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Feb 02. 2023

데미언 샤젤, <바빌론>

사치의 시절, 청소부들을 위한 헌사

데미언 샤젤(Damien Chazelle), <바빌론>(Babylon) 

- 사치의 시절, 청소부들을 위한 헌사    

“진정한 사치는 부의 완전한 멸시를 요구하며, 또한 노동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한편으로는 무한히 파괴되는 화려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들의 고된 거짓말에 대한 조용한 경멸로 살아가는 이의 어두운 무관심을 요구한다.” -조르주 바타이유-

대탕녀 바빌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 바빌론은 신성을 모독하며 왕들과 음행하였고, 시민들은 그녀가 내어준 음란한 포도주를 마시고 흠뻑 취했다. 달콤한 쾌락, 그러나 이에 따른 대가는 혹독했다. 바빌론의 더러운 음행에 취하면 평범한 시민은 물론이거니와 왕들 또한 몰락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무찔러야 하는 악의 화신이자 상징인 바빌론, 그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정욕, 사치, 쾌락주의 등을 악덕으로 규정하는 직접적 해석이 일반적이고, 다른 해석은 기독교를 박해한 방탕한 로마 제국을 가리키거나, 기독교의 타락한 상태라고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방탕과 음욕에 빠졌을 때 따르는 대가로서 몰락임은 변하지 않는데, 한편 그 대가가 오롯이 여성 바빌론의 몫인가. 가부장적인 사회 내에서 으레 성 구매자의 책임을 타자화하여 성 판매자에게만 전가하듯, 바빌론이라는 여성은 단지 쾌락에 따르는 부작용과 희생을 가부장적 관점에서 뒤집어쓴 것이 아닌가. 그 바빌론이란 이름이 데미언 샤젤의 신작에서 등장한다. 고대 도시 바빌론의 이름을 빌려서 헐리우드를 빗대기도 하지만, 섹스심벌로서 문화 산업의 권좌에 오르고자 하는 넬리 또한 대탕녀 바빌론의 그늘을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1985년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난 데미언 샤젤은 미국-프랑스 이중 국적의 영화감독이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 학교에 다녔고, 또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계 캐나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샤젤은 전체적이고 일원적이지 않은 자신의 다원화된 정체성을 작품에 투영한다. 스승의 일원적이고 폭력적인 훈육을 경계하는 <위플래쉬>, <라라랜드>에서의 각자의 꿈을 위한 결별, <퍼스트맨>에서의 ‘초인되기’ 등이 이에 대표적이다. 샤젤은 어려서부터 영화감독이 되길 꿈꾸었지만, 이와 동시에 재즈 드러머도 장래 희망 중 하나였다. 그래서 흑인 음악에 대한 동경이 <가이 앤 매들린 온 파크 벤치>와 <위플래쉬>, <라라랜드> 모두를 관통한다.      


샤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의 감각성에 기대거나, 단순히 포착하는 수준에만 그치지 않고, 청각을 시각으로 승화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시청각 모두가 감각적이다. 그의 대표작,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의 원형인 <가이 앤 매들린 온 파크 벤치>에선 도입부의 무성영화에 가까운 순수 시각, 이로써 필름 및 흑백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거기에 명랑한 음악 및 탭댄스를 담아낸다. 이후 <가이 앤 매들린 온 파크 벤치>에선 '음악 수업'과 '음악과 사랑'이 펼쳐지는데, 각각을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로 이원화하여 구체화한다. <위플래쉬>에서는 리드미컬한 드럼 연주를 이에 상응하는 카메라 워킹과 박자에 맞춰 쪼개는 편집으로 가시화한다. 이로써 처음 느끼는 성취감, 연인에게로 향하는 간절함과 애정이 인간의 목표이자 꿈임을 느끼게끔 한다.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 이로써 자신감을 얻어 니콜의 연인이 되려는 앤드류를 그리며. <라라랜드>는 샤젤의 반쪽인 할리우드를 빌려온 <사랑을 비를 타고>와 또 다른 반쪽인 프랑스계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을 뒤섞은, 현란한 시청각적 볼거리가 특징이다. 웅장한 규모의 뮤지컬은 할리우드를, 대신 더 명료하게 지각되는 원색과 비극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는 자크 드미를 닮았다. <퍼스트맨>에서는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필름을 적극 활용하는데, 이는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는 <가이 앤 매들린 온 파크 벤치>로 회귀한 양식이다. 샤젤은 데뷔작에서처럼 외부 감각이 아니라, 오직 닐의 시각과 거기에 드러나는 내면, 심리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위플래쉬>와 마찬가지로 지상을 넘어선 우주의 감각을 목표로 삼는다. 삶의 이유란 바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에 느꼈던 것 이상으로. 이러한 감각성에서 사랑은 피어난다. 그 사랑의 감각 중 반쪽은 상대방의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환상에 홀려있던 나는 내 감정으로 되돌아오며 이별한다. <가이 앤 매들린 온 파크 벤치>에서 가이의 음악에 매료된 매들린, 이후 가이를 지하철에서 만나 클로즈업으로 밀착한 옐레나는 사랑에 빠진다. 가이의 음악을 배우고 싶을 만큼 너무 감미로웠다.      


그러나 사랑하고 동거하며, 가이의 일을 옐레나가 도맡는다, 듣기 싫어도 그의 연주를 들어야 한다, 신비로움이 일상화되고 무감해지자 소음이 된다. 이에 취업해서 가이에게서 멀어지고, 분리하며 결별한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서 산다. 메들린이 그리워진 가이는 그녀가 살았던 하숙집에 가서 그녀의 주소를 묻지만, 정작 집주인들은 가이에게 여전히 트럼펫 연주를 하냐며, 모두 제 할 말만 한다. <위플래쉬>에서 앤드류는 지휘자 테런스의 제자가 되어 위대한 드럼 연주자가 되려고 한다. 또 그의 가족이 다들 사회적으로 성공하였기에 식구들의 보편성에 맞춰 '위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훌륭한 테런스의 지휘, 시간표, 손가락, 결정에 의해 앤드류는 객체화된다. 그러나 테런스에 의해 앤드류는 사랑도 포기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다. 타인을 위한 위대함에 다가서지만 자신을 잃는다. <라라랜드>에서 두 연인은 심각한 교통체증 속에서 똑같은 뮤지컬, 곧 똑같은 망상과 희망에 참여했다. 파티에서도 마찬가지다. 각자는 비루했지만 서로를 만나서 희망을 봤다. 환상에 빠졌다. 서로의 영역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어떻게든 참여한다. 그런데 서서히 알아가니 너무나도 다르다. 서로는 자신의 구원자가 아니다. 미아와 세바스찬 모두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상대에게 기대선 안 된다. 환상에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한 그들의 집은 천장이 썩고 있다. 그래서 오독한 환상에서 다시 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퍼스트맨>의 소재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이다.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하는 인간은 해방된다. 그러나 우주비행사 교육 과정에선 닐에게 애국심 내지는 전체주의를 강요한다. 닐은 전체주의적인 '성조기'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로서 죽은 딸의 목걸이를 우주에 묻고 싶은 개인적인 제의만 꿈꿨을 뿐인데 말이다. 샤젤은 국가와 전체 인류의 성취가 아닌, 개인의 사명으로서 닐의 성취에 접근한다. 하나의 국가나 하나의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원적으로 종합하는 샤젤은 궁극적으로 주체성을 논한다.      


<가이 앤 매들린 온 파크 벤치>에서 샤젤이 긍정하는 것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춤과 노래다. 타인이 메들린에게 좋을 것이라 예상하며 장미를 주지만, 정작 자신은 이를 받기 싫다. 메들린은 자기를 위해 살고, 나를 위해 노래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는 스스로를 타인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능동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메들린과 달리 가이는 그녀를 위해 노래를 작곡한다. 메들린이 들어줘야 그 노래는 유효하지만, 이를 강요할 수 없다. 노래를 억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듣겠다는 그녀의 수락, 자신의 잣대로 노래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긍정, 거기서 개인은 보존된다. <위플래쉬>에서 테런스에 의해 목숨까지 잃을뻔했던 앤드류는 그와 독대하며 대화하고 신념을 이해해본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속내도 밝힌다. 이후 테런스에 의해 규정되는 앤드류가 아닌, 자신이 한계를 깨부수고 독자적으로 연주한다. 테런스와 앤드류는 동등한 눈높이에서 시선을 교환하며, 각자의 지휘와 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조화하는 마지막 협연을 선보인다. <라라랜드>에서 미아는 프랑스로, 세바스찬은 미국에 남아 영화와 재즈라는 각자의 길을 개척한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희망과도 같았던 상대방이란 환각, 하지만 이제는 각자가 이룩한 예술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마주치며 긍정할 뿐이다, 침범하지 않고. <퍼스트맨>에서는 그런 개인이 홀로서는, 진정 '초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주목한다. 중력은 붙잡아두며 안전을 보장함과 동시에 제약한다. 그래서 중력에 붙잡힌 사람들은 자유를 바라지만, 이를 위해선 스스로 중력이 되어 강인하게 버텨야한다. 샤젤은 자기 스스로 회전하기 위해서 참아내야 할 고약함과 힘겨움을 담아내고, 또 처음에는 방종하게 우주 비행을 계획했지만, 이내 곧 재닛과 릭, 마크와 대화하며 서로의 뜻을 존중하는 자유를 말한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상대를 해하지 아니하고, 마찬가지로 상대도 나를 방해할 순 없다. 이를 서로 이해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명랑한 음조 속에서 쓸쓸하고 현실적이며 슬픈 가사가 이중적으로 공존한다.      


특히 <가이 앤 메들린 온 파크 벤치>와 <라라랜드>가 그렇다. 나를 추구하면 상대를 포기해야 하고, 상대를 추구하면 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곡조와 가사 둘 다 명랑할 수 없는 샤젤의 영화, 과연 <바빌론>에서는 샤젤의 색채가 어떻게 이어질까. 일단 <바빌론>의 도입부부터 살펴보자. <바빌론>의 시작은 그리 영화적이지 않다. 이 말은 영화 고유의 형식이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누엘은 코끼리가 담긴 트럭을 옮기는 중인데 이 사실을 업자에게 숨겼다. 현실에서 불법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불법을 자행하기 위해 은닉한다.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이에 영화의 본질, 카메라는 능동적으로 활개를 치지 못한다. 가만히 멈추어서 온건하게 패닝하고 줌인한다. 그런데 업자에게 트럭에 코끼리를 태웠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현실의 법으론 코끼리를 옮길 수 없다. 그러나 영화를 위해서, 또 영화가 되기 위해서 코끼리를 운송해야 한다. 이에 패닝은 더 과감해지고, 줌인은 아주 감각적인 크래쉬 줌으로 뒤바뀌며 카메라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즉 도입에서 나타나는 두 연출의 대비로 보건데 영화는 '운동'이 있는 무언가다. 이후에도 그렇다. 코끼리를 운송한다. 그런데 코끼리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오르막길에서 화물차는 속도가 붙지 않고, 코끼리가 담긴 트레일러와 연결된 끈도 무게를 못 버티고 끊어진다. 영화는 운동 중에서도, 일상을 넘어서고 법을 위반하는 '험난한 것'이다. 이후 코끼리가 담긴 칸을 끙끙거리며 위로 미는 과정에서, 코끼리가 용변을 참지 못하고 배설물을 퍼붓는다. 그것이 영화의 렌즈에도 묻는다. 카메라의 렌즈가 노출되며 가상임이 탄로 난다. 또는 위로 운동하거나 운반하지 못하는 현실의 흔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그 추함을 씻어낸다. 배설물을 씻어내고, 대신 <바빌론>에 사용된 35mm 필름의 그레인이 간혹 '반짝'거린다. 겨우 오르막길을 올랐지만 마누엘은 경찰을 만난다. 다행히도 경찰은 영화인들의 파티에 초대해주면 코끼리를 불법 운반한 사실을 눈감아주겠다고 말한다.      


현실이 추라면, 영화는 렌즈에 닦인 추를 씻어내고, 또 렌즈를 은닉하며 가상으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것’, 마누엘의 말을 빌리면 '웅대한 것'이다. 너무 웅대한 영화는 경찰이 집행해야 할 법을 무효화한다. 그렇다면 왜 법을 무효화하리만큼 중요한가? 이후 연결된 파티 시퀀스는 매우 환락적이다. 노래와 춤, 음식과 섹스, 마약 등 온갖 것들이 오감을 정신 못 차리게 휘몰아친다. 일반적으로 법은 낭비보다는 생산과 저축을 비호한다. 그런 인간에겐 사치와 낭비와 쾌락이 그립다. 영화가 현실과 법을 넘어서서 저 위로 운반해가는 것이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코끼리, 바로 시각적인 쾌감이다. 이를 바라는 인류는 영화의 위법을 눈감는다. 심지어 영화는 단순히 보이는 수준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경험 또한 제공한다. 페이는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영화에도 출연하고 가수로서 무대에도 선다. 그리고 그녀는 무대에서 에로틱한 노래를 부르며, 욕망의 대상으로 1920년대에 '동성'을 선택한다. 그리고 실제로 키스하며 영화를 위한 행위는 현실에 파장을 미치나, 가상이자 무대라고 핑계를 대고 이는 다만 '연기'일 뿐이라며 무효화한다. 즉 허구인 영화에 참여하는 우리는 실제로, 또 실제에 가까운 경험을 한다. 심지어 웅장한 전투 장면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단역이 중상을 입고, 심지어 죽는다. 그러나 무용한 즐거움,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 현실에 '찌꺼기'나 '쓰레기'를 남기더라도 애써 눈감는다. 샤젤은 영화의 추한 사실을 영화화함으로써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껏 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눈감아진 영화의 악덕을 현실적으로 폭로한다. 파티에서의 연출은 두 쌍으로 나뉜다. 하나는 롱테이크요 다른 하나는 무수한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다. 그리고 롱테이크에는 무도회와 혼 빠진 난교, 음주와 마약, 파괴와 죽음, 장애인들을 희화화하는 약자 혐오가 담긴다. 그것을 20세기 초기 영화는 비호했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일뿐이라고 에둘러댔다. 그러나 샤젤은 현실의 시간과 일치하는 롱테이크로 영화를 현실로 끌어내리고, 거기서 불법을 실현해왔음을 폭로한다.  

   

폭로된 추악함 대신 '웅대한 영화'로써 이상화되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영화를 위해 동원된 사람들의 희생이다. 현실의 시간과 동화되는 롱테이크와 달리(물론 영화의 롱테이크는 시간성을 제외하면 현실적이기보단 기교적이어서 연극적이다), 영화 본연적 요소인 '컷'을 이용해 현실의 시간을 자르고 또 자른 형식엔, 마누엘과 넬리의 얼굴을 담는다. 또 그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회전이 더 리드미컬하게 박진감이 넘친다. 롱테이크 내지는 원테이크로 구성된 시퀀스는 고립적이고 폐쇄적이다. 시퀀스는 여러 숏들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숏 내에서의 움직임만 유효하다. 다른 것들과의 연결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여러 숏으로 연결된 시퀀스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서 더 많은 사람과 여러 공간, 시간을 이어낼 수 있다. 자기 폐쇄적 세계에 고립된 자들이 파티장의 부호들, 반면 그 세계와 외부를 이으며 영화로 승화하는 존재가 마누엘과 넬리다. 전자의 자기 폐쇄적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쾌락에 갇힌다. 즐겁고 나 자신에게 충실하다, 그렇지만 쾌락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서 살인도 발생하고, 파티는 난장판이 된다. 자기 폐쇄적 세계는 소멸하는 즐거움이다. 반면 후자의 마누엘은 뚱뚱한 남성에 의해 착취당해 죽은 제인의 주검을 수습하고,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사인을 어떻게 둘러댄 모양이다. 롱테이크 안에 포착된 사람들이 즐거움에 취했다면, 마누엘은 수습하고 치우는 청소부다. 내부에서 제인이 죽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유입된, 짧은 숏들로 접속되는 넬리가 다가오며 문제를 해결한다. 즉 치우면서 삶으로, 현실로 이어진다. 영화는 내적인 즐김과 현실과의 연결 사이의 균형을 이뤄야 하리. 즉 영화는 연결에도 주목할법한데, 마누엘을 통해서 파티에 초대받지 않은 넬리도 대저택에 입성한다. 넬리는 춤을 춘다. 그러나 춤추는 넬리가 포착된 직후, 죽은 제인이 담긴 숏이 이어진다. 즐겁고 자극적인 쾌락 이후에는 반드시 죽음과 희생이 뒤따른다는 듯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간 이후 세트장에서 빌이라는 음향기사가 사망한 이후에도 유사한 연결이 이어진다. 그의 죽음 이후 바로 시드니의 연주로 연결된다.      


이렇게 샤젤은 환상적인 영화가 잇지 않고 잘라낸, 영화를 탄생시키기 위해 희생된 토대를 다시 이어 붙인다. 영화는 불가능한 것을 실현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것은 넬리와 페이의 빈민가, 잭을 잘 수습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마누엘에서 태동한다. 그런 그들이 보이게 되는 것이 영화에선 불가능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샤젤은 그들을 다시 보이게 만든다. 마누엘이 잭의 뒤치다꺼리를 끝마친 이후에, 도입에 해당하는 약 30여 분간의 분량이 끝났을 때, 'BABYLON'이라는 타이틀이 떠오른다. 사치를 수습하고, 타인의 쾌락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의 토대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샤젤은 숏 하나하나에 마누엘, 넬리, 페이 개개를 담는다. 즉 영화적이라 할 수 있는 숏에 영화를 위해 힘쓰는 개별의 얼굴을 보존한다. 반면 롱테이크로 포착된 롱숏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원이 불분명하게 한데 뭉뚱그려진다. 사실 양자의 상황은 서로 역전된 셈이다. 마누엘은 <바빌론>이라는 영화에서는 눈에 띄는 존재이지만, 정작 그가 소속된 영화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존재, 무수한 일용직 스태프 중 하나일 뿐이다. 넬리도 마찬가지로 그녀 자체로 주목받은 것이 아니라, 죽은 제인의 '대체품'이자 '배역'으로서 중요했다. 한편 파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우러러보는 영화계의 거물들이지만, 정작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액션'과 '컷'으로 주의를 끌고, 그들의 희생으로 주목받게 된 게으른 부르주아지들의 특권적 계급과 개성은 롱테이크와 롱숏으로 무효화한다. 넬리와 마누엘이 영화 스튜디오에 입성한 이후, 넬리의 연기와 마누엘이 카메라를 얻기 위해 과속하는 숏, 술을 흥청망청 마시는 잭이 교차 편집된다. 서로 다른 물리적인 장소에 놓인 세 사람, 영화는 이를 편집으로 이어내며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한데 모아서 보여준다. 또한 세 사람은 다른 곳에 있지만 결국 한 곳에 집약한다. 바로 영화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말이다. 그리고 넬리와 마누엘의 얼굴은 본 시퀀스에서 아주 명확하다. 거짓 없는 넬리의 눈물과 카메라를 빌리기 위해서 요리조리 운전하는 마누엘의 얼굴, 그들에 의해서 영화라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세트장에서 술을 흥청망청 마시는 잭의 신원은 오롯이 프레임에 밝히지 않는다. 잭은 앞선 도입부의 롱테이크에 속하는 인물에 가깝다. 샤젤은 그의 음주라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넬리와 마누엘은 행위를 하는 주체에 주목한다. 잭은 넬리와 마누엘에 의해서 음주가 가능하다는 듯이 연결될 뿐이다. 그의 음주를 위해서 마누엘은 과속하여 카메라를 가져오고, 넬리 또한 잭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랴. 이처럼 보이지 않던 영화계의 노동자들이 가꾼 것, 그리고 연결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이성적인 이득도 없는 비생산적인 것, 그토록 무용하나 단지 즐거운 낭비와 쾌락이다. 그것은 파괴적이다.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는 섹스라는 행위가 언제나 낭비, 사치, 위험, 죽음과 결부되어 있음을 밝힌다. 섹스는 막대한 에너지를 비생산적인 행위에 낭비한다. 섹스의 결과인 임신과 출산 또한 비효율적인 사치 그 자체다. 하나의 생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는가. 그리고 낭비는 미래를 위해 절약하고 비축해둔 에너지를 끌어다가 쓰며, 생산과 노동으로써 유예한 죽음을 다시 앞당긴다. 이성적으로 그토록 무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낭비하는 나는 즐겁다. 생산과 저축이 현재의 즐거움을 건강과 미래의 생존을 염두에 두며 금욕하는 것이라면, 낭비와 사치는 오직 현재 나의 욕구에만 몰입한다. 샤젤이 바라보는 1920년대의 무성영화와 흑백영화가 그렇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고, 또 영화 후반부에 인서트되는 초기 영화 푸티지에는 실제 건물이 붕괴하는 모습이 담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즐거웠다.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방대한 규모의 전투씬과 파괴, 주로 생산과 저축을 비호하는 법에 의한 일상 속에서 희귀한 쾌락과 방탕이 영화에서는 보였고, 그 충격은 동공을 말초적으로 자극했다. 영화를 통해 대중들은 잃어버린 현재, 미래로 미룬 감각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희생된 주검, 불타버린 세트장이 남긴 잔해, 온갖 배설물들이 현실에 남는다. 샤젤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영화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를 수습하는 청소부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영화로써 말한다. 청소부의 삶과 그들의 공간이 영화가 된다.    

  

이렇게 샤젤은 초기 영화 시절의 '낭비'하는 특성을 아주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황금빛 조명' 아래서 탐구한다. 황금색은 주로 금의 특성에 걸맞게 항상성, 영원과 관계를 맺지만, 본 작품에서 황금빛 조명은 금세 차갑고 어두운 현실의 색채로 뒤바뀐다. 왜냐하면 초기 영화의 본질은 낭비의 영광이지, 항구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성영화는 향후 서술할 유성영화에 비해서 더 환각적이다. 또 무성영화 시절의 영화인들은 더 충동적이다. 기분에 따라서 해고하고, 도처에 마약이 만연하다. 왜일까? 잭은 여성 편력이 심하다. 여러 국적의 여성을 아우른다. 첫 번째로 나타난 잭의 아내는 이탈리아어로 소통할 수 없어서 이혼했고, 이후 만난 올가라는 여성은 헝가리어를 사용함에 영어나 이탈리아어를 쓰는 잭과 불화를 겪는다. 잭은 그녀들의 '발화'엔 관심이 없다. 오직 그의 관심은 무성영화적인, '내 눈에 보기 좋으면' 그만이다. 즉 잭으로 위시되는 무성영화 시절 영화인들의 특성으론 내 눈에 보기 좋기만 하면 그만인 '고립', 청각을 이용하여 타인과 연결되지 않고 그저 내 쾌락만 중시하는 ‘충동’이다. 분명 잭의 부인들은 그에게 뭐라 뭐라 말한다. 그러나 해석되지 않는다. 올가가 물건을 깨부수는 와중에도 잭은 평온하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현실과 달리 무성영화, 그리고 흑백영화에서는 '색채'와 '음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대의 색채와 음성을 내 마음대로 상상하여 이어낸다. 또 음성은 추하다. 술 취해서 헛구역질이나 하고 뒤뚱거리는 잭, 그러나 흑백영화와 무성영화는 이를 은닉할 수 있다. 유성영화로 막 이행하던 시절, 잭은 화장실에서 한 영화 관계자와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가 배설하는 뿌지직 소리가 들려온다. 배설하는 시각은 보이지 않는다. 물질인 칸막이가 가로막는다. 그러나 청각은 그 물질을, 시각의 물리적 한계를 손쉽게 뛰어넘는다. 그래서 오직 시각만 통제하면 되는 무성영화와 달리, 현실이나 유성영화는 분방한 청각으로 가득함에 아름답기가 쉽지 않다.      


시각이 아름답다면 청각이 추하거나, 또 그 반대이거나. 현실에서 말이 많아지면 질수록, 카메라가 핸드 헬드로 흔들린다. 넬리와 콘스탄스가 다툴 때 그렇다, 불안정해진다. 이와 달리 무성영화는 대체로 안정적이다. 무성영화는 소리에 동요할 필요 없이, 오직 시각만 완전하도록 신경 쓰면 되기 때문이다. 청각은 내버려두고 오직 시각만 세트장으로 이동하여 액션과 컷만 외치면 바로 불완전한 현실과 분리되어 아름다울 수 있었다. 밖에서, 또 안에서 뭐라 떠들든. 그래서 무성영화 시절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시각 외의 것을 상상의 여지가 있었고, 심지어 흑백영화 시절에는 컬러를 감상자 본인이 수놓아볼 수도 있었다. 또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오직 시각이기에, 창작자 또한 청각은 타인의 시선을 위해 봉사할 필요가 없었다.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초기 유성영화 시기, 배우에게 영화감독 및 촬영감독에다가 음향감독이 더해진다. 당시 음향감독은 시각을 다루는 감독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카메라만 신경 쓰면 되던 배우들이 이제 음향감독의 권위적인 지시와 '마이크'의 위치에 구애받는다.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게 발성을 조절해야 한다. 몸동작과 표정만 표현하던 시절로부터 통제해야 할 것이 많아졌고, 즉흥적이고 자율적인 연기가 가능하던 시절로부터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하는 현재가 도래했다. 그래서 더 충만해져 마땅한 유성영화 도래 직후의 스튜디오는 되레 텅 비고 침묵으로 가득하다. 충만한 가능성이 실종된다. 또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이행하며 조명을 더 신경 써야 한다. 시드니는 조명을 위해서 더 까만 '블랙 페이스'로 왜곡, 비하된다. 넬리는 제인이 맡기로 한 배역을 연기할 때, 인공눈물에 의존하지 않는 솔직하고도 진솔한 표현을 선보였다. 무성영화 시절 이미지는 청각이 덜 개입된 만큼 시각이 순수했고, 이와 동시에 더 많은 요소가 배우를 옭죄지 않음에 연기자의 순일한 표현이 더 쉬웠다. 그러나 소통하지 않던 배우들이 소통을 시작하고, 심지어 더 많은 사람들과 말을 나눠야함에 서로의 입이 곧 제약이다, 답답해한다. 순수함은 서로간의 통제에 따라 불순해지고, 많은 것들이 더해짐에 제작비도 늘어간다.      


본래 무성영화 시절 잭은 제작자임과 동시에 배우였다. 무성영화 시절 영화인들은 스스로 낭비하며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을 조달해야 하는 모양인지, 이제 영화인들은 부르주아지의 파티와 면담에 불려가서 아첨을 떤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옮겨가며 넬리는 몰락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마누엘은 그녀를 다시 복귀시키기 위해서, 영화를 후원하는 백인 부르주아지의 파티에 데려간다. 스스로 흥청망청 낭비하고 충동적이던 배우들은, 이제 부르주아지의 예법에 맞춰 자신을 가꾼다. 야성적인 넬리는 부르주아 여인네처럼 단아하고 우아하게, 흑인 시드니는 백인들의 불편한 발화를 참으며. 이와 달리 무성영화는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짓기』에 나타나는 노동자적인 특성인, 솔직하고도 거친 발화와 말초적인 감각을 선호하는 점이 무성영화의 특징과 부응한다. 무성영화는 이해할 필요가 없다. 직관적이고 확실한 몸동작과 표정을 그저 말초적으로 느끼면 그만이다. 그들의 과장된 연기에 의해서 느껴지는 것은 육체의 '힘'이고, 주로 육체노동에 참여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이를 숭상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들의 가치는 그렇지 않다. 부르주아지의 언어는 민중의 솔직한 언어와 달리, 가꾸고 꾸민다. 노동 이후 파김치가 되어 피곤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지루하거나 도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솔직한 육체를 추구하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는 규칙이 각인된 육체를 주문하기에 여력이 있다. 마피아로 추정되는 제임스는 자신의 영광이 담긴 영화 아이디어를 마누엘에게 떠들어댄다. 부르주아가 바라는 이념, 노동자들의 몸동작 그 이상의 고풍스러운 언어를, 부르주아의 자본이 필요하고 언어가 생긴 유성영화가 봉사한다. 샤젤은 부르주아지의 파티에 불려간 넬리를 포착할 때 숏을 무수하게 나누고 자른다. 이 때 샤젤은 연출 경향을 한번 비틀어서 무엇이 영화화되는지를 비춘다. 그것은 표면적으론 고결하지만, 뒤에서는 동물을 착취하고, 여성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가식적인 부르주아지의 더러운 손, 친절한 척 다가와서 넬리를 무시하고 시험하는 영악하고 교활한 눈매다.     


진솔했던 무성영화는 이제 마누엘의 출생성분을 멕시코에서 마드리드로, 넬리 또한 뉴저지에서 프랑스로 거짓말하며 가식을 떤다. 물론 영화의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특성은 여전히 똑같다. 부르주아지들도 도입부의 파티처럼 장애인이나 소수자들을 한데 몰아넣어 희화화하고 전시하며 쾌락을 누린다. 그런데 도입부에서 혐오와 낭비는 경찰의 시선에도 노출되어 있었던 반면, 부르주아지의 방탕하고도 부도덕한 유희는 어느 한 지하실에 은밀히 숨겨져 있다. 진실하여 본인들이 책임지는 낭비를 무성영화가 선보였다면, 탄로 나선 안 되는 거짓된 낭비는 부르주아의 것이다. 즉 무성영화 시절의 낭비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치였다. 그러나 유성영화는 부르주아지의 은밀한 낭비를 이행해주고 빚을 진다. 영화인들은 자본가에게 빚을 지고, 또 언어를 무시하던 잭은 이제 대사를 잘 구사하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는 배우를 연인으로 삼아 그녀에게 기댄다. 순수하던 시각 기호인 영화가 유성영화와 유사한 연극에게 의존한다. 즉 유성영화 시절 영화는 스스로 낭비하지 못하고 연극을 빌리거나, 그들을 후원하는 거대 자본이 원하는 소비만을 이행하지만, 정작 본 낭비에 따른 비난과 비웃음, 모멸, 멍에는 영화가 짊어진다. 샤젤은 이러한 자신에게 거짓인 영화에서 현실로 나아간다. 무성영화 시절에는 영화화되었던 것이 '영화의 현실'이기도 하였기에 롱테이크에 담길 수 있었다면, 유성영화 시절에는 모든 것을 영화로 감추기에 영화 자신을 부정해야지만 롱테이크나 비교적 긴 호흡의 시퀀스를 회복하여 현실로 나아갈 수 있다. 바로 넬리가 '뉴저지의 타락한 짐승'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며 부르주아의 연회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장면에서다. 무성영화 시절 넬리는 진실한 눈물을 선보였고, 그녀의 춤과 남성들에게 건넨 추파도 실제와 유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카메라는 정제되지 않은 야성적인 그녀를 순수하게 포착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창녀' 소리를 듣는 대탕녀 바빌론과 같았다. 넬리는 유성 영화, 연기를 거부하며 비로소 날뛰는 야생마와 같은 자신을 회복한다. 

     

무성영화 시절, 바로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 넬리가 있었고, 페이가 있었으며, 넬리의 은인 여성 영화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유성영화로 넘어오며 점차 그녀들은 사라진다. 넬리가 무성영화의 스타가 된 당시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었고, 넬리는 돈을 꽤 만졌을 것 같음에도 물질적으로 헛헛한지 '도박'에 손을 댄다. 넬리의 곁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넬리는 그가 매우 불쾌하다. 자신의 돈으로 아버지가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영 탐탁지 않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아버지의 무리한 사업으로 넬리는 빈털터리가 된다. 대탕녀 바빌론에 의해서 남성은 즐거움을 누리고 돈도 번다. 그녀들이 거머쥐어야 할 돈을 빼앗기 위해서 가부장적 세계는 넬리에게 창녀라고 손가락질하며 폄하한다. 내몰리고 폄하를 당함에 어딘지 빈곤하고 공허한 여성은 도박하며 몰락하고 남성에게 의존한다. 넬리가 맡는 배역은 언제나 창녀, 대학교에 간 학생일 경우에는 지성 대신 '백치미'를 뽐내는 금발이다. 즉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실제 여성은 이와 다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이행한다. 넬리의 아버지는 '소리를 내는 악마'인 방울뱀과 싸우겠다며 큰소리친다. 무성영화를 위협하는 유성영화를 가리키는 상징이랴. 그러나 그는 실패한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용감한 다른 남성들도 실제론 겁쟁이여서 도망친다. 잭도 관조하다가 자동차에 부딪혀 쓰러지고, 마누엘도 감히 나서지 못한다. 그들은 유성영화에 잠식당할 것이다. 그러나 넬리는 맞선다. 비록 방울뱀에게 목을 물려서 실패하지만 페이가 넬리를 구한다. 강한 그녀들은 유성영화를 물리치고, 넬리와 페이는 키스한다. 그녀들은 서로가 상징하는 무성영화를 사랑한다. 샤젤은 여성들의 용기를 컷이 많은 영화다운 시퀀스에 담아내며, 아름답게 승화되어야 할 것이 용맹한 바빌론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뱀의 목을 단번에 칼로 베고, 또 레즈비언으로서 이성애자와 달리 쾌락에만 목을 매는 음탕한 존재로 치부되는 여성은,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여파인지 언론의 표적이 된다.      


넬리의 곁에 진정 필요한 페이는 언론과 마누엘에 의해서 그녀와 헤어지고, 넬리는 포르노 산업을 전전하거나 마누엘이 끌고 간 파티에서 정신분열을 겪는다, 요구된 여성과 솔직한 여성 사이에서. 즉 바빌론이 남성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시기로 나아가는 길목에, 소리를 내는 악귀와 대적하는 용맹한 바빌론들은 남성에 의해 악마화되어 무너진다. 또 바빌론은 비단 넬리만 가리키지 않고, 야성적이고 쾌락적이며 사치스럽던 무성영화 또한 가리킬 수 있다. 무성영화 역시 쾌락을 위해 낭비하고 이에 따른 악덕으로 현실을 더럽혔으며, 샤젤은 그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유성영화로 옮겨온 이후에는 영화 스스로 낭비하고 사치하기도 전에, 외부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세계는 이미 더럽혀져 있었다. 영화가 지시하지 않은 청부 살해와 약자 혐오의 탓을, 바빌론으로서 영화가 짊어진다. 바빌론으로서 무성영화도 부르주아, 자본의 죄를 짊어진다. 즉 바빌론은 스스로 즐기는 무엇이다. 넬리는 주체적인 여성, 영화는 내적 동력의 시각적 즐거움과 낭비, 그 바빌론들이 남성과 외부 자본, 정치에 의해서 오명을 쓴다. 마누엘은 이들, 특히 넬리를 구원하려 한다. 마누엘은 넬리에게 함께 멕시코로 도망가서 결혼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흑백 필름에 담긴다. 이후 현실과 디졸브된다. 영화가 곧 현실과 겹쳐지고 이어질 것이라는 듯이. 그러나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은 현실과 다른 한갓 잿빛 가상일뿐이다. 흑백과 더 좁다란 화면비는 컬러로 재현된 현실과 별개다. 샤젤은 그간의 영화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본 작품에서도 자신의 내재적 원리로 굴러가는 바빌론을, 외재적 원리나 또 다른 내재적 원리를 따르는 타인이 구원할 순 없다. 잭은 ‘팁’을 낭비한 이후 자살한다. 최후까지도 바빌론으로서 방탕하다. 마누엘이 외세와 타협했다면, 넬리는 조명아래 잠시 나타났다가 LA의 뒷골목으로 사라지며 이후 사망이 신문에 보도된다. 내재적 원리를 따를 수 없다면, 죽는 것이 그들에게 되레 해방이다. 고정된 카메라는 최후의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저 응시하며 롱테이크를 이룬다.      


무성영화 시절, 바빌론들에게 영화는 자유였다. 영화는 자유로운 그들을 능수능란하게 따라갔다. 그러나 유성영화에 이르러 더는 그것이 자유가 아님에, 영화에 담기기 위해선 수동적으로 굴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자유로운 이들에게 영화는 무기력하다. 비로소 이들은 영화의 시간에 귀속되지 않고 자신의 현실로 돌아간다. 그래서 좌절되는 자신에 의해서 슬프고, 그들을 다른 누군가가 구원할 수 없음에 절망스러운 영화는 흑인의 비극과 애환이 담긴, 샤젤의 필모그래피 내내 관통하는 '재즈'가 여전하다. 바빌론이고 싶지만 더는 바빌론일 수 없는 시대로의 이행과 역경, 이러한 가운데서 타협점을 찾은 마누엘만 살아남는다. 그는 20여년이 지난 이후 LA로 돌아가서 영화를 본다. 잭과 넬리를 앗아간 유성영화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오늘날의 다원화를 암시하는 다양한 인종의 관객들이 보며 웃는 것은 무성영화를 비하하는 유성영화다. 그러나 마누엘의 눈에서 영화가 뒤바뀐다. 샤젤은 20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추앙받는 무수한 작품들을 몽타주한다. 청각은 사라지고, 오직 이미지와 편집이란 영화의 내부 동력으로만 움직인다. 푸티지들은 잉크를 이용하여 새로운 맥락에 흡착되고, 특정한 언어에 덜 기대어 판에 박힌 궤도에서 이탈한다. 이로써 경탄을 자아내는 영화가 감상자와 마누엘의 눈에 여전하다, 미소를 짓는다. 

즉 샤젤은 즐거운 내재적 원리를 따르는 바빌론으로서 영화의 명맥을 예찬하고 이어낸다. 설령 외부 요인인 음악을 빌려오더라도, 청각을 영화 고유의 요소인 편집으로 승화시키는 샤젤은 외부에 의해서 수단화되는 수동적 영화를 원치 않는다. 물론 내재적 원리를 따르는 영화는 무조건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생산하고 비축한 것들을 무한 낭비한다. 샤젤은 낭비에 따른 필연적인 악덕을 비호하지 않고 오히려 솔직하게 까발리며 인정한다. 영화를 위해서 낭비되는 동안 현실은 코끼리의 배설물들이 쌓이고, 파티가 끝나자 쓰레기들이 쌓여 폐허가 된다. 또 영화를 위해서 가식을 떨고 연기하는 행위의 실체는 넬리의 끝이 안 보이는 구역질과 토사물, 어지러운 숙취다. 그렇게 사악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동력에 따라서 인간의 욕망과 쾌락의 꿈에 다가서는 영화를 예찬한다. 샤젤은 그런 바빌론을 악하게 내몰지 않는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예찬하는 대상은 대탕녀 바빌론이다. 다만 <바빌론>의 결말은 외부 작품을 빌린 웅장한 야심에 지나치게 기대므로 본 작품 스스로의 내적 동력이 증발한다. 또 잭의 이야기는 넬리나 마누엘과 섞여 들어가지 않아서 겉돈다. 잭이란 인물을 영화에서 파버려도 전개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만 같다. 분명 영화다움을 만끽하고, 무엇이 영화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유한 탐구가 매혹적이나, 장점들이 외부 동력에의 의존과 브래드 피트 헌정 영화로 둔갑됨에 퇴색된다.   

-----

감상일: 230202 CGV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다니엘 아르비드, <단순한 열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