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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09. 2023

필리스 나지, <콜 제인>

감수성은 삶을 구제한다

필리스 나지(Phyllis Nagy), <콜 제인>(Call Jane) - 감수성은 삶을 구제한다     

“그녀는 클래라가 이제 평소 크기로 오므라들었을 테니 좀 더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조그만 핀 대가리가 달린, 큼지막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어리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온 집단을 책임지느라 몸이 불룩해진 여왕개미 같았고 인간 같지 않았다. 또 어떨 때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인격체가 한데 뭉쳐진 덩어리 같기도 했다.” -마거릿 애트우드-

미국의 임신 중절 논쟁, 일단 19세기 초까지 미국 대다수 주에서 임신 중절은 불법이 아니었다. 태동 유무를 가려서 수술 가능/불가능을 결정했는데, 사실상 태동을 느낄 수 있는 여성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즉 여성이 그나마 수술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임신 중절 반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이유는 법을 주도하는 남성들이 임신을 중단해야 하는 여성의 삶보다, 출산율과 미래 성장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던 임신 중절을 1900년까지 미국 전역에서 금지하기에 이른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임신 중절 불법은, 실은 남성들의 이권 폭거였다. 19세기에 임신 중절 시술은 당대 대다수가 남성이었던 의사가 아니라, 민간 여성이 시행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남성들은 법과 언론을 이용하여 임신 중절 불법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에 나선다. 여성 시술자에게 사회적인 비용이 향하지 않도록, 이로써 남성 의사의 가부장적인 이익과 지위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73년 1월 22일,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임신 중절은 여성의 정당한 권리라고 판결한다. 그 판결의 시발점이 된 여성, 1969년 텍사스에 살았던 노마 맥코비는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러나 여성의 생명이 위독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임신 중절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의사를 소개받지 못한 노마는 대신 여성 변호사들(사라 웨링턴, 린다 커피)과 연결되었고, 비록 임신 중절에는 실패하여 출산을 한 대신, 여성 변호사들과 함께 텍사스의 달라스 카운티 지방 검사 헨리 웨이드에게 소송을 건다. 노마는 '제인 로'라는 가명으로 재판에 참여하였는데, 가부장적인 법에 맞서는 여성들의 재판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남성 법조인들의 여성 혐오적인 주장 및 빈정거림에 시달렸고, 기독교계의 반대도 거셌다. 끝끝내 대법원까지 올라가 텍사스의 임신 중절 금지가 위헌임을 선고받고, 여성들은 비로소 자기 몸과 삶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2022년 6월 24일, 도날드 트럼프가 임명한 극우 인사들로 구성된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다. 시대는 다시 1973년 전으로 퇴행한다. 남성들이 여성의 목숨을 협박하고, 태아의 권리를 운운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던 야만적 시대로, 다시 여성들은 시름에 잠긴다, 남성과 원치 않은 아기가 제 삶과 육체를 점거해 오는 공포에 맞서서… 1960년대 미국에서 임신 중절을 시도하는 조이가 제인(jane Collective 또는 Jane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일리노이 시카고에 마련된 비공식 임신 중절 서비스다)으로 향하는 본 작품 <콜 제인>은 더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오늘날을 향해 성큼성큼 닥쳐오는 위협적인 과거, 이를 1962년 뉴욕 태생의 필리스 나지가 연출한다. 필리스는 <미세스 해리스>라는 작품을 연출한 바 있지만 그것은 TV 영화였기에, 극장 영화로는 <콜 제인>이 사실상 장편 데뷔작이다. 레즈비언, 그리고 여성의 삶을 담은 각본을 줄곧 집필해왔던 필리스는 토드 헤인즈의 <캐롤> 각색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과연 필리스는 <콜 제인>에서 임신 중절을 어떻게 묘사할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 이와 유사한 작품을 찾자면 그녀가 각본으로 참여한 <캐롤>이다. 물론 필리스는 연출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과 본 작품은 유사한 형식을 공유하는데, 바로 ‘매체’다. 토드 헤인즈가 <캐롤>에서 20세기에 통용된 16mm 필름을 선택했듯, 이를 사용하여 먼지가 잔뜩 쌓인 오래된 사진첩을 들추어보는 듯한 아스라하고 희미한 미장센을 구축했듯, 필리스도 <콜 제인>에서 16mm 필름을 택해 1960년대라는 빛바랜 시대상을 재현한다. 35mm 필름보다는 당시에 좀 더 값쌌던 매체, 그래서 35mm 필름에 비한다면 다소 조악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일상적인' 매체로 여성들에게 일상이었던 '사건'을 담는다. 16mm 필름은 빛이 바래고 먼지가 잔뜩 껴있는 듯한 불명확성만큼, 역으로 강조되는 색채가 특징이다. 색채와 부드러운 질감은 임신 중절 서비스를 통한 일련의 희망 및 낙관을 가리키리.      


한편 16mm 필름은 마냥 매끄럽지 않다. 색채에 있어선 쨍한 디지털보다 부드러울지 몰라도, 형태나 질감에 있어선 디지털보다 거칠다. 여성으로서 살기 위해서 불법을 택하며 거칠어야만 했던 그녀들의 삶, 또 공감으로 맺어진 그녀들의 부드러운 연대는 까끌까끌하면서도 뿌연 색채를 강조하는 감성적인 16mm 필름과 잘 조응한다. 16mm 필름과 더불어 풍부하게 사용되는 그 시대 유행했던 음악들, 그런데 과거에만 머물러야 할 매체와 형식이 오늘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캐롤> 또한 과거를 다루면서도 감독과 감상자가 속한 오늘날이 일련 반영되었다. 토드 헤인즈는 <캐롤>과 똑같은 시대의 유사한 멜로를 2000년대에 <파 프롬 헤븐>으로 선보인 바 있으나, 영화가 다루는 시대에서도 비극이었고, 감독이 속했던 2000년대에도 동성애 및 인종을 뛰어넘는 사랑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캐롤>의 경우 1960년대를 반영하되, 영화의 말미에는 2015년 미국에서의 동성혼 합헌 결정을 반영하듯, <파 프롬 헤븐>과 전혀 다른 결말을 맺는다. 영화가 끝나고 감상자는 현실로 되돌아오기에, 결말 이후에 이어지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파 프롬 헤븐>에서는 금기가 이어졌고, <캐롤>에서는 자유가 이어졌다. 그리고 <콜 제인>은 불법화된 임신 중절을 소환한다. 오늘날에 합법적인 병원이 아니라, 다시 콜 제인을 불러야 하는 시대로 퇴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리스는 결말을 긍정적으로 구성한다. 법이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던 여성들이 적힌 카드는 결말에서 불태워진다. 이후 임신 중절을 넘어서 다른 여성 의제를 논의하자고 버지니아는 조이와 대화한다. 오늘날에 다시 위기가 닥쳤지만 이를 뛰어넘어서 향해야 하는 것은 제인을 부르던 시대가 아니라 '임금 평등'을 논하는 시대여야 한다. 그 이전까지 영화 속 여성들은 사회 및 정치와 ‘단절’되었다. 도입부, 조이는 윌을 따라서 전당대회로 추정되는 현장에 왔다. 아마도 공화당일 것이다. 영화 후반에 윌과 라나가 공화당원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이는 민주당원이다. 방 안의 다른 변호사 내지는 정치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윌과 대화하며 조이에게 함께하자고 손짓한다. 그러나 조이는 안에는 머물고 싶지 않다. 당연할 것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므로. 그녀는 남성이 제안하는 실내가 아니라 바깥이 보고 싶다. 그 과정을 영화는 롱테이크로,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조이의 동공을 반영하는 트래킹 숏으로 촬영하는데 움직임이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아마도 '변호사의 아내'에게 요구되는 우아한 발걸음을 반영한 워킹이리라. 청각 또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녀는 이와 상반된, 거리에서 "전 세계가 보고 있다"라고 목 놓아 외치는 젊은이들의 시위를 본다. 아름다운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남편이 요청하는 미가 아니라 추와 혼란이 가득한 현실이다. 하지만 경찰들은 젊은 시위대를 때려눕히고, 내부에서 외부를 접할 수 없게 만든다. 영화 속 아름다움은 자기 폐쇄적으로 세상과 유리된다. 샬롯과 엘렌이 "헝가리는 허구의 나라가 아니냐?"라고 말하고 머리 색깔이나 외모에만 신경을 쓰는 것처럼, 아름다움에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진리’와 단절된다. 아름다움 너머는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을 경찰, 곧 법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은폐하고, 윌은 시위대가 닥치지 않은 뒷문을 통해 집으로 간다. 추한 것을 바라볼 필요가 없이, 아름답다곤 말할 수 없어도 안정적인 집으로 향한다. 윌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조이는 시위 현장을 봤다고 말한다. 그녀는 딸 샬롯이 시위에 참여하지 않을까 궁금해 한다. 그리고 윌은 “우리 딸은 그럴 리 없다”며 학을 뗀다. 조이가 컨벤션센터에 머물던 도입부 이후에 시퀀스는 활발하게 나뉘고 잘리는 여러 숏으로 구성된다. 조이의 견해가 있다. 임신 중인 그녀는 윌과 섹스하기 불편하고, 생명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선 반드시 임신 중절해야만 하며, 이후에는 윌과 샬롯 몰래 '제인'에 참여한다. 그런데 그녀의 소망은 여성이 가사에만 집중하여 냉동음식 대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해주길 바라는, 가부장적인 윌에 의해서 불발되고, 샬롯도 엄마가 아기를 죽였다며 실망한다.      


즉 조이가 기대하고 바라는 자신이 있지만, 그 삶은 계속 주저앉혀진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에 의해 좌우되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뛰어넘지 못함에… 조이는 작가로서 재능이 있고, 이후에는 시술에도 꽤 탁월하다. 그러나 여성의 모든 재능은 남성에 의해 어머니이자 아내, 주부의 형태로 '잘리고' '단절'된다. 그리고 그녀가 외부를 바라보려던 롱테이크는 이내 곧 남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이끌리는 롱테이크로 뒤바뀐다. 병원에서 조이의 임신 중절을 놓고 이사회가 소집된다. 목숨이 위태로운 그녀는 수술이 시급하지만, 정작 '남성' 이사들은 그녀의 목숨을 도외시한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작되지만, 그녀의 목숨에 절박하지 않은 남성들의 얼굴로 대체되고 그녀의 얼굴은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간다. 이로써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일에 정작 그 몸의 주인인 여성이 소외당한다. 이후 남성 심리상담사가 건넨 쪽지를 통해서 불법적인 시술소로 향한다. 롱테이크, 입구서부터 남성들이 성희롱한다. 시술소의 환경은 불결하고 위압적이며 거칠다. 남성의 이익만 고려하는 환경에서 여성은 제 삶을 보호받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후 수술을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온다. 비가 내려서 흠뻑 젖고 몸은 싸늘해진다. 남성이 만든 법을 반영하고, 또 남성이 인도한 롱테이크는 아주 매캐하고 어둡다. 즉 그녀들의 발걸음을 반영하는 팔로우 숏과 롱테이크로 다시 변환되더라도 거기에 여성만의 발걸음은 없다. 남성에 의한, 남성만을 주목하는 카메라… 그러나 제인에서 롱테이크는 일련 긍정적인 분기점을 만난다. 수술은 남성 딘이 하지만, 그 이후 여성을 배려하는 버지니아가 주축이 된 아지트로 몸을 옮긴다. 버지니아는 수술 이후에는 몸을 잘 조리해야 한다며 스파게티를 준다. 조이의 몸을 버지니아의 몸처럼 소중히 여긴다. 제인에서 사용되는 롱테이크는 각 구성원들을 공평하게 헤아리고, 조명은 밝고 따스하다. 이후에도 샬롯과 윌이 조이에게 실망하여 제인 참여를 반대할 때 집의 조명은 아주 차갑고 어두워지지만, 결말에서 여성이 재능과 자유를 꽃피울 때 다시 조명은 온유해지고 따스해진다.    


즉 영화의 연출은 롱테이크에서 숏의 분절, 이후 남성에 의한 롱테이크, 그리고 여성이 모인 롱테이크로 각기 변화한다. 남성이 주도한 롱테이크가 여성을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배려하지 않는 고압적인 끌어당김이라면, 여성의 롱테이크는 부드러운 존중과 배려가 도드라진다. 전자가 남성의 표상에 종속된 여성이라면, 후자는 상호 배려하고 존중하며 네 몸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긴다. 이에 따라서 서로 간 ‘온기’를 공유하고, 삶은 따스한 조명으로써 데워진다. 조이는 연결된 '제인'에서 누가 제인인지 궁금하다. 버지니아는 그 질문에 껄껄 웃으며 특정한 제인은 없다고 말한다. 제인의 정신은 ‘누구나 다 똑같은 제인’으로 여긴다. 그래서 조이도 제 몸의 수술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기사’가 되고 ‘시술 보조원’이 되며, 끝끝내 ‘시술자’가 되어 다른 여성의 위급함을 내 목숨이 위태로웠던 당시와 동일시하여 적극 도와준다. 물론 제인 내부에서도 흑인 그웬과 백인 버지니아가 여성이라는 점은 같지만, 인종 차이로 인해 이견을 보이고 다툰다. 그래서 리버스 숏으로 나뉘지만, 여성은 화해한다. 지금까지 임신 중절을 다룬 영화들이 있었다. 끌로드 샤브롤의 <여자 이야기>, 마이크 리의 <베라 드레이크>, 크리스티안 문쥬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 개봉한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들 모든 작품에서 임신 중절은 불법이었고, 시술을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 모두 악마화되었다. 그녀들은 살인마로 여겨졌다. 그러나 샤브롤과 마이크 리가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그저 평범한 여성의 얼굴로 시술자를 제시했듯, 또 악마화를 감행하고서라도 수술 받아야만 했던 다급한 여성을 문쥬와 디완이 다뤘듯, 본 작품도 남성이 주장하는 임신 중절 금지가 여성의 삶에 실로 해롭다는 것,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 여성에겐 합법이어야만 했다는 관점을 이어간다. 조이는 임신에 의한 합병증을 앓고 있다. 그녀는 몸이 붓고, 의식이 어지럽다. 영화는 슬로우 모션과 아스라한 미장센, 불길한 배경음악을 뒤섞어, 자기 몸이 느려지고 혼탁해지는, 임신이 여성의 몸에 미치는 해악을 가시화한다.      


조이는 요리를 한다. 그런데 그녀가 교정이나 시술 등 주체적이고 활동적인 일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주부로서 주저앉기로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원치 않아 할 요리, 그러나 조이는 해야만 한다. 이와 동시에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솔직하게 들썩이는 몸을 회복한다. 그러나 임신이 그녀가 바라는 몸을 쓰러지게 만든다. 이후에도 제인에는 삶이 위태로운 여성들이 연결된다. 아이를 갖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미성년자, 남편에 의해 이미 많은 아이를 낳은 여성, 강간당한 여성 등이 말이다. 그녀들이 원치 않은 임신은 주체적인 삶을 위협한다. 설령 목숨을 위협하지 않더라도 임신은 여성의 자유를 침해한다. 제인에서 두 차례 임신 시술을 받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임신으로 목숨이 위태롭진 않다. 다만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그녀는 지금 당장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섹스의 결과인 임신과 출산을 제 몸 외부로 전가하여 방종한 남성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으면 되지 않을 수 있다. 중절 현장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그렇지 않다. 원치 않아도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 출산, '어머니됨'은 선택 및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 생존과 무관하더라도. 그 자유가 남성에 의해서 불발된다. 다시 도입부, 조이는 아주 우아하고도 고풍스럽게 꾸몄다. 아름다운 한편 취약하다. 제인으로 향할 때 조이가 입는 의상은 도입부의 복식에 비해 편하고 평범해서 행동에 제약이 없다. 그런데 꽉 끼는 드레스를 입으면 행동에 제약이 생겨 경찰이 안전을 당부하고, 남편에게 보호받게 된다. 그녀들은 아름답기를 요구받는다. 조이의 딸 샬롯과 라나의 딸 에린은 청소년이다. 샬롯은 생리가 시작됐다. 서서히 성인으로 접어든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화는 머리색을 논하는 ‘꾸밈노동’에 국한된다. 생리, 곧 가임은 영화 속 여성들에게 재앙이다. 그러나 전업주부를 요구받는 여성들에게 이는 행복이자 의무로 선동되고, 이를 부정하면 안 될 것처럼 샬롯에게 세뇌된다.      


이렇게 쓸모없는 꾸밈노동만을 강요받아 사회에 참여하기 부적합해지고, 가장에 의해 종속되는 어머니·아내가 되어야 하는 여성은 정치적 발언권이 축소되며, 그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강인한 지배력과 폭력을 비호하기 위해서, 여성에겐 한도 끝도 없이 나약하고 수동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불평등한 젠더는 어려서부터 교육이나 세뇌로 강제된다. 윌은 샬롯이 거친 시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리라고는 걱정조차 않는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그럴 리 없다고 자만한다. 가장의 지배력에 따르는 여성은 전당대회에서도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뽐내고, 시위에도 참여할 수 없다. 라나가 로이를 잃고 미망인이 되자 사람들은 그녀를 배척했다. 남성 없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또 라나는 맹목적으로 로이의 정치적 견해를 따랐다. 주체적으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아내이자 어머니가 된 여성은 경제적으로 취약해진다. 조이는 가사도 맡고, 윌이 부탁한 편집 및 교정도 맡는다. 그러나 라나에게 말하듯 보수는 없다. 돈을 벌지 못하는 여성, 남편의 수표를 몰래 바꿔야만 하는 여성은 더더욱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에게 여성은 ‘수단’이다. 조이가 불편해도 윌은 섹스하길 원하고, 자신의 일을 보조해주지만 돈은 주지 않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제 남근을 위한 수단’, ‘돈벌이 도구’ 등으로 여성은 전락한다. 딘은 여성을 위한다고 떵떵거리지만 실상은 여성에게 과도한 수술비용을 받아 수영장을 짓고, 좋은 차를 타며, 버지니아의 알몸을 보고 싶은, '제 남근'밖에 모른다. 사회적 비용은 의사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라고 일컬어지곤 하는 ‘남성’일 뿐인 딘에게 '부당하게' 집약된다. 여성은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에게 향하는 사회적 비용 중 아주 적은 몫을 챙기는 상황인데, 그조차도 딘과 같은 남성들이 쥐어짜서 착취한다. 제인에서 두 차례 임신 중단한 여성은 성관계 당시 남성에게 질 바깥으로 남근을 빼달라고 요구했는데도 질내사정 당했다. 남성의 재미를 위해서 여성을 불행하게 착취한다.      


이후 도래한 임신이라는 책임은 여성의 부탁을 무시한 남성이 더 무거워야 하지만, 정작 임신 중단을 하러 와서 공포, 불안, 위기를 짊어지는 쪽은 여성 ‘혼자’다. 윌에게 조이는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는, '가부장적인 완벽한 가정'을 위한 수단이다. 퇴근하는 자신을 기다려주고 맛있는 저녁을 해준 이후에야,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또 변호사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법과 절차를 지키는 것이 우선으로, 50%의 확률로 죽을 수도 있는 조이를 위해 불법을 택할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그는 아이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보인다. 제 계획 속의 아이를 위해, 정작 곁의 조이를 충분히 위로해주지 않는다. 조이가 자신의 기대에서 엇나가자 라나에게 의존하며 충동적으로 입맞춤한다. 실수한 것, 죄를 범한 것은 윌이다. 그러나 사과하는 쪽은 라나다. 영화 초반, 윌은 조이에게 임신 부작용으로 인한 신부전증에도 불구하고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느냐?"라고 묻는다. 여성은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 피해자여도 가해자로 전락하는 것이, 그녀들이 원치 않는 삶이 한사코 강행되는 것이, 이에 따른 고통과 부당함이 일반화되어 그녀들은 둔감하고 무덤덤해졌다. 그런 남성들은 변호사이자 의사로 극 중 등장한다. 법을 만들고 목숨을 관장하는 사람이 남성이다. 남성은 여성의 임신 중절에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람이 공격성을 띠는 이유는 ‘사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법조계와 의료계의 남성들은 여성 스스로 법을 만들고 제 몸을 지키는 상황이 도래하여, 가장들의 부조리한 지배력과 이익을 잃게 될까봐 불안한 것이랴. 여성의 목숨을 자신들이 쥐고 있다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임신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운 여성들을 방치한다. 또 딘은 자신의 아이큐가 180 이상이요, 의사 면허가 있다며 허풍을 떨었고, 의학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당대 여성들은 이를 순진하게 믿었다. 그러나 조이는 증거를 수집하여 딘의 허풍을 까발린다. 남성은 여성을 수동적이고 취약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우월하다고 선전 및 ‘사기’치며, 그녀들을 제 알량한 욕망을 위해서 잠식한다.      


또 서구사에서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여성은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플라톤이 남겨놓은 악마의 씨앗이다. 이에 역사 내내 남성은 옳은 존재로, 반면 여성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폄하되었다. 무한 숭상된 남성은 여성을 배척하였고, 남성 내부의 여성성이라 할 수 있는 내면의 돌봄이나 연민 등을 추방하였다. 이에 따라 남은 것이 '극도로 비인간적인 이성 내지는 계산'이다. 병원 이사회의 의사들은 조이의 목숨과 태어날 아기의 가치를 저울질한다. 철학자 바타이유는 생명이나 유기체는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이상으로 과잉 흡수하는 존재라 말한다. 그렇게 과잉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 상태를 뛰어넘는 ‘성장’으로 이어지고, 성장이 더 이상 불가능할 시에는 비생산적인 즐거움이나, 종의 성장을 훨씬 웃도는 크나큰 사치이자 낭비인 ‘생식’이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남성은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저울질하여, 여성은 더는 성장이 불가능한, 이로써 에너지를 획득해야할 이유가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반면,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서 태아에게 더 높은 값어치를 부여하는 것이랴. 그러나 필리스는 말한다, 여성은 여전히 에너지를 흡수하여 더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간 여성은 제 영혼의 창구인 얼굴을 몰랐다. 또 자신 내부에 있는 생식기 구조도 몰랐다. 오직 ‘남성에 의해 좌우되는 여성의 육신’만 알았다. 영화 후반에 조이의 시술을 반대하는 윌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남편의 얼굴로 대체되었다. 또 조이는 작가로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수동적인 여성만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그녀의 재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조이는 임신 중절을 하며 남성중심적인 법에서 이탈한다. 이제 거울을 자신에게 들이밀어 제 생식기를 확인하고, 또 시술자로서 스스로의 얼굴을 본다. 그렇게 주체적인 여성 자신을 회복한다.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일을 남성이 관장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자격도 없는 그들이 가로챈다. 심지어 윌은 조이 덕분에 훌륭한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가치를 평가한 비용은 오직 윌에게만 향한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이 그녀들의 몸에서 발생하는 일을 결정하고 시술하며, 남성에게만 향하던 부당한 사회적 비용과 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된 여성의 몸을 그녀들의 것으로 복권한다. 그간 남성에 의해 좌우된 여성은 실내에 갇혀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름다운 실내'에 갇혀서 세상 바깥의 실제적인 지혜, 정보, 사실과 유리되었다. ‘추한 진실’을 마주하지 못했다. 남성에 의해서 괜찮다고만 일컬어졌고 이를 믿었다. 그러나 제인은 그웬과 함께 대마초를 피우며 '창'을 내려서 바깥을 본다. 남성에 의한 임신중절 '선전'만을 폐쇄적인 실내에서 제한적으로 알고 있던 샬롯은 외부의 실제 여성, 남성에 의해 왜곡되거나 악마화되지 않은 피해자 여성을 직접 두 눈으로 접한다. 물론 여전히 은밀하다. 그웬은 제인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서 조이의 눈을 가리고, 이와 동시에 제인에 도착했을 때 카메라는 ‘롱숏’으로 멀리서 그들을 은밀하게 훔쳐본다. 버지니아가 약국과 조심스럽게 밀거래하는 현장도 그 사실을 정확히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듯 언제나 멀리 떨어진 롱숏, 정보의 구체성을 약화하는 롱숏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여성의 진실이 바깥에 비치면 안 된다는 장애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들은 제 삶을 향해 질주해간다. 그녀들의 진실은 '커다랗게', 그리고 '세세하게' 묘사된다. 필리스는 임신 중절 과정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남성에게만 제한되어 있던 정보를 여성에게도 공개한다. 그럼으로써 가정주부로서 가사 노동에만 능력이 제한되어 있던, 남성에 의해 그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 여성은 이제 사회운동가이자 시술자가 되어, 커진 사회적 발언권을 널리 활용한다. 합법적인 남성 형사가 구할 수 없는 여성을 ‘불법 기관 제인’이 구제한다. 남성만의 법에 여성의 발언권이 뒤섞이며 서서히 평등한 법으로 나아간다. 수동적이고 열등할 것을 강요받은 여성은 가장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그러나 버지니아는 두뇌 싸움에서 딘을 압도한다. 오히려 이성적이지 못한 욕망으로 판단이 흐려진 것은 딘이었다. 또 남성 딘이 할 수 있는 일을 여성 조이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사노동을 남성 윌은 하지 못해 라나에게 도움을 받는다. 우월하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무능한 남성이 남성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추방한 여성성은 돌봄과 염려, 다정다감함 등의 감수성이다. 돌봄과 염려를 모르는 다정하지 않은 남성은 ‘인간을 위한 법’이 아니라, ‘법을 위한 법’을 이성적으로 따지며 임신한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앞선 롱테이크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성의 힘은 상대를 내 몸 안에 품을 수 있는 연민과 포용력이다. 여성을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던 남성은 지나친 비용 600달러를 요구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 너머로 시야를 확장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성들은 기꺼이 무료로 시술하며, 자신의 이득을 내려놓고 타인의 처지를 굽어 살핀다. 가부장제가 보장한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이 본인만의 지위와 권력만을 보존했다면, 여성성은 인류를 돕는다. 가장의 지위, 지배력, 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여성의 성장 가능성을 평가 절하한 남성, 그러나 그간 배태된 여성의 잠재력이 깨어나자, 그녀들의 돌봄 역량으로 피어난 결말은 생명력의 녹색과 황금빛으로 풍요롭고 따스하다. 그렇게 해방된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 임신과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낳을지 말지, 어떤 삶을 살지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의 실존이 임신과 출산으로 가능하다면 <티탄>처럼 낳을 수 있겠지만, 만약 제 뜻이 아니라면 본 작품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레벤느망>처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는 정의를 위해 불법을 감행하는 여성들의 투쟁을 상세히 담아낸다. 권력자의 삶만을 반영하는 편향적인 반쪽짜리 합법은, 배태된 타자에겐 불법·무법지대보다도 해롭다. 남성에게 빼앗긴 그녀들의 몫을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되돌리는 투쟁을, 남성에 의한 육체를 다시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는 혁명을… 다만 여성들의 이상향에 도달한 후반부를 날림 처리한 느낌이다. 윌과 조이의 봉합, 투쟁의 과정 등을 더 상세하게 묘사해야 하지 않았을까? 당대의 투쟁은 영화의 결말처럼 느슨하고 평화롭기보단, 구체적이고 세세한 법의 균열을 찾아내는 피 말리는 투쟁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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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0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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