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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05. 2022

파얄 카파디아, <무지의 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시청각

파얄 카파디아(Payal Kapadia), <무지의 밤>(A Night of Knowing Nothing) 

-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시청각    

“자유란 항상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의 자유다.” -로자 룩셈부르크-

살다가 우연히 한 번쯤, 우리는 '운명', '천생연분'이라고 불릴만한 대상과 만난다. 그들은 일반적인 '연인'과 다르다. 보통의 연인보다 더 특별하고 애착이 가기에 우리는 운명이라고 따로 호칭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별한 운명의 특징은 무엇일까. 운명이라고 불릴만한 대상은 나와 비슷한 어법, 억양, 어투를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나와 유사한 취미를 공유하여 시간을 함께 유용할 수 있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자신과 흡사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너는 나, 나는 너'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때, 대상에게서 자신을 확인할 때, 확신에 찬 어투로 "운명이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 운명이 과연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사건일까, 정말로 이러한 운명을 만나기가 드문 것일까.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자신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결혼에 관한 통계를 밝히며, 운명은 그저 계급, 민족의 재생산에 그칠 뿐이라 말한다. 운명의 대상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요인은 특정 계급 내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그 계급임을 명시하는 습관인 '아비투스'이며, 그 아비투스를 확인할 때 우리가 운명이라 말하는 것이 또 하나의 아비투스다. 그래서 운명과 만나는 우리는 자신이 속하고 가진 계급, 민족, 젠더의 특질을 재생산하고 대물림하며, 설령 그 대상이 나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민족 및 계급을 수직적으로 전면 이탈하진 않고, 수평적으로 이동하며 아비투스 자체는 결코 위반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한편 이러한 ‘운명애’는 단조롭다. 처음에는 천생연분에서 나를 이해받음에 신선하고 놀랍지만, 익히 가능한 자신의 상이 지지부진하게 재생산될 뿐이다. 그래서 지리멸렬해진 우리는 불가능한 나, 불가능한 대상을 찾아 헤매며, 이윽고 금기를 위반하기 시작한다. 부르디외의 천생연분이 사회적으로 자신, 민족, 계급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이자 동물적 번식 욕구라면, 위반을 말하는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본질을 관통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반을 불가능하게끔 만드는, 오직 운명만을 강제하는 숨 막히는 이데올로기가 인류 역사에 가득했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이다. 계급, 민족성을 견고하게 요구하는 국가의 사례가…     


그곳은 바로 인도다. 인도의 신예 시네아스트, 파얄 카파디아는 오직 운명만을 허용하고, 위반을 허용하지 않는 인도의 사랑 이야기를 아카이빙 푸티지와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한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이를 연출하는 1986년 뭄바이 태생의 파얄 카파디아는 인도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꽤 많은 단편을 연출하였으며, <무지의 밤>은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장편에서 이어질 그녀의 색채로는 일단 ‘다양한 매체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그녀는 <수박, 물고기 그리고 반귀신>과 <오후의 구름들> 모두에서 삽화를 인서트하고, 또 전자에서는 물질과 관념, 사실과 상상이 공존하고 중첩되는 매혹적인 디졸브를 선보인다. 또 <수박, 물고기 그리고 반귀신>은 픽션임과 동시에, 등장하는 비전문 배우들의 행동은 다큐멘터리로 기록된다. 즉 하나의 고정된 차원에 속하지 않고, 여러 경계와 세계를 유랑하는 카파디아, 그녀는 힌두교의 윤회적 관점을 다원적인 형식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집에 놓인 여자, 멀리 떠나는 남자, 그를 직접 볼 수 없는 여자의 상상 등, 인도 내 젠더의 한계에 의해 사실과 상상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연출로 보여준다. <수박, 물고기 그리고 반귀신>에서는 단일한 인간이 아니라 여러 동식물로 살았던 존재, 마찬가지로 <오후의 구름들>에서는 식물에의 관심이 부각된다. 이렇게 종교적 관점에 따라 하나의 존재가 아닌 입체적 인간을 연출로 구현된다. 또 이러한 형식은 아주 다양한 언어, 종교,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를 이해하거나 반영하는 수단이다. <수박, 물고기 그리고 반귀신>과 <오후의 구름들> 모두 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한 명은 잠들고 한 명은 깨어있어 정신적으로는 아득한 존재들의 관계가 가시화된다. <수박, 물고기 그리고 반귀신>의 경우 영어와 힌디어의 교차 사용, chawl이라는 중산층 주택단지에 여러 가구가 함께 살지만 모두가 각자 공간에 분절된 고립을 하나의 숏에 각자만 놓이는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오후의 구름들>에서는 같은 여성을 다르게 만드는 세대 차이를 기록하고, 또 그녀들이 사는 공간에 찾아온 한 남자 선원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아프리카로 떠난다. 이질적 존재, 떠나야 하는 존재들의 깜짝 방문을 인서트로 보여주며 낯선 거리감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카파디아는 인도의 복잡한 계급, 민족, 언어, 종교가 형식에 반영된 영화를 만들고, 그뿐만 아니라 한 존재의 전생을 거슬러 내려가다 보면 매우 복잡한 근원이 뒤섞여 있으므로 ‘기억’에도 관심을 둔다. 이러한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 바로 <무지의 밤>이다. 영화가 시작된다. 우리가 무언가의 ‘시작’을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보통 아침이나 책의 새하얀 첫 페이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순일한 캔버스 등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본 작품은 시작부터 어둡다.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 앞서 언급한 새하얀 것들에는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 쓰고자 하는 것들을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다. 영화도 앞서 언급한 매체들처럼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를 백지장 같은 상태에서 구성해볼 수 있는 매체다. 그러나 카파디아는 새롭게 구성하지 않는다. 파운드 푸티지, 아카이빙 푸티지 방식을 취하는 본 작품은 이미 완성된 이미지들을 감독이 '발견'하고 '수집'하여 대신 말한다. 영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본 작품이 시작된 계기 또한 마찬가지다. 카파디아는 인도 영화 학교의 한 학생이 남긴, 편지와 일기 등이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그저 학생이라고 명명될 뿐만 아니라, 본인은 드러나지 않고 L이라 불리는 학생의 연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임이 드러나는 그는 편지와 일기에 담긴 활자를 통해서 대신 삶이 전달된다. 이뿐만 아니라 카파디아가 파운드하고 아카이빙한 ‘타인의 푸티지’들과 배우 부에스타 다스가 연기하는 '타인의 목소리'로 학생은 대신 전달된다. 즉 시청각 모두 학생을 가리키긴 하지만 학생의 것이 아닌 영화, 이와 동시에 학생을 가리키는 이미지들 또한 본래 신원을 잃고 부유하는 영화, 심지어 학생에 의존하여 혁명에 대한 감독의 견해를 간접 내비칠 뿐, 감독 자신 또한 철저하게 은닉하는 영화는 온전히 '시작'되지 않는다. 이미지며 영화가 담아내는 누군가의 인생이며 이미 주어져 있다. 그래서 개방성·가능성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은 부재하여 암담하고 어둡다. 그리고 좁다. 영화는 4:3 화면비다. 이 좁은 화면비에 카파디아는 파운드 푸티지, 아카이빙 푸티지 방식으로 이미지들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화면비에 캠퍼스의 좁다란 복도나 인파가 가득 들어찬 거리를 포착할 때면 갑갑하기 짝이 없다. 안 그래도 좁은 화면비에 너무나 많은 요소가 숨 막힐 듯 욱여넣어졌다.     


심지어 4:3 화면비에서 때때로 본 작품은 더 좁아진다. 중간에 인서트되는 결혼 풍습을 담아낸 필름 릴은 테두리가 훼손되어 더 좁혀져 있고, 또 인서트되는 사진의 크기에 따라 화면비를 더 작고 좁다랗게 변형한다. 영화 후반에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푸티지나 CCTV 촬영본을 인서트할 때도 더 작고 좁다랗게 화면비를 축소한다. 그것은 곧 혁명의 당위성을 드러내는, 국가가 말소하고 삭제시켜 점점 더 볼 수 없게 된 것을 보게 만드는 처절한 형식이랴. 영화 속 좁게 포착된 영화 학교에는 영화계에 몰지각한 총장이 정치·종교적인 이유로 선임된다. 영화 학교의 학생들은 사적인 공간에서 누벨바그 영화를 보며 영화의 전문성을 연구함을 푸티지로 대신 말할 수밖에 없다. 정치·종교적인 총장의 선임은 학생들이 서 있어야 마땅한 상징 공간(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사회의 일반적인 정치적 영향, 경제적 생산력과 같은 토대 위에 건설되지 않는, 이와 상반되는 고유한 가치체계로 통용되는 표상의 범주다. 상징 공간은 ‘사회적 세계에 하나의 시각’을 강제하는 정치·경제적 영향에 반발하고 고유한 가치 체계를 공유한다)인 영화 학교를 앗아간다. 영화계라는 고유한 상징 공간이 비좁아진다. 그런데 사회·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은 영화뿐만이 아니다. 민족적, 종교적, 젠더적 요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도 영화계처럼 획일화된 사회·정치적 영향을 폐쇄적으로 강요받기에, 카파디아는 학생과 L이 실종된 원인인 그들을 둘러싼 당대를 유추한다. 즉 개인이 설 자리도 비좁다. 학생은 L을 사랑했다. 그런데 연인들은 계급, 종교적으로 일치하지 않았고, 이에 그들의 부모님은 반대하였고 심지어 '감금'하였다. 정직한 내 마음에 이끌려 사랑하면 처벌받는 세계란 ‘나’라는 개인에게 있어 얼마나 부당하고 비좁은가. 그 좁은 화면비에 포착되는 것은 얼마나 여지가 없는가. 1.88:1이나 2.39:1의 화면비에 비해서, 양옆으로 포착되는 것이 잘려 나가 더 단순하고 뻔하지 않은가. 학생은 시위 현장에서 여경을 본다. 그리고 개인보다 공동체의 일반성, 젠더가 우선시되는 인도 내에서, 여경은 퇴근한 이후에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을 답습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라고 말한다. 보이는 것은 뻔하다. 반면 그 여경이 시위에 나온 여성들을 보며 '개인적'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는 잘 모르겠다며, 속내를 궁금해한다. 개인적인 것은 넓고 무한하여 예단할 수 없는 것, 이에 궁금한 법이다.      


그 개인적인 것들을 국가가 말소하고 있다. 점점 더 개인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또 그 개인이 처한 양옆이 말소되는 폐쇄적인 화면비에서 카파디아는 잊어선 안 될 학생의 일면들과 학생의 편린을 빌려오는 푸티지에 촬영된 '개인들의 얼굴'을 정성스레 보존한다. 4:3 화면비는 넓고 다양한 것들을 축소하기도 하지만, 켈리 레이카트의 <퍼스트 카우>처럼 '대상 그 자체'에만 주목하기에도 좋은 화면비다. 대상 외의 양옆이 집중력을 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화면비로 말소되어가는 대상을 보존한다. 심지어 경찰들이 CCTV를 파괴하더라도, 파괴되기 전 시위에 참여한 운동가들의 흔적과 실존을 보존하고, 괴한들이 들이닥침에 카메라를 노출할 수 없어 스마트폰을 몰래 이용하더라도, 탄압당하는 개인의 얼굴을 고스란히 기록한다. 보존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영화의 16mm 필름이 보여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화의 도입부, 보이는 것이라곤 망막한 어둠뿐, 그러나 작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오래되어 보존이 열악한 16mm 필름이 만들어내는 그레인이다. 그것이 흡사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린다. 그레인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이는 유(有)다. 그러나 그레인이 포착되면, 그 미세한 구멍, 틈이 이미지의 일부를 훼손하고, 이에 이미지는 온전하지 않다. 그레인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이로써 상실을 환기한다. 필름에 의한 기록은 필연적으로 그레인을 동반한다. 그런데 필름만 그렇지 않다. 학생의 편지와 일기, 그리고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록하고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그레인이 생겨서 경험하고 체감한 그 당시와는 같지 않다. 또 국가의 탄압, 실종, 파괴 등 외부에 의한 그레인에 의해 과거는 왜곡되고, 편집은 드문드문 여백이 많아진다. 깜빡거리는 그레인, 그것은 곧 훼손 가능성, 불완전함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치열하게 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화는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대상을 담진 않는다. 16mm 필름에 결합된 것은 흑백, 이에 푸티지가 가리키는 시대상을 추측할만한 색채가 사라져버렸다. 제한적으로 남은 것은 형태, 윤곽선뿐이다. 그래서 시대는 불분명하다. 분명 트럼프의 집권, 그 당시 인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서도, 과거에 상응한 매체성과 푸티지에 담긴 풍경 등은 오늘날과 마냥 일치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는 16mm 필름의 흐릿함과 불투명성, 명암 대비가 낮은 흑백의 불명확함을 이용하여, 빌려온 푸티지들이 본래 속한 시대의 확고함이나 가리키는 대상의 구체성을 약화한다. 그렇게 시대상, 구체성이 약화된 상태에서 푸티지에 학생이 편지에 그린 그림이 중첩되기도 하고, 부에스타 다스의 음성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곧 20세기적인 매체와 오늘날의 사건이 구분되지 않고 순환하고 겹침을, 끝없이 '무지의 밤'이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형식인가. 그렇게 구축된 이미지들은 '있지만 없고', '가리키지만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모든 것은 주인을 잃는다. 부에스타 다스가 말하지만 배우 자신을 말하지 않고, 학생은 배우의 음성과 카파디아가 발견하고 모은 외부 푸티지를 빌려서 간접적으로 매개되고 있으며, 학생을 위해 봉사하는 이미지는 본래 가리키던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또 캠퍼스 시위가 카스트 제도 철폐 시위로 이어지고 확장되는 그 사이의 시퀀스에, 쓸쓸하고 음산한 공간이나 인물이 포착되며 분명 어떤 숏들이 ‘있지만’, 비어있고 생명력 없이 잠들어 있어 황량하고 무의미할 뿐인 사실상 ‘없는’ 이미지다. 시위의 좌절, 개인의 좌절, 이에 따라 그저 숨만 쉴 뿐인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것을 무용한 이미지, 서로에 서로를 빌려서 드러내지만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아니게 된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항상 ‘잠을 자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깨어서 개인으로 자유로운 것은 캠퍼스에서 포착되는 고양이, 거리에서 포착된 강아지뿐이다. 오직 그들만이 한 개체로서 자유롭다. 이와 달리 영화 속 인간은 깨어있다면 집단으로, 개인이라면 잠든 상태로 포착된다. 그들은 어째서 잠이 드는가. 학생이 캠퍼스 생활을 묘사한 편지를 읊는 영화, 그것을 가리키는 공간의 정경이 펼쳐진다. 그사이에 잠든 여학생이 포착된다. 학생인가, 그녀는 편지에서 사랑의 좌절, 그리고 동료의 이해되지도 않는 영화를 만드는 데 지쳤다고 토로한다. 전자의 경우 갇히고 도망친 연인을 가리키는 이미지의 부재, 그 공백을 '일반적인 결혼식' 푸티지가 인서트되어 대체하고, 후자의 경우 '건설 현장'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자에서 연인은 청각으로 간접 명시되나 시각으론 존재하지 않고, 후자는 학생이 머물지만 머물고자 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잠을 잔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꿈을 꾼다. 한 남자가 잠들었다. 그리고 카파디아는 잠이 든 남자의 상단을 어둠으로 비운다. 그 빈 어둠 속을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로 채우고, 별들은 계속 위치를 변환하여 다양한 형태의 '별자리'를 구성한다. 잠들어서 별자리 꿈을 꾼다는 것, 그것은 무수한 별이 만들어낼 무한한 형체들처럼, 다채로운 유연한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의 의식은 꿈에서 깨어있다, 현실에서는 주로 잠들지만 꿈을 실현하고자 할 때는 깬다. 그리고 영화 앞에서 다시 깬다. 총장 반대 시위에 참여하던 학생은 어느 날 그루터기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연인과 함께 보러 갔다. 영화란 무엇인가. 본 작품의 결말, 영화에 대한 정의를 논하는 푸티지에서, 혹자는 '이것은 현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영화라 주장한다. 또 카파디아가 '모든 것은 기억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인용한 것을 보건대, 기록의 의무도 진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인다, '흑백논리로 접근하지 말 것.' 영화는 현실/비현실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 나뉘지 않는 것, 양자가 뒤섞인 하나의 복잡한 꿈이다. 시위가 일어나는 현실에서 비현실과 같은 영화를 보며, 마찬가지로 연인과 비현실적인 키스를 한다. 그것이 불가능과 가능이 뒤섞인 영화이자, 우리가 눈을 감고 상상하는 꿈이 아니겠는가. 영화는 꿈이다, 거기서 우린 혁명을 꿈꾼다. 흑백 영화는 내내 밤이 지속되고 찬란하고 화사한 낮은 찾아오지 않는 것만 같다. 또 흑백은 인간의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감각’을 자극하는 색채를 앗아가 버린 매체다. 서양 미술사에서 명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조각적이고 형태를 구성하는 선을 이성적으로 여겼다면, 흐리고 불명확하며 감정을 자극하는 색은 비이성적이라 규정했다. 그 감정을 흑백이 앗아간 것이다. 이러한 흑백 영화인 이유는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각을 국가가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영화에선 때때로 컬러가 회복된다. 그리고 그 컬러는 언제나 붉은 색채로 제한된다. 그 붉은색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단 삶이다. 영화 중반부, 파티에 온 학생들이 황홀한 황금빛 조명으로 포착된 푸티지가 인서트된다. 황홀한 색채 아래서 그들은 자유롭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이행이 곧 꿈이다, 청춘들은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이후 연결되는 것은 경찰에 의해 시위가 진압되었다는 정보, 여학생들이 강간 협박을 당했다는 소식, 이후 색채는 사라진다.     


또 허용되는 붉은색이 있다. 영화 초반, 무쿨은 꿈을 꿨다. 한 소녀를 사랑했지만, 소녀의 부모님이 반대하였고 그를 잡으러 쫓아왔다. 이후 무쿨은 도망치는데, 사라지는 그를 가리키는 푸티지는 없다. 불가능한 사랑에 대응하는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고, 대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혼례’가 담긴 붉은 푸티지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의복을 갖춰 입고, 의례를 치르는 일반적인 결혼이 붉은색이다. 앗아간 붉음, 오직 가능한 붉음은 개인의 피나 끓어오르는 사랑과는 무관한 가식적인 붉음, 이후의 붉음도 마찬가지다. 결혼식, 파티 이후에 마지막으로 회복되는 빨강은 불꽃놀이의 불을 덧칠한다. 그리고 불꽃놀이를 포착하는 와중에 나레이션은 계급 간의 충돌을 논한다. 붉음은 곧 물질적인 색채, 물리적인 충돌과 분열을 가리킬 시에만, 인도의 만연하고 일반적인 갈등에 봉사할 때만 붉음은 회복되는가, 그 폭력을 아름답게 둔갑할 때만… 부정적인 붉음, 그 현장에는 언제나 다수가 북적거린다. 다수가 개별이 가능한 사랑을 승인한다, 다수가 시위에 선을 긋고 통제한다, 다수가 시위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한다. 이 강제적 집단에서 개인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개인은 개인이고자 시위에 참여하여 자발적으로 집단을 이룬다, 향후 해산할 수 있도록. 그런데 그 절충조차도 강제 해산된다. 이젠 달콤한 꿈이 아니라 악몽을 꾼다. 자신을 드러내는 편지도 멈췄다. 현실과 꿈, 그 어디에서도 설 자리가 없는 인도 개인의 비극이 파운드 푸티지로 시작되어 아카이빙 푸티지로 이어진다. 카파디아는 그 '불가능한 개인'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미지와 음성을 빌려오고 모은다. 그 이미지들은 21세기의 학생을 가리키고, 학생은 20세기와 혼재된 그 이미지들을 대신 언어화한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능동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현대 인도를 가식적인 이미지들과 진실이지만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카파디아는 화면비, 16mm 필름, 흑백 등 영화 고유의 매체성, 그리고 파운드 푸티지 및 아카이빙 푸티지라는 개별의 특성을 깊게 탐구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상징 공간을 잃어갔으므로, 그 탄압에 반발하여 매체의 고유함을 고심한다. 이로써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다. 영화가 스스로의 매체라는 ‘몸’을 드러내듯, 본 작품의 시작과 끝 모두 다 제 몸의 바람에 솔직한 ‘춤’추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순환을 이룬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시작과 끝에 춤출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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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05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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