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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0. 2022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 <가택연금>

나의 집을 개방하고 넓혀라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Aleksey German Jr.), <가택연금>(House arrest) 

- 나의 집을 개방하고 넓혀라     

“긴박한 시대의 무거운 요구들을 슬쩍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이 당면하게 될 미래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1924년 조지아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소련인이었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캅카스계 소련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다. 그의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 미장센은 국제적으로 높게 평가되었지만 소련 정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정치적 신념, 반종교주의를 주창하던 소련에서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믿었던 그는 당국의 눈 밖에 났다. 결국 동성애, 밀매, 횡령 등의 이유를 들어 파라자노프의 작품 활동은 강제 중단되었고, 1985년에 겨우 복귀한다. 1932년 러시아 태생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정교회의 신비주의를 탁월한 영화문법으로 승화시킨 거장이다. 하지만 그 또한 <잠입자>에서 소련의 정치적 비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이력과 정교회 신자라는 이유를 들어 소련 당국이 탄압하였고, 이후 타르코프스키는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죽는 날까지 모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193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알렉세이 게르만은 위의 둘과 함께 소련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추앙받으나,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소련 정부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쟁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검열 및 탄압을 받는다. 이후 1998년에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로 복귀한 그는 소련 서기장들의 비이성과 권위주의, 아첨과 탐욕에 매몰되었던 소련의 민낯을 여실히 까발렸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과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각본으로도 유명한 1937년 태생의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넘나드는 리얼리즘 영화로 20세기에 주목받았다. 하지만 당국의 부패상과 외곽지역의 실상을 생생히 담아낸 <아샤의 이야기>는 소련의 선전 방향과 상충되어 오랜 시간 상영금지 되었다. 80년대에 헐리우드로 향한 그는 소련이 붕괴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연극과 영화계를 오가며 활동하는 1969년 태생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동시대 러시아 정치·종교 권력의 마초주의, 극우화, 무능력,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스튜던트>와 <레토>에서 부패한 정치권력에 적대적인 그의 작가적 색채가 드러난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그를 횡령 혐의로 내몰아 가택 구금하여 작품 활동을 방해했고, <레토>의 후반 작업은 감독의 손을 벗어난 채로 마무리되었으며, 현재 그는 망명하였다.     


이렇게 자유롭기를 염원하는 러시아의 시네아스트들은 소련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당국에 의해 검열, 탄압을 받곤 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알렉세이 게르만의 아들인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의 신작 <가택연금>은 이러한 역사가 이어져 온 러시아의 오늘날을 비춘다. 197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의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는 소련의 전설적인 감독 알렉세이 게르만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유작인 <신이 되기는 어렵다> 후반 작업의 바통을 훌륭하게 이어받으며 아버지의 작가적 색채를 계승한다. 사실 국내에서 알렉세이 게르만의 색채를 느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간헐적으로 소개되었고, 그와 작품 세계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키라 무라토바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이 1회 개최되었으며, 그들의 적자라 할 수 있는 흐르자노프스키와 같은 감독들의 작품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레토>로 유명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이들의 색채를 희석해서 계승했다고 평가받는데, 소련 및 러시아의 부패상을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연극적으로 펼쳐내는 기법과 비이성적이고 초현실적이며 정치적 부조리가 산발적으로 펼쳐지는 연출이 그렇다. 세레브렌니코프가 이를 동시대에 접목시킨다면,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는 게르만 특유의 비정형성과 소련 시기의 부조리에 집중하며 아버지의 색채를 보다 직접적으로 계승한다. 일단 그의 작품은 매우 황량하고 쓸쓸하다. 그 황량함은 소련의 선전, 소수의 권력을 위해 희생되고 착취된 풍경에서 비롯한다. <페이퍼 솔저>에서 우주선 하나를 발사하기 위해서 카자흐스탄의 초원이 희생되고, 인민들의 실제적인 삶에 투자되어야 마땅할 거대 자본은 선전에 동원되어 지역은 낙후된다. 1917년 혁명 이후 20세기의 소련과 2017년의 러시아가 별 다를 바 없음을, 오히려 그 상대적 비교 속에서 과거를 찬동하게 됨을 보여주는 장엄한 서사시 <전자 구름 아래서>도 그렇다. 러시아인들은 과거 보다 못한 현재에 낙담하며 이민을 생각하거나 실현하고, 이에 의해 건설현장, 예술품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 반면 소련 해체 이후 떨어져 나간 키르기스인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다시 러시아어를 배우는 등 편입을 열망하고, 사회주의가 본분을 망각한 러시아에선 온갖 종류의 부정과 20세기에 그들이 저지하고자 했던 자본주의, 국제적 기업들을 막을 수 없다.      


시인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레닌그라드에서 1917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지낸 나날을 담은 <도블라토프> 또한 낙후된 인민들의 삶과 거짓으로 점철된 고위간부, 권력자들의 삶을 대비하고, 이를 폭로하려는 저널리즘을 탄압함에 풍경은 황량하게 변해만 간다. 그리고 아버지의 후기 두 작품에서 러시아 왕정,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꼬집었듯, 아들의 작품도 직위에 맞지 않는 인물들의 아둔함을 폭로한다. <페이퍼 솔저>에서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어야 마땅할 과학자, 의사, 우주비행사들은 오히려 비이성에 지배되어 느슨하고도 나른하게 퍼져있다. <전자 구름 아래서>에서도 미완, 고장, 사고 등이 만연하여 엄정하게 판단해야할 정치는 눈에 띄지 않고, 무능력한 이들은 박사학위를 남발하거나, 건축·예술에 참여하는 제 기능을 손 놓는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끝끝내 소련에서 망명하는 시인을 다룬 <도블라토프>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흡사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오마주한 듯한 느낌이 드는 <페이퍼 솔저> 속 남겨진 두 여인들의 연대, 국가가 중단시킨 건설현장, 미완의 작품들을 다시금 전진하게 만드는 <전자 구름 아래서>의 피날레 등 국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소련인, 러시아인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삶과 자유, 예술혼을 강력히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연출은 무대와 객석을 나누고 전자를 롱테이크, 인위적인 디렉팅으로 보여주는 연극성이 특징이지만, 이러한 가운데서 두 차원의 경계를 허무는 소격효과가 사용되어 본 참극에 대한 감상자의 답변, 참여를 요구한다. 또 주변인물들이 중심인물을 위해 작동하지 않고 각자의 얘기를 떠드는 등, 대단히 어우선하고 떠들썩한 현실성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연출과 <전자 구름 아래서>에서 멈췄던 미완의 예술, <도블라토프>에서의 탄압당하고 망명하는 예술가의 일대기가 <가택연금>에서도 이어진다. 한때 소련의 수치로만 여겨졌던 역사의 그늘이 다시금 푸틴의 통치 아래, 2020년대의 러시아를 향해 덮쳐온다.      


그 러시아를 이번에도 알렉세이는 롱테이크에 담아낸다. 본 작품에서는 이전 작품들보다 연극적이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덜하다. 전작들이 현실의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유리되어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뒤섞어 놓은 듯한, 예술에서만 가능한 비정형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면, <가택연금>에서는 시공간이 선형적이고 비교적 구체적인 오늘날이다. 그래서 롱테이크 또한 가상적인 세계관에서 끊기지 않는 연극적인 시간이 아니라, 실제와 유사하게 끊기지 않는 현실적인 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냥 현실적이지만은 않다. 영화 초반부에 다비드는 가부키 가면을 쓰고 작업을 하다가, 이윽고 카메라에서 멀어져 어디론가 향했고, 그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가 깨고 뒤척이길 반복한다. 1분도 안 되는 테이크 내에서, 1분 동안 진행하기 불가능한 일들이 일반적인 속도로 압축된다. 말이 안 되는 테이크, 하지만 그것이 마냥 허구의 시간성에 상응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비드는 가택연금 상태이기에, 설령 밖에 나간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집에서 10m 반경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똑같은 집, 더는 무언가가 첨가되지 않고 과거의 특정한 어느 시간대에 멈춰 있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분간되지 않는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리라. 이러한 따분하고 천편일률적인 시간, 이에 각각의 시간을 구별할 수 없는 혼란함, 뒤섞임을 현실적인 감각 내에서의 압축으로 보여준다. 집에서 반복되는 시간은 하나의 테이크 안에 요리조리 뒤섞이지, 각각의 모든 시간이 기억할만하게, 이로써 구별될만하게 분절되지 않는다. 이렇게 폐쇄적인 집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가택연금의 속성을 가시화하는 연출이 인상적인데, 이는 카메라 워킹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거의 언제나 멈춰있다. 본 작품의 카메라는 흡사 다비드에게 전자 팔찌를 채워 어디로도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하는 경찰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만 같다. 그래서 카메라는 다비드를 주로 중앙에 세워두며, 그의 발걸음을 항상 추적한다. 그는 멀리 갈 수 없다. 그래서 카메라는 다비드의 발걸음처럼 멈춰있거나, 기껏해야 고정된 상태에서 고개만 좌우로 까딱거리는 패닝 수준에만 그친다.     


이러한 연출은 대체로 알렉세이가 전작에서 보여준 연출과 유사하다. 그런데 다른 측면이 있다면 바로 숏의 분절, 리버스 숏이라 하겠다. 보통 알렉세이는 하나의 숏 내에 막대한 인물들을 쑤셔 넣어 무수한 의견이 충돌하며 생겨나는 긴장감을 포착하였다. 그것이 그가 포착하는 혼란한 러시아랄지, 그가 비판하는 전체주의에 반하는 민주적 태도, 토론과 같았다. 본 작품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러시아를 민주적인 태도 및 정신으로 반성하는 자세가 핸드헬드라는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던가. 다비드는 민주주의를 논하는 반면, 그의 어머니는 러시아는 스위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지금의 현 러시아가 만족할만하다며 광고하는 선전을 따르지만, 다비드는 항상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의심한다. 이윽고 다비드가 어머니의 입맛, 레시피에 맞지 않게 스프에 간을 했다. 맛을 본 어머니는 자신과의 ‘다름’을 허용하지 않고, 그의 등을 질타하며 다름을 잘못이라며 타박한다. 본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흔들린다. 순응자 어머니는 전체 속에서 안주하고 따르며 안정감을 얻는 존재, 하지만 다비드는 전체와 구별되는 명백한 개인, 이로써 전체로부터 줄곧 탄압받는 존재, 그는 항상 흔들리지만 이러한 '흔들림'을 관철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다비드에게서 발원한 카메라의 흔들림은 이전 작품에서의 고고한 정신성을 계승하는데, 이러한 와중에 알렉세이가 무수한 사람들을 배치하여 형성한 롱테이크, 롱숏이 더는 본 작품에서 유효하지 않다. 이전의 작품들이 원쇼트원씬을 지향했다면, 본 작품에서는 롱테이크로 진행되더라도 리버스숏의 형태로 숏이 잘리고 분절되며, 그렇게 나뉜 숏에는 각자만 배치되기 일쑤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어머니/다비드의 정치적 분절 및 삶과 죽음의 분리, 아니면 타인을 믿지 않고 얘기도 듣지 않던 다비드가 비로소 타인들과 ‘눈 맞춤’하는 발전을 보여주는가, 혹은 가택연금으로 혼자 놓이는 폐쇄성, 단절을 구현하는가, 그저 장르적인 타협일까. 숏이 분절되어야만 하는 명확한 역할을 규명하긴 어렵지만 여하간 알렉세이는 이전 작품으로부터 달라졌다. 이러한 본 작품은 개방성/폐쇄성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본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개방성, 국가가 강제하여 만연한 폐쇄성이다. 가택연금도 그렇고 다비드가 사는, 좁고 작으며 폐쇄적인 마을의 속성도 그렇다.     


진화심리학에 기인한 미학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쾌감이 인간의 생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앞에는 강이나 바다가 펼쳐지고, 뒤로는 산이 펼쳐진 배산임수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인류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유전자가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류가 선호하는 탁 트인 개방성, 반면 추하고 불쾌한 폐쇄성 또한 생존에의 적합/부적합성을 나누는 느낌일지 모른다. 본 작품에서 외부는 제한된다. 다비드는 두 차례 집에서 10m 너머로 발을 뗄 수 있다. 법원 출두, 재판 때 말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는다. 재판에 출두한 다비드의 소식은 작고 좁다란 TV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마저도 다비드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언론의 해석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재판을 직접 볼 수 없음, 검열되고 제한된 것만 볼 수 있음이 곧 가택연금, 그리고 현 러시아의 폐쇄성에서 기인한 형식이랴. 이렇게 외부를 볼 수 없는 다비드는 생존에 난항을 겪는다. 외부로 나가 일을 할 수 없는 다비드는 집세, 전기 및 수도, 가스 요금을 낼 수 없다. 개방적인 곳을 보면 무엇이 닥쳐오는지 확인할 수 있고, 또 열려있으므로 여러 가능성을 도모해볼 수 있다. 하지만 가택연금 당한 다비드는 오직 폐쇄적인 내부만 바라보며 바깥에서 어떤 위협이 자신에게 엄습해오는지를 예방하지 못한다. 그에게 강도, 괴한이 쳐들어와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목숨을 노린다. 그리고 폐쇄적인 곳에 갇혀 있으면 도망칠 수 없다. 외부로 탁 트여 있어야 달아나서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내부에 갇혀 가능성이 제한된 다비드에게 방문한 경찰은 감옥에 가게 될 것, 운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그는 집에서 실내바이크를 탄다. 아무리 페달을 돌리고 또 돌려도 그의 위치는 불변한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교착 상태, 살면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폐쇄성이다. 개방성이 시작과 과정이라면, 폐쇄성은 끝과 결과, 그래서일까 이에 상응하는 미장센도 특징이다. 다비드는 내부에서 담배를 피운다. 불태워진 담배의 끝, 찌꺼기로서 연기만 자욱하다. 그 누리끼리한 최후의 어둠이 늘 있었던 것들만 허용되어 무한하게 반복되는 집을 도배한다.     


한편 외부는 안개가 껴있다. 보이는 것을 단언할 순 없지만 그만큼 가능성은 많다. 날씨는 계속 변화한다. 법원에 출두할 때는 흐렸다가, 학생들이 생일을 축하하러 와줄 때는 선명해진다. 변화하는 미장센, 그것이 곧 외부의 가능성에 상응하리라. 그래서 영화 말미에 재판에서 승리하고 가택 연금에서 해제되자 그의 집이 밝아진다. 집이 닫혀있기에 폐쇄적이었다. 외부와 교류할 수 있는 집, 그럼으로써 가능성이 더해질 수 있는 집은 더는 탁하고 어둡지 않다. 그의 집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다비드가 감시당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따른다면 우리는 메두사의 신화를 마냥 허무맹랑하게 읽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 '나 자신'으로 있음에도, 타인의 시선 앞에선 '나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왜인지 나로서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수치스러움, 타인이 야박한 평가에 맞추어 '타인이 바라는 자신'을 추구해야 할 것만 같은 야비한 굴종, 그것의 역사와 메커니즘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실증적으로 추적한 바 있다. 단순한 바라봄이 아니라 밑에서 아래로의 감시, 그렇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부응하지 않을 시 가해지는 처벌, 이에 따라 감시당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복종하며 제 육신과 품행을 교정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비드는 늘 포착된다. 경찰이 직접 그를 보지 않더라도, 추적 장치가 지금 그가 어디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다비드는 샤워조차 어렵고, 심장마비로 쓰러진 어머니의 면회, 장례식에도 갈 수 없다. 경찰의 감시는 다비드를 아들로서 도리도 못 하는 존재, 최소한의 쾌적함도 누리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영화의 결말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다비드, 더는 그를 추적하지 않는 카메라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감시당하지 않는 인간만이 실로 자유롭고 주체적이랴. 여하간 그 감시는 다비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길 의도한다. 살아있지만 죽은 자의 악취를 풍기게 만들고, 그가 가꾸어 놓은 집을 난장판으로 망가뜨린다. 그들의 목적은 끝끝내 그를 감옥에 보내는 일이다. 아무리 감시한다 한들, 정교하고 폐쇄적인 감시 시설인 교도소에 비한다면 집에서의 감시는 제한적이고 여지가 남으므로…      


다비드의 집은 외부와 구분되는, 그가 나 자신으로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최후의 도피처다. 그는 가택연금 당하는 와중에도 시장을 규탄하는 대자보를 테라스에 걸어둔다. 또 그의 민주적 정신이 묻어있는 작업, 수집물들이 가득 찬 집에서만 '골리앗에게 대항하는 다비드(=다윗)'는 보존된다. 다비드가 사는 마을은 작고 좁으며 폐쇄적인 가운데, 누구나 다 훔치고 시장의 부패를 묵인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를 엄벌하는 것이 보편화·일반화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비슷하게 행동하고 다른 행동을 관용하지 않는 '행동주의'를 주장한다. 행동주의가 곧 동일한 전체의 이익만을 주창하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행동주의는 개방적이어서 ‘다름’이 교류하는 공동체에서는 극복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다름을 문책하는 다비드의 마을, 다른 그에게 횡령을 뒤집어씌우고, 다른 그의 수도를 끊고 책을 훔치는 행동주의는 관철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부패와 부조리로 다수가 이익을 누리는 만큼, 이를 폭로하고 풍자한 올가와 다비드는 눈엣가시다. 또 다비드의 어머니, 다비드의 살해를 시도하는 괴한은 ‘늙었다.’ 유연하지 않고 완고한 사고, 심지어 그 사고는 위대한 러시아를 주장하는 선전에 매몰된다. 러시아가 위대하지 않다고 말하는 유일한 다비드는 수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사라져야 하는 존재다. 영화 결말에서 그는 재판에서 승리했지만, 학교 구성원 대다수의 반대로 복직이 불발된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만 자신을 보존한다. 그의 집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콘스탄틴 클루게의 작품 등이 아카이빙되어 있다. 그의 상황과 일치하고, 그 자신을 대신 드러내는 진실한 예술이 말이다. 그렇게 다비드는 집에서만 만족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외부의 아무것도 믿지 않음에, 심지어 마트도 가지 않는 독종이라 말한다. 그는 혼자다. 영화에선 전화가 걸려 오는 그의 전부인, 변호사 등이 있지만, 정작 그에게는 전화가 오지 않고, 딸 이리나는 그와 대화조차 거부한다. 집으로 추방된 존재, 집에서만 가능한 존재는 혼자다. 그래서 다비드는 가택연금 당하기 전부터 가택연금을 선택한 존재,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집에 외롭고도 쓸쓸하게 수감하며 외부와 결연한 존재라 하겠다.     


그도 한때는 행동주의에 타협하여, 러시아에서 차별당하는 가족의 '조지아 억양'을 억지로 숨겼다. 하지만 그것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이후 자신의 조지아 억양과 같은 특유성, 외부와 구별되는 '나다운 것'을 집에 보존한다. 하지만 집에만 폐쇄적으로 머무는 존재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없고, 시장의 부패도 규명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개방성을 지지한다. 다비드에게 연구 조언을 받으러 오는 제자 케인 린, 교수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오는 젊은 학생들을, 그의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의 뜰’에서 만난다. 그 뜰에서 폐쇄성에서 반복되지 않는 가능성이 편집으로 침투된다. 학생들은 그의 집 앞에서 시위하던 문학도들이나, 좁고 폐쇄적인 마을의 행동주의를 따르지 않고 교수를 지지한다. 학생들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앞선 노인들의 완고한 세뇌를 몰아낼 희망이다.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는 희망의 조건이 열려 있는 미래, 창조적인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가변성, 현실을 초탈한 꿈, 기적 등이라 말한다. 즉 폐쇄성/개방성은 늙음/젊음으로 대비를 이루고, 개방성과 젊음에 희망이 있다. 또 폐쇄성/개방성은 남성/여성에도 상응한다. 본 작품에서 남성은 공격적이다. 그의 집을 쳐들어와서 협박하고 위협하는 괴한 및 강도,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게 해달라는 다비드의 요청을 거부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경찰이 모두 남성이다. 몸 안에 품기 대신, 창과 같은 남근으로 찌르고 공격하는 존재는 자신만의 폐쇄성을 강화하며, 타자를 타자로서 포용하지 않는다. 한편 그를 도와주는 의사, 변호사, 아래층 이웃, 전부인은 모두 여성이며, 알렉세이는 그녀들의 ‘자궁’을 강조한다. 변호사는 출산 휴가를 사용하여 복귀한 지 얼마 안 됐고, 의사와 다비드의 딸 이리나는 현재 임신한 상태로 배가 부풀어있다. 그녀들이 배에 다른 존재를 품는 포용력을 강조한다. 그녀들은 주류와 다른 다비드의 의견을 옹호하며 변론을 준비하고, 남성들은 죽기를 바라는 다비드에게 돈이나 치료를 지원한다. 심지어 누수로 그와 불화를 겪던 아래층 이웃 나이스타 또한 괴한에게 습격당한 그를 도와주고, 재판에도 진술한다. 그녀들은 단순히 포용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들이다. 변호사의 남편은 그녀가 가정에 충실한 수동적 여성상을 따르지 않는 것이 불만이고, 그녀를 주저앉히기 위해 가정폭력까지 동원한다.      


그녀들이 이를 토로하고 포용될 수 있는 곳이 다비드의 집이다. 변호사는 다비드의 변론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를 조력함과 동시에, 남편과 이혼하고 변호사 경력을 이어 나간다. 이렇게 상호 개방적으로 다른 행동들을 포용해야지만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뀐다. 교류는 다비드를 성장시킨다. 누구의 전화도 걸려 오지 않던 존재는 이윽고 이리나에게 전화하는 존재, 이리나가 찾아와 쓰러진 그를 다급하게 염려하는 존재에 이르고,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택연금도 해제에 이르며 조금이나마 자신과 세상을 바꾼다. 한편 다비드들은 작다. 의사는 지시에 의해 다비드를 치료할 수 없다고 자백하고, 케인 린 또한 다비드 없이 러시아에 더는 머물 수 없으며, 그를 지지하는 제자들은 다비드를 복직시켜주진 못한다. 이에 재판에서 다비드가 승리하였음에도 그는 ‘석양’과 함께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도 침대에 우두커니 누워있는 상태로 등장하지 않던가. 그러나 다시 한번 더 일어서서 프레임 바깥의 개방적인 현장으로 나간다. 결말 너머의 그는 젊은 시장이 있다는 모스크바로 갔을까, 아니면 자기 제자와 조력자들을 만나러 갔을까, 아니면 콘스탄틴 클루게처럼 망명을 결심했을까. 열림 속에서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개방과 교류가 작게나마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여전히 알렉세이의 세계는 절망적이다. 작은 개인의 자유가 승리해도 늙고 완고한 사회는 바뀌지 않아 그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가택연금이 여전하고, 알렉세이의 전작에서처럼 시장의 문장을 앵무새처럼 되뇌며 이익을 취득하는 '작가가 아닌 작가'들도 등장한다. 그들이 반동 작가들로 여겨진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를 언급하는 장면을 통해, 감독은 권위만 남고 무지로 가득 찬 러시아의 현 상태를 비웃는다. 이러한 참극 속에서도 승리 이후의 빛, 그리고 다비드가 떠나는 초원의 안개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남긴다. 다만 알렉세이가 아버지를 계승하던 혼란하고도 비이성적인 특징이 모두 사라진다. 통속과 타협함에 따분해졌고, 혼란하고 비이성적인 연출이 빛을 발할만한 장면들(문학도가 아닌 문학도들, 침탈당하는 다비드,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구별할 수 없는 혼란한 시간)은 평범해졌다. 반골적인 정신은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장엄하고 서늘하나, 그렇지 못한 형식과 전개는 신념을 너무나도 초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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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20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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