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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19. 2021

제인 캠피온, <파워 오브 도그>

구속의 번영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 

- 구속의 번영     

“내가 복수할까 두렵구나, 무엇을,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오, 아니야! 통탄할지고! 내가 나를 이리도 혐오하는구나. 내가 저지른 혐오스러운 짓들 때문이지. 나는 악한이다. 그런데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리석은 자여, 자신을 좋게 말하다니. 어리석은 자여, 아첨하지 말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구 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 아래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남성성은 휴머니티의 요건인 이성과 용감함, 절제에 상응했다면, 여성성은 감성과 무절제, 변덕스러움으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더욱이 남성은 여성성을 일부 지니고 배울 수도 있었으나, 여성은 남성에 근접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 중년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소년들은 대단히 이례적으로 남성임에도 수동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데, 이 같은 시절을 겪으며 여성과 혼인한 이후 가정을 더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입증받아 민주적 시민으로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에게 기회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나마 고대 그리스의 여성성이 이후 도래할 기독교 시기의 여성상보다는 나았을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혼인은 분명 자연에서 비롯한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개인의 건강과 지혜에 따른 개별성의 차이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남성에게 배려받을 수 있는 여지도 충분했다. 물론 남성에게 소유된 존재로서 여성의 지위는 이후 도래할 시기와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기독교 시기의 비극은 여성성이 더욱 격하되었다는 바다. 조물주는 남성의 갈비뼈에서 여성을 떼어낸다. 그래서 남성은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 반면 여성은 남편의 소관이 아닌,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한다. 여성의 수동성을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본성이 원하는 바, 지위와 부합하는 바로 여겼던 고대 그리스의 여성관은 양반이었다. 또 기독교 도덕에서 기인한 결혼관은 언제나 전체 체계의 틀 안에서 발생하여 '적절함'은 개별에서 기인하지 않고, 언제나 보편, 일반적인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 일말이라도 허용되었을 개별적 여성의 가능성이 전면 삭제된다. 서구에서 남성은 마냥 전능해졌고, 여성은 마냥 열등해졌다.     


그리고 여성성을 일부 지닐 수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남성도 사라진다. 기독교 이후의 남성은 오직 남성성만을 띠어야만 했다. 이에 ‘여성’과 ‘여성성을 내포한 남성’들 모두 배격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이데올로기가 곧 마초와 호모포비아의 기원이랴. 이들 모두는 기독교 이후의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 신작을 스크린에 수놓는 제인 캠피온은 이 같은 구속당하는 여성, 그리고 내면의 여성성을 숨긴 채 남성성을 우악스럽게 연기하는 마초의 진실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1954년 웰링턴 출신의 제인 캠피온은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이다. 그녀는 칸 영화제에서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으로도 유명하며, 뉴질랜드에만 머무르지 않고, 호주, 영국, 미국 등 영미권을 종횡무진으로 활보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의 특징으론 남성 감독들이 반영하지 못하거나, 등한시하거나, 외면하곤 한 여성의 시각을 스크린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역사 속 여성, 그리고 20세기의 여성이란 '갇힌 여성'이다. <스위티>에서 찻잔 속의 점괘에 갇혀 동그란 운명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여성, <피아노>에서 여성은 남성 중심적 경제원리의 화폐로 전락하여 강제혼인에 처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여인의 초상>에서도 여성은 수동적 위치로 뒤에서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손아귀를 뻗친다. 당대의 순진한 여성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한편 캠피온은 이에 마냥 순응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을 그려낸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광인’이 묘사된다. <스위티>에서 수동적인 케이의 안티테제로 등장하는 돈이 캠피온 작품에 등장하는 광인의 시작으로, 이후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은 <내 책상 위의 천사>의 자넷, 자유분방한 성미를 가진 <홀리 스모크>의 루스로 이어진다. 이들은 언제나 여성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보편을 거부한다. 이들의 욕망, 주체성은 매우 자유분방하며, 때로 이들은 매우 자기 파괴적으로 보인다. <스위티>에서 돈은 자신을 구속하는 요구에 저항하고자 자해를 일삼고, <내 책상 위의 천사>에서 자넷은 남성 작가들과 달리 후폭풍이 존재하는 여성의 욕망에서 해방되고자 낙태를 선택하며, <피아노>의 주인공 에이다는 좌절된 주체성에 의해 파도로 뛰어들기도 하니 말이다.      


그녀들이 거칠고 폭력적으로 저항하고 벗어던지려 하는 것은 남성 권력의 폭정에서 비롯한다. <피아노>에서 에이다는 남성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거래에 의해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고, 그녀의 몸은 그들에 의해 절단될 수 있다. <여인의 초상>에서도 여성은 주체적이고도 동등하게 남성과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지갑'과도 같아서, 남성들은 여성을 흡사 그들의 지갑처럼 마음대로 꺼내 사용한다. <홀리 스모크>에서 남성은 광인인 여성을 치료하는 퇴마사로 등장하고 그녀들의 종교를 이단, 사이비로 규정하지만, 이는 다만 지배권을 보편적인 남성 권력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기만이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피아노>나 <브라이트 스타>에서의 비교적 동등한 남/녀의 권리, 위치를 강조하기도 하고, <인 더 컷>에서 숨기지 않는 여성의 솔직한 욕망, <홀리 스모크>에서 남성이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들어, 서로 이해하는 상호보완적 존재로 나아간 젠더를 그려내기도 한다. 캠피온은 그간 남성성의 특권인 주체성을 여성에게 되돌려놓고, 여성성의 특권인 부드러움을 남성에게도 되돌려놓는다. 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브라이트 스타>와 같은 작품에서 특히나 도드라지는 여성의 주체성이요, 남성에게는 부성이다. 캠피온은 그간 '여성의 일'로 치부되었던 것들에 각별한 주목을 표하는데, <스위티>나 <홀리 스모크>에선 다소 뒤틀려있긴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고 가족 구성원들을 구하러 미지의 나라로까지 여행을 떠나는 강인한 모성을 긍정한다. 이러한 이타심, 부드러움을 회복한 남성이 <피아노>의 조지나 <브라이트 스타>의 키츠다. 이러한 제인 캠피온의 연출은 현란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위티>에서의 아카이빙 푸티지나 꿈과 의식을 오가는 자유분방한 미장센, <홀리 스모크>에서 힌두교의 정신성을 구현한 미장센, <피아노>의 섬세한 풍경화와 초상화가 그렇다. 남성성을 찬미하고 여성성을 전면 배격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그물처럼 엮인 관계망과 심리를 탐구하는 본 작품에서, 과연 그녀의 섬세한 터치는 무엇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을까.      


일단 20세기를 풍미했던 서부극의 미장센을 이어오기 위해서 캠피온은 2.39:1의 화면비를 선택하고, 본 광활한 화면비에 몬타나의 풍경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가득 담아낸다. <피아노>에서도 도드라진 캠피온의 익스트림 롱숏은 본 작품에서도 여전하여, 장대한 몬타나의 풍경은 우리에게 숭고를 불러온다. 본 작품의 익스트림 롱숏이나 드론숏은 거대 자본이 동원된 20세기의 서부극의 규모와 비견해도 밀리지 않는다. 영화의 기조는 <스위티>나 <홀리 스모크>처럼 키치적인 그녀의 색채가 흠뻑 묻어나는 작품은 아니다. <피아노>나 <여인의 초상>, <브라이트 스타> 등 비교적 진중한 문법을 이어가는 작품이다. 기존 확립되어있던 문법을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성 중심적 시선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이를 전복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본 작품은 풍경 자체가 수려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단순한 황홀감, 숭고 외에도 우리는 캠피온의 섬세한 미적 감각을 곳곳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일단 본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빛이다. 농장주이자 마을 카우보이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필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다. 도입부에서 그가 걸어 올라가는 계단과 침실에도, 이후 밤에 잠을 청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머리맡엔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는다. 또 카우보이들의 행렬에서도 하늘에서는 황홀한 자연광이 흠뻑 쏟아졌으며, 로즈가 처음 조지의 집에 진입한 당시에도 빛은 필의 공간에만 비치고 있었다. 이렇게 언제나 주목받는 것, 드러나야 할 것은 필과 같은 남성성, 가부장적인 원리이랴. 반면 여성이 가는 곳에 이러한 충만한 빛을 목도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녀들은 빛에서 멀어져 그늘로 향하거나, 등지고 있진 않던가. 로즈는 오히려 남성적인 빛에 의해 드러나고 싶지 않은데, 필이 빛 그 자체가 되어 로즈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추고 다닌다. 이제 카메라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대체로 영화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정교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소 떼들이 혼란스럽게 뛰놀고, 수소들은 서로 다투며, 먼지바람이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혼란이 발생한다. 필은 이러한 대혼란을 정리하는 인물이요, 이를 비추는 카메라는 질서정연할 수밖에 없으리.     


하지만 이는 야외에서만 그렇다.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사용되곤 하는 핸드헬드는 바로 필이 집안으로 진입할 때 사용된다. 야외에서는 그가 혼란을 정돈하는 자이지만, 집에서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것을 암시하듯, 그의 난폭한 성미를 가시화하는 핸드헬드가 극의 도입부에 잠깐 사용된다. 한편 핸드헬드가 이처럼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면, 그 대상이 부정적일 때는 긍정적 연출로 활용된다. 바로 조지가 피터 대신 로즈를 위해서 웨이터 일을 해줄 때, 그 일이 여성적이라며 조롱하는 태도를 극복했을 때 사용되는 핸드헬드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점에선 동일하나, 이전과 달리 위협적이지 않다. 이외에 영화는 심미성을 불러오기보단 오히려 불쾌하고 신경을 자극하는 전위적인 배경음악이 중후반부에 이르러 고조된다. 이러한 음악은 자유와 구속을 줄곧 오가는 개개인의 삐걱거리는 인생, 시대적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 어긋남 등, 본 작품이 포착하는 불안한 심리를 감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본 작품은 문지방 너머로 집의 안과 밖을 동시에 비추는 구도가 줄곧 활용된다. 이러한 구도가 사용되는 이유는 바로 본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이 공간의 대비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필이 활보하는 공간은 야외다. 외부가 남성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무질서한 자연을 통제하여 안정된 상태로 만들고, 또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바위산을 줄곧 바라보며, 기존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 바로 광활한 외부다. 그간의 남성성을 따르지 않는 피터라 할지라도, 성인이 되어가는 소년은 마을을 넘어서 도시로 향해 기존의 상태를 넘어선다. 이에 남성들은 줄곧 문을 열어젖힌다. 반면 결혼 이후 선물 받은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로즈가 문을 닫는 것처럼, 여성은 주로 닫는 자다. 하지만 남성은 열어서 로즈의 식당에 침입하듯 들어오고, 로즈가 닫아놓은 문을 열고 그녀의 연주에 침투하여 자신의 음률을 강제로 뒤섞는 자다. 이렇게 침입한 실내에서 남성은 모든 것을 독식한다. 대화의 중심은 오직 남성이자 우두머리인 필이어야 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방해하는 자들을 모조리 내쫓는다. 그는 실내에서 피터가 정성스레 만들어놓은 종이꽃에 불을 붙인다. 그들은 오직 자신만 바라본다.      


하지만 여성은 다르다. 여성은 주로 실내에 놓인다. 로즈는 혼자서 피터를 기르고 식당을 운영할 때도 주로 실내에 놓였다. 피터나 로즈나 둘 다 인생의 변곡점을 마주하지만, 로즈는 재혼이란 변화 이후에도 조지의 집 '실내'에 놓이며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야외에 나온다 한들 필처럼 거대한 공간을 누비지 않는다. 이러한 실내는 비좁다. 더욱이 영화의 초반에는 실내에 투숙할 손님들이 찾아온다. 심지어 거대한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말이다. 그래서 피터와 머물 곳이 더 비좁아지지만, 그런데도 공간을 청소하고 재분배하여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창조하는 존재다. 그리고 필이 더는 피터의 꽃을 불태우지 못하게끔, 그것을 더 깊은 실내로 꼭꼭 숨겨 보존한다. 하지만 시대는 1925년, 서부개척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는 시간대다. 더 이상 무자비하고도 야만적인 남성성을 마냥 용인할 시대는 아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말미에는 로즈도 바깥으로 나와서 그간 필이 자신의 힘과 폭력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죽을 불태우며 낭비하는 결정을, 원주민과 장갑을 교환하며 새롭게 결정한다. 이렇게 변화하며 맞물린 시대에 놓였기에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배경음악이나 피터의 머리빗 소리처럼, 서로가 어긋나 충돌하며 삐걱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작품을 가득 채우는 것이랴. 이러한 시대성은 영화의 말미에서만 강조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도 달라지고 있는 시대는 묘사되고 있다. 필은 카우보이로서 마초의 복장을 언제나 고집한다. 하지만 조지는 이와 달리 양복을 챙겨 입는다. 그리고 조지는 필보다는 훨씬 섬세한 성격이다. 그는 피터가 부재하여 난항을 겪고 있는 로즈를 위해서, ‘여성적’이라 놀림 받는 웨이터 일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조지는 필과 25년간 동업하는 것, 그리고 형에게 여전히 붙잡혀 있는 것이 신물 나는 눈치다. 그래서 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필의 분노는 폭발하지만, 이미 다 장성한 조지를 붙잡을 수 없다. 말에게 화풀이할 뿐이다. 또 피터는 그간 남성에게 모방이 금기시된 여성성을 적극 따라 하는 존재다.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피터의 주변에는 남성성이 부재하고 여성성이 익숙하지만, 후자를 배격하지 않는다. 플로리스트였던 로즈의 영향을 받아 종이꽃을 만들고, 과격한 운동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훌라후프로 긴장을 해소한다.     


이렇게 그간의 서부극에서 의도적으로 은폐되었을 피터라는 존재도 그렇지만, 이보다 보편적인 조지라는 남성의 태도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드러낸다. 이러한 조지는 현재에 참여한다. 하지만 필은 줄곧 과거를 되뇐다. 형제가 동업을 함께해온 기나긴 역사, 카우보이의 원리를 정립한 스승 브롱코 헨리의 찬미, 추억만을 반복하는 등, 필은 과거에 침잠해있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선택하는 현실 도피적 태도다. 로즈도 조지와의 결혼 이후 필과 동거해야 하자, 더 이상 현재에 집중할 수 없다. 변화하는 시대에서 여성스러운 창조력을 꽃피우는 피터를 위해 헌신하고 살림하던 그녀와 달리, 재혼 이후 그녀는 술을 마시며 줄곧 현실 바깥으로 도피하고, 피터를 붙잡고 과거를 회고한다. 더 이상 현재에 깨어있으며 참여하지 않는다. 술기운에 곯아떨어져 항상 침대에 누워있기 일쑤다. 자신이 바라는 삶이 있지만, 그것은 흡사 그녀가 말하는 '별'처럼 결코 닿을 수 없다. 로즈가 바라는 자유롭고도 주체적인 삶이 말이다. 이처럼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은, 자신이 행복했고 익숙했던 시대로 줄곧 도피한다. 다만 둘의 차이가 있다면 필은 자신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주체요, 로즈는 재혼에 의해 자유가 구속당한 객체라는 점이다. 이러한 필과 닮은 것은 거친 수소의 싸움이다. 도입부에서 두 수소가 서로 박치기하며 남성성을 겨루는 것처럼, 필은 줄곧 자신의 남성성, 지배력을 확인한다. 그는 다른 수소를 거세하는 자, 말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자, 놀고 있는 개에게 명령하는 자로 그려진다. 필과 다른 존재의 관계는 언제나 그에게 종속적이고 수직적으로, 타인은 그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다. 조지는 언제나 자기 곁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요, 식당의 다른 손님들은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요구할 수 있는 존재다. 자연은 언제나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박제되고 전리품으로 전락하며, 그의 힘을 과시하는 도구다. 하지만 로즈에게 구애하는 조지의 모습은 다르다. 첫 번째 결혼에 의해 로즈라 불리지 않고, 고든 부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녀의 현주소였다. 하지만 조지는 남성에게 종속되고 소유된 ‘고든 부인’이란 호칭 대신, 그녀의 이름인 ‘로즈’를 복권한다. 이후 로즈의 가르침을 통해 함께 춤추고, 누구의 부인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이름 대 이름으로 서로 껴안는다. 그렇게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거대한 세계에서, 작지만 강하게 둘은 이겨나가리라.      


하지만 당시의 결혼은 그럼에도 결혼이다. 생각해보면 조지는 춤을 가르치는 로즈의 손과 발을 거부할 수도 있었고, 또 웨이터임을 자청하여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즈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결혼을 받아들인 것이지, 스스로 제안한 것은 아니다. 이후 조지가 그녀에게 줄곧 피아노를 가져다주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웨이트리스의 일을 부탁하며, 그녀는 그에 의해 조각처럼 배치되고 연주를 요구받는다. 또 필과 동거해야 한다는 사실에 의해 그녀의 신경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필은 그녀가 술 마시는 것을 바라보며 조롱하고, 또 그녀가 자유롭게 연습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다. 재혼 전에 그녀는 감시의 압박 없이 자유로웠다면, 그녀는 재혼 이후 이중의 시선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한다. 결혼 전에 조지는 그녀를 지배하려 들지 않았다면, 결혼 후 조지는 부드럽게 그녀를 조종한다. 애초에 조지가 바란 것이 필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욕망 아니었을까. 그것이 곧 당시 남성의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로즈와의 만남 이후 필의 방문을 잠그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거대한 저택과 타인을 지배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당시의 시대상은 피터의 입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피터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며, 그녀의 ‘살생 금지’를 끝끝내 어기고 필을 암살한다. 피터를 좌우하는 것은 아버지의 전언, 바로 장애물은 치워버리라는 것이다. 그 장애물이 곧 필, 그를 치우며 피터는 아버지를, 그리고 당시 남성의 모습을 답습한다. 이렇게 당시의 시대에서 발원했을 욕망과 결혼이란 제도가 그와 그녀를 규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캠피온의 작품에서 줄곧 등장하는 '광인화'가 발생한다. 그녀는 손님을 맞이하는 웨이트리스가 되고 싶지도 않고, 필의 감시 속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어린 시절의 지나친 훈육에서 벗어나고, 또 사회의 보편 규율을 거부하고자 광인임을 선택한 <내 책상 위의 천사>처럼, 또 자신의 자유로운 신념을 좌절시키러 온 부모와 퇴마사의 시선에서 거칠게 저항함에 광인으로 묘사되었던 <홀리 스모크>처럼, 본 작품도 자신을 향한 구속과 요구에서 줄곧 벗어나려는 로즈는 광인으로 묘사된다. 누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한 젠더지만, 그 부당함을 거부하려 몸부림침에, 로즈는 미친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 구속력은 언제나 필에게만 내재하지 않는다. 피아노 연주로 부담을 주는 조지, 필을 살해하는 피터 등 남성들은 모두가 서로를 구속한다. 당대의 시대는 남성에게 타인의 구속을 요구했으랴. 이에 본 작품은 서부극에서 흔히 도드라지는 선과 악의 절대적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가 악을 생산함에 보편 속에 서늘한 구속이 곳곳에 숨어있어, 그 누구도 절대적 선인이 아니고 절대적 악인도 아니다. 이에 필도 시대의 피해자다. 오직 그만의 존재인 필은 진흙 목욕하고 나체로 수영하거나, 손님들이 도착해도 씻지 않는 등 관계에 구속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시대에 의해 구속되어 그는 자신을 숨기는 존재다. 필이 꼭꼭 숨겨놓은 것은 브롱코 헨리를 성적으로 흠모하는 욕망, 그와 나체를 부대낀 경험, 숨겨놓은 잡지에서 포착된 여성성이랴. 이는 음지에서만 은밀하게 보존되고, 양지에서는 이를 은닉 및 자기 부정하며 이에 반대되는 남성성만을 내세운다. 숨겨진 유혹과 상반되는 거친 다툼, 이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시대가 그의 성적 지향을 구속함에 그는 애석하게도 그 누구와도 자유롭게 관계 맺을 수 없다. 이러한 비밀을 피터가 마주한다. 전면에 내비치진 않지만 피터는 필과 닮고 싶다 말하며 접근하고, 또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만큼 아버지의 자살과 관련한 그의 속사정 또한 공유한다. 필이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매듭, 어쩌면 필과 피터를 '하나'로 '묶어줄' 선물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입술이 닿은 담배를 그에게 공유한다. 피터는 악의를 숨기고 그에게 친밀함으로 접근한다. 그의 비밀을 은밀하게 어루만진다. 이에 불쾌감을 일으키던 불협화음은 서서히 조화를 이룬다. 진실을 숨기고자 방어적으로 거칢을 연기하던 필은 느슨해진다. 개의 힘, 바로 친밀함에 느슨해지고 무장 해제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필과 거리를 두면서도, 결혼 제도와 자유를 구속하는 시대정신에 친밀해짐에, 서서히 서로를 옭아매던 로즈, 피터, 조지처럼, 친밀해지면 악의 불쾌함을 느낄 수 없다. 그 누구와도 친밀하지 않았음에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협을 감지할 수 있었던 필은 현재 피터가 자신을 향한 친밀함이 개의 선의인지 늑대의 악의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이에 피터가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온 탄저균이 그를 향해 엄습해온다. 시대는 여성성을 가진 남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친밀함에 의해 노출된 여성성, 하지만 조지와 피터의 여성성은 항상 사라져야만 했다. 여성성이란 진실이 노출된 필도 사라져야 한다.      


이렇게 캠피온은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도를 타파한, 일상에 악덕이 번영했고 이를 생산하던 '서부'에 초점을 맞춰 입체적인 서부극을 선보인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은폐됐을 타자와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스크린에 수놓는다. 또 단순하고 평면적인 마초의 초상 이면에 내재할 진실을 탐구한다. 실제로 마초적인 이들이 있었겠지만, 이와 달리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과 여성성을 관념에 따라 부정하며 호모포비아가 되는 사례처럼, 자신을 의도적으로 은닉한 마초의 진실을 탐구한다. 단순화되어 현실에서 멀어진 서부극보다, 오히려 복잡한 이해관계와 선악을 수놓은 본 작품은 당대의 현실에 더욱 밀착한다. 그리고 캠피온은 <홀리 스모크>에서 여성성을 숨기고 살아온, 심지어 폭력적인 남성 퇴마사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시대의 희생양인 필 또한 마냥 절대적인 악인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 또한 시대에 구속된 존재요, 그의 최후 또한 피터란 타인에게 구속되어 연미복이 입혀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니. 탄저균이 묻은 가죽을 전달한 피터의 진실은, 브롱코 헨리의 사진집을 숨기던 필의 진실처럼, 그의 침대 아래 감춰져 드러날 수 없는 떳떳하지 못한 악덕이니. 피터 또래의 나이에 브롱코 헨리에 감화되었던 필, 그 또래의 피터가 타인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필과 닮아간다. 그렇게 구조와 시대는 순수한 사람을 물들이며 마초를 재생산하고, 피터의 얼굴은 흡사 필의 얼굴처럼 많은 의도와 진실이 베일 아래 감춰지리니, 거짓된 초상만을 비추는 빛 또한 여전하리. 이렇게 캠피온의 카메라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데올로기가 규정한 현실과 이에 따른 현실도피, 광인화를 포착하고, 음악은 이로 발생한 균열을 절륜하게 표현한다. 이렇게 영화는 새로운 경향의 서부극으로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을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캠피온은 여전히 시대를 따르지 않고 자유를 추구하는 광인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다만 필에 의해 이어진 로즈, 피터, 조지의 촘촘한 그물망과 그들 사이의 긴장감을 절륜하게 포착하던 중반부까지의 구성이, 영화가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느슨하고 해이해진다. 특히 필과 피터의 관계에 집중함에, 더욱 흥미롭게 묘사될 수 있었던 로즈나 조지 관계, 결혼 이후 조지와 필의 관계는 평평하고 밋밋해졌다. 그래서 영화의 균형감, 그리고 심리에 집중한 영화에서 몇몇 인물들의 심리가 서서히 실종되어버린 한계가 아쉽게 느껴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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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11119 cg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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