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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29. 2022

가스통 듀프렛&마리아노 콘, <크레이지 컴페티션>

예술이 스스로를 달리 볼 때

가스통 듀프렛&마리아노 콘(Gaston Duprat & Mariano Cohn), 

<크레이지 컴페티션>(Official Competition) - 예술이 스스로를 달리 볼 때  

“그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결코 먼저 꺼내지 않을 것이다.” -나딘 고디머-

우리가 쾌를 느끼기 위해서 영화를 관람할 때는 가장 널리 관을 확보한 작품, 많은 인기를 구가하는 작품을 별 어려움 없이 선택하면 그만이다. 대중적인 영화는 수용자들, 그것도 특정 수용자가 아니라 만인의 이해와 취미에 호소하기에, 다수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에 상영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예술 영화 내지는 다양성 영화, 작가주의 영화로 규정되는 유형은 대중 영화처럼 만인에게 공격적으로 호소하지 않는다.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감정을 지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철학을 추구하는지를 설득하기보다는 대화하고 소통한다. 그리고 대중영화들이 이를 유통하는 기업에 의해 승인된다면, 예술 영화는 영화제에 의해 승인되는 경우가 잦다. 무슨 무슨 영화제의 '경쟁' 부문은 예술 영화임을 승인하는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소수가 몇천 편의 작품 중 일부를 판가름하는 특권적인 지위를 지니기에, 일개의 취향과 주관에 의해서, 또 비예술적인 그들의 이익에 의해서 예술/비예술이 판가름 날 수 있다. 일례로 칸 영화제에서는 대체로 많은 비평가와 대중에게 혹평과 독설을 받는 숀 펜이 항상 경쟁 부문 단골인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다수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소수인 프로그래머의 취향이나 이익에 의해 숀 펜은 특권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또 베니스 영화제는 프로그래머의 친정부적인 정치 성향에 의해, 이탈리아 감독에 한해서는 친정부적이고 보수적인 감독들이 수혜를 얻는다는 주장이 있다. 베를린 영화제는 제70회를 기점으로 카를로 카트리안이 프로그램 집행위원장을 새롭게 맡았는데 그는 로카르노 영화제 집행위원장 출신인 만큼, 베를린과 로카르노 양자를 비교해보며 한 개인의 지위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판가름해볼 수 있다. 미학자 조지 딕키는 하나의 예술품은 오직 ‘인공품’이라는 요건만 있으면 그만, 단지 ‘예술계’에서 감상 후보의 자격을 부여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믿는 '경쟁 부문'의 신화도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단지 승인하는 체계가 있고, 그 승인 요건은 객관적이거나 주도면밀하기보다는 매우 주관적이거나 미적 속성 이외의 것이 개입할 여지도 다분하다.      


이러한 예술계, 경쟁 부문의 신화를 가스통 듀프렛과 마리아노 콘이 <크레이지 컴페티션>이라는 작품으로 신랄히 꼬집는다. 본 작품의 원제가 바로 ‘경쟁 부문’이다. 1969년 바이아블랑카 태생의 가스통 듀프렛과 1975년 빌라 발레스터 태생의 마리아노 콘은 팀을 이뤄 활동하는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이다. 그들은 TV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장편 픽션으로는 <우등시민>이 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주연배우 오스카 마르티네즈가 볼피컵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신작 <크레이지 컴페티션>이 영화계의 관행을 담고 있는 것처럼, 전작 <우등시민>도 제도와 관행에 따라 움직이는 작가와 인간 군상을 다뤘다. 공동감독은 다니엘 만토바니라는 가상의 작가를 창조한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선 시상대에서 통렬한 독설을 날린다. 자신이 독립적이고도 주체적으로 글을 쓴 게 아니라,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의 취미에 맞춰 글을 쓴 것이라는, 위선의 명예를 노벨문학상이 안겼다는 것이다. 즉 한 개인에게 영광과 명예를 안기는 상은 진정 개인의 공을 평가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을 수여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심사위원들의 취미가 반영되고, 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다니엘에게 다른 위원회와 학회에서 상이 쏟아진 것을 생각해보면, 그에게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신들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의도도 지적할 수 있다. 과연 상은 수상 대상과 실로 관련을 맺는가? 상이 가리키는 목적에 상반되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이득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닌가, 수상자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과연 그를 바라보는가, 아니면 상을 받았다는 후광을 바라보는가. 그래서 공동 감독은 트로피의 아우라에 휩싸이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태도, 상에 선행하는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클로즈업을 이용해, 만토바니의 외부가 아니라 인간 만토바니, 작가 만토바니 자체에 집중한다. 물론 영화의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는 현실과 비교했을 때 ‘자연스럽다’라는 느낌을 주며 리얼리틱하지만, 이와 동시에 풍자적인 영화의 연출은 수상으로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연출의 톤에 의한 이미지가 실제의 인물을 대체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후 만토바니는 고향 살라스로 향한다. 살라스의 주민들은 만토바니와 그의 문학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예와 상을 바라본다. 권위가 있는 만토바니가 살라스 마을 행사에 영광을 드리워주길 바란다. 또 마을에서 만토바니에게 상을 수여하지만, 정작 상의 목적은 그를 상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토바니가 ‘상에 따라 움직여주길’ 바란다. 만토바니가 살라스라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길 바란다. 만토바니가 마을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를 사냥하고 추방한다. 공동 감독은 상을 수여하는 구조의 이익이 목적에 반영됨을, 그것을 수여함으로써 전체주의적 목적에 봉사하길 바라는 명예의 이면을 까발린다. 그리고 진정한 개인의 얼굴, 그리고 예술성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순수한 아이의 얼굴’임을 역설한다. 그를 유일하게 존중하는 작가 지망생 라미로의 순박함처럼 말이다. 구조와 제도를 위해서 개인임이 뭉툭해지는 보편, 이러한 세상에서 개인을 유지하는 것이 곧 만토바니의 까탈과 날카로움이니. 과연 그들의 신작 <크레이지 컴페티션>에서는 영화제라는 구조에 속한 어떤 마리오네트가 등장할까, 경쟁 부문과 프로그래머를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을까? 본 작품의 연출은 전작 <우등시민>에 비해서 꽤 매끈하다. <우등시민>이 흡사 모큐멘터리에 가까운 거친 리얼리즘 양식이었다면, 본 작품은 대상을 안정적으로 배치한 구도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전작이 가파르게 흔들렸다면, 본 작품은 액자와 틀에 갇힌 정물화처럼 정교하다. 여기에 화면비도 스펙타클한 쇼를 널따랗게 보여줄 수 있는 2.39:1로 광대하다. 커다란 규모와 심미주의로 현실을 넘어선다. 이렇게 영화가 아름다워야만 하는 이유, 평범성과 추에서 아름다움으로 도피하는 이유를 <우등시민>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까발린다. 나이 80을 먹은 대기업 회장 움베르토는 권태롭다. 부도 넘칠 만큼 쌓였고, 주변에 사람도 많아서 생일이랍시고 많은 선물을 받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서 보내온 선물은 형형색색 아주 다채롭다. 물질이 아주 풍부하다, 하지만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채도는 풍성하나 명도는 낮아 어둡고, 또 이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수동적이고 정적이어서 ‘생기’는 진실이 아니라 단지 꾸며진 것 같다. 이러한 연출은 곧 움베르토를 반영한다.      


움베르토는 대기업 회장으로서 이룰 것을 다 이뤘고, 경영에 더는 흥미가 없다. 그는 인생의 전환기에서 다른 일을 하며 자본 너머의 명예와 생의 활력을 되찾고 싶다. 여전히 회장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아야 하는 비서는 고용주의 빌딩에 머무르며 회장을 바라보지만, 움베르토는 자신이 서 있는 건물을 향해선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신이 세운 건물 너머, 쌓아 올린 물질 너머의 정신성이나 관념을 바라듯,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다. 그는 맨바닥에서 시작해 자수성가했다. 자본주의에 의거하여 지금까지 무수한 부를 쌓아놓고 모으기만 했다. 그런데 그 돈을 쓰지 않았다. 철학자 바타이유는 ‘소비’가 나 자신의 내재적 원리를 따르는 것, ‘축적’이 현재 자신 너머의 미래의 자신이나 외재적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 움베르토는 외재적 원리를 따른 대가로 자신에게 소홀했을 것이랴. 이제 제작자가 되어 축적한 돈을 소비하며 '족적'을 남기고 싶은 자신에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는 돈을 영화의 제작비로 소비한다. 소비로서 예술은 나의 회복,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영화 초반의 연출은 헤드룸이 강조된다. 심지어 대각선 모퉁이에 인물의 얼굴이 배치되어 상단과 측면의 여백이 더욱 공허하다. 만약 <이다>나 <콜드 워>처럼 중앙에만 놓였다면 상단의 공백만 강조되었겠지만, 측면 구석에 놓여 더 많은 허무가 가시화된다. 움베르토는 이 빈 곳을 다른 누군가가 채워주길 기대한다. 바로 영화감독이 말이다. 회장이 연출을 제안하는 영화감독 롤라 또한 헤드룸이 커다랗기는 매한가지다. 그녀도 혼자서는 영화를 찍을 수 없기에, 제작을 위해서 무언가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명성이 있는 그녀에게 부재한 돈, 곧 물질이 말이다. 롤라의 저택은 동양풍 목조 건축인데, 영화 제작이 시작되자 서구 모더니즘 양식으로 지어진 움베르토 재단 건물로 향한다. 그렇게 인물들은 자신의 커다란 결핍을 서로를 통해 채우며, 기존의 자신이 놓였던 현실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한다. 움베르토와 롤라의 이 같은 상호의존성을 연출에 더해 캐스팅으로도 보여준다. 움베르토를 연기하는 호세 루이스 고메즈, 롤라를 연기하는 페넬로페 크루즈, 이들은 본 작품에서 처음 합을 맞추지 않았다.      


10여 년 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고메즈는 에레네스토 ‘회장’역을 맡았고, 크루즈는 그의 ‘부에 의존’하는 비서이자 아내이자 배우인 레나 역을 맡았다. 감독들은 10여 년이 지나도 유사한 배역과 관계로 만나는 캐스팅을 선보이며, 혼자서는 극복할 수 없는 의존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협업이 시작된다. 그러자 바닥에 달라 붙었던 카메라가 서서히 엉덩이를 일으킨다. 롤라가 펠릭스와 이반을 불러 처음으로 미팅할 때, 촬영을 앞두고 리허설과 카메라 테스트를 할 때, 영화는 달리 숏을 동원한다. 그간 권태롭고 지루하던 일상에 역동적인 움직임이 부여되고, 한평생 부만을 쌓아두던 움베르토는 이를 낭비하여 무언가를 창조한다. 현실에서 영화가 시작되며, 각자는 기존상태를 초월해 다른 국면으로 나아간다. 회장은 영화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기에 단지 제작으로 돈을 대준다. 이후 롤라와 만나지만, 롤라 또한 움베르토가 직접 찾은 감독이 아니라 임금을 지급하는 직원이 대신 물색한 감독이다. 움베르토는 그저 롤라의 커리어만 인지하고, 또 그녀가 영화화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라이벌』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즉 회장은 창작하는 사람의 지위를 갖고 싶지만, 정작 창작할 수도 없고 창작할만한 것의 가치를 모른다. 영화를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회장은 돈을 써서 제작자가 되지만, 정작 그 돈이 대변하는 대상의 예술성은 오리무중이다. 자본가는 막대한 돈을 낭비하며 예술가에게 의존하고 또 그들의 명예를 빌린다. 그들 덕분에 영화감독 및 영화계 또한 거대 자본이 동원되어야만 가능한 기상천외하고 스펙타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회장이 빌려온 영화, 영화감독과 배우가 자본을 빌려온 영화가 ‘누구의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 수 없다. 영화의 헤드룸은 극복했을지 몰라도, 그 자리에는 여전히 회장이 선물 받은 무수하지만 부질없는 오브제들이 채워지고 있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회장이 돈을 지불한 예술 또한 고유한 ‘예술계’ 내의 가치를 자족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사회의 물질 생산적 관점과 구별되는 기호들의 공간을 '상징 공간'이라 명명한다. 사회가 곧 토대와 상부구조에 의한 경제적 투쟁으로 작동한다면, 상징 공간은 이에 복종하지 않는 피지배자들의 투쟁으로 유발, 형성된다. 투쟁하는 피지배자들은 외부와 상반되는 상징 공간을 구성하여 자율적 이해관계, ‘상징 자본’을 통용하고, 외부 사회의 영향은 굴절하거나 변용하여 수용한다. 이러한 상징 공간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예술계, 영화계다. 일반적인 현실과 다른 예술은 불가능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이 영화에선 슈퍼카를 타고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받는 펠릭스와 택시를 타고 합리적인 만큼만 출연료를 받는 이반의 조합이다. 롤라는 현실에선 일반적으로 모이기 어려운 그 둘을 한자리에 모아 '긴장감'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둘의 얼굴이 담긴 잡지의 눈과 입을 오려, 이를 얼굴을 합성하여 '불가능한 얼굴'을 만든다. 그것이 상징 공간으로서 예술계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움베르토와 롤라가 영화화하는 허구의 소설 『라이벌』은 쌍둥이 마누엘과 페드로가 ‘다르고자 하지만 결국 같아지는’ 내용이다. 그리고 영화 속 상징 공간도 현실에서 달라지려고 하지만 같아진다. 롤라는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이반이 그리 살갑지 않은 눈치다. 롤라는 군말 없고 멍청한 펠릭스가 구워삶기 더 편하고, 감독과 배우 관계를 넘어서 그와 에로틱한 사이임이 암시된다. 즉 이 둘은 예술계 내의 관계나 협업이 아니라, 사적인 관계를 예술계에 연장한다. 영화계라는 상징 공간에서 대상을 섭외하는 고유한 가치는 연기력과 개성이다. 롤라는 이를 바탕으로 오디션에 지원한 배우들의 얼굴을 살핀다. 그런데 이반이 '인맥'이 있는 제자를 '당파적'으로 꽂는다. '제작비'를 지원한 움베르토의 딸 디아나가 루시라는 배역을 따낸다. 즉 상징 공간의 고유한 가치가 현실의 외부 원리에 좌우되며 경계는 엄격하게 나뉘지 않는 모습이다. 롤라는 고증에 신경을 쓴다. 돈이 많긴 하지만 계급상 소시민인 남자의 가정에서 어떤 소파 가죽을 사용하겠느냐며, 현실에서 소시민 남자의 가정에서 사용할 법한 가죽을 세심하게 고른다. 영화에서 가죽의 미적 가치는 곧 현실과의 타당성, 부합에서 발생한다.      


롤라가 이반에게 맥락에 맞춰 대사를 읽으라는 디렉팅, 이반이 롤라에게 대본을 수정하면 어떻겠느냐 제안하는 것도, 대본 자체의 예술적 형식성을 따진 결정이 아니다. 현실의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비교한 결과다. 배우가 예술계에 놓임과 동시에 현실에 걸치는 것처럼, 영화도 예술계에 놓임과 동시에 현실에 발을 올리기에, 결국 현실의 가치를 빌려오거나 현실에서 가치가 파생한다. 이반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경쟁과 시상대에 초점이 가해지는 스포츠화, 또 무수한 돈을 벌며 특권을 누리는 예술가의 부르주아화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관행을 수용하는 예술계, 영화계에 필연적으로 놓일 수밖에 없는 배우 이반은 과연 이를 거부할 수 있는가. 펠릭스가 높은 출연료를 받고 이반은 이에 심통을 부리는 것이 영화 후반부에 폭로된다. 이반은 오스카상을 수상하면 이를 거부하려 한다. 그런데 수상을 거부하기 위해서 시상대에 올라서서 파격적인 소감을 남기면, 시청률이 올라 그는 문화산업에 일조할 것이다. 또 대중들의 이목을 끌어서 부를 창출하는 문화산업 내에서 그는 시선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주목을 끌려는 눈치다. 즉 이반은 사회, 정치, 경제에서 독립적인 고유한 상징 공간으로서 예술계의 상징 자본인 예술성을 지향하듯 보이지만, 실상 그는 경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일등석이라는 경제적 특권을 거부하고 합리적인 출연료를 받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리허설에 늦어도 할당된 출연료를 다 누리겠다며 특권을 누리지 않던가. 출연료에 좌우되는 영화계 내의 고유한 가치, 상징 자본이란 과연 무엇일까? 또 펠릭스는 분홍돌고래를 구해달라는 등, 배우 활동 외의 사회운동가적 영향력으로도 자신의 지위를 드높인다. 그래서 순수하게 연기력으로만 배우 펠릭스는 평가받지 않는다. 돈을 써서 예술과 영화를 소유하는 움베르토처럼, 펠릭스 또한 사회적 가치를 빌려와 배우로서 가치와 인기를 드높인다. 이반의 눈에 그런 펠릭스는 꼴사납다. 진정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반 또한 소시민적인 삶과 사회적 참여를 지향하며, 즉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호소하여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지 않았던가. 장애인 학교에서 교육한 대가로 얻은 상을 높게 여기며 도덕적 가치에 기대지 않던가.      


예술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본은 경제력을 이용해 예술성을 구매하지만, 예술성 또한 외부에서 가치를 빌려오기는 매한가지다. 롤라가 트로피를 파기하는 퍼포먼스에 분노한 펠릭스, 그는 롤라에게 소송을 건다. 파괴된 것은 단지 트로피일 뿐이기에 수상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그의 예술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예술성을 담보하는 트로피, 그리고 트로피의 물질적 값어치가 사라졌음에 분노한다. 스스로 예술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까닭인가? 즉 예술도 자본을 빌려서 자신의 가치를 대신 말하기에 왜 고유의 가치가 있는지 예술계에 속한 구성원들도 실상 모르지 않을까.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반이 학생들을 강의할 때 언급하듯, 배우 자체는 '필요 없는 직업'이다. 즉 예술성을 인정받지만 현실에서의 기능은 없고, 또 예술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 물리적으로 발붙이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회적 가치와 자본을 빌려오는 것이랴. 그리고 사회성과 자본을 부정 받음에 쓸모없게 되자 이들은 분노한다. 또 예술계가 가치를 외부에서 빌려오는 이유, 그것도 수치화할 수 있거나 이성적인 가치 체계를 빌려오는 이유는 예술이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중요하고 선한 쾌락이나 욕망, 하지만 타인에겐 악하거나 평가 절하되기 일쑤인 주관의 표상을 구현한 것이 예술 중 하나다. 영화에서는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건물 바깥에서 청소부들이 낙엽을 치우고 있다. 그런데 상영 오류가 난 것처럼, 청소기 소리가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한다. 이윽고 그 이유가 밝혀지는데 롤라가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분명 청소하는 소음은 존재하지만, 귀의 열림과 닫힘, 왼쪽 귀와 오른쪽 귀 각각만 들림에 객관적 사실은 ‘주관적인 미적 경험’으로 승화된다. 또 롤라는 긴 호스에 입을 대고 말하는데, 그 호스가 이어진 곳은 바로 자기 귀다. 롤라는 자기가 말하고 듣는다. 사람이 다 빠져나간 빈 곳에서 펠릭스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이는 메아리쳐서 돌아온다. 타인이 대답하지 않고 내가 대답하기,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자족성이 곧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그래서 이러한 주관, 욕망이 가치 있음을, 타인에게도 유의미함을 확인하고 싶어서 경제력이나 사회의 권위, 인정으로서 상을 빌려오는 것이랴.      


그런데 앞서 누누이 언급한 것처럼 회장으로서 자신, 배우나 감독으로서 자신은 도통 없다. 나를 표현하고 그것의 가치를 측량하기 위해서 외부의 가치 체계를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것조차 외부에 의존한다. 늙은 움베르토가 제작발표회에서 배우들과 사진을 찍으며 부재한 젊음, 예술성을 사는 것처럼, 펠릭스가 이반의 아이디어인 1인 2역을 훔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 진솔한 나를 반영한 예술을 영영 확인할 수 없다. 예술계의 명예를 다들 누리지만, 그 명예를 있게 한 자신의 예술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적인 것은 모두가 다 똑같이 본다. 그런데 나를 넘어선 타인의 주관적인 것은 일반적인 내가 접하기 어려운 것이다. 롤라는 펠릭스-이반 캐스팅, 또 미술감독에게 '디자이너'의 눈이 아니라 배역인 ‘졸부’의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즉 예술은 익히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택시를 타고 온 이반, 슈퍼카를 타고 온 펠릭스가 첫 대본 리딩 현장에 들어선다. 리허설 바깥 현실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발로 움직이는 달리 숏으로 포착되었다가, 어느새 달리 숏은 멈추고 고정된 카메라가 패닝한다. 가까운 근거리는 롱숏으로 멀어지는데, 이러한 낯설어짐이 곧 예술이다. 영화 초반 편집은 다소 거칠다. 현장이 갑자기 끊겼다가 리허설, 그 이후에는 무술이나 수업 현장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곧 예술의 감각인가, 다른 차원으로의 비연속적인 이동. 비일반적인 예술은 때때로 거짓된 일반성을 중단하는 진실의 거울과도 같다. 본 작품에서는 총 두 차례의 거울의 사용이 인상적이며, 또 거울과 역할이 유사한 카메라의 의미도 모색한다. 첫 번째 거울 사용은 배우 펠릭스와 감독 롤라가 그 이상의 에로틱한 관계임을 암시하는 이중 거울, 두 번째로는 드레스룸의 배우들은 뒤태를 보여주는데 그들 사이의 거울은 배우의 정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듯 거울은 현실에서 일반적이거나 통상적인 것 너머를 다양한 각도에서 깊게 보여준다. 그래서 배우 펠릭스가 아니라 시한부 인생 펠릭스를 스크린에 비춘다. 예술은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것을 포착한다. 하지만 당연한 관행의 중단 속에서 언제나 진실이 샘솟진 않는다. 이들의 연기는 거짓이다.      


또 비일반성은 나를 넘어서 타인의 주관을 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다수가 참여한다. 롤라는 이반-펠릭스의 주관성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긴장감을 담아내려 했지만, 정작 그 둘의 개성을 누그러뜨리려 자신의 해석을 고집하며 디렉팅한다. 이반의 개성이 들어간 해석은 불허한다. 펠릭스의 입 풀기, 이반의 의자 파괴 등 배우들 각각의 고유한 연기 방식을 모두 지양한다. 배우의 몸을 꽁꽁 묶어 자아를 내려놓게 만든다. 이렇게 감독에 의해서 이반-펠릭스가 뭉툭해지면서 긴장감이란 불가능한 것은 볼 수 없게 된다. 익히 볼 수 있었던 롤라의 일반성만 재생산되지 않던가. 집으로 돌아간 이반은 부인과 함께 노이즈가 잔뜩 깔린 전위적인 음악을 듣는다. 그것이 수준 높은 음악이라며 찬미하지만, 정작 옆집의 못질 소리임을 알고 분개한다. 이반은 진정 비일반적인 감각을 즐겼는가. 영화와 예술은 과연 일반적인 현실에서 비일반적인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 롤라가 제작발표회에서 말하듯, 이해하기 어려운 비일반적인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용이한 일반적 감각만 즐기는 것이 아닌가. 디아나와의 리허설, 무수한 마이크가 배치되어 있고 펠릭스, 이반, 롤라는 그녀와의 애무를 연기한다. 익히 상상했던 것을 지지부진하게 실현한다. 거기서 영화는 모순에 빠진다. 분명 일반적인 나를 중단하고 비일반적인 나를 생산하기 위해서 예술이 시작되었다. 비일반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포부를 천명했다. 그러나 정작 비일반적인 감각을 천명한 롤라는 예민해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익히 일반적이거나 머리로 수용해본 감각만 지리멸렬하게 재생산한다. 또 롤라식의 디렉팅은 배우들에겐 자신을 내려놓은 비일반적인 경험이나, 롤라에게는 일반적인 작품 세계의 재생산이다. 이후 롤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이반-펠릭스가 자기 스타일의 연기를 증명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겐 일반적이나, 감독이나 다른 배우가 마주하기엔 비일반적이다. 디아나와의 리허설도 움베르토에게는 낯선 것이어서 자리를 황급히 뜨지만, 나머지 배우들에게는 익히 일반적인 것의 재생산이다. 누군가는 자리를 뜨며 낯섦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익히 느끼고 싶었던 일반적 감각만 받아들인다.  


그렇게 주관성은 타자에겐 새롭고 비일반적인 것이지만, 주체에겐 일반적이다. 그것이 영화에서 무수히 충돌한다, 혼돈이다. 또 예술은 현실과 경계를 긋는다. 그런데 상징 공간과 외부 현실이 계속 뒤섞이는 것처럼, 상징 공간에서 배역을 입는 배우 또한 자신의 주관성과 외부에서 부여한 배역이 줄곧 혼재된다. 배역과 감독의 디렉팅은, 외부에서 닥쳐온 비일반성과 배우로서 자신의 일반성을 오간다. 그래서 현실이 예술을 교란하고, 예술은 현실에 자신을 투사한다. 이에 예술은 현실과 혼동된다. 영화 속 현실과 상징 공간의 경계선을 엄격하게 나누던 편집은 이내 곧 혼탁해진다. ‘가짜 눈물’을 연기에 사용하는 펠릭스는 롤라와 이반에게 췌장암에 걸렸다며 고백하고, 이반은 펠릭스에게 선민의식을 실토하는 연기를 한다. 그럴듯한 배우들의 연기는 진실로 둔갑되고, 이반의 연기가 담긴 ‘스크린’을 바라보며 롤라는 걱정하며, 이반은 치료법을 찾아주는 등 현실에 진심 어린 반응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연기를 하게 만든 원흉인 롤라는 가벼운 모형 바위로 배우들에게 실제 위압감과 두려움을 선사했다. 또 그녀는 디아나가 춘 춤을 따라 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손에 잡히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은 가짜지만, 사람들에게 진심에 가까운 경험을 전달하기에 ‘진짜 같은 가짜’로서 유효하다. 그런데 이들은 거짓말을 통해 어떤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짓만 생산한다. 안쓰럽게 췌장암 연기하는 펠릭스, 그는 밤에 식당에서 햄버거를 처연하게 먹으며 슬픔을 빌린다. 실내에서 연기하는 펠릭스, 연극 무대 바깥에서도 이익을 얻는 펠릭스, 정작 그의 곁에 있는 실외의 노숙자는 여전히 빈곤하다. 빈곤함을 빌린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현실에서 빈곤함을 갈취당한 빈자는 더 빈곤해진다. 이반의 그릇된 겸손을 향해 펠릭스가 경의를 표함에, 진짜로 겸손한 이에게 그 공이 향하지 않는다. 롤라가 일반적으로 전시, 보존되는 트로피를 갈아버릴 때, 펠릭스가 파쇄기에 물건을 집어넣으며 발생하는 시각과 강렬한 청각은 비일반적인 생경한 감각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생산한 대가로 현실에 '쓰레기'를 남긴다. 이를 치우는 것은 예술인이 아니라, 청소부의 몫이다. 또 펠릭스와 이반의 거짓말 소동에 해고되는 것은 펠릭스의 젊은 매니저다. 그렇게 거짓말하고 중단하며 ‘변신’하는 예술의 책임을 현실이 짊어진다.     


이반은 옥상에서 펠릭스를 밀어버린다. 스턴트맨과의 합의된 액션이, 합의되지 않은 폭력이 위법인 현실에 반영된다. 또 리허설을 앞두고 따로 마련된 상징 공간인 무대에서 육두문자를 날리며 모욕한 것, 마누엘과 페드로로서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상징 공간에서 뛰쳐나와 현실을 대체한다. 그 파장으로 이반은 식물인간이 되었고, 그의 아이디어였던 1인 2역을 펠릭스가 갈취한다. 그러나 현실의 살인미수와 절도는 처벌당하지 않고, 가해자 펠릭스를 상징 공간의 가련한 배역이 대체한다. 이반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펠릭스는 현실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며, 롤라는 『라이벌』에서처럼 방관자가 된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만을 중시하는 포르노가 현실을 대체한다. 이반은 췌장암으로 펠릭스가 죽더라도 영화 촬영이 멈춰선 안 된다고 말한다. 결말에서 롤라도 영화는 영영 끝나지 않으리라 말한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지 않는 이유, 포르노에 따른 책임을 영화는 면피하거나 심지어 현실에 타자화하여 전가하기에, 그래서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타인에 의해 주관성을 억압받을 때는 영화 제작을 멈추거나 하차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독·배우 모두의 주관성이 살아나기 시작하자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반의 희생을 눈감고 각자의 이기심을 위해 영화를 계속한다. 이후 백인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반면, 원주민은 원시인으로 전락하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 영화, 현실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여성 혐오적'이라는 비판을 무마하는 롤라의 영화가 이어진다. 움베르토는 다리를 개통하며 기존 너머로 삶을 이어간다. 그런데 점차 현실은 저물어간다. 그래서 현실에 해악을 미치는 영화화된 『라이벌』을 듀프렛과 콘은 절대 비추지 않는 것인가, 현실에 반영하지 않기 위해서, 또 그것의 실체로서 포장만 비추는가. 예술은 분명 주관적이나 나만의 주관성이 아니라, 다수의 주관성, 비일반성을 위한 나 너머의 주관성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선 소수의 주관성으로 전체주의적 희생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자기들만의 주관성이 충돌한다. 비혼 롤라가 따로 놓이고, 기혼자이자 아이들을 낳은 이반-펠릭스가 숏 하나에 공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모라는 점은 같으나 정작 배우로서 함께 있으면 둘 중 하나는 사라지고 숏은 분리되는 이반/펠릭스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예술은 현실을 맹목적으로 재생산하는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 롤라가 트로피를 파기하는 퍼포먼스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숭배하고 따르는 예술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가 실제로 무의미할 수 있음을, 당연시된 가치판단과 물신화를 의심한다. 또 트로피의 값어치가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펠릭스와 이반 스스로 트로피가 되어야 한다. 롤라의 퍼포먼스는 외부 가치를 빌려와 나를 대변하는 맹목적인 관행에 균열을 일으킨다. 거짓 속에서의 진실을 예술로 폭로한다. 결말에서 카메라는 펠릭스의 기자회견에서 왜곡된 이반이 깨어나는 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영화는 계속될 것이라 말하는 롤라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거짓이 아니라 씁쓸한 진실을 비추며, 예술계의 일원이 보기 싫은 사실을 커다랗게 송출하며 마무리한다. 그 불편한 영화를 영화계는 승인해야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사실에 책임을 지는 영화를. 이렇게 듀프렛과 콘은 현실과 경계를 긋고 관행을 중단하면서도, 현실에 기대는 예술을 다각도에서 성찰하고 반성한다. 진실을 비추는 예술의 미적 경험을 긍정함과 동시에, 외부 요인과 결탁한 예술의 빈곤함, 필요할 때는 현실 속에 스며들어 거짓말하는 해악의 정곡을 찌른다. 예술계에 속하면서도 관행까진 사랑하지 않는 감독들은 이를 폭로하며, 사랑하는 예술이 가야할 길을 반성한다. 결국 우리는 롤라와 펠릭스의 작품이 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반성해야 하는 이유다. <우등시민>에서 작가의 아우라에 의해 작품세계를 확인할 수 없던 것처럼, <크레이지 컴페티션>에서도 작품과 유리된 쇼에 가까운 리허설, 영화를 승인하는 영화제, 이를 찬미하고 포장하는 기자회견이 작품의 실체를 은폐한다. 『라이벌』의 줄거리는 알지만 그것이 정작 어떻게 영상화됐는지는 모르고, 오직 시각은 '디자인'을 빌려온 '포스터'로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영화 고유의 것은 없고 외부 자본이나 가치체계를 무방비하게 빌려오므로, 우리는 영영 영화를 모른다.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맹목적인 경쟁 부문의 실체, 그것을 승인하는 예술계의 민낯이다, 더 많은 것을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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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2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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