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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5. 2022

스테판 브리제, <또 다른 세계>

숫자와의 이혼

스테판 브리제(Stephane Brize), <또 다른 세계>(Another World) 

- 숫자와의 이혼    

“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진보하면 할수록, 그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는 더욱더 끔찍하게 되었다.” -에른스트 블로흐-

티에리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책임져야 하는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못하다. 실업 상태다. 아내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어떻게든 재취업을 해야 한다. 이에 국가가 제공하는 취업교육을 받지만 그것은 효용성이 없다.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취업은 되지 않는다. 취업교육이 무의미한 이유는 취업시장에서 교육 수강 내역이 쓸모없게 치부되기 때문이다. 또 월 500유로의 지원금은 세 식구의 삶을 이어 나가기엔 역부족이다. '시장의 법칙'은 잔혹하다. 고용주에게 절절히 호소하고 굴종하는 태도, 시장의 법칙은 노예화, 체념을 노동자에게 내면화시킨다. 이런 이들이 모인 곳이 티에리가 어찌어찌 취업한 마트다. 티에리는 마트의 보안 요원이다. 절도를 감시한다. 하지만 티에리가 마주하는 절도범들은 대체로 불우한 삶을 이어간다. 그들의 절도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일탈이다. 마트에서는 고생한 노동자들을 위해 형식적인 퇴직 파티도 열지만, 퇴직 대상자는 표정이 어둡다. 어쩌면 절도범과 퇴직 대상자는 순환을 이룬다. 절도범 중에서는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퇴직자와 유사한 노년층도 있었으니, 또 티에리가 조금 만 더 벼랑 끝에 몰리면 절도범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절도범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인간성을 포기한다. 안정된 삶은 얻었지만, 그의 양심은 따갑다. 절도범들도 그렇고, 마트에서 편법을 일삼는 직원들도 그렇고, 이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서 그런 일을 지행했다는 것을 알기에 냉정하게 처신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티에리가 악행을 고발한 앙셀리라는 직원은 자살한다. 수치심, 그리고 직장에서 해고됨에 따라서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 앙셀리를 짓밟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것일까, 인간다운 것일까. 그래서 티에리는 앙셀리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직원을 마주했을 때, 이를 제지하지 않고 마트를 뛰쳐나간다. 시장의 원리에 순응하여 인간성을 포기하기보단, 어떻게든 인간성을 지켜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아마데오 로랑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아쟁의 파랭 공장에서 일한다. 공장은 노동자들에게 상여금도 지급하지 않고, 또 저임금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5년간의 계약을 약속한다. 하지만 독일 본사의 명령으로 2년 만에 공장을 폐업하려 하고, 약속을 파기 및 불이행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티에리와 달리 아마데오는 적극적으로 항거한다. 노조를 조직하여 파업을 시작한다. 정치권력에게 호소한다. 하지만 프랑스 당국은 노조의 편에 서지 않는다. 국민들의 삶이 아닌, 국제적으로 노출될 지표, 통계를 위해서, 사법부 또한 기업이 약속 일부를 이행했다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그들의 주장을 기각하고, 가진 자의 편에 선다. 노동부, 경제인연합회 등도 노동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노동자는 약속을 지켰지만, 노동자가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제도, 구조, 기업은 계약을 파기하며 노동자를 배신한다. 그들은 계속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어둠 속에 숨어서 침묵하고 방관한다. 길고 긴 기다림, 생존의 위협, 불만을 호소할만한 대상은 드러나 있는 노동자들, 이에 노조는 서서히 분열한다. 서로의 희생을 충분히 감내해야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감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국가는 내몬다. 전기세, 급식비, 집세도 낼 수 없어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심지어 국가는 취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민을 장려한다. 그래서 아마데오는 분신자살한다. 국가가 국민을 보듬지 않는다면, 국민은 과연 어디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1966년 프랑스 렌 출신의 스테판 브리제 감독의 <아버지의 초상>(원제 <시장의 원리>)과 <앳 워>를 요약한 것이다. 티에리와 아마데오, 이름은 다르지만 연기한 배우는 뱅상 랭동으로 똑같다.(브리제는 항상 랭동을 주연으로 기용한다. 사회주의적인 영화와 반복된 배우들을 기용한다는 점에서 브리제는 유사한 세계관을 이어가는 동향의 영화감독, 로베르 게디기앙을 닮았다) 상황도 인간성을 회복한 티에리가, 이제는 기업에게 굴종하지 않는 아마데오로 성장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 <아버지의 초상>과 <앳 워>는 서로가 시퀄이자 프리퀄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진보를 방해하는 국가가 원인이 되어 아마데오는 불에 타 죽어간다. 브리제는 이를 다르덴 형제를 연상케 하는 핸드헬드와 롱테이크의 조합으로 포착하였으며, <앳 워>의 분신자살은 감상자의 도처에 널려 있는 좁고 긴 스마트폰의 화면비로 담아냈다. 작금의 리얼리틱한 영상매체로 현실을 포착했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아마데오는 가까스로 살아나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죽지 않은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일까, 스테판 브리제는 뱅상 랭동이 연이어 출연하는 세 번째 노동 영화 <또 다른 세계>를 선보인다. 본 작품에는 랭동과 2008년까지 부부관계였던 배우 상드린 키베를랭도 출연하며, 실제 배우의 관계가 영화의 리얼리즘을 강화한다. 랭동과 키베를랭은 부부였다가 이혼을 했지만 자녀들 때문에 서로 마주치게 되는 현실 속 부모로서의 책임이 영화 속 배역과 유사하고, 무엇보다 영화 오프닝에서 카메라에 포착되는 사진 중 일부는 랭동과 키베를랭의 실제 결혼 생활을 보존한 사진들이다. 몇몇 사진은 현실에서는 가족이 아닌, 다만 배역으로서는 가족이 되는 안소니 바이온, 조이스 비브링과 함께 찍은 사진, 즉 허구로서 꾸며진 사진들이다. 이러한 허구 사이에 배역이 아닌 현실 속 랭동과 키베를랭의 사진이 뒤섞인다. 영화는 두 배우의 관계와 사진을 뒤섞음으로써 허구의 경계선을 현실의 요소로 지워내는 리얼리즘을 강화한다. 그렇게 현실과 닮아있지만, 배역으로서의 사진을 뒤섞음으로써 현실과 마냥 같지는 않다. 브리제가 자연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탐미주의를 뒤섞었던 <여자의 일생>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영화를 만들되, 마냥 현실과 같은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현실과 마냥 같다면 현실을 바라보지, 영화를 감상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선 브리제의 전작 중에선 <앳 워>, 그리고 타인의 작품에선 자파르 파나히의 <3개의 얼굴들>처럼, 딸 줄리엣이 필립의 생일을 축하하는 영상 편지가 스마트폰의 길고 좁은 화면비에 인서트되며 현실과 흡사한 매체가 침투한다. 이 또한 우리가 현실에서 밀접하게 접하는 친밀한 매체를 다만 빌려올 뿐, 거기에 담긴 것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게 현실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영화,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 봐야만 하는 이유를 브리제는 제시한다. 일단 도입부의 사진은 리얼리즘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매체의 특징으로 시간성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사진으로 포착된 화목한 순간은 얼어붙거나 흑백이 색을 앗아간 과거인 반면, 영상은 치열하게 협상하고 다투는 움직이는 현재를 포착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진과 영화라는 상반되는 두 매체는, 유실되어버렸고 멈춰버린 화목한 과거, 이와 반대되는 공격적이고 냉정한 현재를 움직임으로 대비하며 강조한다. 이렇게 브리제의 연출은 현실이거나 실제와 닮은 내용을 매체만의 방식, 즉 예술로써 더욱 주목하게끔 가시화한다. 다른 연출도 그렇다. 사진이 포착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필립과 안느가 이혼 소송을 하는 시퀀스로 이어진다. 액자 속 사진에 든 필립과 안느는 하나의 프레임에 옹기종기 함께 있다. 또 거기에 줄리엣이나 루카스가 함께 있어 셋이나 넷이 ‘하나의 프레임에 다 함께’ 포착된다. 하지만 이혼하는 부부의 현재는 다르다. 필립과 안느는 절대 서로의 숏에 침범하지 않는다. 이들은 각각의 숏에 홀로 담기며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며 치열하게 교차될 뿐이다. 이렇게 나뉘고 단절된 숏, 고립된 프레임은 부부의 관계에만 그치지 않는다. 남과 여의 발언권, 변호사와의 관계도 지칭한다. 부부는 각자가 고용한 변호사와 동석한다. 필립은 자신이 고용한 변호사의 말을 끊고 스스로 변호할 정도로 주체적으로 제 의견을 피력한다. 하지만 안느는 침묵한다. 그녀의 말을 변호사가 대신 전달함에, 변호사의 발화가 안느의 뜻인지, 변호사의 과장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변호사를 제지하여 자신이 의견을 주장하는 필립은 고용한 변호사와 함께 프레임에 온전하게 포착된다면, 침묵하고 있는 안느는 변호사가 포착될 때 그녀의 얼굴 일부, 그마저도 잘려나갈 듯이 파편적으로 포착된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떼자 온전하게 변호사와 포착된다. 진정 자신을 변호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아니라 변호사가 안느를 통해 제 주장을 강화하는가, 이러한 관계의 차이가 숏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혼 소송은 분명 현실 속 무수한 사례들, 그리고 두 배우의 경험에서도 파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평범하게 보여주지 않고, 숏에 대상을 어떻게 담고, 이것을 어떻게 자르고 이어낼지를 고심하는 영화다운 방식, 즉 편집으로 브리제는 대신 말한다. 이러한 숏의 분절은 사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충돌하는 사측과 노조 측의 토론, 그리고 관리자와 노동자간의 불화 등을 포착할 때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프레임에 이들은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분리에 순응하지 않는다. 더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브리제는 '함께'를 말한다. 브리제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상대의 숏에서 동떨어지거나 홀로 고립되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초상>에서 동료의 자살, <앳 워>에서 아마데오의 분신자살처럼 말이다. 그래서 함께여야 한다. 그 중에서도 부부 모두의 책임인 자식, 특히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 불안하고 난폭해진 루카스를 책임이 있는 부모는 홀로 내버려둘 수 없다. 또 안느는 이혼을 바라지만, 필립은 이를 바라지 않는 눈치다. 루카스에 대한 책임과 바라지 않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이를 촉발시킨 고립된 숏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필립은 안느가 있는 숏으로 향한다. 그간 혼자 고립돼서 부부·가정의 책임을 홀로 떠안은 그녀를 위로하고 어루만진다. 그 책임을 나눠 갖으며 루카스가 폐쇄 병동에 갇혔을 때 안느 곁에서 함께 머리를 맞댄다. 또 결말에서 유학을 간 줄리엣을 제외한 세 가족은 하나의 테이크 안에, 분절되지 않고 온전하게 완성된다. 그리고 필립이 루카스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의 연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 쏟아지는 발화는 매우 이성적이다. 회사에서 많은 경영진들은 모두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타당한 논거를 들어서 제 주장을 펼치고, 이혼 소송에서도 필립은 제 자신이 얼마만큼 가장으로서 책무를 이행했고, 반면 안느는 그가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루카스 또한 마찬가지로 부모가 병원에 오는 데 소요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려 하고, 병원에 입원한 동안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숫자’가 뒤처진 것이 두려워 빨리 복귀하여 졸업 및 취업하고자 한다. 그들의 발화에 감정은 허용되지 않고, 또 지연도 수용되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서 오직 허용되는 것은 계산가능하고 논리적인 것, 그리고 효율적인 것뿐이다. 이러한 숏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혼 조율 이후에 필립을 포착한 숏, 약을 먹고 러닝머신에 올라탄 다리를 비추며, 넥타이를 매는 시퀀스다. 건강과 일에 있어 효율적인 숏들만 취합하고 이어내며 구성한 시퀀스, 하지만 그는 이성적으로는 따졌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부부와 가정이 느끼는 감정에 있어선 문제가 분명하기에 이혼 당할 위기에 처했다. 본 시퀀스의 삭막함이 곧 안느가 느낀, 문제가 없지만 문제가 있는 불쾌였으리.   

  

영화는 그러한 감정을 회복한다. 영화의 편집은 대체적으로 매우 재빠르다. 여러 의견이 치열하게 오가고, 그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8월 국내에 소개된 <풀타임>이 연상되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편집이다. 그런데 루카스와 함께 축구를 하는 장면은 여러 숏이 아니라, 단 하나의 숏에 포착된다. 다른 시퀀스라면 무수한 의견과 내용이 오갔을 시간에 오직 필립과 루카스가 축구하는 장면만 유유자적 담긴다. 결말도 마찬가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내용 없이, 그저 감정적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세 가족의 단란한 풍경을 느린 테이크 안에 보존한다. 무엇보다 이 순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감정적인, 그리고 해석이 불가능한 배경음악이 대신 말한다. 그간 듣고 해석하여 재빨리 내 의견을 피력해야만 하는 공격적이고도 이성적인 대화, 그렇게 쉴 틈 없는 합리적인 청각의 홍수로부터, 배경음악은 오로지 그 자체에 유일하게 빠져들 수 있는 감각에의 몰입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꼽을 연출은 핸드헬드다. <아버지의 초상>이나 <앳 워>에 비한다면 본 작품은 그리 역동적이지 않는다. 이전 작품들에서 랭동이 블루칼라를 맡았다면, 본 작품에서는 화이트칼라를 맡는다. 그래서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덜 흔들릴 수밖에 없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린다는 것은 안느의 말처럼 '기업에 결혼한 그'에 의해서 가정에선 이혼당하고 '분리'되기 때문이랴. 또 이혼 과정에서 안느를 이해하고 노동자에게 마음이 쏠리며 양측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변하는 그의 '불안한 심리'는 핸드헬드일 수밖에 없으랴.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 그는 이혼한다. 이혼은 본 극에서 수미상관을 이룬다. 도입에서는 안느와 이혼하고, 말미에서는 기업이 필립과 올리비에를 분리시키려하며, 끝끝내 필립은 기업과 이혼한다. 이혼 과정에서 주체적인 분리를 실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부부간의 이혼을 바라는 쪽은 안느다. 필립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가정에 지불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지급한 돈의 액수, 횟수로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기업에 충성한 필립은 돈이 전부가 아닌 가정생활의 감정적인 측면, 아이에 대한 책임에 소홀했다. 식구들과 함께 주말이나 휴가를 보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그렇게 안느에게 떠맡겨진 필립의 책임을 덜어내고, 이제 그녀는 자신을 회복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을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바로 이혼 소송을 이어갈 경제력이 넉넉하지 않다. 일단 그녀는 경력이 단절되었고, 또 필립이 노동자들을 구조 조정하는 것 대신 교육과 재배치를 주장할 때, 다른 임원이 나이 50 넘어가는 노동자들에게 그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말하는 것처럼, 안느 또한 경제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가 어려운 나이다. 소송을 이어갈 수 없음에 절망한 안느는 필립에게 위로를 받는다. 본 이혼 과정은 결코 동등하지 않았다. 경제력이 우위인 필립, 이에 소송을 끌어나갈 여력이 있는 남편과 달리, 경제력이 미약한 안느는 자신이 주도하여 이를 끌어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필립이 반성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에 의해서 이혼이 일단락되어, 다시 남성의 경제에 종속되며 스스로를 잃은 상태로 둘 뻔했다. 이후 영화 말미, 필립과 기업 간의 이혼에서는 그의 위치가 뒤바뀐다. 노동자들에게 말을 잘못한 이유로 그는 해고될 위기에 처하나, 사측에선 더 까다로운 강성인 올리비에를 해고하는 대가로 필립을 남기려 한다. 소송을 이끌어갈 수 없었던 안느처럼, 필립 또한 자신의 일자리와 동료 올리비에를 위하는 인간성, 양자 모두를 취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이혼이 안느가 주체적인 제 자신을 되찾으려던 것처럼, 필립도 기업이 요구하고 계산한 이혼이 아니라, 진정 제 자신이 바라는 이혼을 실현한다. 안느와의 이혼 과정에서 가정에 충실해왔다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과 이혼하는 것처럼, 기업과의 이혼에서도 올리비에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신의 실수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짊어지며 비인간적인 경제인으로서 자신과 이혼한다. 그렇게 하나였던 존재가 둘로 다시 갈라서는 이혼은 주체적이어야 한다. 필립이 기업과의 이혼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안느와의 이혼 과정에서 ‘종이가 아닌 현실’을 돌아봤기 때문이다. 그간 필립은 자신이 가정에 지불한 돈의 액수와 횟수만 바라봤고, 벽에 걸린 과거의 화목한 가족사진만 쳐다봤으리라. 기업에서도 노동자들의 실제 현장이 아닌 보고서만 들여다보던 필립은 가정 또한 텍스트로 환원하며, 이로써 텍스트로 환원할 수 없는 것들을 외면했다. 이를 그의 분신과도 같은 루카스가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계측한 내용을 적은 종이만을 들여다보는 모습, 숫자로 경쟁하는 사회에 다시 복귀하고자 전전긍긍해하는 태도를 바라보며 반성한다.     


그래서 필립은 더는 종이, 그리고 거기에 적힌 숫자를 보지 않는다. 이제 종이가 대변하고 가리키는 실체를 본다. 안느도 숫자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가정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그녀의 얼굴은 달랐다. 그리고 정신건강에 큰 이상이 생긴 루카스를 보니 노동자들의 작업 현장에 그간 방문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진 너머의 가정 또한 등한시했음을 깨우친다. 루카스는 필립이나 안느를 쳐다보지 않고 종이를 쳐다봤다. 부부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선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운다.’ 안느와 필립의 결정적인 차이는 표정이다. 기업에서 경영진들은 언제나 날카롭거나 냉정하고 이지적인 무표정이 일반적이다. 타인의 발화, 특히 노조의 의견을 포용하지 않고 튕겨내려는 방어적인 표정, 제 주장으로 맞받아치려는 공격적인 표정을 유지한다. 자신이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가 표정에 반영된다. 하지만 안느는 제 자신의 처지, 그리고 폐쇄병동에 입원하는 루카스를 보고 그 처지에 깊이 몰입하여 울음을 터뜨린다. 필립 또한 서서히 공격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대상을 포용하는 감정을 회복한다. 병원에 입원한 루카스가 회복을 위한 조금의 여유도 없이, 학교와 사회로의 복귀를 위해 전전긍긍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남몰래 주차장에서 비관하고 탄식한다. 이러한 감정이 회복되는 공간이 '주차장'인 것도 주목할법하다. 주차장은 차가 정지한다. 쉴 새 없이 차를 운전해야 하는 도로,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떠들어야 하는 회의장과 다르게 멈춰서 가만히 기다린다. 누가 얼마만큼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지를 평가하는 기업 및 노동현장과 다르게 비효율적으로 정차된 현장, 그저 가만히 돌아오기를 무의미하게 기다리는 주차장, 바로 그곳에서 안느와 루카스를 향한 감수성을 회복한다. 또 안느 및 루카스와의 일상을 회복하는 숏에서 중요한 행동은 바로 '얼굴 따라 하기'다. 이들은 필립의 얼굴 표현을 보고, 그가 누구를 따라하는지 맞추는 게임을 한다. 필립은 문자로 환원되지 않은, 오직 시각적으로 그 사람을 대면해야 알 수 있는 특징에 집중하여 이를 얼굴로 표현하고, 마찬가지로 루카스와 안느도 필립의 얼굴에 주목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타인을 골똘히 생각하여 정답에 다다른다. 그렇게 이들은 가족 간의 시선을 회복하고, 이로써 얼굴을 마주하며, 주차장에서 잃어버린 나를 회복한다.     


회복하기 이전, 자신을 잃어버린 이유는 다름 아닌 '숫자' 때문이다. 기업은 언제나 통계와 보고서에 적히는 숫자만을 요구한다. 실제 노동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진실 및 처우는 알거나 고려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필립은 해고해야 할 노동자를 검토한다. 이를 위해서 보고서를 펼친다. 어떤 노동자들은 보고서에 능률이 좋지 못한 것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그들은 노련하여 긴급한 문제를 해결한 이력이 있거나, 또 아픈데도 회사에 출근한 사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보고서가 요구하는 기준이나 틀, 언어에 맞지 않아서, 오직 그 노동자를 현장에서 접한 필립과 올리비에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필립은 그들이 해고당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숫자만을 강조하는 이념에 속한 간부들 앞에서 이는 무기력하다. 이에 대외적으로 나타나는 숫자를 위해서 은폐되는 노동자들의 임금, 즉 드러나지 않는 숫자는 기꺼이 희생하고 감축한다. 이렇게 숫자, 그것도 대외적인 기업의 평판과 생산성, 그리고 주주들의 숫자를 위해서 이를 구성하는 무수한 노동자들은 도외시된다. 기업은 당장의 숫자를 위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구조조정을 감행하지만, 보고서나 숫자가 담지 못하는 사실들을 고려하지 못함에 그것이 낳을 여파는 더 복잡한 현실에 온당 부합하지 않을 테다. 루카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동안이 얼마만큼 손해를 입었는지 계산한다. 루카스가 속한 청년 세대의 평균적인 숫자에 따라가지 못하면 멸시를 당하거나 위축되는 모양이다. 이에 루카스는 손해를 보상받고자 하루 빨리 퇴원하고 졸업하여 페이스북에 입사해야겠다고 초조해한다. 그는 하얀 종이에 손실, 소요된 시간 등을 계산한다. 하지만 하얀 종이와 달리, 현실은 오만 낙서가 가득한 종이다. 하얀 종이에는 어떠한 변수도 없겠지만, 오만 낙서로 가득한 현실에서는 갖가지 변수가 많다. 이를 하얀 종이에 죄다 옮겨 담을 수 없으니, 필립과 안나가 병원에 오면서 소요된 시간을 계산한 숫자는 결코 현실을 온전하게 가리키지 않는다. 그래서 루카스의 취업 계획, 페이스북 CEO와의 대화도 그것이 단지 글자에만 그칠지, 아니면 현실에 타당하여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본 작품이 안느와 필립의 재결합, 그리고 가족의 봉합으로 향하는 것처럼, 영화는 가정과 기업의 분단된 관계 개선, 노동자와의 화해 또한 촉구한다.      


하지만 필립은 여전히 제 머리만 싸맬 뿐, 루카스를 현실로 매개하지 못한다. 우리는 숫자가 인간을 대체해버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그렇게 무기력하게 시대에 주저앉음에 소외돼서는 안 되는 노동자, 숫자보다 지금의 건강 상태에 집중해야 하는 사람들의 ‘인간다움’이 소멸된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신이 계산한 숫자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아 루카스는 현실 유리적인 정신병에 걸리는 것일까, 숫자의 인간이 되어버린 그들은 현실의 인간으로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인가. 본 숫자는 이기적인 이익만 포함한다. <아버지의 초상>에서 벼랑 끝에 내몰리는 노동자들, <앳 워>의 분신자살 등은 숫자를 위해 버림당한 인간의 말로를 보여준다. 그러나 루카스가 폐쇄병동에서 다른 환자와 '협동'하며 인형의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을 닮은 인형이 걸어갈 수 있으려면 두 명의 ‘조력’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로 나아가며 산다. <아버지의 초상>속 일반 노동자, 그 이후 <앳 워>에서 노조 간부, 그리고 본 작품에서는 기업의 임원으로 랭동은 진전을 이뤘지만, 이러한 발전 속에서 인간다움과 삶은 점점 더 메말라간다. 하지만 영화 말미, 집을 팔 때 안느와 필립을 포착하는 구도에서 좌측과 우측에 무수한 헤드룸이 비는 것처럼, 이후 들어차게 되는 필립, 안느, 루카스를 기다리듯 보이는 것처럼, 공존을 회복하며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리. 그래서 필립의 기업과의 이혼은 여전히 올리비에와 공존하기 위한, 또 안느 및 루카스와 함께이기 위한 ‘비인간성 내지는 숫자와의 이혼’이다. 그렇게 자본주의, 숫자 너머의 ‘또 다른 세계’로 향한다. 브리제의 앞선 두 작품과 본 작품 모두 랭동은 현실, 그리고 기업을 떠나는데, 앞선 두 작품에서 현실을 떠난 노동자는 죽거나 생존이 불확실해서 그 이후가 포착되지 않았다. 그리고 본 작품의 경영진은 살아서 동료, 식구들과 동행한다. 그것이 비교적 해피엔딩인 본 작품의 씁쓸한 뒷맛이다. 노동자는 포착 불가능한 퇴직 이후의 삶, 한편 부르주아는 포착 가능한 해고 이후의 삶. 그러나 필립의 떠남에 의해서 올리비에와 노동자들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았나, 필립의 선택에 의해 본 작품에서 올리비에와 노동자는 포착되지 않더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던가. 그래서 필립의 개인적 구원이 아니기에 마냥 씁쓸하지는 않다,  <아버지의 초상> 및 <앳 워>의 노동자가 수혜를 입을 수 있으므로, 그 구원은 부르주아, 임원 이전의 공존하는 인간을 회복할 때 가능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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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05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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