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ul 09. 2022

취르허 형제, <소녀와 거미>

동물, 우리

취르허 형제(Zurcher Brothers), <소녀와 거미>(The Girl and the Spider) 

- 동물, 우리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시대는 새로움에 대한 느낌을 거의 잃어버린 셈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그저 관습에 의해서 살아가고, 도래하는 것은 어제 있었던 것의 계속적인 반복이기에 전혀 새롭지 않다.” -에른스트 블로흐-

인간인 우리는 보편적으로 법을 따른다. 그래서 법 바깥의 감각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타자와 놓이더라도 최소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감각과 경험을 교류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 동물은 법을 따르지 않는다. 또 보편적인 인류의 크기와도 다르다. 그래서 인간에게 개입한 동물들은 인류가 경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한 감각을 선사한다. 일례로 필자의 집은 주택이다. 봄이나 여름에 현관문을 열어 두면 아주 간혹 쥐가 들어올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법을 따르는 인류는 어지간해선 침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는 동물은 우리에게 ‘침입’의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보다 크거나 작다. 그래서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숨어든다. 또 우리의 생체리듬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시간에 불현듯 등장한다. 이렇게 동물에 의해 인간의 질서는 무너진다. 단 하나의 동물에 의해서도 인간의 심리는 불안하게 요동치고 일상은 어제와 같지 않다. 한편 일상이 깨짐으로써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시선, 보편적인 경험으로는 보지 못한 구멍, 각도, 관점이 동물에게서 드러난다. 그들의 개입은 우리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한편 그 폐허에 다시금 새로운 질서를 쌓게 한다. 이렇게 서두에 동물의 개입을 언급한 이유는 취르허 형제의 신작 <소녀와 거미>에서 동물에 의한 미묘한 일상의 변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1982년 Aarberg 태생의 라몬 취르허(Ramon Zurcher)와 실방 취르허(Silvan Zurcher)는 쌍둥이 형제로, 둘이 공동 연출하는 스위스의 청년 감독들이다. 그들은 2013년에 공개한 장편 데뷔작인 <스트레인지 리틀 캣>에서 동물과 함께 공존하며 규정되는 일상의 감각을 탐구하며, 동물과 인간을 유비한다. 사람들은 다들 고양이와 강아지가 미쳤다고 말한다. 그들이 문을 열려고 하는 행위, 대뜸 식탁 위에 올라가는 돌발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동물의 ‘광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취르허 형제는 몇몇 배우들에게 매우 건조한 디렉팅을 주문한다. 그저 무표정으로 관조하는데 그들의 생각을 꿰뚫기가 어렵다. 또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이에 세계에 자신을 내놓지 않는 무표정함도 대두되니,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유추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 내면, 심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얼굴을 알 뿐이다.     


심지어 그 얼굴조차도 모를 때가 있다. 아직 10살이 채 되지 않은 듯한 소년, 소녀의 아이 레벨 뷰로 영화는 숏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성인들은 상반신이나 얼굴이 노출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얼굴조차도 모르는 세계, 그나마 상대방의 대화는 들려오지만, 이를 감상자는 주목할지언정 영화의 인물들은 상대방의 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있는 얼굴들은 상대의 얘기를 튕겨낸다. 그래서 집단적 독백의 형태를 띠거나, 청자가 없는 발화는 수용되지 않아 내내 반복된다. 설령 반응을 보이고 행동한다 한들, 그 상대방이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는 표정이나 행위를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연기자들의 모호함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영화는 플래시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나만의 세계에 침투하여 방해한 타인의 기억, 또 나는 그 대상에게 관심이 있으나 그 대상은 내게 관심이 없는 기억을 줄곧 곱씹는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각자의 표상에 갇혀있는 타인이, 하나의 외부 세계에 놓여 부대낌에 발생하는 질서의 균열, 붕괴에 취르허 형제는 주목한다. 영화 속 오렌지 껍질을 까서 바닥에 던지면 언제나 하얀 면이 위로 올라온다. 주황색 면이 더 무겁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력의 법칙이랴. 하지만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흡사 이러한 법칙처럼, 몇몇 공간을 똑같은 구도에서 반복하여 보여준다. 창문 부근, 부엌, 화장실이 그렇다. 하지만 반복되는 공간에 많은 식구, 손님이 방문해오고, 나방이나 쥐도 등장한다. 이에 반복되는 공간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 예상치 못한 동물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간에 등장하고, 이러한 출몰이 개인의 시간을 규정한다. 또 영화는 여러 사물을 흡사 정물화처럼 포착하며 붙잡지만, 이후 포착된 사물들은 깨지거나 수리되고 변형되는 등 이전과 같지 않다. 이러한 사물의 변화에 사람들도 과거와 같지 않은데 사물의 소음을 따라 하는 소녀, 새로운 사물에 행동이 규정되는 사람들 등, 행동은 우발적으로 튀어 나간다.      


또 영화는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직접 비춘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잠들었다며 아이에게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법칙은 정작 지켜지지 않는다. 또 잠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과 아이를 체벌하는 행위는, ‘배려’를 기준으로 모순적인 이중성을 띠며 법칙에서 이탈한다. 대단히 일상적이고 별거 없는 영화처럼 보이는 <스트레인지 리틀 캣>, 그러나 취르허 형제는 평온함과 잔잔함 속에서 번잡하게 움직이고 엇갈리며 발생하는 미묘한 변주, 긴장감을 재치 있게 통찰한다. 흡사 영화 속 어린아이가 문법에서 벗어난 오타가 잔뜩 적은 메모를 보며 즐거워하듯 말이다. 과연 그들의 신작, <소녀와 거미>에서는 기존의 질서와 문법에 어떤 오타를 낼까. 일단 연출의 기조는 이전과 유사하다. 여전히 고정된 카메라로 대상을 회화적으로 바라본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전무하다. 이러한 연출로 가져올 수 있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일단 리사가 상대방이 들을 수 없는 방에 가서, 그를 두고 '바보'라고 험담하는 장면이 초반에 등장한다. 움직임이 능동적인 카메라라면 그 대상과 리사를 이어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고정된 카메라는 양자를 이어주지 않으며 서로 간의 단절과 분리를 더욱 심화한다. 즉 인물과 인물, 공간과 공간으로 이동하지 않는, 그저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카메라는 고립을 가시화한다. 또 마라가 반려견에게 뜨거운 커피를 붓는 장면이 있다. 관객들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마라가 개의 등에 커피를 쏟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은 평평한 구도로, 즉 2차원에 가까운 시점에서 이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마라와 개 사이에 공간, 3차원적 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윽고 마라가 개의 등에 커피를 쏟은 것이 아니라, 그 옆의 바닥에 쏟는 것을 확인한다. 특정한 구도에서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보이는 바에 대한 다각도의 상세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이에 따라서 감상자와 영화 사이에 오해가 발생한다. 그러나 비단 이 오해가 감상자와 영화 사이에만 국한될까. 본 작품 자체가 대상의 총체를 마주할 수 없는 제한된 나의 관점을 탐구하는 영화이므로, 고정된 카메라가 속속들이 볼 수 없는 제한된 시각성은 인간관계에서의 필연적인 제한과 단절을 삭막한 정감으로 가시화한다.     


외에 영화의 색채는 희멀건 무채색에 가깝다. 차갑고 건조하다. 이는 영화의 디렉팅과도 일맥상통한다. 전작에서 그랬듯 배우들의 연기는 적극적이지 않고 매우 제한적이다. 표현을 최소화하여 내면을, 심리를,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표면 너머의 내면이나 심리를 읽어낼 수 없는 그저 물질일 뿐인 얼굴, 그래서 분명 무언가가 보이지만 무(無)에 가까운 시각성, 그것이 곧 영화의 채도로도 직결되는 것이랴. 영화에서 따스한 색채인 노랑이 흠뻑 퍼지는 순간은 회고로 인해 플래시백 할 때에만 국한된다. 현재에 대면한 상대방의 얼굴이 미지의 여지로 가득한 모호함이자 열림이라면, 과거는 이미 끝나서 닫혀있다. 그렇게 확실히 무언가의 존재를 확인한 과거에 유, 즉 유채색이 퍼져나간다. 외에 영화는 전작과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스트레인지 리틀 캣>에서 대가족이 살던 집과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한 구조의 집에서 영화를 촬영한다. 그리고 배우들은 바뀌었어도 어린 소년, 소녀가 있고, 할머니도 있으며, 잠 못 드는 사람이 있는 구성도 동일하다. 즉 이전 작품의 구성과 많은 부분이 유사하지만, 이러한 나의 익숙함을 파괴하는 '오타'를, 그로 인한 개개인의 절충할 수 없는 개성, 자유를 영화는 강조한다. 그래서 이전 작품에서처럼 하나의 순음악이 몇 차례에 거쳐 반복되지만,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칭하지 않는 순음악의 추상성, 그리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들이 줄곧 이전의 맥락에서 이탈하며 변화함에, 음악 자체는 익숙하지만 감각은 결코 같지 않다. 영화는 큰 틀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서서히 무너지는 보편, 질서를 고찰한다. 영화의 시작, 건물의 설계도가 펼쳐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전 작과 유사한 구조다. 하지만 결코 같지 않다. 이윽고 마라가 길거리에서 ‘공사하는 인부’를 바라보며 변화를 예고한다. 집안을 가득 채우던 사물이 빠져나가 새로운 주인의 물건이 채워질 준비를 하고 있으며, 배치도 무수히 달라질 예정이다. 인간의 목적에 따라 사용이 달라지는 사물, 이러한 사물로서의 집, 집의 설계도 자체는 변화가 없겠지만, 그 안에 아이들이 주관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사물과 집의 목적은 주관에 의해 무수히 달라질지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이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에 따른 변화다.      


여전히 취르허 형제는 정물화에 가까운 필로우 숏을 보여준다. 한순간에 얼어붙어 닫힌 듯한 완전성, 하지만 이들은 결코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미술사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자면 그것은 죽음을 연상케 하는 '바니타스 정물'에 가까운 숏이다. 이미 다 인간의 손을 거쳐서 소멸되고 불태워지고 목적을 잃어버린 쓰레기들, 구멍이 뚫린 컵, 열린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에 의해 흩날리는 비닐 등 현재에 포착하는 사물들은 모두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취르허 형제는 이전 작과 유사한 많은 것들을 반복해서 포착하는데, 이는 이전 작에서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 작에서도, 그리고 <소녀와 거미>에서도 반복되는 것, 또 미래에도 불변할 것은 오직 '변화'하리란 운명이다. 화장실에서 세탁기를 수리하는 장면도 전작과 이번 작, 모두 동일하게 포착되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것은 과거로부터 완전한 세탁기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되는 세탁기의 형체다. 그리고 인간의 몸도 그렇다. 마라의 몸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 리사가 문을 쾅 닫아서 손가락에 흉이 생겼고, 헤르페스에 의해 입 주변에 물집이 잡혔으며, 자는 도중 창문이 열려 이마를 찧었다. 그렇게 우리의 몸은 줄곧 변형된다. 인간과 인간도 그렇다.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고, 한때 사랑할 마음이 없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불변하리라 여긴다. 흡사 영화의 카메라처럼, 집의 주인이 계속 바뀌어도 이에 신경 쓰지 않고 머무는 거미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줄곧 이사하고 청소하여도 우두커니 서서 관조하는 마라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머문다고 해도 거미는 이윽고 거미줄만 남기게 될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그것마저도 분해되어 사라져, 변형이란 필연을 맞닥뜨리리. 고정된 카메라, 반복되는 일정한 구도, 그것은 곧 머물고 싶은 나, 익숙한 질서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 반복이 가리키는 것은 '변화'라는 보편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하지 않기를 갈망하거나, 닫혀서 멈춰 있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어머니는 딸, 리사의 유년 시절을 회고한다. 또 마라는 리사와 함께했던 여행을 떠올린다. 눈을 뜨고 있었을 땐 분명 주변에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눈을 감으니 아이들이 사라져버렸고 이윽고 리사가 다가왔다.     


또 항상 가출하는 고양이는 방안에 자신 대신 털 뭉치를 남기고, 리사를 임신했던 당시 어머니는 머리칼이 빠지는 게 안타까워 그것을 모아 가발을 만들었다. 기억처럼, 털 뭉치와 가발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현재 속에서 과거를 줍고 모은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가 남긴 털 뭉치는 더 이상 고양이의 것이 아니다. 고양이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고, 가발도 마찬가지다. 이제 다른 주인을 만나, 그 주인의 현재 용모를 뒤바꾼다. 더욱이 과거조차도 마라의 회고처럼, 눈을 감은 순간에 여백이 가득한, 상상의 여지가 충분한 과거라면 이는 내 생각에 따라 줄곧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과거조차도 우리에게 마냥 닫혀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대상을 직면하지 않고,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도 짧은 회고다. 마라는 상점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종업원의 삶과 표정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과거의 종업원에게 타당한 것이지, 현재의 종업원에게 적합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녀의 생각은 기억하는 과거를 곱씹는 것이지, 현재를 바라보며 되새김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회고하는 과거는 현재와 불일치하고, 또 마냥 끝난 것처럼 보이는 몇몇 과거는 현재에 다른 역할로, 다른 여지로 변형된다. 타인이나 세계에 의해 변화하고 싶지 않은 우리,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은 나만의 방에 놓이는 것이 편하다. 마라가 제일 편한 곳은 가장 사적인 공간인 화장실이다. 영화 속 문은 혼자와 다수를, 또 내부와 외부를 구분한다. 그리고 내부에 놓이면 외부를 알 수 없기에 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에 마라가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쾅 닫아서 그녀의 손가락이 다친다. 방문을 닫으면 외부의 개입을 막을 수 있다. 더 이상 아이들의 장난으로 깃털이나 물풍선을 맞지 않아도 되고, 또 동물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문을 넘어서 외부로 나가게 되면, 아이들의 장난 때문에 깃털을 뒤집어써서 '닭'처럼, 즉 스스로가 원치 않는 존재로 변형된다. 그리고 창문이 열리며 마라의 이마에 흉이 난 것처럼, 외부는 나를 변형시킨다.      


집이 머물러있다면 변형은 더디겠지만, 집에 외부인이 들이닥치고, 설계도에는 그림이 잔뜩 그려지며, 항상 닫히지 않은 문에 집은 변하고, 그 집에 사는 나도 변한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밤, 한 이웃이 지붕에 올라 춤을 추는 것처럼, 문 너머는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충격을 매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외부에 의한 변형은 시선과 연관한다. 리사가 마라와 대화하며 어머니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연인과 대화할 때 리사가 쳐다보자 행동이 움츠러드는 것처럼, 대상을 품어내는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과 기대를 투영한 상대의 시선은 나의 행동을 제약한다. 이러한 시선이 닿지 않는 공간이 ‘나만의 방’이다. 하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외부로 나와야 한다. 그렇게 나온 외부에서는 스스로가 바라는 제 자신으로만 살 수 없다. 마라는 마르쿠스의 냄새가 지독하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자신의 담배 연기를 그에게 피워, 자신의 냄새를 마르쿠스에게 덧씌운다. 타인에게 악취라 평가된 마르쿠스의 냄새는 스스로의 체취로 머물 수 없고, 타인이 원하는 냄새로 뒤바뀐다. 상대방이 잠들어 있는 순간 한 여인은 연인의 성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잠들어있는 수동적인 그는 깨어있는 능동적인 그녀에 의해 육체가 변형된다. 이윽고 그가 깨어나서 긴 팔로 그녀를 부드럽게 휘감자,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그의 욕망이 그녀를 규정한다. 거미가 마음대로 리사의 등을 타고 올랐던 것처럼, 우리도 거미의 욕망과 다를 바가 없다. 마라는 개에게 커피를 주고, 또 종이컵에서 와인이 샌 이후에는 강아지가 그것을 마신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소녀가 마라에게 “왜 강아지에게 커피를 쏟았냐”고 물으니, 마라는 개가 목말라서 그런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목마를 때 커피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것은 마라의 욕구지 개의 욕구가 아니다. 마라의 욕구가 개에게 덧씌워지며, 개의 욕구가 마라의 것으로 뒤섞이고 변형된다. 앞서 언급한 형제의 전작, <스트레인지 리틀 캣>에서 대화는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교류이자 소통이 맞았다. 하지만 그 속을 상세히 파고 들어가 보면 서로가 상호 이해하는 대화이자 소통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각자의 독백에 가까웠다.     


본 작품에서도 나의 기대, 욕망, 욕구를 상대방도 으레 그럴 것이라며 덧씌우고, 이에 의한 변형에 개개인의 '발화'가 봉사한다. 영화의 초반, 등장인물 다수는 각자가 초면이다. 그래서 이름을 묻고 여러 질문을 한다. 하지만 청자들은 답하지 않거나, 답변을 하더라도 매우 늦다. 내 의사대로 늦게 답변한다. 더욱이 똑같은 텍스트라 할지라도, 이는 수용자에게 의도대로 수용되지 않는다. 리사와 어머니는 똑같이 강아지에게 '조용히 해!'라고 요구하지만, 반려견은 똑같은 텍스트임에도 오직 어머니의 말만 수용한다. 그래서 똑같은 텍스트라 할지라도 수용자의 태도에 따라 판이해지는 의미에 의해 대화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즉흥적이고 우발적이며 주관적으로 변화한다. 또 발화와 관련해서 ‘거짓말’이 영화에서 잦다. 직업을 묻는 소년의 질문에 마라는 건축가라고 답하지만, 어머니에 의해 건축가 마라는 부정되고, 이후 ‘거짓말쟁이’, '삽화가'가 된다. 건축가임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거짓말'한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대상과 말이 일치하기 전까진, 거짓말일 수 있는 발화가 대상에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균열의 이유는 묘사하는 대상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가리키거나,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아니라 발화자의 주관성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대화는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설득이나 강요에 가깝다. 리사는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엄마를 제 기대에 부응하게끔 발화를 쏟아낸다. 마라는 얀에게 '누구도 너를 안 좋아해'라며 자기 생각으로 대상을 단정적으로 규정한다. 대화는 공격과 방어를 오간다. 상대방이 나를 변형시키려 할 때는 거절, 침묵, 답변을 거부한다면, 내 욕망이 들끓어 오를 때는 발화를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를 거부하지 못한 상대방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나의 모습에 변형을 겪거나, 상대방이 대신 말한 나로 인해 텍스트와 실재 사이의 괴리를 겪는다. 마라는 설계도가 그려진 pdf 파일의 문자와 그림이 겹치는 오류를 봤다. 이윽고 다시 pdf 파일을 열어보니 정상적으로 작동되었고, 이후에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겹침은 이례적인 사건이었고, 문자와 이미지가 분리되는 것이 보편이다. 서로는 말로 상대방을 왜곡, 중첩, 규정하려 들지만, 그것은 결국 찰나적인 사건이어야 한다.      


시선은 타인을 호출하여 내 동공과 중첩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리사의 시야에서 마라가 사라진다. 상대방의 시선이 덧씌워진 내가 사건이고, 다시금 분리돼서 상대방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편이 되어야 하리. 영화의 결말에서 하나의 공간에 무수하게 겹쳐 있던 사람들이 각각의 공간으로, 또 각각의 숏으로 나뉜 것도 그렇다. 물론 그 분리와 단절이 영원할 순 없으랴. 그렇게 분리된 것이 나의 진정한 자유일지 모르지만, 또 다른 자유를 위해선 문을 열고 나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나아간 곳에선 시선으로, 말로, 욕망으로 나를 변형하려한다. 그렇게 나는 우두커니 서서 머무를 수 없다. 변형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지만, 이전에 방에 들어왔던 나와는 결코 같지 않다. 반복되는 것은 내/외부의 오고 감, 문의 열고 닫힘, 이에 따른 변형이지 결코 불변하는 내가 아니다. 이렇게 취르허 형제는 익숙한 감각과 질서에서 발생하는 낯섦, 불쾌를 포착한다. 불쾌는 서로에 의해 자신이 왜곡되는 현장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피상적으로 감정이 제거됐다시피 한 인물들의 심리를 극의 외부에서 읽을 수 없고, 객관적으로 극을 관조하는 감상자들이 곧 자신의 초상을 마주하고 있으므로 불쾌와 낯섦이 발생하지 않을까.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 실망스러운 타인, 심지어 엄마조차도, 그들을 오직 나를 위해서 변형하려는 말과 욕망,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에서 감지하지 못한 서늘한 부조리가 자리하고 있으니. 그렇게 변형과 머묾을 오가는 인간은 곧 영화 속 제 욕망대로 인간의 등을 올라타고 집에 머무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거미와 다를 것이 없다. 이전 작에서 인간은 개, 고양이와 다를 바가 없지 않았었나, 본 작품에서도 인간은 거미란 동물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동물의 개입이 인식의 확장을 불러온다. 다만 이전 작과 거의 동일한 구조에서의 미온한 변화는 그들의 데뷔작만큼이나 예민한 감각을 전달하지 못하며, 그렇게 안일한 변주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는 100분이라는 러닝타임조차도 길게 느껴진다. 이미지로 승화되지 못한 대사의 문학성은 양 매체의 균형을 깨트리고, 영화가 문학에 의존하게 되어 안일한 형식으로 전락한다. 

-----------

감상일: 220709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마이크 밀스, <컴온 컴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