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an 13. 2023

아그네즈카 스모친스카, <더 사일런트 트윈스>

방어기제적 자기애

아그네즈카 스모친스카(Agnieszka Smoczynska), <더 사일런트 트윈스>

(The Silent Twins) - 방어기제적 자기애    

“위대한 기지는 광기에 아주 가깝고 그들의 경계를 가르는 엷은 칸막이가 있을 뿐이다.” -알렉산더 포프-

현실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환상과 망상의 세계로 도주한다. 현실에서 환상을 꿈꾸는 이유는 익히 가능한 것 너머의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여 현실에 가능성을 더하기 위함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카를 융에게 환상이란 한때 현실적 가능성을 지닌 절박하거나 은밀하고 괴로운 문제이기에, 환상을 성취하면 이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의 실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바꾸며 나를 고풍하게 드높인다. 반면 실현하지 못한 환상을 현실과 대체하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이라 여기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망상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개인의 탓인 사례도 있겠지만, 환상이 가능해야 할 사회를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린 따돌림, 고립, 차단을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침묵의 쌍둥이’라 불리는 준 기븐스와 제니퍼 기븐스의 망상에는 사회의 책임이 분명하다. 그녀들이 외부와 일절 교류하지 않고 오직 쌍둥이 단 둘끼리만 소통한 이유는, 그녀들이 거주하던 영국 웨일즈에서 그들 식구가 유일한 흑인이요, 나머지 가구가 전부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주한 그녀들이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그들을 일찍 하교시키는 방향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그렇게 고립되고 폐쇄된 상황이 지속됨에 그녀들은 반사회적인 성향을 띠었고, 끝끝내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리고 쌍둥이 중 제니퍼 기븐스가 사망하자 비로소 준 기븐스가 사회화를 거쳤다. 이러한 침묵의 쌍둥이의 비밀스러운 삶을 아그네즈카 슈모친스카가 신작에서 영화화한다. 1978년 브로츠와프 태생의 아그네즈카 스모친스카는 폴란드의 영화감독이다. 동시대 폴란드에서 주목받는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얀 P 마투신스키, 얀 코마사 등은 모두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폴란드 학파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물론 슈모프스카의 <첫눈이 사라졌다>의 사례처럼 키에슬로프스키의 마술적 리얼리즘도 뒤섞는다. 이러한 청년 감독들의 색채와 다르게, 스모친스카는 컬트영화로 유명하며 폴란드 학파보다는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영향력에 놓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 그녀가 졸업한 키에슬로프스키 영화학교의 영향이 컬트영화 속 기묘한 상징, 상상력으로 발휘된 것일 수도 있다.    

  

스모친스카는 <더 사일런트 트윈스> 이전까지 총 두 편의 장편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매우 기묘하고 불쾌하며 적나라하다. 『인어공주』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을 현대적인 뮤지컬로 재해석한 <인어와 함께 춤을>에서 인어들은 전시되고 상품화되어 타인의 욕망과 시선에 의존하면 아름답다. 반면 주체적이고 자유로우면 불쾌하고 추하다. 여성 인어들이 남성 사장 앞에서 상품성을 평가받을 때, 사람들에게 촬영되기 위해서 꼬리가 꾸며질 때 이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로운 본 모습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 타인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속에서 살기 위해 비린내를 풍기고, 비늘과 꼬리는 동화에서 상상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리 생존을 위해 날카롭고, 육식하는 이빨은 사냥을 위해 뾰족하여 공포를 준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 속 뮤지컬 음악은 양분되어 있다. 하나는 도시의 스펙타클과 자본주의를 찬미하기 위해서 선전적인 의중을 가진 음악, 다른 하나는 주체적인 자기표현이다. 기억 상실이 소재인 <낯선 여행>에서는 확신할 수도 없지만, 기억이 없어서 의심하거나 판단할 수도 없는, 그래서 불안하고 불쾌한 여정이 이어진다. 또 기억을 잃어 모든 인습에서 벗어난 주인공이 지하철역에서 오줌을 누거나, 집에서 나체로 활보하는 등, 우리의 보편성에서 벗어난 적나라함이 특징이다. 이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스모친스카의 특징은 자유로운 것, 솔직한 것이 추하다. 자유로운 스모친스카는 이런 불쾌감을 지향한다. <인어와 함께 춤을>의 대사처럼 누군가의 시선, 시대에 부응하는 삶은 잠시 휴가여야 한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 내가 살기 위해 타 생명체를 탐닉하는 삶이란 필연적으로 역겹고 매스껍다. 스모친스카는 현실의 일반성과 동떨어진 초자연적 존재를 설정하거나, 낯선 사건을 발생시켜 우리에게 일반화된 것의 부조리를 폭로한다. <인어와 함께 춤을>에서 도시 사회는 사람과 인어를 유혹한다. 인어는 도시가 모든 것을 제공해주리라는 환락에 빠지고, 도시에 머물고자 클럽에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인어에게 임금이 체불되어 도시가 약속한 스펙타클은 유예되고, 반짝이고 펄럭이는 도시의 삶이 인어에게 적합하지도 않다. 환락과 사랑에 빠져 자신의 하반신을 잘라내는 등 인간의 법과 일반성에 의해 인어의 자유와 개성은 재단된다.      


<낯선 여행>에서는 기억 상실로 주체와 객체를 탐구한다. 폴란드 영화 특유의 날카롭고도 차가운 한색의 필터가 사용되는 본 작품은 기억이 없는 상태, 몸은 성인이지만 정신은 아기와도 같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주위에서 주입하는 이름, 기억, 역할, 규정에 의해 객체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부모한테서 태어난 직후, 또 기억이 있던 당시 주인공은 '킨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기억 상실 이후에는 '알리차'라는 이름을 택했다. 이후 가족들과 재회하자 킨가라는 이름과 아내이자 어머니, 딸이라는 객체성이 부여된다. 그녀는 기억이 있던 당시에도 남편의 이혼 선언에 의해 불가피하고도 맹목적으로 객체로 전락할 상황에서 달아난 것이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객체로 붙잡힌다. 이에 반해 주체라면 알리차라는 이름을 직접 선택하고,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나와 무관하게 규정된 단어나 개념 등을 재배치하는 능동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이끌려 실내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역할과 성격을 몸소 규정하고 열려 있는 외부로 향해야 한다. 이러한 스모친스카는 사랑을 숭고하게 그린다. <인어와 함께 춤을>에서 인어의 정체성은 하반신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한 인어는 인어로서 특징과 성기가 있는 하반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것으로 바꾸며, 연인을 위한 육체로 변신한다. 상반신에 남아있는 이빨이 갈구하는 본능도 억제하며 사랑을 위해 스스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자연은 인간을 위해 성과 정체성을 포기할 정도로 이타적이고 자애로우나, 인간이 자연을 배반함에 또 다른 자연은 복수하고자 난폭해진다. <낯선 여행>에서는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음에 사랑하지도 않고 기억이 없음에도 펠라치오를 하고, 아들의 짓궂은 장난도 참아준다. 그들을 위해 알리차로서 자신이 아닌, 킨가라는 정체성을 선택하며 현재의 자아를 포기한다. 이후 기억이 돌아왔을 때도 자신을 망자로 여기는 아들의 의식, 남편의 주체성을 위해서 그들을 포기한다. 주체적으로 킨가임을 다시 기억해냈을 때 사랑을 위해서 알리차가 되며, 즉 스모친스카의 사랑은 연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숭고다.      


스모친스카는 비일반성 속에서 회복하는 진실한 인간성과 사랑, 주체성을 <더 사일런트 트윈스>에서 이어간다. 제니퍼가 죽기 전까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정신병원에서도 늘 달라붙어 있었던 쌍둥이, 스모친스카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영화의 화면비는 1.33:1보다는 조금 넓고, 1.85:1에 비한다면 조금 좁은, 그 사이에 있는 어딘지 어중간한 ‘1.66:1’이다. 우리에게 일반적인 1.85:1이나 2.39:1에 비해서 좁고 폐쇄적인 화면비에 쌍둥이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가득 찬다. 영화 초반부에 준과 제니퍼는 그들만의 '라디오'를 진행한다. 자매는 여자 없이 살 수 없는 남자들을 논한다. 이와 동시에 그녀들을 증오하고 파괴하는 남성들의 지배욕을 말한다. 가부장제를 인지한 쌍둥이는 경제력이 높은 남성과 결혼을 하더라도 여자가 당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즉 가부장제가 팽배한 시대에서 대담하게 남성의 치부를 들춰내는 쌍둥이, 그러나 여성이 주체적이고 당당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그들끼린 말해도 외부, 사회로 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그녀들의 라디오는 한갓 망상에 그친다. 외부의 어머니에게 그녀들의 발화는 차단된다. 그래서 쌍둥이만의 고립된 표상/외부 세계를 나누고 단절하는 연출이 특징이다. 전자의 경우 1.66:1의 화면비에 준과 제니퍼의 얼굴이 클로즈업,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잘려 나가리만큼 꽉 들어찬다. 오직 쌍둥이만 허용되는 표상을 가시화하는 연출. 또 쌍둥이는 투명한 창이 있는 녹음실에서 라디오 진행을 하는 상상을 하는데, 그 유리창에 서로의 얼굴이 비치며, 창에 의해 자연스러운 '디졸브'가 발생한다. 쌍둥이가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현실과 달리 그들만의 표상에서 준과 제니퍼는 서로의 얼굴이나 손이 중첩되어 구별되지 않는다.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다. 그리고 이들만의 세계는 따스한 주황색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외부는 다르다. 일단 표상에선 디졸브된 제니퍼와 준, 그러나 외부 세계에서 서로는 분리된다. 정신적으로 깊은 교감을 하고, 멀리 떨어져도 흡사 텔레파시를 하듯 서로를 직감하는 쌍둥이는 동일한 표상을 공유하고, 거기서 둘의 정신은 하나다.     


그러나 외부 시선에서 제니퍼와 준은 물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중첩된 것은 곧 떼어지고, 가까이 있던 클로즈업은 롱숏 및 풀숏으로 변하며 멀어진다. 그리고 영화 내내 외부 세계의 계절은 '겨울'이다. 그래서 따뜻한 난색이 아니라, 싸늘하고 차가운 한색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 겨울은 단순히 구체적인 사실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지 않는다. 쌍둥이가 느끼는 외부 세계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가리킨다. 그 고통은 후술하겠지만 준과 제니퍼가 바라는 표상을 배반한다. 그래서 쌍둥이는 물질적인 세계에서도 타인들, 심지어 가족들과도 자신들만의 세계를 분리한다. 크리스마스에 쌍둥이의 조카, 헬렌 마리를 낳은 언니가 방문한다. 그러나 쌍둥이는 자기들 표상 너머인 크리스마스, 언니나 조카 등의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쌍둥이가 원망스럽고 서운한 언니의 세계와 그들만의 표상에 놓인 쌍둥이는 하나의 테이크에 공존할 수 없고, 각기 다른 두 개의 숏으로 나뉜다. 즉 숏의 분절은 이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있음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줌인/줌아웃도 주목할 법하다. 가장 먼저 줌인은 영화 도입부의 저녁 식사 시퀀스에서 사용된다. 아빠가 일을 끝내고 돌아왔고, 부모와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한다. 그리고 아빠가 쌍둥이에게 학교생활에 대해 질문하고, 본 과정을 줌인한다. 쌍둥이는 아버지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들은 아빠의 말에 답하지 않는다. 관심은 오로지 쌍둥이에게만 갇혀 있다. 이후 전개가 진척되어 백인들이 많이 다니는 웨일스의 학교에서 특수학교로 옮겨진 쌍둥이, 특수학교의 교사는 쌍둥이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한다. 이러한 와중에 쌍둥이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손가락으로 침묵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본 과정에서도 줌인이 동원된다. 이후 쌍둥이에게 어떤 답변도 끌어내지 못한, 그들에게서 소외된 교사가 줌아웃된다. 줌인/줌아웃은 쌍둥이만의 세계에의 침잠/쌍둥이에게서의 소외를 표현한다. 그녀들은 왜 아버지나 선생을 소외하는가. 그 이유는 쌍둥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특수학교로 전학 가기 전에 쌍둥이는 백인 학생들에게 괴롭힘 당한다. 정신적, 물리적 모두 다 모욕감·굴욕감을 느낀다.    

  

쌍둥이를 괴롭히는 백인 남학생은 그녀 위에 올라타서 얼굴에 침을 뱉는다. 백인은 흑인이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으로 포착되어 거대하고 위압적인 반면, 흑인은 백인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굴욕적인 '하이 앵글'으로 포착된다. 스모친스카는 구도를 통해 흑인 위에 있는 백인, 그들에 의해 찌그러진 흑인을 암시한다. 이러한 와중에 쌍둥이는 백인들이 보길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욕설이나 언어폭력에 의해 굴욕감을 느끼며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흑인들을 보면서, 백인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백인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변형하지 않고, 언제나 그들의 자극을 무반응으로 튕겨내며 스스로를 보존한다. 이후 특수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백인이다. 흑인 부모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는 쌍둥이, 특수학교의 백인 선생이 아무리 그녀들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다고 해도, 외부에서 당하고 쌓인 게 많은 쌍둥이는 교육 현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교사는 쌍둥이를 학교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정보를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개인 정보를 묻는 질문이 낭송되는 녹음기를 놔두고 자신은 자리를 뜨며 쌍둥이가 답변하기 쉽게끔 배려하지만, 그럼에도 백인의 질문에 흑인 쌍둥이는 답하지 않는다. 특수학교에서도 행동이 굼뜨고, 피부색이 홀로 다른 쌍둥이들은 타 학생들에게 밀쳐진다, 교사의 눈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말이다. 여전히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힘을 가하고, 그럼으로써 백인에 의해 ‘약한 흑인’이 규정된다. 쌍둥이는 특수학교에서도 백인이 흑인을 규정하는 힘을 거부한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밥을 먹는다. 백인들이 규정한 점심시간을 따르지 않는다. 학교에서 종이 울리면, 책상에 팔을 괴고 잠을 잔다. 말을 잘 타는 쌍둥이, 이를 교사가 칭찬하자 백인의 기대·평가에 부응하지 않겠다는 듯 각기 다른 말에 탄 쌍둥이는 동시에 낙마한다. 이들이 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다, 부모님은 식구, 손님들을 맞이하기에 여념이 없다. 크리스마스의 관행은 사랑을 베푸는 것, 그래서 언니는 쌍둥이가 조카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바란다.    

  

그러나 쌍둥이는 언니에게 한마디 말도 붙이지 않는다. 쌍둥이는 백인 문화인 크리스마스의 일반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인형으로 창조한다. 그리고 언니는 백인 마크와 결혼했다. 그래서 쌍둥이는 더더욱 반감이 있을 것이다. 백인에 의해서 영국으로 이주한 부모도 마찬가지다. 백인에 대한 반감은 제니퍼와 준의 표상을 가시화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난다. 그녀들이 집필한 동화를 시각화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본 작품에서 두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는 '두 마리 앵무새 이야기', 다른 하나는 '선천적으로 약한 심장을 갖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개를 희생하는 이야기'다. 그중 전자에서 흑인 쌍둥이가 백인 사회를 향한 반감이 드러난다. 앵무새는 쌍둥이처럼 둘이다. 앵무새는 새장 안에 갇혀있고, 일반적인 앵무새와 달리 사람의 말을 따라 하지 않고, "나를 팔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되뇐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한다. 쌍둥이는 웨일즈에서의 삶이 백인들이 원하는 모양새로 '진열대'에 올라간다고 느꼈을까, 이에 부모가 본래 머물던 바베이도스를 고향으로 삼아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쌍둥이는 관념적으로, 상상의 표상에서 바베이도스를 그려본다. 그것이 곧 영화 속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쌍둥이는 인형을 만든다. 그들이 쌍둥이 외의 친구다. 백인이 흑인을 좌우하던 움직임으로부터, 흑인이 인형에 움직임을 부여하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흑인 고유한 삶을 상상한다. 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자기 폐쇄적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도 크레딧을 스톱모션으로 대체하는데, 호명하는 이름들은 외부로 전달되지 않고 쌍둥이의 표상 안에 쌓여만 간다. 즉 쌍둥이의 세계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그녀들의 주관성은 타인이 수용하거나 동의하는 객관성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자기 안에만 갇히고, 거기서만 유효하다. 이후 특수학교에서 받은 질문을 스톱모션 세계에서 답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름, 기억, 답변은 모두 현실의 움직임과 달리 뻣뻣하고 이질적인, 흡사 그녀들의 불명확한 억양, 발음과 같은 표상에만 갇혀 외부에 전달되지 않는다.     


한편 이는 쌍둥이가 '세계의 메커니즘'을 모방하여 표상을 구축하는 과정도 내포한다. 특수학교에서는 준과 제니퍼를 분리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후 둘이 분리되자 쌍둥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힘 빠진 다리는 백인에 의해 강제로 움직인다. 성인이 된 이후 가게 된 교도소도 그렇다. 백인에 의해 공간이 규정되고 움직임은 제한된다. 백인에 의한 강제 이송, 그것이 쌍둥이들이 느끼는 세계의 작동 원리다. 그래서 쌍둥이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일반적인 흑인들처럼 외부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인형을 만들고, 흡사 쌍둥이가 백인이 되어 그들을 지배한다. 이는 쌍둥이가 성장한 이후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보통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존재는 백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젠 쌍둥이가 2층 방에서 망원경으로 거리의 백인을 내려다보고, 소설을 쓰기 위한 사랑의 도구로 웨인을 선택한다. 백인이나 남성의 욕망에 규정당하지 않고, 본인들이 바라보고 욕망하며 대상을 역으로 규정한다. 물론 차이는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면 분명 그 타자는 "쟤가 왜 나를 쳐다볼까, 내가 무슨 문제가 있나?" 등의 질문을 자신에게 끝없이 내던진다. 상대의 시선에 만족스러울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시선의 힘은 바라보는 사람이 노출될 때의 일이다. 그리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노출할 수 있는 특권은 여전히 보편적인 백인 사회 내에서의 백인이 갖고, 반면 쌍둥이는 몰래 훔쳐보거나, 사람이 없는 빈집에 들이닥치므로 그녀들의 시선은 무능력하다. 그런데 쌍둥이들은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기 전에도 이동했다. 그때는 누구에게 지배받았던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서로였다. 특수학교로 처음 전학 갔을 때, 쏟아지는 질문을 두고 답변해야 할지 말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쌍둥이는 서로의 눈을 마주친다. 이윽고 손가락으로 '쉿'이라는 신호를 교환한다.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대강 알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며, 하나였을 때 나약했던 것이, 동일시된 상대방과 맞대고 기대면서 단단해진다.   

   

특수학교 외에도 쌍둥이는 특정 행동을 할 때 항상 서로의 눈을 응시한다. 각자가 하고 싶지만 망설이던 행동은, 나와 동일시된 쌍둥이의 '결재'에 의해서 확신이 생긴다. 그래서 특수학교에서 특단의 조치로 쌍둥이를 분리시키려 하자, 준과 제니퍼는 다툰다. 다툴 때 '너는 나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서로를 헐뜯는다. 상대방이 자신에게서 멀리 사라지거나 동떨어질 수 있는 '타자'임을 부정한다. 영화는 이를 가시화하는 편집이 인상적이다. 한 명은 특수학교에, 다른 한 명은 외진 학교로 보내져 분리된 쌍둥이, 영화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쌍둥이들을 교차 편집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장소에서 연락도 주고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준의 행위가 제니퍼에게로, 그 반대로도 이어진다. 준과 제니퍼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는데도 흡사 계획이라도 한 듯, 학교에서 탈출한다. 영화 후반에 서로 다른 독방에 갇혔음에도, 준의 자살을 직감한 제니퍼가 울부짖는 장면도 그렇다. 분리된 두 차원에 놓인 쌍둥이의 행동, 심리가 인과적·개연적으로 이어지는 교차편집은 쌍둥이가 자매를 자기 동일시함을 가시화한다. 그렇게 같은 자매는 작가의 꿈도 동시에 꾼다. 어렸을 땐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되는 동화를 집필하던 그녀들은, 성숙한 후에는 제법 현실적인 소설을 쓰며 이는 ‘필름 푸티지 인서트’로 영상화된다. 현실과 제법 유사한 풍경, 하지만 현실 그 자체에 비한다면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풍경, 낡은 필름의 아스라한 매체성이 실제와 동떨어진 분위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을 풍긴다. 쌍둥이들은 그 소설로 등단하여 작가가 되고 돈을 벌고자 하지만, 시도는 연이어 불발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몽환적이고 망상적인 그녀들만의 표상은 외부에선 유치하게 보일지 모르며, 또 다른 관점으로는 '백색 현실'과 다른 '흑인 여성의 표상'을 관용할 능력이 하얀 외부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들은 표상을 벗어나 현실에서 사랑을 경험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학창 시절에 본 적이 있는 웨인이라는 청년을 그녀들의 '뮤즈'로 삼고자 계획한다. 그녀들은 사랑을 한다면 분명 소설을 잘 써서, 등단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흑인은 백인들이 원하는 프레임에 갇힌다. 준과 제니퍼는 백인들에게 수용될만한 흑인의 용모를 꾸미기 위해 가발을 쓰고 화장한다. 웨인의 빈집에 가서 자신들이 웨인의 공간을 규정한다. 그러나 웨인과 그의 가족들이 들이닥치고, 웨인 아버지의 호령에 쌍둥이는 도망치다가 얼어붙는다. 그 백인들이 백인우월주의자라는 것을 부모가 웨인과 론을 언급하는 대사, 또 TV에 방영되고 그들이 시청하는 '흑인이 문제'라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공연으로 암시한다. 그렇게 백인의 시선에서 도망가지 못한 쌍둥이들은 웨인과 론의 제안에 약물을 복용하고 술을 마신다. 그녀들은 비현실적인 황홀감을 느끼고, 그간 쌍둥이는 서로를 제외한 타인과 말하지 않던 것과 달리 웨인&론 형제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론과 웨인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반면, 제니퍼와 준은 침대 아래 맨바닥에 눕는다. 그녀들은 스스로의 기분이 좋다고, 이로써 주체적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는 한갓 환각으로, 실상 흑인 여성들은 백인 형제 아래 놓인다. 그녀들은 제 기분 따라 웨인을 선택할 수 없다. 웨인은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준이나 제니퍼를 각기 선택해서 욕망한다. 웨인에게 선택된 누군가는 황홀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누군가는 소외되어 우울하다. 또 웨인은 제니퍼가 절대 백인이 될 수 없다고 조롱한다. 이에 웨인과 결별하는 장면에서 제니퍼의 가발이 불탄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가발, 그러나 백인임을 승인하는 백인 권력에 의해 그녀의 욕망은 부정된다. 이렇게 웨인과 사랑한 기록을 그녀들은 글로 옮기고, 심지어 준은 책을 출판한다. 그녀들의 언어는 매우 솔직하다. 제니퍼는 첫 경험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상세함을 모조리 글로 옮겨 적는다. 하지만 솔직한 광기가 남아 있음과 동시에 백인들과 타협한 그녀들의 글은 따분해지지 않았을까. 광기의 치기어림과 날카로움보단, 백인 독자들이 기대할만한 상이 제시되어 있지 않았을까? 웨인을 모델로 한 소설을 영상화환 시퀀스는, 현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나 필름 푸티지와 다르게, 쌍둥이를 포착한 '디지털'과 질감이 별 차이가 없다.      


즉 흑인 쌍둥이의 이질적인 자기애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보편적인 백인 남성의 세계에 가득한 파멸적 욕망만 백인 독자에게 수용된다. 그리고 백인에게 서로 달리 '간택'당한 흑인에 의해, 쌍둥이의 연대는 무너진다. 앞서 교차 편집을 언급한 것처럼 쌍둥이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어도, 서로의 행동이 동시에 인과적으로 연결될 정도로 돈독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간택되고, 누군가는 버림받고, 그렇게 나와 네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웨인과 정사를 나누는 제니퍼의 의식에는 꽃이 피고, 그 황홀한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감미롭게 붙잡히지만, 그 연출이 준에게는 이어지지 않는다. 쌍둥이는 각기 다른 시간에 참여한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시간, 반면 느리게 붙잡고 싶은 시간으로. 또 준의 소설은 출판되지만, 제니퍼는 등단에 실패하여 자매를 질투하고 증오한다. 그간 학교와 집에서는 둘이 차이를 느낄만한 사건이 적었다. 이란성 쌍둥이이긴 하지만 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교육은 천편일률적이고, 부모님이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도 차별 없이 동일했다. 하지만 이란성 쌍둥이이기에 각자의 개성이 도드라져 사회에선 그녀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생겼고, 그 과정에서 쌍둥이는 서로를 분리한다. 그간 쌍둥이는 폐쇄적인 표상에 갇혀 서로만 바라보고, 심지어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자기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자매와 달리 나만을 사랑해주는 확연한 타자를 욕망하며, 리비도는 외부로 향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리비도에는 총량이 있다. 그래서 높은 자기애와 높은 상대 흠모는 공존할 수 없다. 자기애가 높으면 흠모는 낮아지거나, 그 반대가 가능하다. 그리고 쌍둥이는 웨인을 사랑하며 자기애가 낮아지고, 이로써 나르시시즘에 가깝던 쌍둥이 대신 웨인을 바라본다. 그러나 백색 외부, 흑인을 그저 능욕하던 웨인은 적절한 연인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다시 자기에게 되돌아온다. 백인 사회에서 유일한 흑인, 그것도 가부장적 사회에서 수동적인 여성에게 능동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      


이후 쌍둥이들은 백인 사회에 반사회적인 테러를 가한다. 지금까지는 흠모하던 웨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백인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검열했다면, 이제 반사회적인 테러를 웨인과 론 형제에게 덮어씌우기 위해서 백인으로 위장한다. 방화를 일으키고 절도한다. 그러나 쌍둥이는 웨인과 론에게 덮어씌우지 않고 자백한다. 백인임을 모방하지 않는 흑인이자 본인들만의 반성적 태도일까? 이를 두고 백인 사회의 하얀 검·판사들은 그녀들을 사이코패스라 규정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따르면 광인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사회 안정을 위해 추방되었다. 광인의 광기는 ‘어리석은 광기’와 ‘현명한 광기’로 나뉘는데, 스모친스카는 반사회적이면서도 가부장적 사회의 진실, 자기 파멸적 욕망을 통찰하는 현명한 광기를 쌍둥이가 가졌다고 해석한다. 현명한 광기는 이성을 능가하여 맹렬하고도 강렬한 진실로 정념을 뒤흔든다. 그래서 쌍둥이의 광기가 투영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나, 수감 직전의 '뮤지컬'은 황홀하고도 환상적으로 감상자를 홀린다. 그러나 흑인의 광기가 백인 사회의 거짓된 일반성을 교란하는지, 하얀 검·판사들은 '흑인에게 반사회적'이었던 백인 구조를 지적하지 않고, 광인들을 병원 내지는 구빈원으로 추방하는 먼 과거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렇게 모두가 정상인들의 통일성, 일관성, 기능성을 반복하고, 광인들에게도 이를 교육한다. 사회는 성장한 준과 제니퍼가 서로간의 다름, 백인들과의 다름을 경험하는 장소였다. 물론 거대한 백인 권력에 의해 흑인 자매들의 저항은 불발되었지만. 반면 정신병원은 모두를 똑같이 만드는 공간이다. 광인들의 유별난 행동을 두껍게 감시하는 백인 간호사, 경비는 그들을 겁박하여 백인 정상인들이 요구하는 상태로 주저앉힌다. 정신병원에서 스톱모션, 푸티지 인서트 등은 모두 사라진다, 의사가 앵무새를 잡아먹는 장면을 끝으로, 그렇게 광기는 백인의 일반성에 잠식당한다. 즉 백인의 획일화에 의해 각기 다른 개성을 말소당한 쌍둥이의 자기 동일시는 더 심해진다. 그녀들은 분명 서로를 분리해갔다. 무도회에서 각기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제니퍼는 한 살인자의 아기를 임신하려 했지만, 간호사에게 적발되어 불발된다.      


서로 다른 욕망을 품던 쌍둥이는 외부에서 제지가 가해지자 자기 보존에 위기를 느껴, 바깥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자매를 다시 쳐다보며 의존한다. 그녀들의 애독자이자 기자인 마저리는 면회를 와서 향후 작가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 전한다. 이후 준은 자살 기도하는데, 출판 유/무를 두고 다투던 제니퍼는 다른 방에 머무는 준의 위기를 제 일처럼 직감한다. 즉 망상증의 원인은 타자의 현실 참여를 거부하는 획일화된 현실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제니퍼는 내내 백인 다이애나를 선망하다가 출소하는 날 돌연사한다. 정신병원에서 광기를 말소당하고, 백인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이고 일반적인 여성상을 내면화하지만, 몸이 흑인인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다. 한편 제니퍼의 죽음 이후 준은 사망한 자매를 분리하며 제 몸이 요구하는 춤을 춘다. 몸에서부터 영혼까지 너무나 닮고 친밀한 쌍둥이라서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스모친스카의 대답은 NO다. 스모친스카는 자신의 B급, 컬트적인 색채로 쌍둥이의 광기, 백인 사회 내에서 흑인의 현명한 광기를 가시화한다. 이후 광기와 독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백인 사회를 분석하여, 침묵의 쌍둥이와 1970~80년대의 영국을 스파이트 리나 조던 필을 연상케 하는 관점에서 비춘다. 그 사회는 쌍둥이의 개-아기 심장 교환 이야기처럼, 선천적으로 병약한 백인 아기를 살리기 위해 타자를 착취한다. 그런데 그 아기는 자라나며 자신이 간직한 타자를 그리워한다. 또 결말에서 준은 우주를 바라보며 광대함 속의 자신을, 드넓은 차원으로 사라진 타자이자 망자 제니퍼를 회고한다. 인종 간 다름, 각자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쌍둥이가 서로에게 집착하고, 죽어서 분리되는 비극도 발생하지 않았으리. 결국 우리에겐 넓은 우주에서의 무한한 공존이 살아서부터 필요하다, 착취와 희생 대신에. 이러한 ‘반성과 제안’을 폴란드를 떠나서도 퇴색되지 않은 스모친스카만의 개성으로 버무린다. 단순 개성만 살아있는 작품임을 넘어서, 다루는 소재를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으로 그녀의 도약을 확인할 수 있다.  

----

감상일: 230113 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드니 코테, <댓 카인드 오브 썸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