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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11. 2021

미셸 프랑코, <뉴 오더>

가능한, 하지만 도래하지 말아야할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 <뉴 오더>(New Order) 

- 가능한, 하지만 도래하지 말아야할     

“우리는 주는데, 왜 우리한테는 아무도 안 줄까?” -레프 톨스토이-

위로는 미국과 인접하고, 아래로는 과테말라와 접경한 북미의 멕시코,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경계로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나라다. 위로는 앵글로색슨 문화권과 인접하고, 아래로는 라틴 문화권에 인접해있으며, 한때 농업 강국으로 찬란했지만, 오늘날에는 불안한 치안과 열악한 경제력으로 북쪽으로의 인력 유출이 상당하다. 이에 멕시코의 인구 밀도는 북서부 지역은 매우 낮은 편인 반면, 남동부 지역은 매우 촘촘하게 밀집하여 있다. 북부의 경우 미국과 바로 국경을 맞대 불법 밀입국하려는 이민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치안이 더욱 열악하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비교적 유리된 동남부에 인구가 밀접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랴. 이러한 인구 규모가 곧 경제력도 좌우한다. 멕시코의 북부 지역은 이를 교두보 내지는 ‘역’으로 삼는, 소위 '여행객'들이 많아서 탄탄한 경제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북부지역의 경제력은 실로 열악하다. 반면 이보다는 인구 유출이 덜하고, 오랜 세월 살아온 거주자들이 밀집한 동남부의 경우 사실상 멕시코 경제의 핵심이다. 이렇게 지리적 요건에 따라 지역 간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지만, 멕시코의 복합성은 단순히 지리에만 있지 않다. 바로 복잡한 인구 구성도 한몫을 하는데, 메스티소가 약 60%, 원주민이 약 30%, 백인이 약 10%로 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이들은 각자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백인은 과거에는 식민지의 관리자, 정치인, 식자층이었고, 그들의 부와 명성을 이어받은 작금의 백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백인들은 경제적으로 상류 계급에 위치한다. 그리고 중간에 놓인 메스티소들은 스스로 백인 문화권에 속하길 갈망하고, 경제적으로 더욱 열악한 원주민 공동체를 멸시한다. 이에 따라서 백인-메스티소-원주민 순으로 자연스레 위계가 구획되고, 이에 따른 갈등은 여전히 멕시코가 해결해야 할 거대한 숙제다.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는 거대한 재앙으로 불어 닥칠지 모른다. 이를 방치할 멕시코가 맞닥뜨릴 디스토피아를 미셸 프랑코가 <뉴 오더>라는 신작을 통해 예측한다.     


1979년 멕시코 태생으로 자국과 스페인을 활발히 오가며 작업하는 미셸 프랑코는 독특한 연출과 폭력에 대한 경계, 사회 비판적인 주제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감독이다. 프랑코의 영화는 하나의 숏을 하나의 시퀀스로 사용하는 원 쇼트 원씬(플랑 세캉스)이 활용되며, 카메라의 운동이 대단히 더뎌 회화적, 사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인 테오 앙겔로풀로스나 짐 자무쉬의 초기 카메라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프랑코는 그들의 작품 속에 있던 일련의 탐미적인 색채를 모두 소거하고, 아주 건조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그래서 프랑코의 작품은 마치 실제 풍광을 특정한 구도에서 훔쳐보는 듯한, 현실 속 관찰자가 된 듯한 관객의 위치를 환기한다. 이 같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그가 현실에서 비판하는 바는 일단 폭력이다. <애프터 루시아>처럼 직접적인 폭력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또 사회 구조가 방종함에 개인들의 복수가 범람하는 현장을 지적한다. 또 <애프터 루시아>에서는 성년이 미처 다 되지 않은 청소년을 다루기에 폐쇄적인 학교가 배경인데, 이러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기원을 추적했다. 또 <크로닉>의 경우에는 환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어지는 생명 연장의 폭력성이나, <에이프릴의 딸>에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하는 간접적인 폭력을 탐구했다. 이 같은 폭력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프랑코의 또 다른 관심은 '침묵'이다. <애프터 루시아>의 경우에는 공동체를 위해 침묵하는 피해자의 초상을 담아내며,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의 존엄성이 은닉되는 상황을 고발한다. 그리고 <크로닉>의 경우에는 발화하지 않고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음에 한 개인의 진실이나 내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팀 로스의 걸출한 무표정 연기와 파격적인 극의 결말로 보여줬다.     

오마르 로드리게즈-그레이엄, <Solo los muertos han visto el final de la guerra (Después de Tiepolo)>, 2019
프란츠 마르크, <동물들의 운명>, 1913

<에이프릴의 딸>에서도 얼굴에 띤 표정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의도적인 에이프릴의 침묵과 은닉에 의한 사건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프랑코가 가족에 대해 품는 시선은 다소 적대적이거나 비판적인데, <애프터 루시아>에서 너무나도 친밀하지만 말할 수 없는 존재, <크로닉>에서 환자들에게 가족은 혈육이 아니라 요양보호사요, 그 요양보호사조차 마음 둘 가족이 없다. <에이프릴의 딸>에서도 가족이란 개인의 결핍, 후회를 무마하기 위한 도구이자 착취의 대상이다. 이러한 그의 신작 <뉴 오더>는 그가 멕시코로 향하여 찍은 작품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다소 정적인 그의 기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중후반부에 이러한 색채가 잠시 얼굴을 비출 뿐, 본 작품은 대체로 프랑코의 변주한 연출이 주를 이룬다. 일단 강렬한 도입부부터 살펴보자. 날카로운 짧은 숏들과 푸티지들이 비논리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도입부는 흡사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의 도입부를 연상케 한다. 그 작품처럼 <뉴 오더>의 도입부도 하나의 꿈, 그것도 악몽이리라. 꿈을 꾸는 주체는 누구일까. 깨어나 악몽의 모든 것을 경험할, 도입부에서 잠든 것이 명시된 마리안일까, 또 그 주체는 감독일 수 있지 않을까. 본 작품 자체가 현재 고조되는 멕시코의 불안을 직감한 감독의 악몽이자 예지몽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가장 먼저 비치는 것은 오마르 로드리게즈-그레이엄이라는 화가의 <Solo los muertos han visto el final de la guerra (Después de Tiepolo)>라는 추상표현주의 회화다. 흡사 그것은 1차 대전을 직격탄으로 맞은 청기사파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평온한 현재의 자연이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풍만한 원이라면, 이윽고 전쟁의 습격이 뾰족뾰족하고 날카로운 직선이란 조형으로 환원되어, 원을 찌르고 침략한다. 21세기의 또 다른 전쟁, 20세기로부터 반복될 전쟁이 회화에서 예고된다. 본 회화를 프랑코의 변모한 카메라가 대상에서 슬그머니 멀어지는 줌아웃을 활용하며 비춘다. 하지만 이를 마냥 멀어진다고 여길 수 없다. 그림의 중앙만 클로즈업되던 구도에서, 줌아웃을 통해 그림 전체가 드러난다. 줌아웃은 곧 총체를 확대하여 보여준다. 참상을 외면하거나, 온화한 일부만을 마주하다가, 이윽고 분노가 뒤섞인 전체를 마주하는 줌아웃이다.       


이후 도입부는 주인공 마리안이 벌거벗고 우두커니 서 있는 숏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역겹고도 괴괴한 녹색 물을 비처럼 맞고 있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다. 그녀는 분노에 찬 시민들의 폭동이 발생하는 와중에 이를 외면하고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다. 그녀의 피부색과도 같은 흰색에 녹색의 공포가 엄습해온다. 그녀는 외면하지만 도망칠 순 없다. 백인을 향한 하층민, 유색인종의 고조된 분노는 필연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에 서서히 군인은 다가오고, 시체는 질질 끌리며, 방화와 폐품이 포착된 숏들이 이어진다. 한편 이러한 분노는 필연이지만, 이에 따른 결과가 마냥 ‘참’은 아닌 것 같다. 생명을 틔워내는 이끼의 녹색이 이윽고 붉은색, 그리고 '얼어붙은 불꽃'으로 불리며 병적인 색채로 여겨지는 보라로 뒤바뀐다. 생명은 번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저물어가고, 그 자리에는 죽음을 지칭하는 색채가 자리한다. 영화 타이틀이 뒤집힌 텍스트인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영화는 현실로 깨어난다. 병원이 비친다. 중환자실로 추측되지만, 홀로 몸 가눌 수 없는 환자들은 병상에 누워있지 못한 채, 재빨리 바깥으로 대피해야 한다. 시위대가 들이닥쳤다. 이끼의 색채가 바뀐 것처럼, 병원에 머물러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들이 내쫓겨 죽음으로 내던져진다. 이후 무수한 주검이 포착된다. 백인, 메스티소, 원주민 등 다양한 인종, 계층이 고루 뒤섞여있다. 이러한 주검의 언덕을 상승하는 카메라로 올라가면서 비춘다. 이윽고 그렇게 시체의 언덕을 ‘밟고’ 올라가서 연결되는 숏은 부르주아 일가의 결혼식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일단 연출부터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데로 본 작품은 프랑코의 변주가 눈에 띈다. 도입부에서의 짧은 숏들의 이어짐, 잘려 나간 시간은 이후에도 동일하다. 프랑코는 지독하리만큼 롱테이크를 선호한 감독 중 한 명이었는데, 본 작품에서는 이를 포기한다. 더욱이 그의 고정된 카메라도 능동적인 트래킹으로 뒤바뀌거나, 최소한 머물러있지 않고 틸트, 패닝하며 계속 움직인다.      


이는 프랑코가 다루는 시간이 달라졌기 때문이랴. 그간 프랑코는 과거 내지는 현재를 다루었다. 과거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현재도 이미 주어져서 펼쳐져 있고 거기서 다만 선택할 뿐이다. 이에 프랑코의 카메라는 수동적이어야만 했다. 그저 펼쳐진 것, 완결된 것들을 고정된 카메라로 적절한 구도에서 포착해야만 했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아직 완결되지 않았기에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며, 카메라는 고루 휘젓고 다닐 수 있다. 또 카메라가 수동적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몸소 만들어나갈 수 있다. 이전 작품들이 이미 완결된, 이에 수동적인 현실을 그저 모방하는 듯한 정적인 디렉팅이었다면, 본 작품의 디렉팅은 더 경쾌하고 역동적이다. 미래는 과거, 현재와 달리 제약이 덜하다. 영화의 시간성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잘리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흘러가며, 과거의 시간은 이미 결정되어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프랑코는 앞으로만 흘러가는, 또 시간을 생생히 보존하는 롱테이크를 선호한 것이랴. 하지만 열려있는 미래는 잘려 나갈 수도 있고, 사이사이는 여지가 가득하여 무수한 가능성이 침투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코는 롱테이크 대신, 짧은 숏들을 모으고 이어내며 미래의 여러 가능성, 특히나 비관적인 디스토피아를 구성한다. 이외에 영화는 핸드헬드가 활용된다. 현실 그 자체에 카메라가 적극 개입하지 않고, 그저 관조하듯 비추던 프랑코의 그간 현실적인 연출을 생각하면, 이는 리얼리즘을 강화하는 형식으로 읽을 수 있으랴. 이와 동시에 끓어오르는 하층민들의 분노, 이에 따라 급변할 현실을 마주하는 부르주아의 불안, 사회적인 격동을 가시화하는 연출로도 탁월하다. 그리고 영화는 색채에 주목해야 한다. 본 작품의 주된 색채는 멕시코 국기에 수놓아진 하양, 빨강, 초록에서 기인하는데, 영화 속 분노의 표적인 백인이 하양이라면, 그들을 전복하는 폭동과 그 이후의 체제가 빨강과 초록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하양 위에 분노를 표출하는 빨강과 초록이 흩뿌려진다.      


일단 빨강은 끓어오르는 욕망, 피, 폭력에 상응하는 색채다. 빨강은 분노 그 자체에 잘 어울려 보이지만, 녹색은 언뜻 생각하기에 조화, 생명에 상응하기에 이와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녹색은 뜨겁고 밝은 노랑, 차갑고 어두운 파랑이 합쳐져서 조화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운동감에 있어선 부동 그 자체로 역겹고 둔탁한 색채다. 특히나 독을 품은 양서류, 파충류들의 색채가 초록이곤 하기에, 불길함과 '새로운 체제'를 지시하지만 새로운 미래로 진전하지 못하는 운동성의 부재, 퇴보를 드러내기에 녹색은 탁월하다. 폭동이 본격적으로 포착되기 전, 감독은 마리안의 결혼식을 비추며 분노의 기저인 현 멕시코의 불평등을 날카롭게 그려 넣는다. 결혼식이 포착되기 이전, 바로 이전 숏에서 주검이 포착되었고 병원에서 환자들이 내쫓기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전의 숏으로부터 분리, 단절된 부르주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식을 연다. 절박한 삶과 유리된 비인간적인 사치, 노동계층의 급박한 호소의 외면, 그들의 주검을 딛고 하하 호호 떠드는 태도가 폭동의 원흉이었으랴. 백인들은 결혼하고, 또 하객인 여성 중엔 임산부도 있다. 바깥에서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 백인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 또 남성의 직업 중 눈에 띄는 것은 건축가로 바깥에서는 병원이 무너지는 와중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건물을 새로이 축조할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의복은 호화롭다. 노동의 흔적이 엿보이지 않는다. 모두 결혼식이라는 TPO에 맞춰 예복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백인을 보필하고, 또 급박한 상황 때문에 방문한 롤란도의 옷은 이들과 다르다. 그는 노동복과 일상복, 그리고 예식에 참여하는 의복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에서 의복에 관련한 사회학적 통계처럼, 부르주아는 잉여의 자본과 시간을 통해 TPO에 맞는 옷을 고루 갖추고, 이를 갈아입을 여유가 존재한다. 그들은 예법에 투자할 여유가 있다.      


하지만 노동계층은 다르다. 노동과 사적인 시간은 쉬이 구별되지 않고, 이에 옷을 바꿔 입을 여유가 없다. 그들의 의복은 항상 노동의 흔적이 묻어나고, 이는 파티장으로도 이어진다. 파티장의 한 사람은 옷을 갖춰 입고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롤란도를 비꼰다. 옷에서부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양 계층의 단절이 시사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부르주아지의 파티를 위해 물밑에서 노동한다. 청소, 음식 준비, 명령에 따라 마리안을 찾는 등 부르주아는 도우미, 청소부, 집사로 일하는 원주민, 메스티소 없이는 삶을 이어갈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삶을 이어간 이들이 롤란도의 삶을 위한 호소를 외면한다. 오랜 시간 그들 곁에서 보필했음에도, 수술비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빌려달라는 호소를 박정하게 뿌리친다. 이에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동하고 헌신하지만, 그들은 정작 죽어가는 불공평함에 분노는 커져만 가리. 앞서 영화가 짧은 숏들, 그리고 잘림이 대두된다고 한 것처럼, 이전 작들과 다르게 편집도 눈여겨봐야 한다. 프랑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경계로 숏을 나눈다. 파티장에서 호화로운 연회가 펼쳐지는 숏, 이후 시위대의 녹색 페인트가 싱크대에 흘러나오거나 딸과 화장실에서 용변 보며 대화를 나누는 추한 것들은 다른 숏으로 분절되어, 호화롭고 아름다운 이전 숏과 이어지지 않는다. 녹색 페인트를 끼얹은 손님이 나타나더라도, 이를 재빠르게 은닉하여 마찬가지로 숏은 분리된다. 이렇게 프랑코는 숏의 잘림, 나눔을 통해 전시하는 바와 은닉하는 바를 구분하고, 후자 또한 생생하게 비춘다. 후자는 용변을 보는 와중에 뇌물과 축의금 얘기가 오고가듯, 더러운 돈으로 전자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일구었음을 고발한다. 이러한 편집은 곧 병원에서 이어지지 않는 결혼식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이후 롤란도가 방문해도 출입이 불가하여 숏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또 안의 위선과 바깥의 냉대를 구분하며, 이어지지 않는 부르주아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이러한 숏의 잘림, 이어지지 않는 단절은 곧 영화 속 ‘굳게 닫힌 대문’과도 같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분리, 누군가의 이어지는 삶은 곧 누군가의 이어지지 않는 삶, 그것을 숏과 대문이 구별한다.      


하지만 영화 속 마리안은 이러한 부르주아의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는다.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롤란도의 호소가 우선이다. 그래서 금고를 열어 그에게 돈을 내어주고자 하지만, 이내 곧 사이렌이 울린다. 그에게 돈을 주는 것이 '금기'라는 듯 말이다. 이렇게 사이렌이 울리고, 그에게 돈을 주려고 가족들을 설득하자, 균열이 발생한다. 경쾌하고 수다스럽던, 또 마약을 흡입하며 환락에 빠져있던 파티장이 이내 곧 조용해진다. 현실을 외면하고 휘황한 쾌락을 방해하는 것을 막고자 그토록 롤란도를 숏으로 분리하여 출입을 막고, 그들만을 고립한 것인가. 하지만 영화의 소요는 필연적으로 닥쳐온다. 나뉘었던 계층, 인종이 뒤섞인다. 그 뒤섞임은 침입과 방문으로 구분된다. 영화 속 침입은 폭력이 뒤따른다. 애초에 굳게 걸어 잠긴 대문에 의해, 그들의 침입 자체가 무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시위대의 방문은 하객 및 가족들에게 경악스럽고, 그것 자체로도 충격, 폭력이다. 침입은 상대방이 거부함에도 그들이 억지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이에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이 발생한다. 집안은 약탈당하고, 이후 롤란도의 집에 들이닥친 군인도 마리안을 납치하며, 후반부에 크리스티안과 마르타를 납치범으로 여긴 다니엘은 이들을 경찰에 신고하여 체포한다. 그들의 진실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상대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방문은 다르다. 마리안은 롤란도를 따라가 엘리자를 돕기 위해 그들의 세계, 집에 방문한다. 이에 불안하긴 하지만 해를 입지 않고,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저택 바깥의 현실을 헤아리며 그들에게 속한다. 그리고 롤란도도 그녀의 출입을 허락한다. 침입이 나만을 아는 것이라면, 방문은 상대방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후에는 크리스티안과 마르타가 친밀했고, 또 진정 처지를 연민하고 있는 마리안을 위해 방문한다. 하지만 영화의 방문은 좌절된다. 이유는 영화에서 발생한 반란의 본질이 폭동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폭동과 혁명을 구분한다. 폭동은 물질적인 것을 좇는 탐욕에 따른 반란이요, 이에 반하여 혁명이란 언제나 정신성이 기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위고의 관점에서 본 작품은 오직 폭동만이 포착된다. 파티장에 숨어있던 가사노동자가 섬뜩하게 웃는 표정으로 물건을 약탈하는 것처럼, 시위를 주동한 대다수의 관심은 오직 물질이다. 어떤 웅대한 이상, 미래를 향한 정신적 규범을 사회에 이식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물질을 탐하는 욕망이 폭동을 주도하기 때문에 영화의 도입부에서 병원으로 향하는 약자들은 늘어만 간다. 폭동에 의해 굳이 발생하지 않아도 될 피해자들이 발생함에, 기존의 약자들이 병상을 비워야만 했다. 돈이 없어 엘리자를 잃을 위기에 놓인 롤란도처럼, 궁핍하더라도 삶다운 삶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시위는 시작되었을 테지만, 이전과 다른 정신성, 질서를 이식하지 못함에 여전히 돈이 없으면, 몸값을 지급하지 못하면 죽어야만 한다. 영화 속 폭동은 빈자들의 배후에 군인이 있다. 빅토르라는 장군은 마리안의 결혼식을 은밀히 빠져나가 시위대의 급습을 방조했다. 정신성이 없는 폭동은 마찬가지로 탐욕을 갈구하는 부패한 군부의 개입과 장악을 막지 못한다. 결혼식에 잠입해 있던 한 가사도우미가 약탈하고 성호를 긋는 것처럼, 그들의 폭동은 자신들이 증오했던 백인들의 선교, 착취를 반복한다. 빈자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환자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를 외면하고 결혼식을 치르는 부르주아들과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호소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야욕만 챙기는 폭동 및 그 이후의 체제는 과연 무엇이 다른가. 그렇기에 백인 군인들이 장악하고, 영화의 결말에서도 다시 백인 권력자들이 자리를 가득 채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는 페이드아웃이 활용된다. 페이드아웃에 의해 일반적인 숏의 잘림보다 훨씬 거칠게, 앞과 뒤는 단절된다. 흡사 앞과 뒤가 이어지지 않듯이, 앞에서 포착되었던 일련의 풍요는 절대 연속되지 않고 후에 황폐화로 제시된다.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오직 갈취이기 때문이랴. 그리고 첫 번째 페이드아웃이 사용되기 이전 영화는 롱숏으로 대문 너머의 거리를 비췄다. 여기서 한 시위자가 누군가를 무참히 폭행하고 있었는데 그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 백인일 수도 있지만, 메스티소나 원주민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자신들의 약탈에 협조하지 않는 원주민 마르타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었나, 또 도입부에서 포착된 무수한 주검은 백인만 존재하지 않았다. 물질을 갈구하는 폭동은 곧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으로 간주하리.      


이후 마리안을 위시한 백인들은 수용소에 갇힌다. 그리고 거기서 반군들의 성노예로 전락한다. 현재 멕시코는 '페미니사이드'가 사회문제다. 멕시코의 마초주의와 마약 카르텔로 인한 여성 혐오 범죄를 일반 범죄와 따로 규정한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는 저소득층, 유색인종 여성들이다. 그녀들이 사는 지역이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 다수이기에, 범죄에 손쉽게 노출된다. 이러한 페미니사이드가 수용소에서는 반대로 뒤집힌다. 유색인종 여성이 아닌 백인 여성에게로 말이다. 하지만 그 복수심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악몽을 재생산할 뿐이다. 물질에 따른 의지는 채워지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의 몸, 곧 물질에 따른 의지는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처음에는 분노로 시작했더라도, 이후 그 의지가 충족되고 나면 다른 욕심이 차오른다. 그렇기에 정신으로 물질을 통제해야 한다. 그것이 혁명이다. 하지만 백인의 것을 마냥 갈망하고, 이윽고 서로의 것을 약탈하는 혼란 속에서 혁명은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폭동은 매우 폭력적이다. 이들은 계급, 인종이라는 보편성 안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은 고립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에서 기인한다. 고립 속에서 누구나 다 약탈하고 폭력과 죽음이 만연하면, 그것이 곧 평범한 것, 보편이 된다. 영화도 그렇다. 이들은 오직 집단에 치우쳐있다. 롤란도를 도우려는 마리안이란 개인을 헤아리지 않고, 영화의 후반부엔 마리안을 도우려던 크리스티안과 마르타란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다. 복종과 불복종, 같은 피부색과 다른 피부색을 축도로 삼아 후자를 분리한다. 이들은 이분법적인 진영논리로만 판별할 뿐, 개인 대 개인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불복종의 이유나 반란에의 참여는, 말하기 이전부터 자리하는 편견과 통념이 짓밟는다. 병원에 가려고 불복종하던 롤란도는 오직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사살되고,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온 관광객도 수용소에 붙잡힌다. 이에 계급을 극복하려던 반란은 철저히 계급, 인종의 경계에 더 단단히 고립된다. 이에 새로운 체제 이후 개인의 행동에는 더더욱 활기와 자유가 없다. 계급, 인종의 경계에 얽매여 개인은 명령에 끌려 다니고 맹목적으로 따라해야 한다.      


이에 폭력은 범람하고 보편이 되어, 이윽고 프랑코의 이전 작에서 대두되었던 연출이 전면 등장한다. 움직임이 없는 정적이고 건조한 카메라로 포착되는 것은 이에 상응하는 주검들, 찬란했던 대도시가 폐허로 전락한 풍경, 죽음이 곧 보편이 되어 롤란도의 사후에도 정신성 없이 그저 맹목적인 삶을 이어나가는 즉물적 초상이다. 어두침침하여 둔탁한 롤란도의 집안, 마리안의 부재로 희멀겋게 식어버려 생명력이 부재하는 텅 빈 부르주아의 저택에는 운동성이 없다. 이렇게 프랑코는 변화할 수 있는 미래가 다시금 과거에 붙잡혔다는 것을, 자신의 정적이고도 수동적인 연출을 다시 불러오며 감각으로 보여준다. 물질만을 좇는 부르주아에 분노하여, 마찬가지로 물질만을 좇는 폭동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녹색의 색채론처럼 부동하고, 여기에 폭력의 징후인 빨강이 결합하여, 삶 이전으로 세상을 되돌린다. 한때 이룩했던 계엄령 없는 자유로운 삶과 이동, 교류는 모두 불발된다. 다시금 전체주의적 통제와 무수한 CCTV를 동원한 삼엄한 감시가 모두를 옥죈다. 혁명은 정신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정신성은 마냥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표면으로 판단하는 반군들은 결코 혁명을 논할 수 없다. 영화 속 혁명의 가능성은 마리안, 크리스티안, 마르타에게서 목도할 수 있다. 그들은 대화한다. 그리고 진영논리에 파묻혀 보편이 된 악에 마냥 따르지 않는다. 상대의 정신을 소통으로 헤아리고, 이에 따라 결혼식이나 폭동에 얽매이지 않는 능동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을 내린다. 초반부에 마리안은 롤란드의 집으로, 크리스티안과 마르타는 마리안의 집으로 향한다. 오히려 정신성을 유지하며 민족, 계급을 초월하여 서로 교류하고, 이에 따라 분노의 기저가 된 불평등은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프롤레타리아에게 베풀고자 하는 부르주아 마리안, 계층이 역전된 상황에서 반대편을 위하는 크리스티안과 마르타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불씨는 확장되지 않는다. 크리스티안과 마르타는 반군이 책임에서 무관할 수 있게끔 납치 누명이 씌워지고, 마리안 또한 반군이 크리스티안과 마르타에게 죄를 전가하고자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개인 대 개인이 아닌, 보편과 통념,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한다.      


개인의 정신이 좌절하고, 또 개인을 보편, 집단이 대체하는 구조에서 혁명은, 그리고 생명은 싹틀 수 없으리. 프랑코는 이렇게 점점 더 물질적 불평등이 극심해져 가는 멕시코의 현 세태에 기인한 잔혹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이는 <헬리>나 <야생지대> 등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멕시코 영화로 유명한 아마트 에스칼란테를 연상케도 하고, 또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천국의 전쟁>에서 나타난 과감함과 적나라함을 오버랩시킨다. 이런 점에서 미셸 프랑코는 멕시코에 만연한 죽음, 부패, 불법을 외면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카메라로 담아내는 동시대 멕시코 시네아스트의 물결을 이어간 셈이다. 또 <애프터 루시아>나 <크로닉>의 결말에서의 충격은 다만 롱숏으로 포착되어 충격이 경감되었을 뿐, 우리에게 경악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항상 폭력, 충격을 다소 정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미래를 다루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변모한 연출에서, 프랑코가 폭력을 비추는 시선이 더욱 눈에 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연출로 프랑코는 판사와 기업인들이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법경유착이 발생하고, 부의 불평등이 극심해져가는 멕시코의 현재를 결혼식 시퀀스를 통해 신랄하게 까발린다. 숏의 분절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 비추며, 상류층의 '더러운 돈'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가 혁명이 아니라 폭동으로 흘러갈, 아직 도래하지 않은 우려되는 미래 또한 염려한다. 이러한 우려하는 미래는 마냥 허무맹랑하지 않다. 도입부에서 등장한 회화가 20세기 모더니즘을 연상케 하는 것처럼, 역사를 관통한다. 수용소의 모습은 흡사 홀로코스트를, 시위대의 과격함과 불평등이란 원인, 새로운 체제 이후 평등과 공정을 반복하는 구호는 러시아 내전과 사회주의 혁명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던 나치들 다수는 일반 독일 시민들, 특히 유대인에게 악감정을 품은 하층민도 껴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은 열악한 러시아의 경제력에 따라 사회주의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인민들이 다수였다. 이들은 약자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잔혹하고 악랄할 수 있었다. 정신을 잃고 물질에, 진영논리에 매몰됨에 따라 말이다. 이렇게 프랑코는 멕시코의 현재, 그리고 역사에 기인한 멕시코의 미래를 우려한다. 계급의 해체가 아닌 단순한 전복과 재생산은 영화의 뒤집힌 텍스트처럼 과거로의 퇴보가 뻔하니, 프랑코가 그려내는 미래는 반드시 기우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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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11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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