력의 도움을 받기도 쉽지 않아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고르보비치는 끊어낼 것을 강하게 역설한다. 복수하지 않고, 나의 아들이 희생되었어도 다른 누군가의 아들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내 품 안에 보듬는다.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약자를 구조한 강자의 진정한 힘이요,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흡사 파노라마로 공간을 넓게 펼쳐내고 이를 평면으로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인물들의 ‘걸음’이 강조되었다. 나를 위한 걸음이 아닌, 죽은 아들을 기억하기 위한 걸음, 현재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떠난 길, 전작에서의 걸음이 고르보비치의 신작 <아버지의 길>에서도 이어진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서두에서 언급한 세르비아의 작품들도 그렇고, 고르보비치가 21세기 초반부터 내놓은 작품들도 그렇고, 연출은 대체로 건조하고 거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형식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기조가 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도입부, 니콜라의 아내 빌랴나가 아이들과 함께 왼쪽 길로 걸어 나가는 장면을 평면적인 구도와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영화는 이후에도 롱테이크, 비교적 긴 시간을 고스란히, 손실을 최소화한 시퀀스로 세태를 담아내어, 현실 속 잘려 나가지 않은 날 것의 시간을 스크린에 오롯이 구현한다. 또 길을 걷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이들의 움직임은 핸드헬드로 담겨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이 또한 실재의 시선을 구현하는 리얼리즘의 일환이랴. 그리고 이와 더불어, 실직 이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빈자들의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상황에 따른, 격렬하고도 처절한 흔들림, 불안한 심리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흔들림 속에서 영화는 니콜라의 창백하고도 절망적인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며, 서류나 돈, 법으로 환원되지 않은 생생하고도 처절한 호소를 감상자가 맞닥뜨리게 만든다. 또 길을 걸어가는 니콜라의 여정을 롱숏으로 포착하는데, 본 작품은 집과 공동체를 탐구하는 작품으로서 과연 세르비아라는 거대한 집과 공동체가 풍요로운지 황량한지, 올바르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이러한 모든 얼굴과 풍광을 16mm 필름으로 포착하여, 흐릿하고도 빛바랜, 저물어가는 세르비아의 현주소를 가시화한다.     


이러한 본 작품에서 길을 떠나는 이유는 관료들의 부적절한 개입으로 인해 왜곡되어 버린 부모 자식 간의 진실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그 길을 본격적으로 떠나기 이전, 빌랴나가 얼마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마주하는, 니콜라가 의사와 면담하는 병원에서의 줌인은 고통스러웠던 가족의 진실에 서서히 다가서는 첫걸음을 연출로 보여준다. 이란의 시네아스트 키아로스타미가 말하는 '길'의 의미처럼, 우리의 인생이 곧 끝없이 흐르는 길, 길의 끝에서 다른 길이 시작되고 굽이굽이 흐르며,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여정이 바로 인생이란 길이랴. 진정으로 자유로운 길을 향하는 우리는 무수한 갈림길에 선다. 하지만 진정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길은 제한된다. 본 작품에서처럼 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길을 걷는 빌랴나의 발걸음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평면적인, 즉 선택이 제한된 구도로 제시된다. 절망적인 가난과 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길은 죽음의 지름길, 삶으로 나아갈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막다른 길로 얼굴을 뒤바꾼다. 니콜라의 길도 마찬가지로, 초반부에 그의 길은 '되돌아옴'이다. 그가 영화에서 걷게 되는 길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실직 이후 변변찮은 일용직을 전전하며 그는 가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책임지지 못한 과거를 해결하기 위해 니콜라가 가야 할 길은 집, 가정의 과거로 제한된다. 빌랴나가 쓰러지자마자 부인이 굶주림을 호소하러 가던, 그 길을 다급하게 뛰어간다. 이후에도 니콜라의 길은 이미 결정된다. 어떻게든 가족을 재건하기 위해, 장관을 만나러 수도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길, 그 이유는 열악한 세르비아의 지방에서 정규직을 얻거나 단기간에 부를 쟁취하여 가족을 재건하는, 다른 갈림길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궁핍과 국가의 제약에 의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 이처럼 우리의 길은 이처럼 극도로 제약된다.      


더욱이 가족은 각자가 필연적으로 개인이기에 다른 길을 걸어가기도 하지만, 가족으로서 하나의 에움길로 돌아와서 걸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의 개입으로 니콜라의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다. 아버지가 길을 떠나는 이유는, 각자가 모두 흩어지고 갈라진 길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 더 가야 할 길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끊겨버린 가정의 길을 재건하기 위함이다. 니콜라는 집에서 끊겨있던 물'길', 전류가 흐르는 '길'을 다시 잇는다. 그의 길은 아내의 자살기도 원인이 된 황량함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길이자, 집안의 가장으로서 모두의 길을 다시 재건하고 이어내는 길이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세르비아 외곽지역의 절망적인 현실과 지방자치의 문제 등을 비교적 빽빽하게 보여줬다면, 영화의 중반부는 니콜라가 길을 걷는 특별한 별사건도 없는 5일간의 과정이 느슨하게 나열된다. 언제쯤 베오그라드에 다다를 수 있을지 니콜라도, 감상자도 모두 가늠할 수 없다. 이 같은 지리멸렬함, 기약 없는 중반부의 분위기는 아무리 길을 걸어도 다다를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적인 공허를 구현한다. 눈은 호화롭지만, 흡사 부질없는 약속과도 같은 황금빛 들판이 절망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미지불된 임금과 퇴직금이란 약속이 공허한 황금빛과 같았을까. 이후 복지부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장관을 만나기 위해 하릴없이 기다려야 하고 금지인물로 낙인찍혀 출입이 금지되며, 겨우 만난 차관이 지방에 하달한 문서는 오직 '권고'사항이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자식이 같은 길을 걸어가는 날은 유예되고 기약도 없다. 하지만 영화는 아예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때 서로 멀리 있던 부부의 두 손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어루만진다, 두 눈은 깨어나 서로를 응시한다. 또 아예 만날 수 없었던 아이들과 잠깐 재회하고 포옹하고, 가정의 약탈당한 물건들을 다시금 모으며, 언젠가 하나의 길로 모이게 될 권리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까지 가정을 재건하며 빵을 먹는 아버지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니콜라가 가야 할 길, 그것은 국가 때문에 강제된 길이다. 니콜라는 집안의 가장으로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정을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의 가정은 풍요롭진 않지만 최소한 있을 것은 갖춘 집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국민이라는 구성원들을 품은, 국가라는 거대한 집은 이와 정반대다. 니콜라는 2년 전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밀린 봉급과 퇴직금도 수령하지 못했고, 지방의 낙후로 인해 변변찮은 일용직을 전전했다. 미지불 임금과 낮은 소득에 의해 빌랴나는 두 아이와의 생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분신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후엔 퇴직금과 밀린 임금을 지불하게 만드는 법의 책임, 수도 중심 발전에 의한 지방의 희생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법은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헌신보다 가난을 판단기준 삼아, 옹색한 한 가족의 구성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국가는 구성원들을 긍휼히 여기거나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감독관'이 되어 호되게 질책한다. 노동을 괄시하는 국가는 빈곤의 공범이고, 궁핍에 따라 양육을 결정하는 정책은 합법적인 납치를 조장한다. 겨울을 어떻게 날지, 국가의 지원이 절실한 약자들의 경미한 언어장애를 해결하지 않았는지는 본인들의 책임이 아니라, 이를 짊어지기 어려운 빈자들의 책임이다. 공무원들은 부패하여 편법으로 지원금을 받기 위해 더욱 그들만을 위한 법에 몰두하고 빈자를 착취한다. 이러한 국가의 태만에 의해 극빈층들은 막다른 길에 몰린다. 서로의 없는 살림을 약탈하고, 어떻게든 생계를 일삼기 위해 불법 이민자를 운송하는 등, 책임지지 않는 합법의 울타리를 줄곧 벗어난다. 니콜라가 베오그라드로 순례와도 같은 여정을 떠나는 과정에서, 철조망을 넘고 고속도로를 걷는 것이 불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다.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표 값을 벌기도 버거운 실정이기에, 불법이더라도 고속도로를 걸어야만 한다.      


길을 걷다가 니콜라는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그는 누워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베오그라드로 하루빨리 가야 하기 때문이요, 이와 더불어 그는 입원 및 검사와 관련한 비용을 지급할 조금의 자금도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니콜라는 길을 걸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빌랴나의 무기력함과 절망을 간접 체험한다. 궁핍 속에 방치된 삶, 아무리 살려고 몸부림쳐도 해결되지 않는 삶, 그 고통이 화상의 통증보다 극심하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에 가장 끔찍하고도 격심한 고통이 바로 화상이다. 하지만 빌랴나는 화상보다도 참을 수 없는 빈곤에 절망하여 분신을 택한다. 자살을 선택한 빌랴나의 정황을 영화는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돈을 벌기 위해 너무나도 바빴던 니콜라가 가족이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며, 그들의 고통을 엿본다.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는 외로움과 국가의 냉대, 무심함을 그녀 또한 니콜라처럼 경험했으리라. 또 불법의 길로 내몰리고, 이에 의해 극심한 벌금이 부여되며 더 궁핍해지는, 빈자에게 불리한 법을 니콜라가 몸소 직면한다. 니콜라가 거주하던 황량한 시골과 그가 길목에서 잠깐 잠을 청하는, 인적 없는 산기슭은 아이러니하게도 별반 차이가 없다. 산에 사는 토끼와 노숙하는 니콜라의 처지는 마치 서로를 거울처럼 쳐다본다. 열악한 식수와 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가혹한 제도, 교회의 부랑자나 영화 후반부, 주민들의 갈취는 곧 야생의 늑대와 다를 바가 없으니. 생계를 위해 난민을 운송하는 브로커, 하지만 그들 또한 언제든지 난민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는 불안한 입지, 중앙정부의 시선에서 멀어져 예산을 횡령하고 법원과 유착하는 지방자치의 부작용 등이 세르비아 외곽의 시련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집의 붕괴는 제 아무리 아버지, 가장이 집의 대들보라 한들, 이들조차 무너지게 만든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벌목하며 한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리는 니콜라의 노동 현장이 하이앵글로 포착된다. 숲의 기둥으로서 나무, 하나의 집이자 가장으로 무수한 생명을 책임지고 품어내며 꿋꿋이 서 있는 나무, 하지만 빌랴나의 소식이 들려오는 순간에 나무가 무너진다. 국가의 타락이 나무들을 무너지게 만든다. 이후에도 나무의 붕괴와 유사한, 니콜라가 기절하여 쓰러지고 구토하며 휘청거리고, 발에 상처가 나 주저앉는 장면들이 자꾸 겹쳐지고 오버랩된다.      


하지만 아버지란 그런데도 일어서야 하는 존재다. 영화는 공무원에게 뒷돈을 챙기고 형식적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명목상 아버지일 뿐인 계부의 강압적인 태도와 그런 아들을 끌어안아 보호하고 되찾아올 것이라며 위로하는 아버지의 본령을 대비한다. 병원에서 만난 한 노인은 자식들에게 버림당했다. 이에 가족들은 실망만 안긴다고 심정을 털어놓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책임이란 아무 대가 없이 그들을 보듬고 짊어지는 것이다. 길에서 만난 한 떠돌이 개에게 약소한 음식과 온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듬는 것이 의무다. 다만 그렇게 책임의 대상들이 머물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떠돌이 개는 로드킬을 당한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아버지는 책임을 철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책임지기로 한 주검을 안전한 자리에 옮겨 최후까지도 보듬는 것이 아버지의 태도다. 강직한 태도로 관료 및 국가와 맞서지만, 아내와 자식들에겐 포옹으로 따스한 온기와 부드러움을 나눠야 한다. 떠돌이 개에게 집이 되어주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니콜라는 집을 온전하게 보살필 수 없다. 돈도 없고 꾸준히 머무를 수도 없으며, 치안은 안일하다. 니콜라를 둘러싼 환경은 아버지를 줄곧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저 꿋꿋이 잃어버린 물건을 우직하게 되찾아 온다. 물건을 하나하나 되찾아 오는 아버지의 일은 그만큼 진력나는 것, 하지만 끝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끝나지 않는 일의 배경에는 세르비아의 현실이 자리한다. 앞서 언급한 전작들에서처럼 고르보비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개인들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냉대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국민은 세르비아를 위해 헌신하였으나, 국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임금이 미지급된 지방은 낙후된 반면, 수도 베오그라드는 호화로우며 그들만의 배를 불린다. 수도에 위치한 복지부에서 국민이 직접 장관을 만날 기회는 제한된다. 언론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저 가십거리로서 노동자의 비극을 착취한다. 이후 니콜라가 신문,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자 부랴부랴 그를 불러들여 일을 해결하는 척한다. 그마저도 권고였기에 니콜라는 난항에 처한다.      


하지만 차관은 이를 트위터에 게시하여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처럼 너스레를 떨고 제 이익을 챙겼으랴. 베오그라드의 관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이지,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빌랴나 및 니콜라의 호소나, 포착되지 않는 장애인, 참전용사들의 파업이 아니다. 후자를 위해 헌신해야 할 국가는 오직 그들 자신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하며, 자신의 책임을 망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재 얼굴은 사라진다. 모든 것은 서류, 소득수준으로 환원된다. 니콜라처럼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면 서류가 그들을 대신하여, 실제 인류를 판단한다. 지방정부의 민낯을 보자면 그것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또 베오그라드에 가까워질수록 부유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빈자들의 존엄, 노동의 가치를 무참하게 짓밟는다. 또 정부 기관에서 언급하는 바도 가난하면 낳을 수 없고 키울 수도 없다는 정책 방향이다. 실재는 서류에 의해 대체되고, 돈에 의해 존엄과 가족계획이 결정된다. 돈이 없으면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고, 삶도 지속할 수 없으니, 이에 따라 빌랴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랴. 분신자살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요,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자본, 텍스트, 사물이 대신 말하거나 증명하지 않는, 실제 인간의 얼굴을 호소한다. 차가운 사물로 환원되어 그들을 냉대하는 가혹한 태도가 아닌, 그들에게 잠자리와 약소한 먹을 것, 성물을 나눌 수 있는 감정과 히치하이킹을 권유하고 니콜라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 그와 연대하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강조한다. 본인의 길만도 벅찬 니콜라가 떠돌이 개와 동행했던 이유는 설령 본인이 빈자일지라도, 자신보다 더 불행한 빈자를 가엾게 여기는 마땅한 인간성, 사랑이다. 영화 말미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태도 전환에 있다. 그간 완고한 태도를 고집하던 여성 공무원이 그를 돕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것처럼, 약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민을 가져야 만이 그들을 보듬는 집과 국가의 본령을 회복할 수 있을지다.  


니콜라가 거주하는 마을의 시장 중앙에는 유고 시절을 환기하는 거대한 노동자 동상이 자리해 있다. 노동의 가치, 인간의 존엄, 개인의 자유는 자본, 이해관계, 소수의 권력에 의해 종속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영화는 노동자 동상이 모순적일 정도로 위선적인, 노동자들이 제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없는 세르비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인민의 마땅한 권리 대신, 자본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차가운 관료, 제도의 민낯을 꼬집는다. 국가는 니콜라라는 한 노동자가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책임지지 않으며, 이에 따라 동상이 무색하게 노동의 가치, 노동자들의 삶이 서서히 저물어 간다. 더욱이 지방자치에 의해 중앙의 감시를 받지 않는 관료들은 타락한 부르주아의 모습을 띠며, 프롤레타리아의 자녀까지도 갈취한다. 국가도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기는커녕 본인의 이미지와 이익을 위해, 오직 수단으로서 니콜라를 착취하니, 상황은 헛바퀴를 돈다. 하지만 니콜라는 아버지로서 자신의 책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최소한 가족 구성원 네 명이 돌아와서 앉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를 되찾아온다. 이렇게 영화는 니콜라가 걷는 베오그라드의 여정과 집을 재건하는 길을 그저 묵묵하게 뒤따라가며, 국가와 사회가 잃어버린 아버지, 집의 본령을 되새긴다. 또 형이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다른 이의 아들조차도 보듬던 고르보비치 작품 속 아버지의 정신이 본 작품에서도 계승된다. 더불어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 외곽지역의 빈부격차, 불법이 만연하는 실상, 지방자치의 부작용 등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최근 세르비아 영화들의 리얼리즘 기조를 이어간다. 현실적인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잘려 나가지 않은 날 것의 시간, 생생한 니콜라의 '고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러한 진실을 목도하기 위해 세르비아 영화는 여전히 길을 걷는다. 은폐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묵묵한 순례길, 잃어버린 본령을 회복하고, 끊겨버린 가족의 길을 묶기 위해 아버지는 순례를 떠난다. 여전히 세르비아 영화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은폐된 현실과 진실이 자리해있다. 물론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거나 미미하기에 여전히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세르비아가 직면한 과제지만, 그렇게 길들을 추적하는 개개의 여정이 세르비아의 희망을 실현할 맹아가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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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00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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