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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13. 2022

샬린 부르주아-타케트, <아나이스 인 러브>

활짝 핀 꽃의 시간은 낭비하기엔 너무 짧으므로

샬린 부르주아-타케트(Charline Bourgeois-Tacquet), <아나이스 인 러브>

(Anaïs in Love) - 활짝 핀 꽃의 시간은 낭비하기엔 너무 짧으므로    

“사랑이란 어떤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청춘과 사랑.

①청춘: 청년들은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 존재다. 청년은 미래의 삶을 확실하게 설정하고 싶고, 또 좋은 환경으로 도주하고 싶지만, 어떻게 그래야 하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통속 소설 속 '용기 있는 청년'들의 전형, 행복이나 사랑과 승리를 위해 말썽꾸러기, 가출 소년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꿈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존재다. 매일 똑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면 서서히 죽어가고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데, 청춘은 쳇바퀴처럼 연상할만한 생각도 없고, 모든 것이 너무 새로운 나머지 온 일상이 여행 같은 존재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는 청년은 기성세대의 관습을 추종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기존 세상에 대립되는 이상을 품는다. 청춘, 그것은 변모하는 시대, 창조적 제작,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회운동의 동인이자 동의어다. 모든 것이 모호하지만, 그만큼 여러 가지 능력을 미리 느끼고 갈망할 수 있다, 단지 선택하기 어려울 뿐이다.

②사랑: 블로흐는 로코코 시대의 화가 중 오직 와토만을 높게 칭송하였다. 블로흐는 다른 로코코 화가들의 노골성과 다른, 은근한 사랑의 본질을 오직 와토만이 간파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눈은 먼 곳에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계속 동공을 회전한다. 우리의 눈은 가린 베일의 유혹에 휩싸이고, 코는 아스라이 감춰진 에로스의 체취를 향해 킁킁거린다. 은근한 사랑의 속성이란, 쾌락을 누리기 전까지는 멀리 떨어져서 불안하게 은폐되고, 그렇기에 다가가고 싶은 법이다. 사랑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래서 막상 그 동경에 다다르면 정작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그 베일 너머를 다각도로 상상하며 사랑의 즐거움을 누렸는데, 실존하며 까발려진 대상은 이상에 대응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자아내기 일쑤요, 이에 환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충족감을 얻지 못한 채 낙담에 머무른다. 물론 그 꿈은 현실과 합치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윽고 빠져나가는 것은 꿈이다. 사랑과 결혼, 그것은 곧 숙취, 김빠진 맥주, 그래서 무한정 꿈을 꾸는 우리는 다시 새롭게 사랑한다, 현실이 아니라 상상을… 그간 이러한 청춘과 사랑이 결합된 연애담은 프랑스 멜로가 진국이었다. 최근 개봉한 작품들만 하더라도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파리 13구>가 생각난다.      


이러한 청춘의 사랑, 그리고 프랑스의 연애담을 1986년 로양 태생의 샬린 부르주아-타케트가 이어간다. 그녀의 장편 데뷔작 <아나이스 인 러브>에서 말이다. 일단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시작, 아나이스가 꽃집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와 이내 곧 자전거를 챙겨 내달리기 시작한다. 아나이스의 정신 사납고 조급한 움직임, 이를 따라가는 영화의 연출도 자연스레 속도가 붙는다. 영화 전체에 거쳐 카메라는 한결같이 팔로우숏을 유지하며 아나이스의 뒤를 쫓고, 이러한 아나이스의 와당탕 재빠른 발걸음은 형식을 재촉한다. 이에 따라 영화는 아주 빠른 달리 숏과 뜀박질하는 듯한 핸드헬드가 특징인데, 이는 비슷한 운동성을 보여줬던 최근 개봉한 프랑스 영화 <풀타임>, 카메라 워킹보다는 편집으로 이와 유사한 효과를 냈던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연상된다. 그리고 이러한 '빠름의 동기'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맥락이 더 유사한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변덕스러운 청춘의 삶과 사랑을 보여준 율리에처럼, <아나이스 인 러브>의 아나이스 또한 이러한 청춘의 특성을 대담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춘의 특성, 일단 그들은 젊음을 허비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지금 여기, 끓어오르는 나의 청춘과 삶이 너무 중요하기에 남의 얘기를 들을 여력이 없다. 그래서 영화 속 집주인과 대화하거나 라울, 다니엘 등과 얘기를 나누더라도 그들에게 길게 붙잡히지 않는다. 어느새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청춘이 바라는 삶을 향해 급박하게 달려 나간다. 이에 영화의 연출은 항상 흔들리고 초조하다. 또 청춘은 아직 경험이 많지 않다. 모든 일에 초연하고 담담한 아니아스의 부모님이나 에밀리에 비한다면, 아나이스가 경험을 마주하고 드는 감정은 언제나 제 예측을 벗어난 ‘낯섦’이나 ‘생경함’이다. 시끄러운 화재경보기를 그냥 부숴버린 아나이스는 감히 제집에 불이 나리란 걸 예상이나 했을까, 에밀리와의 달콤한 연회 중 다니엘이 깜짝 방문 하리라는 걸 가늠이나 했을까. 그래서 이러한 만족스러운 시간, 안락한 시간을 '첫 경험'으로 항시 잃어버리는 청춘의 삶을 비추기 위해 선택한 불안정하고 급박한 연출은 서로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쉽게 지겨워하고 권태를 느끼며, 영원한 충만함보다는 무수한 경험과 감각을 원하는 아나이스는 '거짓말'하며 기존을 부정하고, 재빨리 다른 국면으로 뛰쳐나간다. 그래서 청춘의 영화는 연출이 필연적으로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으랴. 어제를 바라보기엔 오늘의 청춘과 미래의 젊음에 재촉당하는 젊은이, 그래서 항시 과거를 배반하고 새로운 오늘로 나아가는 청년들의 삶이 편집으로 가시화된다. 영화 초반에 아나이스는 별거 중인 라울과 재회한다. 임신 중절/출산을 두고 아나이스와 라울의 견해 차이를 좁힐 수 없는 만큼 분위기가 썩 좋진 않지만, 그간 바쁘게 달려온 모양인지 라울의 유혹에 아나이스는 부드럽게 안긴다. 그렇게 재빠르던 연출은 안정적으로 뒤바뀌고, 이후 영화는 침실에서 나뒹구는 남녀가 있는 숏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익히 자연스러운 인과에 따라 라울과 아나이스가 섹스를 즐기는 것이라 예상하리.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라울이 아니라 다니엘이다. 아나이스는 라울의 포옹을 그 당시에는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짧은 제 청춘이 너무나도 아까우리. 그녀는 하루 동안 꽃집에도 다녀오고, 집주인과 대화도 하며, 다니엘과 만나고 파티에도 가는 등, 제 젊음을 극도로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조금의 낭비도 불허한다. 그것이 곧 비유기적인 편집의 이어짐이다. 아나이스가 임신 중절을 하기 위해 부모님과 친한 의사에게 들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의사는 어머니의 항암치료를 위해 곁에 있으라고 조언하지만, 다음 숏에서 그녀는 자기 집으로 달려간다. 거기서 어머니가 아닌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숙박을 제공한다. 어머니에서 한국인 관광객으로, 그마저도 그들에게 길게 붙잡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한국인과 소통할 수 있는 영어를 포기하고 불어로 자기 얘기를 쏟아낸다. 그렇게 영화의 편집, 이어짐은 산발적이고 정신 사나운데 그것이 곧 청춘의 특성이다. 이는 청춘의 특성뿐만 아니라 사랑의 특성이기도 하다. 서두에서도 언급했고 본 작품도 그러하듯, 사랑은 만개했지만 쉽게 시드는 꽃, 금방 상하고 마는 늦여름과 가을의 건실한 과실이기에, 절정의 감정은 이내 곧 이별로 전환, 이어진다.     


또 기존 상태를 위반하며 위태로운 사선에 서게 되는 사랑은, 결국 탄탄한 지반 위로 되돌아가야 하므로 이별을 결심하거나, 그러한 헤어짐이 또 다른 위반의 계기를 낳기도 한다. 영화의 결말도 그렇다. 이전과 달리 상반되며 대비를 일으키는 공간·국면으로의 전환, 이어짐은 없지만 아나이스가 전혀 예기치 못한 결별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에밀리를 다시 유혹하며, 이어지는 숏은 에밀리가 종전에 남겨놓은 씨앗과 똑같은 싹을 피우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필연적인 '개인'을 탐구하는 극이다. 청춘만이 개인임을 지향하지 않는다. 아나이스가 부모님이 사는 해안 마을에 방문한 당시, 아나이스와 부모 세 식구는 한 프레임에 놓이더라도 아버지는 여가를 즐기러 자신의 자리로, 이내 곧 어머니와 아나이스도 책이나 암 재발 사실에 대한 이견으로 각자의 공간으로 멀어지고, 서로 놓이는 숏도 나뉜다. 아나이스가 에밀리와 우연하게 처음 만난 이후 교수와 연구실에서 대화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교수가 아나이스 곁의 카메라에 노출되고 있을 때는 학회 얘기가 오가지만 아나이스의 시야와 카메라 바깥으로, 즉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 아나이스는 에밀리와의 만남을 얘기하며 내게 집중한다. 이렇게 청춘과 사랑에 따른 '위반의 편집',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각자의 프레임으로 멀어짐' 등 청춘과 사랑을 가시화한 연출이 특징이다. 이러한 영화의 시작은 ‘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나이스가 꽃집에서 꽃을 사 들고 부산스럽게 뛰어나온다. 그녀는 왜 조급할까. 그 꽃을 들고 파티에 가니 이윽고 꽃이 세 송이 정도 망가지고 시들었다. 더 살펴보니 쓸 만한 꽃이 하나도 없다. 만개한 꽃은 시간이 촉박하다. 아름다운 꽃의 순간은 인간의 젊음이 가장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청춘'과 일치한다. 그래서 짧지만 찬란한 꽃의 시간은, 언제나 조급하게 제 자신을 채찍질하며 만끽해야 한다. 아나이스는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는 문장을 철학으로 삼는다.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다양한 것을 만끽한다.      


영화 속 꽃은 아나이스가 구입한 꽃다발, 그리고 오프닝 크레딧의 만개한 다채로운 꽃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꽃은 아나이스가 항시 즐겨 입는 각양각색의 원피스에 항상 수놓아져 있으며, 30살의 만개한 그녀의 젊음이란 꽃을 지칭한다. 꽃 원피스를 즐겨 입는 아나이스는 하나의 원피스만 입지 않는다. 처음에는 강렬한 빨강 원피스를 입었다가, 파티에 가기 위해 하얀 바탕에 노란 꽃이 수놓아진 원피스로 갈아입고, 또 푸르른 꽃이 수놓아진 원피스를 선택한다. 피어있는 상태, 그리고 특정 색채로의 상태에 짧게 머무는 꽃, 그래서 항시 변화하는 꽃, 청춘은 청년에게 그 막대한 에너지와 열정, 활력으로 '다양한 행위와 경험'을 주문한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청춘은 이기적으로 변한다. 제가 가진 청춘이라는 재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잘 알고, 그것이 눈 깜빡이면 금세 시든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나이스는 라울과 임신 중절을 타협하지 않는다. 다니엘과도 섹스는 괜찮지만 한 침대에서 자는 자신의 규칙만은 수정하고 싶지 않다. 인간인 아나이스와 다른 존재인 여우원숭이 질베르를 만지는 것조차 질색한다. 아나이스는 청춘이 요구하는 제 자신의 요구사항만 따른다. 하지만 그 꽃은 서서히 시든다. 에밀리와 아나이스의 부모님은 이제 중년이다. 청춘이 유일하게 가진 자신의 짧은 젊음, 그리고 찬란한 생명을 붙잡고 만끽하고 싶어 '현재'에 참여한다면, 에밀리는 ‘과거’를 숙고하는 존재, 그리고 아나이스의 부모님은 암의 재발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존재다. 아나이스가 어머니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애달픔에 휩싸이는 것과 다르게, 어머니는 비교적 담담해하고 심지어 아버지는 여전히 호쾌하다. 그나마 어머니가 슬픈 이유는 아나이스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미안함이랴. 아나이스가 저물어가는 짧은 청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부모님 세대는 붙잡는 것보다는 꽃의 저물어감, 시듦에 익숙하다. 아나이스는 어머니가 삶에 열의, 그리고 아버지와의 사랑에 심드렁해져서 더더욱 의욕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청춘을 잃어버린 혹은 사용한 대가로 경험을 축적했다. 에밀리는 이를 토대로 글을 쓰고, 아버지는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어머니는 딸을 향한 사랑을 배웠다.      


이에 반해 아나이스는 소유한 것이 없다. 유일하게 소유한 것은 청춘의 막대한 에너지, 그 끓어오르는 혈기가 가리키는 욕망뿐이다. 아는 게 없는 영화 속 청춘은 언제나 실패하는 자다. 철학자 가다머에 의한다면 '경험'이란 이제까지 닫혀 있던 주관주의적 사고를 뛰어넘는 ‘부정의 사건’, 그런 경험은 고통스럽지만 이를 통해 고뇌, 깨우침으로 성숙해갈 수 있다. 경험은 내 주관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것이기에 나의 뇌리에 축적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청춘은 이러한 경험이 잦다. 중년들은 무수한 경험을 축적한 대가로 청춘을 소진했다면, 청춘은 무수한 경험을 쌓기 위해 젊음이란 에너지가 남겨진 존재다. 경험이 없는 그들은 언제나 '우당탕'이다. 집주인이 아나이스에게 밀린 집세를 받기 위해서 방문한다. 그러나 아나이스는 집주인에게 내어줄 주스나 차도 없고, 또 밀린 월세를 당장 납부할 수 없으며, 시계조차 없어서 집주인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이후 아나이스는 화재경보기도 설치할 수 없고, 운전도 미숙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지닌 것은 미천하여 사실상 백지상태다. 앞선 경험과 기억이 얕음에 “내가 문제가 많나?”라고 그녀 스스로 질문하듯, 어떤 것도 예측하지 못한다. 아나이스는 피임도 실패했고, 집에 화재가 나리라는 것도, 모두 처음이다. 또 가진 것은 오직 제 자신의 청춘뿐이기에, 제 자신을 넘어서는 '언어'로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다. 남동생 발타자르는 질베르의 울부짖음이 시끄러워서 인간의 안정제를 먹이는 등, 청춘은 오직 협소한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기준으로 세계에 참여한다. 아나이스가 이를 두고 '육아 연습'이라 말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은 짧은 청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무수한 경험을 축적하여, 그 청춘이 가져다줄 값진 결실, 곧 사랑과 보완을 바란다. 그래서 아나이스는 라울, 다니엘 등 줄기차게 타인을 욕망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지지받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아나이스는 출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반면, 라울은 아나이스가 ‘미니 아나이스’를 낳아줬으면 좋겠다. 아나이스는 제 젊음을 긍정해주기를, 라울은 자신이 낳지 못하는 자손을 낳아주기를, 그렇게 상대방에게서 ‘보완’이나 ‘지지’를 바랐다. 하지만 이들은 나를 사랑하지 상대를 사랑하지 못하며, 그 상대는 나를 위한 보완이 못된다, 멀어진다.      


라울과 재회 전에 다니엘과 만났다. 아나이스는 폐소공포증이 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 이에 다니엘과 함께 타려고 했지만, 이내 곧 자전거만 태우고 자신은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다니엘은 폐소공포증을 극복시켜줄만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에서 아나이스는 어둡고 답답한 것이 싫어서 '불을 켜는' 사람이었는데, 다니엘은 무릎을 다친 아나이스를 화장실로 데려가는 와중에 불을 켜지 않는 사람이다. 아나이스의 집에서 다니엘과 밤을 보낼 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나이스는 다니엘에게 하룻밤을 내어주지 않고, 다니엘은 아나이스의 결함인 화재경보기 설치를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또 아나이스는 관광객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다니엘의 집으로 향한다. 다니엘이 통화를 받는 동안 아나이스는 기다려주기보다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드라이기를 찾기에 급급하다. 이후 방이 필요한 아나이스에게 다니엘은 제 침실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나이스, 라울, 다니엘 셋 모두 상대방을 통해서 자신을 지지받고자 한다. 심지어 다니엘은 늙어서 상대방을 포용해줄만 한데도 불구하고, 섹스가 안 되는 것은 아나이스 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삶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아나이스와 거리를 둔다. 다니엘에게 에밀리나 아나이스는 그저 소유물, 그녀들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드높이는 수단 같다. 영화관에서 다니엘은 아나이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에밀리의 무릎을 만진다. 에밀리는 그것이 거북하다. 하지만 다니엘 자신을 위해서 만진다. 이러한 소비적인 만남 가운데서 아나이스에게 에밀리는 어딘가 다르다. 일단 아나이스는 어지간하면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불어를 못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신의 말을 듣든 말든 혼자 불어로 떠들기 바쁜 화자였다. 아나이스의 말을 들어줄 청자도 없고, 그녀 자신을 청자로 만들어줄 만한 말을 하는 인물은 라울도 다니엘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나이스는 에밀리의 말을 듣고 싶다. 유튜브로 그녀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대화를 지속하고 싶었으며, 그녀의 강연이나 gv에 오래 있고 싶다. 에밀리 앞에서 아나이스는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그녀를 위해서 질문한다.      


에밀리가 작가로서 말하는 많은 것들은 아나이스의 동경과 이상이 깃들어있는 삶과 언어다. 부모님이 바라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에밀리의 철학이고, 아나이스는 에밀리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본다. 그렇게 자신이 소중하여 자기애가 가득하던 아나이스는, 이윽고 이상적인 자신이 투영된 에밀리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이제 곧 엄마와 작별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다. 아나이스에게 어머니는 라울이나 다니엘과 다른, 또 제 삶을 중시하는 아버지와도 다른, 역에서 딸을 기다려주고 언제나 자기보다 타인을 사랑하는 ‘진정한 연인’이었다. 아나이스도 유일하게 어머니의 말을 경청하고, 또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서 학회에서 먼저 전화를 거는 등, 어머니는 아나이스에게 타인을 위한 헌신과 지지라는 사랑의 본뜻을 가르쳐준다. 그런 상황에서 에밀리는 아나이스의 어머니와 세대가 일치하는 인물, 또 아나이스의 어머니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 미숙한 운전을 대신 해주는 어머니와 같은 기둥이다. 또 그녀들의 성격은 상반된다. 아나이스가 열정적이고 과감하며 현재만을 바라보고 뛰어든다면, 에밀리는 냉정하고 신중하며 과거를 숙고한다. 아나이스가 뜨거운 빨간 옷을 입고 초원을 활보할 때, 에밀리는 차갑고 냉정한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에밀리는 아나이스와 균형·조화를 이루고, 앞길을 터주는 존재다. 이러한 보완은 곧 아나이스의 자력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 그래서 '신비로운 것'이었다. 반대로 에밀리가 아나이스에게 빠진 이유도 중년인 자신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랴. 이러한 신비는 아나이스가 에밀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싹텄다. 다니엘은 정면을 다 알고 있는 사이다. 나체까지 볼 장 다 봤다. 그러나 다니엘의 집에 걸려있는 액자 속 에밀리는 '뒷모습'이다. 볼 수 없어서 신비로운, 그 이면의 정면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마구 솟구친다. 액자 속 에밀리도 뒷모습에 국한되는데, 심지어 그녀가 집안에 남기고 간 립스틱, 파운데이션, 귀걸이 등은 온통 주인을 유추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모호한 '흔적'들이다. 이런 미용품이 어울리는 존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할까, 아나이스의 얼굴에는 에밀리라는 존재를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가득 찬다.      


자신에게 먼저 연락하던 다니엘, 그렇게 ‘사랑받는 존재’였던 아나이스는, 이제 자신이 에밀리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래서 편지를 먼저 쓰고, 말도 먼저 붙인다. 아나이스가 사랑하는 에밀리는 '바다의 존재'다. 에밀리의 방에 걸려 있는 액자는 바다, 또 그녀가 옷걸이에 걸어두고 간 옷도 푸르른 바다색 원피스다. 본 바다는 아나이스에게 동경의 공간이다. 어머니의 암 재발 소식을 들은 이후, 그녀는 유한한 생명의 제약과 한계가 뒤따르는 중력의 대지를 뒤로 하고, 무제한의 바다로 나아가 부력에 제 몸을 자유로이 두둥실 띄웠다. 아나이스에게 에밀리는 바다의 존재, 실제로도 에밀리와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신비로운 사랑을 비로소 성취하는 공간이 바로 바다다. 또 아나이스는 다니엘에게 에밀리가 알프스에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야생의 공간을 상상하며 매혹되었다. 그녀는 도시에 메여 있다. 도시에서는 집세도 내야하고 대학원생으로서 교수에게 시달리며, 빼곡한 건물과 구획된 공간이 부여하는 역할과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아나이스가 에밀리를 만나고, 이후 함께 춤을 추는 푸르른 초원은 무제한으로 펼쳐져 있다. 거기서 아나이스는 논문도, 학회도, 다니엘도 어떤 생각도 않고 그저 무제한인 자유를 추구하며 에밀리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불가능에 가깝기에 사랑은 신비롭고 소중하며, 닿고 싶어 애달프다. 아나이스가 학교에서 나오다 우연히 길에서 에밀리를 마주친 순간이 그녀들의 첫 만남이다. 교수를 내팽개치고 에밀리에게 달려가 자기소개한다. 이윽고 몇 마디가 오가다가 에밀리가 출판사에 가야 한다며 프레임 밖으로 멀어진다. 이후 학회에 가서 에밀리와 재회한다. 그렇게 재회하여 대화를 나누지만, 오딜이 숙박비 문제로 아나이스를 데려가 에밀리 곁에서 멀어진다. 이후 숙박비 문제를 노동으로 해결하니, 이제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요안이 에밀리와의 달콤한 연회에 훼방을 놓는다. 그것은 잘 익은 달큼한 사과, 곧 욕망의 선악과를 먹는 순간 들어온 노동의 제지다. 또 타인의 눈을 피해 오딜의 다락방에 숨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불을 켜보니, 오딜이 앙큼하게 숨겨놓은 레즈비언들이 여러 체위를 즐기는 고대 삽화가 드러난다. 사랑은 금단의 선악과, 어둠에 숨겨져야 하는 과거에만 가능했던 무엇인가. 심지어 다니엘이 들이닥쳐 불가능한 사랑의 심지에 아찔한 불이 점화된다.      


이후 학회를 준비하라는 교수의 지시를 거짓말로 위반·거역하고, 또 다니엘이라는 기존 연인과의 관계를 마찬가지로 이탈하며, 불가능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성거리던 두 여성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찰싹 달라붙어, 불가능했기에 더욱 농밀한 서로의 체온과 감촉을 절절히 즐긴다. 이후 바다에 들어간다. 하지만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되었던 두 여성의 사랑은 바다에 입수하며 롱숏으로 멀어지고, 그녀들의 사랑도 휴가가 끝나며 멀어진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는 순간보다, 재빨리 위로 올라가며 사라지는 에밀리의 편지가 아나이스에게 더 절절하다. 이후 다시 가능해진 사랑은 에밀리가 아나이스에게 이별을 고하며 불가능으로 뒤바뀌지만, 아나이스는 이에 순응하지 않고 다시 위반한다. 에밀리의 불가능한 현실, 그리고 ‘통보 및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던 아나이스 자신을 위반하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에 어긋나는 ‘슬로우 모션’을 쟁취한다. 이는 에밀리 또한 불가능을 쟁취하는 것이다. 에밀리는 56살의 자신에게 없는 대담함, 과감함을 아나이스에게 기대했다. 아나이스와 에밀리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던 당시, 에밀리는 소극적으로 편지에서 눈을 못 뗐던 반면, 아나이스는 아주 대담하게 스크린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 렌즈에 눈을 맞추는, 적극적인 소격 효과로 편지 그 너머의 대화를 나누었다. 영화가 스크린 바깥으로 돌출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동성, 불가능이다. 그런데 아나이스는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적극적인 존재임이 형식으로 부각된다. 에밀리는 청소년 시절, 자신에게 작가의 꿈을 불어넣어준 가르시아 부인을 존경했다. 그녀가 첫 사랑이었지만, 사랑은 그저 짝사랑으로 끝마쳤다. 에밀리는 아나이스에게 대담하면서 소극적이라고 말한다. 작가로서 주체적이고 대담하지만, 한편 사랑에 있어 레즈비언의 지향성을 포기하는 소극적인 존재가 바로 에밀리, 그녀 또한 자신이 바라는 대담한 얼굴, 지금 자신의 얼굴인 소심함을 아나이스에게서 본다. 아나이스에겐 에밀리에게 부재한 젊음과 대담함이 있고, 또 학회에서 잃어버린 책을 찾아주는, 그렇게 나를 위하고 보완하는 존재다.      


이별을 전달하는 에밀리는 아나이스에게 내어 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간 sugar daddy로 일컬어지는 부유한 ‘중년 남성’들이 언제나 ‘젊은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며 사랑 아닌 매매혼, 성매매를 계약했다. 그것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관계의 일반성’이었다. 그러나 아나이스는 대담하게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고 그간 불가능했던, 진정 나이 차이를 뛰어 넘는 ‘사랑’을 거머쥔다. 이렇게 다시 한번 짜릿하고 신비한 사랑을 쟁취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정리하며 샬린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에서 청춘과 사랑을 논한다. 보통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랑 이야기는 경제적으로 우위에 선, 나이가 지긋한 sugar daddy들이 젊고 파릇파릇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매매혼 합리화 판타지였다. 샬린은 그 남성을 여성으로 뒤바꾸고, 나이 많은 존재에게 마냥 종속되는 청년이 아닌, 오히려 리드하고 능동적인 청년을 그려내며, 경제나 지위에 예속되지 않은 진정한 사랑과 청년의 주체성, 여성성을 탐구한다. 그 청년, 여성의 사랑은 ‘자기애’이자, 소중한 ‘자신의 얼굴이 투영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상대방은 나의 주체성을 보완하고 성장시키는 스승이다. 그런데 일방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다. 스승과 스승의 관계로 상호 보완한다. 더불어 아나이스는 그간 딸이었다, 맹목적이고 무한한 어머니의 사랑을 다만 받을 뿐인. 그러나 어머니가 사라질 위기를 겪고, 또 내가 보이는 상대방이면서도 필연적으로 타인인 에밀리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사랑함으로써 어머니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다. 에밀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로가 동시에 딸이자 어머니가 되어 상대를 지지하는 것, 그것이 욕망과 다른 사랑이 아닐까.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주문하는 청춘의 사랑은 앞서 언급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그리고 기존 성 지향성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인 사랑은 <6번칸> 등을 연상케 하며, 규정할 수 없는 대자들의 자유로운 사랑에 주목하는 최근 퀴어 멜로극의 동향을 이어간다. 물론 영화 속 청춘만큼 작품의 연출 또한 확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여성과 청춘, 그리고 사랑에 대한 특출난 고뇌가 묻어있는, 감독의 가능성이 더욱 기대되는 발랄하고 신선한 데뷔작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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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13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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