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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7. 2022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인생은 꿈입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Bardo: False Chronicle of a Handful of Truths)- 인생은 꿈입니다…   

“아무도 꿈을 꾸지 않고 아무도 추억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각각의 사람들은 삶의 잉여적 요소를 갖지 않은 채 존재했고, 잠자는 동안에는 오직 심장만이 살아서 그를 지탱해주었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다스리던 이타카로의 귀환을 앞뒀다. 이타카에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 페넬로페와 젖먹이 상태에서 이별한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귀환은 쉽지 않았다. 신들의 미움을 산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의 귀환에 10년이 소모되었다. 신들은 그가 이타카로 돌아가지 못하게 방해했으나, 트로이 전쟁에서 지혜롭게 승리를 거둔 명장답게 그는 난관을 극복하고 이타카에 다다른다. 전쟁도 10년, 귀환도 10년, 합 20년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 고향에 도달한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오디세이아』는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험난한 귀환, 디아스포라를 빗댈 때 사용된다. 이냐리투의 신작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또한 하나의 『오디세이아』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귀환의 여정, 그렇게 도착한 고향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1963년 멕시코시티 태생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멕시코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멕시코계 영화감독 트리오를 의미하는 The Three Amigos에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 토로와 함께 묶이며, 멕시코와 헐리우드를 오가며 활동한다는 점도 이들과 유사하다. 특히 최근에는 팔로우숏과 롱테이크를 적극 사용하여 감상자를 간접 체험하게 만드는 이냐리투는 알폰소 쿠아론과 형식적 지론을 함께 공유하듯 보인다. 이냐리투는 최근 진척되는 VR 기술을 영화에 접목할 정도로, 감상 이상의 '체험'에 주목한다. 다만 형이상학을 탐구하는 쿠아론에 비해서, 이냐리투 또한 철학적 탐구를 공유하긴 하지만, 쿠아론보다는 정치적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또 초기 멕시코 시기에 이냐리투는 잦은 컷과 빠른 카메라 워킹으로, 폭력과 이기적인 욕망이 들끓는 급박하고 불안한 멕시코의 치안을 비추기도 한 만큼, 현실의 시간과 동화되는 롱테이크를 항상 추구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비추는 현실이나 대상에 가장 적합한 매체를 선택하여 이를 체험하게 만들고, 그것이 멕시코를 비춘 <아모레스 페로스>에선 급박한 연출, 브로드웨이를 다룬 <버드맨>에서는 연극적인 롱테이크다. 그래서 이냐리투의 영화는 감각적, 달리 말하면 매우 피학적인데, 초기 작품에서는 <아모레스 페로스>가 그렇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는 서부 시대와 대자연, 백인 사회가 인간에게 피학을 선사한다.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세계를 매우 급박하고도 리드미컬하게 연출하는 그의 영향은 The Three Amigos 이후의 멕시코 영화감독 중 비교적 느린 영화를 추구하는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미셸 프랑코에게선 유리되어 있고, 아마트 에스칼란테에게는 정치성과 리얼리틱한 연출, 폭력성 등이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 일단 이냐리투의 세계에선 욕망이 들끓는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이냐리투가 그리는 멕시코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불법 투견과 청부살인, 불륜이 만연한 세계, 타인의 착취를 기회 삼아 철판 위의 고기를 누리고 상대의 짝을 노리는 세계, 타인을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소유물로 치부하는 독선적인 세계다. <아모레스 페로스>의 특징은 3장 구성과 교차 편집이다. 다른 주인공이 중심이 되는 장에서 앞선 장들의 주인공의 비밀이 폭로된다. 각 장의 인물들에게 욕망을 투영하지 않는 제삼자의 눈을 빌려야지만 대상의 객관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상대를 욕망으로 파악하는 각 장에서는 파열과 충돌, 오독과 무지만 가득하다. 마찬가지로 교차 편집이 대두되는 초기 작품 <21 그램> 또한 극의 시작에 교차 편집되는 대상들은 파편적으로 고립돼 있고 충돌과 폭력만 만연하다가, 이를 야기한 욕망을 내려놓을 때 객관적인 상대와 마주한다. <바벨>은 <아모레스 페로스>를 국제적으로 확장한다. 모로코, 미국, 멕시코, 일본을 교차편집으로 오가는 본 작품은 개개인의 이기심에 의해 탄피, 추파, 성기를 매만지는 손, 결혼식에 가까웠다가, 이후 개개인의 이기심을 충족하자 버려지고 멀어지는 단절을 보여준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처럼 매치 컷, 즉 유사성으로 전후의 숏, 거기에 담긴 다양한 국가가 보편적으로 이어지지만, 그 유사성은 이기심이다. 모로코의 도망가는 아이들은 부모의 이기심에 의해 방치되어 숨바꼭질하는 아멜리아와 아이들로 이어지고, 인간에게 목이 비틀어지는 닭의 피는 아이들의 장난으로 출혈하는 수잔으로 연결되며, 수잔의 의지와 무관한 비명은 타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치에코로 이어진다. 이냐리투는 떠나간 리차드의 돌아옴, 책임 전가한 몫을 되돌리기, 아멜리아의 자기희생으로 고립과 폭력의 매치 컷을 극복하고 진정한 연결로 나아간다.      


이러한 세계에서 이냐리투는 인간을 '기존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존재'로 고찰한다. <아모레스 페로스>에서 각 장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짝사랑과 계획, 온전한 다리를 가졌던 광고모델로서의 자신, 잃어버린 딸과 아내를 되찾고자 한다. 투견 피코를 살려줬더니, 다시 개들을 살육하는 포악한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개인들은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것, 계획한 것을 어떻게든 되찾고자 한다. 그것이 내게 당연하다는 듯이. 하지만 현재는 뒤바뀌었다. 짝사랑한 대상은 형과 결혼했고,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으며, 아내와 딸에게 친부는 죽은 사람으로 취급된다. 기존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변화한 현재, 거기에 사는 타자들을 해한다. <21 그램>에서 교차편집으로 제시되는 사람들은 모두 시한부, 난임, 트라우마, 죄책감 등의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버드맨>에서도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나락에 빠지는 인간이 등장한다. 이냐리투는 과거를 붙잡는 아집 대신 변화한 현재의 긍정, 그리고 기억에서 '떠날 것'을 주장한다. 기존 상태로 되돌아가려 아득바득 생을 붙잡는 존재 인간, 그러나 과거의 아집에서 해방되어 현재에 참여하는 이냐리투의 사람들은 비로소 ‘이어진다.’ <21 그램>에서 고립되어 있는 서로가 폴을 통해 교차편집, 매치 컷으로 연결되며 상호 보완을 이루고 타인의 심장으로 사는 것처럼, 우리는 기존 자신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이어갈 때 현재에 참여한다. <21 그램>의 규모를 보다 축소한 작품 <비우티풀>에서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비우티풀>은 <21 그램>보다 더 암담한 상황을 제시한다. <21 그램>에서 상호 보완이 가능한 미국과 달리, <비우티풀>에서 신분도 자아도 모두 희미하게 지워지는 하류층,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바르셀로나의 뒷골목은 배신이 보편적이다. 서로가 이어지는 교차편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21 그램>에서 폴이 자신과 얽힌 존재들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며 제 생을 간접 이어내듯, <비우티풀>에서도 남겨질 이들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으로 발버둥 치는 욱스발은 처음에는 과거에 일반적이었던 목숨에 대한 집착으로 발버둥 치다가, 이윽고 그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대신 무언가를 남기며 현재와 미래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한편 <레버넌트>에서 글래스는 살해당한 아들과 아내의 복수를 감행하고, 자신의 목숨을 망자의 복수를 위해 부지하기에, <21 그램>에서 복수 및 폭력과 거리를 두는 주제의식과 다소 모순적이지 않은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는 타인을 위해서 이타적으로 변화하고, 한편 <버드맨>에서처럼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던 타율적인 존재는 주체적으로 실존하며 초인이 된다. 마이클은 인기스타였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지만, 이를 위한 당대의 소환은 모두 우스꽝스럽고 부질없게만 비춰지고, 결국 현재의 육신을 긍정하며 제 삶과 목숨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으로 거듭난다. 이에 비로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행한다. 이렇게 이기적인 나 자신의 표상, 그것을 이루는 과거에서 깨어날 것을, 타율적인 수동성을 벗어던지고 주체성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는 이냐리투, 과연 그의 자전적인 신작에서 이러한 지론은 어떻게 반영될까. 이냐리투는 신작에서 자신의 삶의 진실 일부를 뒤섞은 가짜 배역 실베리오를 통해 삶과 죽음을 탐구한다. 일단 그가 바라보는 삶은 '그림자'다. 이는 영화의 시작부터 바로 나타난다. 도입부, 우리가 멕시코 하면 떠오르는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지대가 펼쳐진다. 이냐리투, 그리고 영화 속 실베리오가 그리도 도달하고자 하는 자신의 고향일지다. 거기서 황량한 바람 소리만 들려오다가 이윽고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러나 인기척을 자아낸 그 사람은 직접적으로 흔적을 노출하지 않는다. 오직 그림자로만 현현한다. 그림자란 무엇인가, 그림자는 주체적일 수 없다. 언제나 원본의 불완전한 환영에 불과하다. 원본, 그리고 빛의 유무에 따라서만 존재/부재가 결정된다. 다른 존재에 기대는 그림자는 자신으로서는 없지만 타인으로서, 그리고 타인으로써는 있다. 그것이 곧 이냐리투가 신작에서 고찰하는 삶의 본질이다. 영화의 제목은 바르도, 이는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림보, 이승과 저승의 경계, 아직 온전히 죽지도 그렇다고 살지도 않은 애매한 차원이다. 어쩌면 바르도에 놓인 존재가 곧 삶의 흔적을 어렴풋이 지니며 존재하나 그렇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자가 아닐까, 그 그림자는 걷는다. 대지에 발을 딛고 걸을 때는 지상에 그림자가 그려진다.      


그러나 일순간 뛰어오른다. 꽤 오래 비행한다.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렇게 비행하며 뜀박질하던 존재는 그림자로서 살지 않고 비로소 나로서 살게 되리. 중력과 빛과 원본, 그 모든 타율이 제거되고. 그러나 이를 위해선 대지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나로 살기 위해서 나는 땅 위에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남는 것은 오직 대지뿐이다. 그리고 남겨진 대지는 개인을 그림자로 만드는 대지, 비행하는 내가 바라지 않는 대지, 살기 위해 타협한 대지다. 실베리오는 고향으로서 멕시코, 자기 집으로서 미국을 갈망한다. 그러나 풍요로운 문화적 풍토를 간직한 고향 멕시코는 현실에 없고, 자기 집이라고 여겼던 미국에서는 '내 집'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군인들에 의해 끌려간다. 즉 어느 곳에도 실베리오가 바라는 대지는 없다. 그래서 원치 않은 대지에 구속된 실베리오는 그림자로 산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라 비로소 원하는 자신을 그리게 된 실베리오는 나로서 살지만 이와 동시에 지상에서,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냐리투,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한 멕시코인들의 『오디세이아』이랴.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는 멕시코로 가기엔 선전과 검열, 배신자라는 오명 등 장애물이 많다. 원전에서 오디세우스가 겨우 도착했더니 아들 텔레마코스가 못 알아보고 그를 죽이겠다고 공격하거나, 오디세우스와 키르케의 아들인 텔레고노스가 페넬로페와 혼인해있는 등 기대를 배반한 현실이 펼쳐진 것처럼, 실베리오가 위시하는 이냐리투 및 미국에서 부르주아가 된 멕시코인 모두 다 그리워하던 고향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환대는커녕 손가락질받거나, 이익을 누리려 아첨하기 바쁘다. 실베리오의 작품을 진정 감상하고 이해해주는 이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고향과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 서 있는 땅 사이에서 그림자가 되고, 이윽고 대지를 떠나 비행하며 죽어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영화는 죽어서만 꿈꾸지 않는다. 쩍쩍 메마른 황토색 대지가 포착된 이후에 연결된 숏에는 병원 복도에서 기다리는 실베리오, 아이를 출산하는 루치아가 담긴다. 실베리오는 잠들었고 루치아는 마테오를 낳았다.      


그런데 마테오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루치아 뱃속으로 다시 넣어진다. 이는 부모의 상상이다. 마테오는 태어나자마자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30분 만에 사망했다. 마테오는 죽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부모는 마테오가 다시 루치아 뱃속으로 들어갔고, 모체를 갉아먹으면서 여전히 생존해있으리라고 꿈꾼다. 즉 우리는 대지에 발붙이고 있으면서도 사실로서 육체가 아닌, 변형 가능한 그림자로서 꿈을 꾸며 산다. 분명 자궁 바깥으로 나와서 죽었지만 다시 들어간 것으로, 그렇게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지만 나온 상태여야만 노출될 수 있는 사실의 증거로서 '탯줄'이 기묘하게 루치아를 따라다닌다. 우리는 그런 상태다, 나로서 온전하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삶을 부정하고 꿈을 꾸는데, 탄생이란 사실을 명시하는 탯줄은 증거로서 우리의 꿈을 방해한다. 이냐리투는 본 작품에서 꿈으로서 삶을 그린다. 이냐리투는 최근 두 작품, <버드맨>과 <레버넌트>에서 적극 사용한 연출인 롱테이크를 여전히 이어간다. 현실의 감상자가 잠들거나 의식이 끊기지 않는 이상 시간의 흐름이 연속적인 것을 반영하는 실제적인 촬영이다. 하지만 이 현실적인 형식에 불가능한 것들이 끼어든다. 태어난 아기가 다시 자궁으로 들어가고, 실베리오는 망자가 된 자기 아버지와 다시 만나며, 아홀로틀이 담긴 봉지에는 겨우 1L 정도의 물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터지자 지하철을 가득 침수시키는 등 불가능성이 침투한다. 그것은 흡사 꿈에서 비논리적인 것들이 비인과적으로 연결되어도 그냥 수긍하는 ‘의식의 흐름’, 이를 예술에 적극 기용한 초현실주의 사조의 ‘자동기술법’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마술성은 온전한 꿈은 아니다. 꿈인 것이 현실이기도 하고, 현실인 것이 꿈이기도 하다. 즉 이냐리투는 꿈과 잠자는 동안 육체의 주인이 되는 무의식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롱테이크에 자동기술법, 초현실성을 뒤섞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택한 것이 아니라, 로렌조가 부모의 섹스를 부정하고 실베리오가 가상의 모국을 상상하듯, 깨어서도 꿈을 꾸는 인류의 삶을 위해 마술적 리얼리즘을 채택한다. 또한 무의식이 마비되어 혼수상태에 빠진 실베리오의 육체를 '못 박힌' 형태로 꿈에서 반영하듯, 때론 꿈에서도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기증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마술적이며 현실적인 본 작품의 연출은 적절하다.      


이러한 꿈은 오직 각각의 개인이 도취한다. 앞서 서술한 이냐리투의 작품 세계에서, 고립을 넘어선 타인들과의 유대 및 관계를 교차 편집으로 드러낸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입부, 아마도 그림자의 주인이자 비행하는 주체는 실베리오, 그는 롱테이크로 포착된다. 그러나 이후 병원에서 실베리오, 마테오, 루치아, 각각의 주체에 따라서 숏은 나뉘고 잘린다. 낳은 것이 사실이라면 다시 들어가는 것은 꿈이기에 편집으로 나뉠 수밖에 없거나, 분명 자궁 바깥으로 나온 '현실의 마테오'와 루치아와 실베리오의 상상에 따라 다시 자궁으로 들어간 '꿈의 마테오'는 각기 다른 차원에 놓이기에 숏이 나뉘는 것이랴. 이후에도 숏의 나뉨은 멕시코의 미국 대사와 실베리오의 알레시아상 수상 소감을 둔 견해차를 가리키고, 대사관에서 펼쳐진 연극과 그것이 허위임을 폭로하는 장치가 드러날 때, 실베리오의 기대와 달리 루이즈가 그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인터뷰로 변형할 때, 실베리오와 로렌조의 언쟁 등에서 발생한다. 개인은 나로서 살며 자신이 바라는 꿈을 꾼다. 그것이 사실과 망상이 뒤섞인 롱테이크로 한 인생이 이어진다. 그러나 내 기대를 무한히 배반하는 현실 속 '타자'의 개입으로 꿈꾸는 인생은 방해받고 잘린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내 뜻대로 통제하고 싶다. 실베리오가 아홀로틀이 든 봉지를 들고 지하철에 탄 숏은 두 번 반복되며, 처음과 끝 수미상관을 이룬다. 양 시퀀스 모두 봉지를 든 실베리오를 옆 칸이 연결된 공간과 함께 깊숙이 포착하는 수직적인 구도로 처음 촬영한다는 것, 이후 수평적인 구도로 앞 사람과 눈을 마주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봉지를 놓친 이후에 촬영은 달라진다. 처음 시퀀스에서 실베리오는 수직적인 구도로 포착된 깊숙한 구도를 향해 헤엄쳐 올라가며, 멕시코의 집과 세트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실베리오를 방치하는 미국인들만 수평적인 구도로 포착되다가, 옆 칸으로 연결되지 않는 막힌 반대편을 포착하는 수직적인 구도로 변용되며, 즉 현실 너머를 상상할 수 없는 그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후자가 현실의 제한이자 멈춤이라면, 전자의 꿈은 현실의 제약을 극복하는 무한이자 열림이다. 후자의 방치를 극복하고 싶어서, 전자의 실베리오는 자신을 긍정해주는 앞좌석의 승객을 상상하고 마비를 수영으로 극복한 것이랴.      


이렇게 꿈꾸는 실베리오는 몸이 경직된, 그럼으로써 죽어가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한다. 그는 현실을 넘어서고자 꿈을 꾼다. 즉 꿈은 현실의 부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부정하는가. 실베리오가 아홀로틀을 들고 가는 숏처럼 영화에선 두 번 반복되는 숏이 또 있다. 바로 침실에 모래가 가득 찬 시퀀스다. 처음에는 죽음으로 가득 찬 이민 행렬을 외면한 실베리오가 루치아와 섹스를 마친 이후의 침실에서, 두 번째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실베리오가 집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모래는 집 안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모래란 무엇인가. 살았던 것이 죽고 부서지며 메말라서 향하는, 인생이란 여행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아닌가. 살아있는 우리는 그 최종적인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실베리오가 죽음에서 유리된 것처럼 보였던 찬연한 삶의 순간에도 생의 최종적 목적지는 이미 도착했다는 듯 그의 곁에 있었다. 치매에 걸려 노쇠한 실베리오의 어머니가 살면서도 죽은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에게 모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다. 또 실베리오는 망자가 된 아버지와 만난다. 우리는 살아있음에도 망자와 과거를 기억을 통로로 공존한다. 실베리오가 저승으로 향하기 위해 모래를 따라가는 시퀀스도 그렇다. 그가 모래를 따라 문밖으로 나서니 선글라스를 착용한 또 다른 실베리오가 마중을 와있다. 그리고 살아 있던 실베리오와 그를 맞이하는 망자 실베리오는 거울처럼 똑같이 행동한다. 그간 삶과 죽음은 동행하고 있었을까.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과 두 개이기에 영화는 수미상관을 이루고 그림자가 되는 걸까.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는 살아있는 자신만을 긍정하고 싶다. 그래서 실베리오는 죽지 않은 것처럼 꿈을 꾸는데, 그 꿈은 육체가 꾼다. 육체가 혼수상태에 빠지니 꿈은 발에 못이 박힌 상태로 마비를 반영한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꿈을 꾸면서, 마찬가지로 죽음의 꿈, 즉 꿈도 두 개를 꾼다. 반면 죽은 실베리오는 살아있는 실베리오를 보내고 하나 된다. 그런데 그 끝은 다시 도입으로 연결될 수 있다. 즉 하나는 다시 둘이 될 지 모른다. 두 개인 것은 하나 되고, 하나인 것은 두 개가 되는 꿈이 곧 삶과 죽음이리.   

   

영화의 제목 바르도는 림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불교의 중간계도 지칭한다. 탄생과 죽음의 중간계, 잠과 깨어 있음의 중간계, 죽음과 재탄생의 중간계 등 어떤 한 차원에 명확히 머물기 전의 표류 상태, 인간에게는 죽음과 동행하는 삶도 중간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실베리오의 다른 요인들도 명확한 한 차원에 놓이지 않고 중간계에 놓인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하고자 하지만, 어쩌면 중간계 같은 어중간한 것이 우리 삶이자 현실이므로 부정은 곧 꿈이 된다. 그러면서 잠들지도, 그렇다고 깨어있지도 않은 또 다른 중간계에 빠지며 이는 무한하게 흘러간다. 실베리오는 이중국적자다. 멕시코는 고향이고 미국은 집이다. 양국에 대한 마음은 복잡하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가 돌아가길 바라는 풍요로운 문화를 간직한 멕시코는 없다. 반면 미국은 상스러운 나라지만 집임을 인정받고 싶고, 딸 카밀라가 미국에서 삶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꿈꾸는 실베리오는 고향 멕시코에의 헌신, 집으로서 미국에의 인정을 바라나, 정작 바라는 고향 멕시코는 실제로 없고, 미국은 실베리오의 집이 미국임을 불인정한다. 계급 또한 마찬가지다. 실베리오가 어린 날에는 아주 빈곤한 프롤레타리아였다. 로렌조와의 대화에서 언급되길 원양어선을 탈 정도로 험난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성을 얻었고, 이에 안전한 집에서 부유하게 산다. 불안한 치안과 기아에 시달리며 멕시코를 등져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더는 같지 않다. 그러나 로렌조의 지적에 따른다면 현재 부르주아인 실베리오는 과거 프롤레타리아의 태도로, 즉 현재의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로 긍정하며 다큐멘터리를 연출한다. 정작 이를 통해 이득을 누리는 것은 부르주아인 자신인데 말이다. 또 루치아는 실베리오가 명성을 얻고 누릴 것을 다 누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장한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실베리오는 로렌조, 루치아, 루이즈의 지적을 참을 수 없다. 아버지를 소환하고 그의 말을 받들어 “명성을 한입 먹고 뱉는다”고, 즉 부르주아처럼 축적하지 않는다고 최면을 건다. 그러나 이 말을 해주는 아버지는 망자, 즉 그의 인정은 자기 위로이자 꿈이기에, 스스로를 제외하면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실베리오는 카밀라, 로렌조, 마테오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아들이었다. 다만 죽은 아버지,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그를 아들로서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그런 그는 아들이 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실베리오의 귀환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국무장관이 돌연 나타나 연설을 한다. 그는 국무장관의 선전 쇼에 이용되고 싶지 않다. 연회장을 슬며시 빠져나온 그는 화장실에서 아버지의 망령과 마주한다. 그는 작아져서 아들이 된다. 그런데 왜 아들이 되어야만 할까. 혼자서는 국무장관의 드높은 권위에 맞서기 어려운가? 그래서 나약한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던 전능한 가장의 힘을 빌리려는가. 더욱이 그 전에 루이스가 진행하는 생방송을 펑크낸 것처럼, 현실에서 그는 참여하기 싫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망상으로 회피할 뿐이다. 즉 이중국적자, 보호자임과 동시에 피보호자, 한 인생에 다양한 계급이 뒤섞인 존재인 나, 그런데 개인은 이 모든 자신을 긍정하기 어렵다. 원치 않는 자신은 부정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 꿈과 망상으로 도피한다. 대신 나와 다른 타자는 그 꿈을 방해한다. 미국에서는 영어를 쓰라고 말하는 실베리오와 달리, 미국에서도 스페인어로 따박따박 대드는 로렌조처럼, 타자들은 원치 않는 현실의 나를 끄집어낸다. 원치 않는 내부를 부정하는 나는 이윽고 자신을 둘러싼 외부 현실도 부정하며 통제한다. 로렌조와 루치아가 위선적이라며 실베리오를 공격한다. 이를 반박하고자 그는 멕시코 빈민들이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이민 행렬을 기록하러 간다. 본 작품에서의 유일한 핸드헬드다. 현실의 시간인 롱테이크, 그리고 현실의 불완전한 흔들림인 핸드헬드의 결합으로 비로소 실베리오가 현실에 참여함을 명시한다. 그러나 굶주림과 죽음이 일상, 멕시코에서의 삶이 생지옥이라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성모 현현을 주장하며 명랑하게 뛰어가는 소녀가 나타나자, 즉 실베리오가 기대하는 '동화적인' 상황이 제시되자 이를 재빨리 따라간다. 그 소녀를 좇아가지만 성모 현현이 한갓 부질없는 허상이었음을 직시하고 그는 아예 행렬을 이탈한다. 루치아와의 침실로 향해 섹스를 나눈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꿈으로 도주한다. 부모 자식은 가장 가까운 존재지만, 서로에게 '성적 본능'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모는 아이가 순수 상태에 남아주길 바라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부모는 오이디푸스 및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연인을 빼앗기기 싫음인가, 그래서인지 로렌조는 실베리오가 벌거벗은 루치아를 쫓아다닌 순간을 꿈이라 치부한다.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이.     


실베리오는 루이스에게 비난받는다. 그러나 실베리오는 당하고 있지만은 않고 그의 주장을 부정하며 맞받아친다. 그리고 루이스는 입을 열지만 말문이 막힌 상태로 그려진다. 앞선 영화 초반부 루치아와의 대화에서 실베리오는 ‘복화술’을 사용한다. 실베리오가 좀스럽게 말하지 않는 척하면서 제 말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면, 루이스는 말하는 척을 하면서 제 말을 못 하는, 자신보다도 못한 소인배로 부정하는 것이랴. 이후 루이스는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가는데 그것이 실베리오의 꿈 아닐까. 행사장 입구에서 현실 참여적인 저널리스트 실베리오에게 기자들은 여러 현안을 묻는다. 그러나 실베리오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는 이런 자신을 루이스에게 타자화하여,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것이랴. 그리고 근심 걱정을 모두 잊고 태평하게 무도회에서 춤판을 벌인다. 제 몸에 솔직하다는 듯. 이후 망자가 된 아빠를 만나 명성을 내려놓은 삶에 대해 논하고, 치매에 걸린 엄마가 망상에 젖어 산 것을 확인한 이후, 아직 살아있고 비교적 젊은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현실의 ‘길거리’로 나선다. 텅 빈 길거리, 노동자들의 아침이 시작된다. 이윽고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며 활기를 띤다. 실베리오는 활기찬 생들과 마주한다. 그러나 한 옷가게에서 아름다운 드레스 위를 올라가는 타란툴라를 목격한다. 독거미 곧 죽음의 징후, 그는 기겁하고 뒤로 후진한다. 그간 보고 싶은 긍정적인 삶만 보던 실베리오, 그러나 보기 싫은 죽음을 확인한 이후, 뒤를 돌아서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 뒤에 한 여인이 픽 쓰러진다. 그녀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실종' 상태라 말한다. 카르텔들에 의해 생사가 불분명한, 또 그들의 착취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림자' 같은 삶을 실종이라는 쓰러짐으로 반영한다. 무수한 원주민들이 쓰러진다. 찬연한 오후는 급격히 어두워져 밤이 되고, 도시는 붕괴한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윽고 실종된 사람들이 산처럼 쌓인 언덕 위로 실베리오는 올라간다. 거기서 실종된 사람들을 다스리는 아즈텍 족장을 만난다. 그리고 실베리오는 공격당한다. 부르주아 친척들에겐 '깜시'라 놀림 받지만, 정작 족장은 실베리오에게 실종의 뿌리를 지니지 않은 '사생아'라고 직격한다. 그렇게 실베리오의 꿈이 무너지자, 환상 그 자체였던 영화는 이윽고 현실의 촬영 현장임이 까발려진다.   

조르주 드 키리코, <거리의 우수와 신비>, 1914

본 장면은 일단 실베리오의 예술적 역량이 모자란다는 루이스의 비판을 부정하기 위해서, 실베리오가 예술적 역량을 집약한 꿈으로 볼 수 있다. 멕시코의 현실을 살아있는 상태도 그렇다고 죽은 상태도 아닌 상징적인 ‘실종’으로 비추며, 적막으로 가득한 텅 빈 거리를 구축하는 실베리오의 풍경은 이탈리아의 초현실주의 내지는 형이상학파에 해당하는 조르주 드 키리코의 회화를 닮았다. 이렇게 예술은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본 시퀀스는 현실 도피적인 어머니에 대한 부정에서도 출발한다. 그래서 실베리오는 현실을 보고 보여준다, 다만 현실 그 자체가 아닌 고유의 방식으로 뒤틀어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자 꿈이다. 즉 현실을 이탈한 꿈같은 것이지만 현실을 반영한 것, 그렇게 무의식을 유혹하면서 의식도 이해시키는 꿈과 현실의 중간계, 양자 모두의 부정이 곧 예술이다. 그것이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로서 예술이리. 그러나 진실과 거짓의 균형이 무너진다. 실베리오가 통제한 꿈에선 잠들어 있던 실종자 역을 맡은 배우들이, 실베리오가 힘을 잃자 깨어난다. 현실을 고유한 방식으로 비추는 꿈은 예술이 되지만, 이와 동시에 예술이 비추던 현실이 자명하게 보이면 꿈에서 깬다. 꿈을 이용해 정상에 선 실베리오는 꿈이 흔들리자 내려와야 한다. 더욱이 실베리오는 타란툴라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 이후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실종을 보지 않던가. 그것이 곧 후반부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이 턱밑까지 차오른 자신의 상태 아닌가. 그는 더는 현실에서 꿈으로 도피할 수 없다. 미국-멕시코 이중 국적자 실베리오는 양국의 관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미국의 정치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위해 자기 소신껏 연설문을 작성하는 한편, 정작 미국의 대기업이 멕시코의 땅을 자본으로 침략하는 수혜를 본인이 누린다. 초반부에 실베리오는 대기업 아마존의 공격적인 멕시코 토지 매입을 보도하는 뉴스를 꺼버렸는데 그 이유는 후반부에, 멕시코의 내지인들과 원주민, 프롤레타리아가 누리지 못하는 바로 그 땅을 미국에 발을 걸친 부르주아인 그가 독점적으로 누렸기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프롤레타리아 다큐멘터리를 찍는 자신이 부르주아임을 숨기기 위해서, 모순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 뉴스를 외면했다. 부정하고 그렇게 꿈을 꾸며 모든 이익을 누린다.    


그러나 더는 부정하지 못한다. 멕시코에서는 부르주아 미국인으로서, 또 미국에 입국할 때는 이민자 멕시코인으로서 차별을 그저 묵묵히 수용하며, 실베리오는 더는 사실을 뒤틀지 못한다. 미국에 입국한 이후의 지하철에선 자신이 마비된 현실을 꿈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그간 루치아의 자궁에 다시 들어간 것이라 상상하거나, '알'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이라며 꽉 쥐고 있던 마테오를 바다에 떠나보내며 상상한 삶에의 집착이 아닌 죽음을 긍정한다. 그리고 멕시코로 돌아오려는 카밀라를 실베리오가 기대한 꿈처럼 말리지 못하며, 실베리오가 몰랐던 로렌조의 유년기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들어준다. 그렇게 더는 부정, 즉 꿈꾸지 못하는 실베리오의 동공에 어머니의 곁에 있던 노견이 아른거린다. 바라는 꿈대로 거동할 수 없던 어머니는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간의 실베리오는 꿈을 실현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긴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위해 촬영한 대상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의 다큐멘터리에는 언제나 대상과 마주하는 자신을 포착하였고, 끝끝내 위대한 그의 이름이 불리며,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그의 마비 소식을 보도하는 방송국에서도 실베리오의 상태보다, 그를 구조한 청소부에게 주목하여 이를 보도하는 멕시코의 애국주의를 부추기듯, 영상은 촬영하고 연출하는 주체의 꿈을 위해 대상을 이용한다. 또 연회장에서는 친척들이 실베리오를 공격해도 맞받아쳤다. 그러나 꿈은 부정당해 현실로 추방되고, 또 꿈을 가능케 하는 그의 육체가 저물어가니, 이로써 사실은 확고하게 다가오며 실베리오는 꿈으로써 살 수 없다. 그렇게 실베리오는 유한한 산 자의 집을 빠져나와, 광대하고 무한한 황무지로 향하며 비로소 죽음과 인사한다. 이후 혼자만의 먼 길을 떠나며 친척들의 아첨과 요구에서 달아난다. 아직 살아있는 가족과 죽은 자신을 분리한다. 그렇게 중력에 붙잡힌 그림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의 자신이 되며 비행한다, 자유롭게. 황홀한 연회장에서 쓴맛을 맛보고, 비위생적인 화장실에서 보고 싶은 대상을 만나던 지상의 우리는, 비로소 모든 구속과 결핍에서 벗어나 비행한다.      


그런데 이냐리투는 이로써 죽음을 긍정하는가? 내용상 꿈꾸는 삶, 꿈꿀 수 없을 때 무의미해지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 다분하나, 작법이 좀 더 명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약 가득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꿈꾸는 삶 또한 충분히 아름답다. 그런 삶에 대해서 이냐리투는 지나치게 어리석음만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원치 않은 현실을 원하는 방향으로 매만지며 꿈꾸는 우리, 그러나 꿈이 담긴 숏은 컷이 되고 다시 현실로 연결되는 우리, 그것이 뒤죽박죽 계속 반복되는 우리의 삶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중간계에 놓여있다. 비로소 꿈과 현실이 함께 살던 중간계에서 오직 하나의 죽음만 남게 되나, 비행하던 죽음이 도입부로 되돌아오면 다시 죽음은 삶이 되어 두 개로 나뉘고, 명쾌하던 죽음은 다시 꿈이 되리니… 그렇게 윤회하는 우리는 삶과 죽음의 영원한 중간계에 갇힌 셈이다. 그것이 곧 현실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인 신이 아닌, 불완전하게 꿈꿀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 『오딧세이아』다. 향수에 젖어 바라는 고향은 제약 가득한 현실에선 꿈이 되고, 인간인 우리는 영영 꿈을 찾아 현실을 떠돌 뿐이니… 이러한 형이상학적 탐구와 롱테이크를 활용한 마술적 리얼리즘은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를 연상할 정도로 우수하나, 앞서 언급했듯 삶과 죽음에 대한 좀 더 확고한 태도가 필요하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이 죽음 공포를 극복하게 만드는 해방이란 관점은 흥미로우나, 마찬가지로 살고 꿈꿔야 하는 인간이 굳이 삶에 냉소적인 염세주의를 표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작법의 한계는 아쉽지만 부재하는 향수에 휩싸여 『오딧세이아』와 『텔레고네이아』를 겪는 우리네 인생을 황홀하게 보여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꿈과 같은 어지러움을 선사하는 광각렌즈와 이를 숭고하고도 광대하게 품어내는 경이로운 시네마스코프는, 본 작품을 극장에서 놓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현실을 뒤틀며 꿈으로 나아갈 때 발생하는 부조화의 웃음, 이로써 긍정하는 꿈은 조금이나마 우리가 무엇으로 삶을 사는지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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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17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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