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Feb 19. 2022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꿈과 낭만의 향수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 꿈과 낭만의 향수  

“하나의 측면을 본다는 것은 … 하나의 상태를 가리킨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① soggy bottom: 직역하면 ‘축축한 바닥’을 의미하지만, 직역한 의미 자체로 사용되지 않는다. 본 단어는 주로 성적인 문맥에서 사용된다. 대체로 일반적인 성교가 아니라 항문 성교하는 문장이나 발화에서 사용하며, 행위 이후 체액에 의해 축축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soggy bottom은 항문 성교 그 자체나 이를 암시하는 상황에서 사용되는 은어다.

② Licorice Pizza: 1970년대에 성행했고, 1980년대에 매각된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 레코드 매장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제목으로 제격이다. 직역하면 ‘감초 피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미국 포크 듀오였던 버드 & 트래비스가 자신들의 앨범이 흥행에 실패하자, LP판에 참깨를 뿌려서 사료 가게에서 판매하자는 자조적인 농담에서 비롯했다. 동그란 LP판은 피자 도우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또 Licorice Pizza의 약칭이 LP이기에, 역으로 LP판을 지칭하는 속어이기도 하다.

본 첫 번째 단어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의 원제, 기획 단계의 제목이었고 이후 두 번째 단어 '리코리쉬 피자'로 변경되었다. 전자가 매우 성적인 은어라면, 후자는 LP가 주류였던 1970년대를 지칭하는 단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폴 토마스 앤더슨은 1973년의 어떤 풍광을 담아낼까. 또 원제라 할 수 있는 soggy bottom은 본 작품에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1970년 캘리포니아 태생의 폴 토마스 앤더슨은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미국의 작가주의 감독이다. 정규적인 영화 교육을 받은 적 없고, 사실상 독학으로 경험을 쌓아나간 폴 토마스 앤더슨은 동시대 미국 감독 중에서도 가장 개성적인 작품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초기작부터 작가로서 색채가 온당 확립되지는 않았었다.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의 경우 멜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멜빌의 차갑고도 미니멀한 흑백에 색을 입혀 미국으로 옮겨온 듯한 작품이다. 그리고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의 경우 로버트 알트만의 영향을 받아, 전지적 시점에서 무수한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영향 관계를 아주 현란한, 그물망 같은 편집으로 이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내용에 있어선 폴 토마스 앤더슨이 향후 전개할 작품 세계가 예고되는데, <부기 나이트>의 경우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애 전반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성의 추동으로 전개되고, <매그놀리아>에서의 초자연적인 개구리 비는 그의 초현실성을, 불완전한 인물들의 궁핍한 정신과 심리는 이후 그의 작품에 줄곧 등장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일단 폴 토마스 앤더슨의 초현실성은 <매그놀리아>의 바로 다음 작품인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이어진다. 소위 알트만 스타일에서 벗어나 서서히 그만의 전형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확립한 작품으로,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쉬이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초현실적 장치들을 뒤섞어, 단순 로맨스를 넘어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개인의 심리를 유랑하고 조명한다. 이를 형식에서도 기존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만들어놓은 심미적인 양식에,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불쾌하고도 이질적인 효과, 편집, 사운드를 가하여 전형에서 벗어난 독특한 작품이다. 더욱이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이 매우 이성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연과 감성이 이를 압도하는 세계의 필연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초현실성은 마약에 빠진 히피의 의식을 따라가며, 사건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물들은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부터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팬텀 스레드>까지 이어지는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선이다. 언제나 주변 가족들에게 규정되고 지배되며 사회에 우뚝 서지 못한 성인 남성, 애정 결핍과 사적인 삶의 좌절,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군인 등 그의 작품에서는 불완전한 인물, 나사 빠진 인물, 삶에서의 정수를 잃어버린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틈새를 나의 바깥에 있는 가치들로 불완전하게 쌓거나, 제대 이후 군인으로서 이념을 잃어버린 이에게, 또 다른 이념, 종교가 침투하여 그를 지배한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타율적일지 모른다. <매그놀리아>의 이어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성을 극복함과 더불어, 육체를 가진 동물로서 필연적인 욕망을 위해 주체적으로 타인을 긍정하고 선택하길 바란다. <팬텀 스레드>에서는 스스로가 자연도 문명도 아닌, 제3의 자연이 되어 욕망의 대상을 지배하는 사디스트를 탐구함과 더불어, 이러한 사디스트에게 지배되길 바라는 불완전한 마조히스트가 자신을 드러내고 극복하길 바란다. 이러한 그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의 경우 1970년대 한 고등학생의 삶과 성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남근이 삶의 중심이 되던 <부기 나이트>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유령이 중년의 나이까지도 따라다니던 <팬텀 스레드>와 이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5mm 필름을 이용하여 1970년대의 쨍하고도 뜨거운 색감을 구현하고, 지금에서는 기억이 된 당대를 자글자글하고도 아스라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리코리쉬 피자’에서는 당대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음악들이 쉼 없이, 술술 흘러나온다. 이를 2.39:1의 화면비로 널따랗게 담아내는 폴 토마스 앤더슨, 당대의 매체와 더불어 그는 본 작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1970년대의 연애를 그려내고 있을까. 일단 인물들부터 살펴보자. 도입부에서 알라나에게 첫눈에 반한 풋내기 15살 소년 개리, 그는 1960년대를 풍미한 히피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다. 알라나와의 데이트가 지금 자신의 삶에 전부인 것, 이러한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어린 남동생을 홀로 집에 둬도 괜찮다는 방종이 그렇다. 또 개리가 알라나와 함께 연극을 하러 갔을 때는 사랑과 평화에 대한 손동작을 하기도 한다. 개리 외에도 일하러 라스베가스에 간 엄마, 영화 내내 언급조차 되지 않는 아버지 등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의 형태도 반골적인 히피의 영향이 깊이 배겨있다. 생각도 일반적이지 않다. 사랑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상적인 태도, 영화배우이자 영화광으로서 현실보다는 그 너머를 중시하는 낙관적인 태도가 그렇다.     


한편 25살, 첫인상은 다소 냉소적이고, 꼬맹이의 알량한 꿈과 낭만보다는 차가운 현실과 일을 중시하는 알라나는 히피 이후 세대다. 개리가 아직 15세이기에 소년과 사귀면 법에 위반한다는 현실 원리에 집착하고, 또 30살에도 동네에서 시답잖은 일이나 하고 있을 거라며 냉소적인 태도를 띤다. 영화의 시대 자체가 개리와 같은 10대 청소년들은 히피 문화를 동경하나, 이를 경험한 이후 세대들은 다소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그래서 양자가 서로 맞물리는 '과도기', '끼인 시대'다. 그래서일까, 이를 드러내는 과도기적 장치가 인상적이다. 도입부, 알라나를 처음 마주하는 개리, 그녀를 마주하기 전과 후를 개리의 시야를 방해하는 어느 한 학생의 형체를 통해서 분리한다. 개리가 동경하는 시대가 알라나와의 만남 이후에는 결코 같지 않으리라는 듯이, 알라나와의 만남 전과 후로 개리의 삶이 적지 않게 변하리라는 듯이 말이다. 이후 지금 여기에 놓여 있지만,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개리와 알라나가 서로 대화한다. 서로는 너무나 다르다. 이윽고 사진 촬영이 진행되는 학교의 강당으로 향한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계속 터지고 있기에 영화의 조명은 불안정하다. 지금의 믿음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과도기를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일까, 또 서로의 만남에 의해 각자의 삶이 깜빡이며 변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일까, 여하간 시대는 끼어있다. 개리는 향락적인 물침대, 오락적인 핀볼 기계 등 히피들이 선호한 개인의 쾌락에 초점을 맞춘다. 앞서 언급한 soggy bottom은 개리의 물침대 사업의 이름으로, 쾌락과 욕구가 사업화되는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들 또래의 입에선 마약으로 유추되는 단어들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다. 하지만 알라나 세대에게 더 이상 낭만은 없다. 알라나도 그렇고, 그녀 친구들도 죄다 일하기에 바쁘다. 개리가 알라나에게 추파를 던진 당시에 그녀는 소년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15세 소년이 25살 누나를 쫓아다니는 일, 서로 사귀는 일은 훗날 사귀는 당시에도 '이상하다'고 언급하는 것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일, 심지어 범법적인이다.   

   

그래서 그녀는 괴상하지 않고 통속적인, 자신 또래 랜스와 사귀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알라나의 집안이 유대교 집안으로 다소 세속적이고 성에 대해 보수적으로, 개리의 집안과 정반대임이 드러난다. 또 랜스는 유대교였으나 무신론자로 전향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실망을 접한 이후, 더 이상 현실 너머의 이상,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신이 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또 현실 너머의 신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 더 이상 이승 너머를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현실에 착 달라붙은 세대다. 대화도 통하지 않는 서로, 개리가 창이라면 알라나는 방패다. 이들은 서로 가는 방향도 다르다. 개리는 사진을 찍으러, 또 그녀에게 구애하러 오른편으로, 반면 알라나는 사진 촬영하는 학생들에게 빗과 거울을 빌려주기 위해 왼편으로 향하고 있다. 이윽고 알라나가 개리와 동행하며 오른편으로 참여한다. 이윽고 강당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개리는 문밖을 나가지만, 알라나는 문 안에 남는다. 이후에도 첫 번째 데이트를 위해 개리는 집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강조되는 반면, 개리가 먼저 와있는 식당에 알라나는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강조된다. 알라나는 개리를 따라다니거나 수동적이다. 문을 열고 나간다는 것에 걸맞게 개리는 다소 소모적이다. 도입부, 사진을 잘 찍기 위해 빗질에 급급하고, 또 화장실에선 다른 소년이 변기에 폭죽을 넣어서 폭발이 발생한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듯 분출한다. 하지만 알라나는 머문다. 착실하게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자신이 해왔던 것을 지속하기, 평범함을 유지하기… 카메라 워킹도 다르다. 화장실에서 폭발이 일어날 때, 또 알라나를 쳐다보는 개리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빠르고 부산스러우며 숏의 길이도 짧은 편이다. 한편 개리를 향해 걸어오는 알라나는 느리게, 그리고 숏의 잘림이 비교적 적다. 하지만 다른 서로는 사랑함에 따라 자신도 뒤바뀐다. 알라나가 개리에게 직접 찾아간 순간은 청소년 엑스포, 한편 누명으로 개리는 체포된다. 늘 안에 머물던 알라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서 개리가 체포된 경찰서로 달려 나간다.      


서로를 사랑하게 되자 알라나는 개리에게 모든 것을 노출, 즉 드러낸다. 자신의 알몸이 옷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듯이, 개리처럼 진보적으로, 히피적으로 뒤바뀐다. 캐스팅을 위해서라면 누드 연기도 두렵지 않다. 알라나를 줄줄 쫓아다니던 개리는 그녀에게 환상이 있었다. 가슴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노출한 상반신을 보자, 또 그녀가 속옷을 입고 물침대를 홍보하자 그녀에 대한 신비, 환상은 사라진다. 오히려 그녀의 전라에 대해 보수적으로 군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연출 또한, 안에 머무는 사람은 개리,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알라나로 뒤바뀐다. 경찰서에 갇힌 개리가 알라나에게서 용기를 얻고 밖으로 나간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분명 개리, 하지만 그것이 창문에 비치자 흡사 알라나가 놓인 문 안으로 개리가 진입하는 것만 같다. 더 원숙한 알리나, 또 치기어리고 용감한 개리, 둘이 사랑하며 상대의 결핍을 채우며 문의 여닫음도 달라진다. 그래서 알라나가 잭과 먼저 데이트하고 있는 식당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쪽이 개리다. 이제는 알라나가 상황을 만들고, 개리가 여기에 초대되듯이. 한때 기존에 안주하던 것이 알라나라면 이제는 그녀가 상황을 넘어서려고 하고, 반면 개리는 안일하고 쉬운 제 욕망에 안주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서로를 부정하며 자신을 되찾기도 한다. 알라나에게 마음이 식었을 때 개리는 문을 박차고 나가서 수와 만나고, 또 개리와의 애정전선이 차갑게 식었을 때 알라나는 조엘의 초대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 서로가 문을 박차고 나가서 상대방에게 달려간다. 상대의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서로를 찾는다. 과거에도 서로에게 달려가던 숏들과 매치컷된다. 개리를 위해 경찰서로 달려가고, 잭이 내팽개친 알라나를 위해 달려가던, 서로의 능동적인 과거가 말이다. 과거에는 한쪽이 달려 나갔다면 다른 한쪽이 좌초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질주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게 문을 박차고 나가서 서로를 영화관 앞에서 조우하고 포옹한다.      


두 연인들은 더 이상 상대방이 만들어놓은 상황에만 속하지 않는다. 알라나가 사무소 문을 박차고 나가서 수상한 남자를 의심하듯, 제 뜻을 정확히 밝힌다. 그리고 상대방의 방향에 참여하기보단, 서로의 방향으로 뛰어가다 만나고 인사하며 긍정한다. 사랑은 안에 머물며 안주하거나, 마냥 상대방의 초대에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잭이 알라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질주하는 것처럼, 기다림은 도래하지 않거나 배신한다.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하는 것, 심지어 상대방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알라나의 협박을 뿌리치고 문밖의 도로로 나를 위해 나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며 뒤바뀜, 그것이 곧 영화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배우’다. 사랑은 변화시킨다. <팬텀 스레드>에서처럼 수동적인 모델을 지배적인 사디스트로 만들고, 주체적인 디자이너를 수동적인 마조히스트로 만들 수 있다. 사랑은 사람을 배우로 만든다. 개리는 배우 지망생이다. 그는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학생이지만, 배우로서 자신을 휘황하게 꾸며낸다. 개리는 배우로서 학생인 자신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넘어서고 싶다. 광고 모델로 캐스팅되기 위해서 여러 옷을 바꿔 입는 개리의 모습이, 곧 여러 배역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배우의 속성이랴. 한편 개리는 자신의 뇌리, 표상에서만 변화한다. 알라나에게 개리는 배우로서 멋지게 변화한 모습으로 전달되지도 않고, 개리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아이들과 함께 유치한 무대에 서야 하니 퇴행적이다. 더욱이 무대에서 그가 관객들에게 던진 농담은 실패했다. 즉 그는 현실에서 변화하지 못한다, 혹 변했다면 퇴행이다. 이러한 그를 진정 배우로 만들어주는 것이 알라나다. 보호자로서 ‘뉴욕’으로 동행하며 ‘캘리포니아의 개리’에서 변신하게 해준 것, 누명을 쓰고 갇힌 경찰서에서 탈출하게 해준 것, 실패한 청소년 엑스포를 극복하기 위해 라디오를 소개해주고, 물침대 사업까지 도와주는 등 말이다. 알라나가 개리에게 선사하는 변신, 그것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의 안주가 아니라 극복이다. 오디션 낙방, 트럭의 기름이 떨어진 상황 등에서 말이다.   

  

망상적 히피에서, 자신의 낭만과 사업을 결합한 낙천적인 사업가가 된 개리, 이러한 변화는 개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알라나 또한 마찬가지다. 알라나가 처음 호감을 가진 것은 랜스였으나 마음이 식어버렸다. 무신론자로서 너무나도 완고한 랜스는 세속적인 이전의 자신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자신보다 더 말랑거리고 아직까지는 희망을 품고 있는, 즉 자신과 다른 개리를 서서히 동경하는 눈치다. 개리에게 이끌리며 자신도 배우가 되고 싶다. 캐스팅되기 위해선 기존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고, 잭을 회유할 수도 있다. 배우 되기,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를 사랑하며 변화하고 닮아가는 실존이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지 않는 시대를 극복하면서도 배우가 된다. 영화의 말미, 연료 위기에 의해 플라스틱 생산에 차질이 생겨 물침대 장사에 난항을 겪는다. 또 알라나가 느끼기에 파괴적인 당시의 시대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 순응되지 않는, 오히려 이를 극복하고 변화하려는 배우로서 개리는 핀볼 사업을 시작하고, 알라나는 정치에 뛰어든다. 사랑하면 닮아가고 사랑하지 않으면 분리한다. 사랑한다면 닮아가기에, 한때 사랑했던 시니컬한 알라나는 리드미컬한 카메라로 개리 또래들과 함께 명랑하고도 밝게 포착된다. 하지만 이를 개리는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도 중후해졌을까, 오히려 육체적으로 나이가 유사한 수에게 이끌린다. 이제는 개리가 알라나의 성숙함을 닮았기에 수와 다르다고 느꼈거나, 또 모든 신비가 사라지고 이미 소유했다고 느낀 알라나에 대한 싫증으로 다른 이에게 눈이 간다. 알라나와 달리 옷을 입고 있는 여인, 신비가 간직된 여인에게 이끌린다. 알라나 또한 개리보다 더 나이가 많고, 개리와 달리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을 잭과 만나고, 시시껄렁한 개리와 달리 비전이 있는 조엘에게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한심함이, 시시껄렁함이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락스타 존에게 물침대를 배달하러간 시퀀스의 말미에서 알라나는, 마주치는 모든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존이든, 기름통으로 성 행위와 유사한 장난을 하는 개리 또래 모두에게 염증을 느낀다.      


하지만 알라나가 조엘에게 품던 이미지 또한 환상이었음을, 또 시시껄렁한 다른 사람들처럼 잭이나 조엘도 제 자신의 욕망이 최우선이었다는 바가 폭로된다. 이와 관련하여 사랑이란 상대를 진정으로 품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랜스와 알라나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 개리는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윽고 알라나가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건다. 알라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개리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호흡, 또 그들이 놓인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만이 들려온다. 개리는 그저 이를 지그시 들어준다. 이는 안식일에 무례하게 무신론자임을 폭로한 랜스와 다르다. 어떤 존재인지 캐묻지 않고, 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녀 앞에서 과시하지도 않는다. 숨만 쉬고 있는 존재, 그 자체를 기다리고 긍정한다. 상대의 기대와 달리 부재하고 있다면, 그 부재를 긍정한다. 알라나가 처음 개리와 만났을 때 그녀는 소년이 숨 쉬는 것도 경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알라나가 처음으로 매혹된 개리는 수화기 너머의 숨만 쉬는 청각이다. 이후 다시 이들이 결합하는 결말에서는 상대방이 어디에 있든 달려간다. 핀볼 오락실이든, 정치인 선거 캠프든, 이윽고 영화관에서 서로는 마주치니, 영화란 이러한 다른 존재들이 어디에 있던 포착하고 만나게 해주는 것일까. 여하간 25살과 15살의 나이 차이, '이상하다'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는 그렇게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며 배우가 되고 사랑을 이어간다. 이러한 본 작품은 매우 충동적이다. 영화의 도입부, 개리가 알라나에게 첫눈에 반한 사건부터 어떠한 설명도 없다. 개리는 알라나를 충동적이고도 우발적으로, 갑자기 마음에 불꽃이 일어 사랑했다. 이후에도 여러 연인을 오가는 이들의 관계에 ‘서서히’, ‘이유 내지는 근거’란 없다. 존처럼 그저 눈앞에 있으면 구애한다. 가까이 있고 눈앞에 보이면 외의 이유도 근거도 없이 충동적으로 이끌린다. 정해져 있던 것도 당시의 마음에 따라 뒤바뀐다. 바버라를 두고도 흔들리는 존, 일본인 연인을 계속 뒤바꾸는 제리,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욕망을 쳐다보는 개리와 알라나도 마찬가지다. 욕망뿐만이 아니다. 개리가 알라나에게 정해준 대사도, 또 개리가 참여한 뉴욕의 연극도 모두 즉흥적으로 뒤바뀐다.      


그래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전형적인, 흥분과 격양으로 가득 찬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눈앞에 없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잭은 오토바이를 타고 불을 넘는 묘기를 알라나와 함께 하기로 한 것을 까맣게 잊는다. 뒤에 타서 그녀는 보이지 않으니,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불구덩이 뿐이니, 충동적으로 알라나를 떨어트리고 묘기를 부리기 위해 불구덩이 앞으로 질주한다. 영화는 보이는 것, 살갗에 밀착함에, 또 멀어지고 보이지 않게 됨에 따라 이유도 없이 이어졌다가, 별 이유도 없이 멀어지고 잊히는 충동의 일대기다. 그렇기에 이성을 활용해야 할 서로의 대화, 언어 또한 영화에선 이해되지 않는다. 일어와 이를 제 마음대로 따라 한 일어 억양의 영어, 번역되지도 않은 채로 전달하는 무책임함, 잭은 영화와 전쟁에 관해 한국을 얘기하는데, 알라나는 여행지로서 한국을 이야기하고, 알라나가 잭에게 건넨 질문은 답이 돌아오지 않듯, 불통하는 서로의 표상이 합쳐지지 않고 독립적으로 이어지는 본 작품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최근 작품 중 가장 명쾌하게 보일지라도, 속내는 혼란하고 단절적이다.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알라나가 보고자 하는 개리, 조엘을 상상함에 그녀는 실망한다. 있는 그대로의 개리, 또 객관적으로 조엘에게 접근했다면, 자신의 욕망이 불발하는 실망을 겪을 일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기 때문에, 잭도 조엘도 알라나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 보고 있지만 실상 객관적인, 순수하게 상대방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외부 세상,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표상을 보고 나의 기대를 투영하기에 당연히 그들의 마음에 찰 리가 없다. 잭은 알라나를 통해 그레이스 켈리를 보고, 영화의 주인공 레인보우, 낸시를 본다. 그녀 자체를 보지 않는다. 실제 그녀 이름을 묻자 저버린다. ‘알라나’는 그가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잭에게서 버려진 알라나를 개리가 구해준다. 환호하는 대중들에게 향하는 잭과 반대 방향으로 알라나에게 달려가서 그들은 재결합한다. 하지만 서로 재결합했어도 다시 존의 집에서의 파동 이후 헤어지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 성에 차지 않는다.      


이후 영화는 과도기가 아니라, 서서히 암담한 시기로 나아간다. 미국의 연료 위기로 사회는 진척이 없다. 주유소 앞의 교통체증으로 꽉 막혀 있다. 이는 60년대의 스타인 배우 잭이나 락스타 존과 같은 이들이 선택한 결과를 알라나와 개리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지경이다. 알라나는 무책임한 잭에게서 버려지고, 연료 위기가 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더욱이 연료 위기가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중동의 대처, 즉 당국의 정치적 결정을 국민, 이와 무관한 젊은 세대들이 떠안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참혹한 시대정신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개리가 알라나는 마냥 한심하다. 그녀의 기대에 들어맞지 않으므로, 개리 자신의 사업이 세상의 전부냐며 따진다. 하지만 알라나가 이상적인 시대와 사회를 그려보는 것 또한 그녀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상상한 것이니. 본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서로 간의 불통, 단절, 고립은 ‘세상의 전부인 자신’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렇게 헤어질 때 서로는 더 이상 상대와 같지 않음을 역설한다. 나는 너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하고, 또 ‘할머니’가 아니기에 젊다며, 한때 선망했던 다름을 애써 부정한다. 자신에게서 분리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부정한 서로보다 더 이해받기 어렵다. 알라나에게 선거 사무소 앞의 정체불명 남자는 신분이 모호하여 불안하다. 또 핀볼 사업장을 꾸린 개리는 블랙컨슈머에 시달린다. 블랙컨슈머는 핀볼이라는 사물의 목적이나 외부의 규칙이 아닌, 자신의 남근이라는 목적에 충실하다. 외에도 손님들은 막무가내로 기계를 사용하고, 자전거도 마음대로 세워둔다. 그렇게 이기적인 서로, 나의 앎이 미치지 않는 외부에 의해 그들은 답답하다. 존의 집에서 일을 내팽개치고 나오는 것이 나름의 반항이자 항거일까, 또 연료 위기 속에서 기름 없이 위험천만하게 법규를 위반하며 운전하는 것 또한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것일까, 그 시대의 청년들은 어떻게든 순응하지 않고 제 자신이 배우로서 시대의 배경으로 흡수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것이 개리에게는 핀볼 합법화라는 변화를 영민하게 선택한 오락실이고, 알라나는 정치다. 알라나의 눈에 개리가 시간을 허비하고, 촬영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개리 또한 '세상의 종말' 속에서 ‘환호’하는, 교통체증 속에서 훨훨 달려 나가는 자신을 유지하는 나름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반면 시대 속에서 조엘과 같은 정치인은 자신의 성 지향성을 드러내고 유지할 수 없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미지를 따르고 이를 광고한다. 알라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꾸민다. 조엘 뿐만이 아니다. 배우인 잭의 발화는 대사인지 진심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하지만 알라나와 개리는 자신이 외부에 어떻게 보이든, 이를 사랑한다. 캐스팅을 위해서 알라나는 과장하지만 그녀도 개리 앞에서는 솔직하고, 개리는 모든 것을 오픈했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광고’, 그리고 포장, 그것이 서로에게는 없다. 조엘이 언론에서는 상대방에게 이해를 강요하기 어렵기에 독신이라 말하지만, 정작 매튜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위선과 그들은 다르다. 또 자신의 욕망을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존과 다르다. 그래서 서로에게 달려간다. 그간 법이 두려워서 연인임을 은닉하였는데, 더는 숨기지 않는다. 시대의 법이 그들의 사랑을 좌우할 수 없다. 사랑, 그것은 조엘에게서 진실을 은폐 당한 매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또 개리와 만나서 서로에게 '안녕'이라 인사하며 배려하고, 빛으로 상대방의 생생한 진실을 비추는 것, 그렇게 드러낸 타인을 사랑하며, 내 욕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개리는 거울을 들어 ‘자신을 비추고 위해주는’ 알라나를 사랑했을까, 하지만 결말에서는 거울이 아니라 빛이 알라나와 개리의 얼굴을 드러내니, 비로소 서로는 상대를 사랑한다. 이렇게 폴 토마스 앤더슨은 과도기, 꿈과 낭만에 종말이 온 1970년대를 그려내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 배우들을 재현한다. 시대에서 변화하며 다른 배역을 입는 사람들이 배우, 또 사람들은 사랑하며 배우가 된다. 서사가 <인히어런트 바이스>나 <마스터>에 비한다면 명확해 보이지만, 실상 각자의 눈과 육체, 보임과 밀착으로 전개되는 본 작품은 매우 우발적이고 혼란한 전개를 띤다. 이러한 와중에 진정한 사랑은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에게 향하는 것, 그리고 빛을 밝히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시대의 반항아들, 그 속에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시대의 ‘징그러움’ 또한 사랑하던, 진짜 연인들이 놓여있다.  

-------

감상일: 220219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베흐타시 사내에하&마리암 모그하담,<흰 암소의 발라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