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1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Nov 18. 2021

웨스 앤더슨, <프렌치 디스패치>

저널리즘과 예술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 

- 저널리즘과 예술     

“진정한 예술가란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나는 이것을 분명하게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다른 무언가가 이것과 아무리 유사할 수 있다 해도, 그 다른 무언가를 분명하게 하는 일은 예술가에게 쓸모없다. 예술가는 특정 부류의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어떤 것을 원한다.” 

-로빈 조지 콜링우드-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추상'이란 개념을 주장한다. 이는 미술의 추상과 유사하다. 미술에서 추상회화는 회화의 요소인 점, 선, 면, 색을 재현의 대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오직 ‘조형 원리’ 그것 자체에 주목하게끔 만든다. 미술가가 그릴 대상에 종속되고, 이를 위해 봉사하던 조형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형 원리 그 자체가 추상하여 대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이윽고 주인공이 된다. 알튀세르의 추상 개념도 이와 유사하다. 철학에서 논의하는 무수한 대상, 사물들은 이해관계가 과적되어 있다. 그것 자체로 여겨지지 않고, 무수한 이해관계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규정되고, 진리와 본령은 오독된다. 이에 알튀세르는 연구의 대상을 추상으로 분리할 것을 명한다. 현실의 한 부분을 나머지로부터 분리하는 것, 그것이 알튀세르의 추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은 언제나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에 현실에서 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추상은 구체에 잠식되어선 안 되지만, 추상화된 것이 구체로 돌아가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추상으로 발굴한 것이 대상의 진리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의 정신이 저널리즘에 필요하리. 하나의 진실에는 마찬가지로 무수한 이해관계와 사정이 헤아려진다. 이에 진실은 은닉되고, 왜곡되고, 심지어 거짓이 진실을 대체한다.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패한 저널리스트의 사사로운 이권을 위해서, 이에 종속된 거짓이 진실의 자리를 꿰찬다. 그래서 진정 진실을 염원한다면 무수한 이해관계에서 달아나야 하리. 진실 외의 모든 것은 고려하지 않고, 기자 또한 무수한 이해관계로부터 자신을 추상으로 분리해야 할지다. 그래야만 진실을 파헤칠 수 있나니. 이를 언급한 이유는 웨스 앤더슨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가 저널리즘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잡지나 신문은 때때로 진실에 영향을 주는 이해관계, 그리고 진실을 접하는 독자의 사정을 헤아리며 눈치 보게 되는데, 과연 앤더슨의 신작에서는 타협이 나타날까, 아니면 추상의 여정을 걸어갈까.     


1969년 휴스턴 태생의 웨스 앤더슨은 동시대에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미장센을 펼치는 미국의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는 <문라이즈 킹덤>처럼 키덜트적인 관심, 팝아트적인 기법에서부터, <판타스틱 Mr. 폭스>처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대한 탐구, 특히 <개들의 섬>에서는 일본 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대체로 유년기의 사랑, 어린 시절의 꿈 등 이제는 마냥 달콤하게만 여겨지는 과거의 노스텔지어로 빠져든다. 사운드트랙에서 그가 어렸을 적 즐겨 들은 20세기의 팝을 배경음악으로 즐겨 사용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마냥 유년기의 달콤한 향수에만 젖어 들지는 않는데, 필연적으로 앤더슨의 작품에서는 이별, 한 시대의 종언, 죽음 등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랑하고 키덜트적인 분위기 때문에 퇴색되는 것이지, 그가 다루는 과거 자체는 대단히 무거운 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에 대한 향수, 비교적 여러 민족이 융화되었던 이중제국이 해체되자 도래하는 세계대전의 전운을 담아내었다. 파시즘의 광기가 예고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주제 의식은 <개들의 섬>에서 일본의 정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층 심오해져서 전개되니, 그는 형식만큼이나 마냥 명랑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심미성은 아름다움의 이면을 폭로하거나, 유치함이나 명랑함이 언제나 즐거움에 상응하지 않는, 간극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형식은 가히 르네상스적이라 할법하다.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으론 폐쇄성, 통일성이 손꼽히곤 하는데, 프레임 내에 견고하게 짜인 배치와 구도는 그것 너머의 여지를 상상할 수 없게끔 완전무결하게 통제, 즉 폐쇄된다. 조명이나 색채 또한 특정 인물에게 하이라이트를 가하지 않고, 그가 프레임 내에 담아내는 그 모든 대상이 균일한 조명을 받곤 하기에 르네상스의 통일성이라 말할법하다.     


더욱이 평면적인 구도로 이미지의 안정감을 추구하며 극적이고 역동적인 감각과는 거리가 먼 미장센, 이렇게 구축된 이미지 그 자체에만 몰입하게끔 카메라 무빙은 틸트나 패닝 등으로 최소화된다는 점도 르네상스적이고 회화적인 그의 특징을 설명하는 연출 중 하나이다. 이러한 그가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신작으로 돌아온다. 가상의 도시 블라제를 배경으로 하는 본 작품은 20세기 중반의 모더니즘 운동과 68혁명을 환유하며 당대의 프랑스를 환기함과 동시에, 저널리즘과 예술의 정신을 사유하는데, 과연 그의 정치성과 형식은 어떻게 승화되고 있을까. 일단 본 작품의 일반적인 연출은 1.37:1의 비교적 좁은 화면비 내에 대상을 중앙에 놓곤 한다. 하나의 대상을 집중하기에 최적화된 화면비와 구도, 영화는 그 대상을 대체로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한다. 설령 움직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줌인이나 대상의 조형성을 따라가는 달리 등을 활용하여, 앤더슨이 정교하게 구축해놓은 미장센 그 자체에 주목을 요구한다. 물론 인물이 항상 정중앙에 놓이지만은 않고, 헤드룸이 강조되거나, 모서리 구도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앤더슨은 여전히 대상을 주목한다. 소외된 인간의 포착, 이와 동시에 화면비를 꽉 채운 건물, 풍경, 색채, 조형을 말이다. 어느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다. 저널리즘을 지향하는 본 작품에서 앤더슨은 쨍한 색감과 부드러운 조형성, 그것 자체의 진실을 우리에게 매개한다. 이는 일상에서 떼어낸 조형 원리 그것 자체에의 주목을 통해서, 또 일반적인 매체를 감상할 때는 너무도 익숙하여 주목하지 못하는 감각을, 영화가 그 매체를 따라 하며 대상의 속성을 우리에게 환기한다. 정지된 사진과 스톱모션, 영화에서 만화로 뒤바뀌며 환기되는 허구성, 능동적인 카메라 무빙, 자유분방한 표현 등이 말이다. 이렇듯 우리의 익숙한 통념으로부터 대상을 떼어내어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지만 잊고 살아간 감각을 환기·매개한다. 앤더슨은 이러한 고유의 세계에 주목을 요구하게끔 배우들의 디렉팅도 건조하고 뻣뻣하게 요구한다. 카우리스마키의 디렉팅이 핀란드인의 무관심함과 건조함, 브레송이 자본주의에 의한 탈인간화, 란티모스가 구조에 무기력하게 기계화되는 수동적인 초상을 보여준 것이라면, 앤더슨은 배우가 아닌 배역, 대사, 시각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디렉팅을 지향하듯 보인다.     


이러한 연출 하에 앤더슨이 가장 먼저 환기하는 대상은 바로 '과거'다. 화면비와 구도, 운동성 외에 보편적인 연출은 35mm 필름을 활용한 자글거리고 투박한 질감과 색채가 사라진 차가운 흑백이다. 이를 통해 앤더슨이 주목하는, 저널리스트가 기사를 통해 동시대로 불러오고자 하는 과거를 형식으로 재현한다. 하지만 때때로 과거보다 더욱 중요한 대상에 주목할 때가 있다. 1부에서는 ‘추상회화’, 3부에서는 ‘음식’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들의 감각성을 위해 영화는 유채색을 회복하고, 또 1.37:1의 화면비를 2.39:1로 확장하기도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도 화면비 변화는 활용된 바 있지만 거대한 시대가 아닌, 시대 내에 놓인 개별의 대상의 조형을 위해 화면비를 변화한다는 점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이 연상된다. 이렇듯 앤더슨의 탐미주의는 그의 개인적 취향을 위해서만 봉사하지 않는다. 대상의 속성을 위해서도 앤더슨의 탐미주의는 절륜하게 활용되고 있다. 본 작품의 구성은 액자 구조를 취한다.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잡지의 이야기가 있고, 그 내부에 비교적 커다란 이야기 3부, 이에 비한다면 작은 이야기 하나가 담겨 있다. 일단 프렌치 디스패치의 이야기는 편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편집장이 포착되고, 잡지를 구성하는 무수한 부서, 기사들이 연이어 드러난다. 영화의 도입부, 조리실에서 요리를 배달하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처럼, 그 무수한 총체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로 집대성한 것이 프렌치 디스패치다. 편집장은 이러한 잡지를 구성하는데 철칙이 있다. 바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편집장이 죽이지 말라는 것은 개개 필자들의 글, 스타일과 표현이다. 그래서 영화는 대체로 개개의 필자들이 하나의 숏에 놓여있기가 부지기수다. 그 누구와도 절충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필연적으로 하나의 숏에 한 인물만 놓였던 구성은 흐트러진다. 하나의 숏에 여러 인물이 함께 공존하고, 또 침투한다. 이는 한 명의 필진, 하나의 기사가 필연적으로 다른 타인, 잡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타인과 부대끼는 상황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와 다른 기사, 그리고 잡지라는 나를 위해서 그 대상을 죽이는 게 아니다. 바로 '상호보완'이다.      


첫 번째 작은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블라제를 재현하는 에세이, 편집장은 너무 어둡지 않느냐며, 추잡하고 더러운 것만 묘사되어있지 않느냐며 불안해한다. 하지만 작가는 고칠 생각이 없다. 기사를 작성할 때 사용했던 자전거 바퀴를 여전히 고치고,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결국에는 그의 의도대로 잡지에 실리게 되리. 다만 가능한 것은 대상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의 교정, 첨언이다. 1부에서는 구속과 자유라는 서로가 갖지 못한 요소를 열망하는 모세와 시몬이 서로를 충족하고 보완한다. 2부에서는 학생 운동의 리더 제프렐리의 선언문을 노련한 작가 루신다가 오타 등을 교정해준다. 선언문의 내용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3부에서 편집장이 로벅에게 개입하는 것은 단지 중복되는 문단, 문장일 뿐이다. 즉 내겐 너무 익숙하여 알아채지 못할 결함,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능력을 상대방에게 빌리는 상호보완을 강조한다. 이는 상대방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개성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영화의 마지막에 사망한 편집장의 삶을 아주 다양한 각자의 시선에서 더욱 풍성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편집장이, 그리고 타인이 쉽게 다른 기사를 훼손할 수 없는 것은 잡지에 싣는 글들이 저널임과 더불어 예술이기에, 이들이 갖는 재현과 표현의 역할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재현이다. 첫 번째 작은 이야기는 블리제를 글로 모방하는 것이다. 쥐, 고양이, 실뱀장어들이 들끓고, 온갖 불법 행위가 곳곳에서 발생하며, 죽음이 만연한 암울한 도시 블라제, 하지만 이를 인위적으로 '꽃'이 만연한 것으로 묘사한다면 그 기사가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3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요리사 네스카페르가 맹독을 맛보았는데 그것이 난생처음 접해보는 감각이라 매혹되었다고 말했다. 이를 기사에 첨부하는 게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네스카페르를 재현하는 기사라면 그것을 최소한 왜곡해선 안 되리. 즉 대상을 재현하는, 대상의 진실을 매개하고자 하는 기사들은 주관에 의해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 이러한 기사는 언제나 재현, 즉 현실에 충실함과 동시에, 기자들은 작가로서 창작하며 '표현'의 성향을 갖기도 한다.      


표현은 화가와 뮤즈가 등장하는 1부에서 도드라진다. 모세는 예술가요, 교도관 시몬은 그의 뮤즈·모델이다. 모세는 추상화가다. 그는 1950년대에 모더니즘의 마지막 황금기를 꽃피웠던 액션 페인팅을 오마주한 화파에 속한다. 하지만 모세는 허구의 추상을 논하지 않는다. 그의 표현, 추상은 언제나 정교한 재현, 현실로부터 시작한다. 그 대상이 되는 시몬을 예술가의 자의대로 포즈를 취하게 하고, 또 물감을 묻히려 하지만 시몬은 아주 당당하게 이를 제지한다. 즉 표현은 예술가의 자의식과 생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재현으로부터 출발하기에 현실에 충실하고 이에 빚이 있다. 현실인 시몬을 제 마음대로 왜곡할 수 없다. 카다지오와 거래할 때 모세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그 회화에 공이 있는 시몬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렇다. 즉 표현이라 할지라도 예술가의 진실과 그가 반영한 현실의 진실, 양자 모두가 반영되어 있기에 쉽게 뒤바꿔선 안 된다. 이렇듯 표현이든 재현이든 예술은 진실을 매개한다. 1부에서 모세가 그림을 그리는 장소는 교도소요, 대상은 광인, 비극, 빈자들이요, 재료는 찌꺼기와 쓰레기다. 그나마 모세가 그리던 대상이 시몬으로 뒤바뀌면서 '사랑'이란 아름다움이 유일하게 첨가된다. 하지만 대체로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은 희소하고, 대상들은 추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진실이기 때문에 모세는 언제나 이를 논한다. 카다지오가 모세에게 요구한 바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제 계획과 달리 죄수들이 침입하는 것처럼, 이를 강의하는 베렌슨의 프레젠테이션에서 계획하지 않은 사진이 등장하는 것처럼, 세상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불완전하며 오히려 추하다. 모세는 이를 옮겨 담는다. 묘사되는 시몬 또한 모세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나 스스로 취하지 않은 포즈가 묘사되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모세의 회화는 추상일 수밖에 없으랴. 모세의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 대답 없는 시몬, 이에 따라 명확하지 않고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모호하고 불완전한 감정의 형태로, 흡사 등 돌리고 외면하는 시몬처럼 답하지 않는 형식으로 그려진다. 카다지오는 이러한 모세의 그림을 보기 위해 무수한 뇌물을 지불하며 교도소에 들어간다. 즉 예술을 위해 무수한 희생이 뒤따른 것이다. 그렇게 현실을 무수하게 희생해야 한다면, 예술은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진실을 담아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높게 숭상되는 저널리즘의 정신, 이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 진실을 세밀히 좇아가는 정신을 잃어선 안 되리. 2부의 시작은 혁명의 단초가 된 남녀 기숙사 출입 여부를 둔 학생들의 갈등이다. 이는 너무 사소해 보인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이후 전개된 혁명은 너무 시시해 보인다. 하지만 혁명의 진실은 이보다 더욱더 긴 역사의 진실을 내재하고 있다. 루신다는 혁명에 연관한 모든 진실을 파헤치는 타임라인을 기사로 풀어낸다. 3부 또한 마찬가지다. ‘경찰 요리’를 취재하는 로벅 또한 그 과정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지도’를 따라가지만 너무도 복잡하여 경찰 요리에만 이를 수 없다. 하지만 그 복잡한 지도를 거치는 동안 로벅은 경찰 요리의 기원을 나레이션으로 설명한다. 그 길고 긴 역사를 파헤치고, 여러 사건을 우회해야지만 진정 경찰 요리의 진실을 목도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하나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그물망을 파헤쳐 지도를 그려내기에 예술과 저널은 숭고하다. 이렇게 예술과 저널이 진실을 담는다면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는 특히 2부의 정치와 연관된다. 루신다는 독신주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눈물이 흐른다. 최루탄 때문인지, 독신주의를 주장한 것과 다르게 외로워서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이후 외롭다는 것이 탄로 난다. 또 혁명을 주도하는 학생들은 난항에 처한다. 복무하지 않는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의 강제 입영이 제국주의의 반복이라면서 비판한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징집되어 끌려가는 남학생들은 의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즉 제국주의를 반성하고자 하는 그들의 이념과 실제 현실은 부딪힌다. 남학생 중 하나가 그렇게 끌려가서 복무를 시작한다. 다른 전우들과 전역 이후의 삶을 논의하며 밤을 지새운다. 하지만 한 전우가 투신자살한다. 많은 전우가 바라는 미래는 마냥 달콤했다. 하지만 자살한 전우는 그것이 현실에 도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이처럼 2부는 정치, 이념, 신념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현실과 일치하는가가 주된 화두다. 그런 점에서 남과 여가 서로의 기숙사 찬반을 놓고 다투는 시위는 사소해 보이지만, 현실과 맞닿아있고 적용되어 뒤바뀔 수 있기에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타당한 안건이다. 실현되지 않을 것이 허무하여 초라하게 낙하하지 않을 정치다.      


내 몸을 과소평가한 독신주의,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제국주의 비판에 비한다면, 대학생들의 토론과 그 결과는 바로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이후 혁명에서도 제피렐리, 루신다, 줄리엣이 삼각관계를 이루며 질투, 애욕, 사랑으로 엮이는 것처럼, 정치의 동기는 매우 사소해보이고 하찮아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 놓인 내 몸이 하고 싶은 것, 규제되어선 안 되는 것, 이에 내 삶을 밀접히 좌우하는 것을 뒤바꾸는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3부의 음식도 그렇다. 범죄자를 추적하다가 배고파서 음식에 집착하는 것이 동물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욕구를 무시했다간 경찰은 그 어떠한 것도 수행할 수 없다. 이후에도 납치범들이 네스카페르의 음식에 매혹되고 무장 해제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고 체감하는 삶을 외면할 수 없다. 혁명의 선언문도 하나의 예술이자 저널일까, 음식도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예술은 1부의 모세처럼 그것의 창조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낸다. 이러한 미래를 그려냄에 있어, 그리고 현재를 비춤에 있어 사소하고 익숙한 것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러한 사소한 질투, 감각에 유혹당하는 몸이 곧 인류의 진실이기에, 표현된 예술은 사소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진실을 강조하는 웨스 앤더슨은 자신의 표현으로 가상의 이름들을 사용하긴 하지만, 분명 『뉴요커』, 액션페인팅, 68혁명, 제임스 볼드윈을 관통하고 있다. 이에 앤더슨의 연출이 강조되고 이름이 뒤바뀌기야 했지만 비교적 대상을 강조하는 극이 본 작품인데, 그 와중에도 앤더슨의 저널, 예술에 대한 탐구, 해석, 표현, 사상을 뒤섞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색채 중에서 여전히 도드라지는 요소가 '죽음'이라 할법하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시작 자체가 편집장의 죽음을 기점으로 한 '회고'요, 블라제를 재현하면서도 도드라지는 것이 죽음이다. 이후에도 1부에서는 전기의자에서 처형되고 싶어 하는 모세, 이후 그것을 경험하더니 다시 삶의 의욕이 불타오른 모세가 강조되고, 2부에서는 제피렐리의 죽음, 3부에서는 맹독을 먹고 겨우 살아난 네스카페르가 강조되니, 모든 이야기에 죽음이 깔려있다. 저널과 예술은 이렇게 죽어서 사라져버릴 필멸의 진실을 최소한 반영구적으로 붙잡는다는 것에 유의미할까. 영화는 마지막까지도 죽은 편집장을 기사로 영원히 보존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정신을 예찬한다.      


그리고 앤더슨의 감각 자체가 우리의 일상을 '죽이면서' 발생한다. 앤더슨의 세계는 감상자가 살아가는 마냥 유미적이지 않고, 또 완전하지도 않은, 불완전하고 추한 세계와 전혀 다르다. 이러한 세계를 죽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감각을 느낀다. 감각이란 우리의 몸에 전해지는 힘, 고통, 폭력이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무감해진 자극은 결코 우리에게 감각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에게 감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 지금까지 감당해보지 못한 힘을 경험함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에 근접하여 우리의 감각을, 이러한 몸의 떨림과 느낌을 통해 나의 삶을 환기한다. 즉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란, 특히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란 필연적으로 죽음과 그것에 필적한 힘이 필요하다. 앤더슨의 세계가 명랑하게 보이더라도 죽음은 언제나 만연하고 있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도 잘려 나간 육체가 적나라하게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강조되기도 하였고, <개들의 섬>에서도 죽음은 곳곳에 가득했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또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리. 그래서 앤더슨은 우리의 현실과 일상을 죽인 세계를 구축하여 감각을 전달하고, 또 언제나 죽음을 곳곳에 배치하여 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삶, 감각을 환기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자기 생각을 환기함과 동시에, 저널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 또 공통된 요소를 비추며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모색한다. 표현과 추상으로 변형되더라도 진실은 유지되어야 하는 예술과 저널, 이에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듯 보이더라도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 예술이란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의 추억 가득한 음식'과 같아야 하는 것… 다만 앤더슨의 반복되는 형식이 일상이 되어버린 듯, 이전 작만큼의 감흥은 없다. 물론 그는 분명 변주를 시도했다. 2부의 핸드헬드, 죽음에 이끌리는 제피렐리를 80~90년대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휘황하고도 복고적인 조명으로 포착하는 것, 3부의 리버스숏, 애니메이션 등이 일반적인 앤더슨의 연출과 다른 부분이다. 이는 혁명, 그리고 인터뷰란 대상에 집중한 결과로 유추되지만, 다소 따분하고 안일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관습적인 다른 영화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흥미로운 것은 죽음에 이끌리는 제리펠리의 아찔함이 조명으로 형식화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3부에서 네스카페르가 느낀 맹독의 감각을 단순히 텍스트로만 언급하지 않고 연출로 가시화하며, 대상과 자신의 상상력을 뒤섞는 변주를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감상일: 211118 cgv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미셸 프랑코, <뉴 오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