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이 깨어나는 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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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는 직관을 그르치게 하지만 광기는 사상을 그르치게 한다. 즉 미친 사람은 대개의 경우 직접적으로 ‘현재의 것’에 관한 지식에서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때때로 인류는 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숨는 월식을 접한다. 월식의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이 되는 바로 그 찰나에만 성립하기에 신비하고도 진귀한 경험이다. 안 그래도 희귀한 월식, 그런데 월식 중에서도 더욱 희소한 적월(blood moon) 현상이 이따금 발생한다. 그 적월이 너무 신비로웠던 나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에 대한 전설과 신화를 무수히 만들어냈다. 대체로 설화들은 부정적이었다. 적월의 영어 명칭인 blood moon이 피를 지칭하듯 적월을 보고 피를 연상하는 문화권이 적지 않았고, 혹 피를 구체적으로 암시하지 않더라도 적월의 빨간색은 폭력적이고 불길하게 느껴졌기에, 적월을 살생, 악마, 질병 등 불길한 예언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적월이 발생하면 설화에서 상상한 갖가지 악행들을 차단하는 의례를 진행하였는데, 한편 그 '악함'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특정한 믿음과 종교관, 이데올로기에 따른 일반성을 따르지 않을 뿐인 타자성이 악마화될 여지도 다분하다. 그렇게 악마화되어 봉인되었던 광기가 깨어난다. 애나 릴리 아미푸르의 신작,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10년간 폐쇄병동에 격리되었던 ‘광인’ 모나리자가 적월에 깨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80년 영국 마게이트 출신의 애나 릴리 아미푸르는 현재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영화감독이다. 이름에서 암시되듯 그녀의 가족은 이란계인데, 아미푸르는 자신의 출신성분을 부정하지 않으며, 장편 데뷔작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 차도르를 입고 아랍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였다. 또 아미푸르는 청각에 경미한 장애가 있어 청각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풍부한 대사나 설명보다는, 시각으로 대신 말하는 작법을 선택하기에 다소 듬성듬성한 연출이 특징이다. 행간에 여백이 존재하는 그녀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 형식이다. 반면 그만큼 시각에는 강점이 있다. 이러한 연출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멀어지는 영화를 지향하였다. 그녀의 두 장편에선 초자연적 존재 '뱀파이어'가 등장하거나, 현실의 특정 시공간과 조응하지 않는 '생지옥'이 펼쳐진다.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와 세계를 보여주는 아미푸르, 그러나 아미푸르에게 영화 속 초자연성은 현실에서 존재하거나, 분명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생지옥은 현실 속 변두리로 내몰린 타자·약자들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미푸르의 대표작이라 말할 수 있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 미국의 '어느 도시'로 일컬어지는 영화 배경은 폐기물이 도처에 가득하여 활력과는 거리가 멀다. 불법과 마약, 매춘이 보편적으로 성행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랍어가 들려온다. 아미푸르는 다른 언어, 다른 문화권, 열악한 경제력으로 인해 미국 내의 어느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주변부를 황량하고도 쓸쓸한 미장센으로 구현한다. 마찬가지로 <더 배드 배치>에서도 어느 이름 모를 황무지에서 출소한 알렌을 뒤따라가며, 법도 인프라도 존재하지 않는 황야에서 서로를 사냥하는 지옥도를 담는다. 혼자서 생지옥과 다를 바 현장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지만, 다시금 붙잡히고 귀속되는 진창의 연속은, 과연 주변부의 타자·약자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한지를 되묻는다. 이들에게 주어진 삶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거리가 멀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 어느 도시의 너절한 공간성과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아버지'라는 시련은, 언제나 주인공의 곁을 졸졸 쫓아다니며 자립을 방해한다. <더 배드 배치>에서도 혼자 다니는 나약한 존재는 사냥당해 잡아먹힐 처지이며, 냉혹한 자연 그 자체인 황무지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억지로 강해져야만 한다. 약자끼리 공존하기 위해서 태동한 ‘문명’의 본령과 다르게 말이다. 문명이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질되어버린 현장이 곧 이방인 아미푸르가 느낀 미국에서의 삶일까? 이러한 가운데 강해지기를 포기한 몇몇 여성들은 자유를 택하기 보단, 강인한 남성에게 제 몸을 맡기며 노예가 되어 삶을 연명한다. 이러한 아미푸르의 두 작품 모두에서 소년·소녀가 등장하는데, 불가항력적으로 디스토피아에 떨어진 이들은 맹목적으로 공간과 어른들을 반영한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 소년은 구걸하고, <더 배드 배치>에서 소녀는 더 나은 물질적 풍요만을 갈구하며 비인간적인 기성을 모방한다. 하지만 아미푸르는 낙담하지 않는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 뱀파이어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역사를 함축한 초자연적 존재다. 뱀파이어는 어느 도시에 만연한 악을 조금씩 정화해가고 소년에게 착한 아이가 되라고 전언하며, 아라쉬에게는 사랑을 가르쳐 역사를 지탱해온 가치를 전승한다. 한편 자유와 사랑을 가르치는 존재가 초자연적인 존재로 전락할 정도로 이 시대는 아미푸르의 시선에서 타락했고 곪아있다. <더 배드 배치>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에 다른 누군가가 태어나며 종족을 유지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순리다. 하지만 불필요한 악에는 굴복하지 않고, 그 자리에 연대와 사랑을 남긴다. 애정과 연민을 모르던 소녀에게 눈물을 가르치며, 뜨겁지만 그 어떤 설원보다도 혹독하고 차갑던 사막에 온기를 남긴다. 이를 담아내는 아미푸르의 연출은 아주 탐미적이고 과감하게 터부를 넘어서는데, 과연 그녀의 색채는 신작에서 어떻게 이어질까? 그간 아미푸르의 작품에서 ‘공간’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전작 둘 다 다루는 지역을 '어느 도시'라고 추상적으로 명명하였는데, 심지어 그 공간이 속한 시간 또한 불명확했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의 흑백은 과거를 지칭하는 것 같으면서도 현대적이고, <매드맥스 시리즈>를 닮은 <더 배드 배치>는 미래의 우화인지 과거의 우화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대단히 추상적이고, 단지 시공간을 불문하여 ‘야만적인 인세’라는 공통점만 관통하던 아미푸르는, 본 신작에선 시공간을 구체화하며 변주를 가한다. 션 베이커의 <탠저린>이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연상케 할 만큼 ‘뉴올리언스’의 로컬성과 하위문화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시간 역시 트럼프 집권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보도 영상을 인서트한다. 다만 현실의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도, 아미푸르 특유의 초현실적인 B급 감성은 기성의 현실과 조금도 절충하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밑도 끝도 없는 허황한 B급 감성에 내재한 초자연성은 현실에 뿌리내려야 할 이상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초자연성은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영화는 어쩌다가 모나리자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현혹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그 기원이나 학습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배우 전종서가 연기하는 초자연적인 배역은 자칫 잘못하면 '신비로운 동양', '서구가 기대하는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모나리자처럼 눈에 띄는 초능력은 없을지언정, 일상에서 그녀만큼 신비롭고, 또 지배력을 구사하는 인물들을 함께 배치한다. 그들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서 작동되지 않고 매우 자유로운데, 이들을 함께 비추며 모나리자가 가리키는 것이 서구가 기대하는 허구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의 천성이자 궁극적 목적인 자유롭게 제 삶의 주인이 되는 '초인'임을 명시한다. 신비로운 초인들을 비추는 영화는 어둑어둑한 습지에서 시작된다. 귀뚜라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래로는 호수가 펼쳐져있으며, 위로는 나무가 빼곡한 숲을 포착한다. 숲의 인상은 아주 어지럽다. 무수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기 때문이다. 형체를 이루는 선들도 어지러운데, 색채조차 검고 혼탁하여 마구잡이로 뒤섞인 이미지 각각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풍경은 어지러움에 닫혀있지 않고, 규명을 기다리며 열려 있다. 검정은 분명 무수한 색들의 끝이다. 여러 유채색들이 뒤섞이고 또 뒤섞이면 본래의 색채를 잃고 검정, '아무 것도 없음'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영화 속 검은 숲에는 여전히 본래 색들의 흔적이 미약하게나마 보존되어 있다. 어두운 숲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있고’, 심지어 많다. 어지럽지만 다채로운 형체와 희끗희끗한 색채는 감상자에게 숲의 비밀을 해독하라고 요구하고, 이에 숲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무수한 비밀이 뛰쳐나올 듯하다. 즉 포착되는 숲엔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빽빽한 폐쇄성이 아니라, 오히려 무궁무진함이 곳곳에 숨어 있는 개방적인 어둠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숲의 모든 것을 파헤치기 위함인 듯 카메라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각 요소들이 중첩되고 또 중첩되어 형성됐음을 알리는 '디졸브'도 사용한다.
디졸브는 폐쇄병동에서 탈출한 모나리자가 숲을 지날 때도 사용되어, 그녀가 숲에서 기원한 존재 내지는 숲이 품고 있는 복합적인 존재, 단순화할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즉 신묘하고 숭고한 숲에서 기원했을지 모르는 그녀의 초자연성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이와 상반되는 공간은 인간이 만든 폐쇄병동이다. 곳곳에 다른 색채가 숨겨져 있던 숲의 검정과 달리, 하얀 폐쇄병동에는 다른 색채, 잡티가 거의 묻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로 그 너머의 공간이 암시됨에, 입체적이고 개방적이던 숲과 달리, 폐쇄병동은 하얀 벽이 외부를 원천 차단한다. 또 탈출 이후 모나리자는 퍼지나 찰리가 빌려준, 다양한 색이 칠해진 티셔츠를 입지만, 폐쇄병동에서는 공간과 환자복 모두 다 단일한 하양만 허용된다. 거기서 그녀는 외부와 차단되고 포박당해 멈춰있다. 숲에서는 창공을 비행하는 듯한 자유로운 하이 앵글 구도가 도드라졌다면, 병동을 포착할 때는 아이 레벨 뷰로 추락한다. 흡사 중력의 구속에 붙잡히고 떨어지듯. 더욱이 다채로운 개방성을 따라가며 멈추지 않던 숲의 트래킹 숏과 달리, 폐쇄병동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정지한다. 여기에 더해 카메라는 자유를 박탈당한 모나리자를 저 멀리 줌아웃하며, 그녀의 육체는 롱숏으로 떨어지고 소외된다. 그녀가 폐쇄병동에 갇혀 제 자신의 소망과 자유에서 소외되고 멀어져야만 하는 이유, 모나리자는 영화 내내 위험인물로 치부된다. 탈출한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서 뉴올리언스의 경찰 다수가 동원된다. 영화 후반에 보니벨을 폭행한 남성들은 체포되지도 않고 파렴치하게 길거리를 누비는 반면, 이보다 죄의 경중이 낮은 모나리자는 과한 죄목을 부여받는다. 모나리자는 중증 ‘조현병’ 판정을 받은 ‘광인’이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조현병을 앓는 것 같진 않아 보인다. 또 국가가 모나리자에게 가한 ‘광인 낙인’은 철학자 푸코가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밝히길 '정치적으로 사회 안정'을 위한 전략으로, 권력을 존속시켜주는 보편에서 벗어난 타자들을 프레이밍하는 행위다. 즉 그녀의 죄목이나 병목은 매우 당파적일 수 있다.
이에 더해 푸코는 프레이밍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만 그치지 않고, 광인의 속성을 더 자세히 탐구하였는데, 그들이 ‘물’과 닮았음을 밝힌다. 사회가 부여한 운명에 군소리하지 않고 고체처럼 얽매이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운명의 불확실성을 따르고 이를 스스로 책임지는, 가장 자유로운 물의 여행자가 바로 광인이었다. 유랑하는 그들은 명확한 하나의 도그마로 국민들, 신자들을 지배하는 일신론 체계를 의심하고 교란했다. 범신론적이거나 무신론적 광인은 확고한 일신론 체계, 거기서 비롯한 전제정권, 전체주의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이로써 광인은 체계가 금기시한 이단적 앎, 범신론적인 앎에 도달하는 인물, 그만큼 비일반적으로 솔직하고 물처럼 흘러가는 인물이었는데, 본 작품에서 바로 그 금지된 앎이 '자유'다. 모나리자는 작품 내내 자유를 향해서 달아나고, 광인을 구속하려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유를 방해한다. 자유, 특히 여성의 자유를 통제하는 가부장제는 여성을 폭행한 남성들은 방치한다. 대신 남성을 지배할 수 있고 자유로운, 그럼으로써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여성 모나리자는 구속한다. 광인들의 광기는 전염성이 있다. 광기는 이성을 압도하리만큼 매혹적이고도 유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인들은 유혹하기 위해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감정, 자신이 아는 진실에만 충실히 떠든다. 그 자유가 결여된 존재들은 자유롭게 손짓하는 광인들에게 홀린다. 유혹하지 않았는데도 유혹당한 쪽, 광인이 자신을 꿰어냈다고 믿는 쪽은 광기에 휩싸인 일반인이다. 영화에선 제이 리빙스톤과 레이 에반스가 부른 <모나리자>라는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신비로운 미소를 가진 모나리자, 그녀는 외롭기 때문에,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즉 그녀의 표정을 가수가 주관적으로 유추하고 있다. 본 노래를 기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초상화다. 다 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연기처럼’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다 빈치는 어원처럼 대상을 희뿌옇고 불명확하게 처리하는 걸 선호했다)으로 그려진 <모나리자>는 아스라함과 불분명함이 특징이다.
다 빈치와 동시대를 살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설령 신원이 불명확하더라도 윤곽선을 매우 뚜렷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대상의 표정이나 용모, 동작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스푸마토 기법의 오묘함에 더해, 그가 인간을 표현할 때 분명하지 않은 동작과 표정을 선호하였기에,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인식이 단언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감상자에겐 친절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한편 작품에 담긴 모델에겐 매우 친절한 표현일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불분명함, 불확정성이 자신에게 자유로워 여지를 열어두는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모나리자>는 흔히 감상자를 유혹하는 신묘한 작품이라 일컬어지지만, 그 유혹이 <모나리자>와 작품의 모델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다 빈치는 단지 타인의 인식에 봉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표정을 <모나리자>에서 묘사한 것뿐이다. 타인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는 자유는 타인 입장에서 불분명하여 신비롭다. 타인은 자유로운 상대의 신비에 매혹됨과 더불어, 신비로움을 밝혀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 이로 인한 불쾌감을 몰아내고자 작품을 주관적으로 규정하려할 테다. 그 시도가 영화에 삽입되는 <모나리자>라는 음악이랴. 그런데 과연 그 시도가 <모나리자>라는 작품과 대상을 존중하는 일일까? 본 작품의 모나리자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자유롭고 신비로워서 타인은 그녀에게 매혹되고 심지어는 지배된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 모나리자에게 홀리는 인물과 홀리지 않는 인물이 각기 다르다. 아미푸르는 광기에 전염될 수밖에 없었던 피지배자들의 결함을 서서히 까발린다. 영화에서 모나리자가 가장 먼저 지배하는 대상은 그녀의 손발톱을 정리하러 온 간호사다. 그녀는 <모나리자> 노래를 부르며 모호한 존재 모나리자에게 다가와 폭력을 행사하며, 하대해도 되는 환자로 규정한다. 그런 오만한 행동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그녀 내부에 있지 아니하고, 환자 위에 있는 '간호사'라는 지위, 모나리자를 구속하라고 지시하는 상부가 부여한다.
모나리자가 유약한 사람이라면 간호사에게 고분고분 지배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빽빽한 법칙에 메여있지 않은 물의 광인으로 간호사와 환자의 엄격한 수직적 관계를 거부한다. 간호사가 스테디캠에 올라탄 안정적인 카메라로 포착되며 어딘가에 ‘붙들려’ 있다는 게 암시된다면, 모나리자는 제 손에 상응하는 핸드 헬드 방식으로 촬영된다. 이에 흔들리고 불안정하더라도 제 다리로 걷는 모나리자의 의지를 반영한다. 이후 찰리와 해싱을 하며 제 몸과 감정에 솔직할 때도 핸드 헬드는 이어진다. 그렇게 고분고분 탑승하지 않는 모나리자가 상대를 '간호사'로 치부하지 않자 그녀는 힘을 잃는다. 간호사는 타인은 고사하고 자신조차 지배할 힘이 없지만, 외부에서 간호사의 지위를 보장하고 빌려준 것이다. 모나리자가 그 외부를 무시하고 역으로 그녀를 지배하자 간호사 스스로 저항하기는커녕,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모나리자에게 빈다. 본 과정에서 모나리자와 그녀, 양자 모두의 얼굴에 줌인으로 밀착한다. 모나리자는 줌인에 의해서 그녀 자신의 지배와 자유에 가까워진다. 반면 간호사는 줌인으로 모나리자에게 가까워지는 만큼 본래 머물던 공간에서 멀어진다. 또 기묘한 카메라 워킹에 의해 기존 공간이 흔들리고 일렁이는데, 간호사를 간호사이게 만들고, 모나리자를 격리해야 할 광인으로 치부하는 기존 공간을 파기한다. 이후에도 모나리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할 때 본 연출이 반복된다. 폐쇄병동에서 탈출한 모나리자는 프론트의 간호사, 헤롤드라는 경찰을 지배한다. 양자 모두의 공통점은 상부에서 모나리자를 격리하라거나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점, 동료 경찰이나 부두교 등의 외부 도움 없이는 다소 무능력하다는 점, 특히 포박된 모나리자나 수술을 앞둔 환자 보니벨, 만만한 꼬맹이 찰리, 즉 약자들만 쥐 잡듯이 잡으며 자신을 강자로 드높인다는 점이다. 그 대가로 과자나 중국 음식을 먹는다. 물론 모나리자 또한 식욕이 왕성하다. 간호사에게 그가 지닌 과자를 요구하고, 퍼지나 보니벨에게 음식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유약한 사람들은 음식을 빼앗긴다. 간호사는 모나리자에게 과자를, 헤롤드는 동료에게 에그롤을 빼앗긴다.
반면 모나리자는 음식을 뺏기지 않고, 오히려 빼앗거나 지킨다. 또 음식을 위해서 타인에게 의존하지도 않는다. 음식에서 엿볼 수 있는 자유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강인함을 요구한다. 그래서 힘겨운 투쟁의 연속이다. 그러나 유약한 사람들은 스스로 책임지지 못한다. 간호사·경찰 모두 상부가 대신 책임을 져주는 대가로, 상부가 그들의 행동을 규정한다. 이런 유약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유라는 광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자신은 자유를 감당하기에 나약하므로, 그래서 나서서 자유를 탄압한다. 반면 모나리자는 위협이 닥쳐서 제 자유가 침해받을 때만 지배한다. 타인을 지배하면서 이익을 챙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보니벨을 처음 만난 다이너의 아이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레이라는 남자친구가 외도할까봐 전전긍긍 불안해한다. 그녀 자신은 그를 붙잡아둘 확신이 없다. 그래서 질투·의심에 휩싸이고 괜히 피해의식을 느끼는 보니벨에게 시비를 튼다. 아이린은 남자 친구인 레이에겐 대들지 못한다. 신체적으로 우위이기 때문이다. 대신 만만한 연적 보니벨, 사회적 약자 여성을 공격하여 낮은 자신을 드높인다. 이렇게 자신에게 확신이 없어, 약자들을 공격하며 자존감을 챙기는 아이린 또한 모나리자에게 지배된다. 즉 스스로가 제 자신이지 못한, 외부에서 권위를 빌려오거나 기대는 존재는 언제든지 그 주인이 튼튼한 광인으로 대체될 수 있다. 모나리자는 ‘보름달’과 동시에 ‘월식’, 즉 일반적으로 떠있는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리거나, 심지어 본 현상에 의해 시뻘겋게 보이는 ‘적월’에 해방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떠있던 저 하늘의 지배자에게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월식과 적월은 이를 가리고, 그 자리를 모나리자가 대체한다. 또 경찰, 간호사, 남성들의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가 가려지면서 부정성이 폭로되고, 반면 사회에서 부정적인 편견으로 낙인이 찍힌 괴짜, 여성들의 진실이 깨어난다. 아미푸르가 진실을 밝히는 타자들은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 평범한 사람들은 서로 간 동질성을 느끼며 자존감을 챙긴다면, 타자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다름을 꿋꿋하게 유지한다.
영화에선 이 타자들의 권리를 복권한다. 보니벨이 일하는 스트립 클럽의 여성들은 ‘남성이 좋아하는’ 전라에 가까운 의상을 입고, 음란한 춤을 추며 돈을 번다. 그리고 남성들은 이를 그저 누리기만 할 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이 부당함을 여성 혼자서 항거하기 어렵다. 선천적인 신체적 차이, 그리고 후반부에서 보듯 경찰은 모나리자는 기를 쓰고 체포하려 해도, 여성을 폭행한 이들에겐 관심이 없어 수색 및 구속하지 않기에, 여전히 여성은 남성의 무력에 의해 가꾸어지고, 남성에 의해 가난하다. 그래서 보니벨은 모나리자를 이용하여 남성이 정당한 몫을 지불하게 만든다. 본 장면은 풍자다. 모나리자의 지배는 물리적 강제성이 없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면 남자들이 스스로 돈을 지불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 스스로 돈을 지불해놓고 이후 보니벨에게 돈을 내놓으라며 따지고 폭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성은 남성이 손에 쥔 펜에 의해 그런 수모의 역사로 기록되었다. 팜므파탈이 아닌 여성들 또한 팜므파탈로 치부됐고, 남성들은 그녀들에게 유혹당해 제 인생을 망쳤다며 책임을 전가한, 타자화의 역사로 말이다. 그 남성들은 몰려다닌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약자인 여성에게만 물리적으로 강할 뿐, 남성성을 어렵사리 과시할 필요가 없는 다른 남성이나 주체적인 모나리자에게는 유약하다. 보니벨을 폭행한 남성들은 클럽 경비의 주먹 한 방에 쉽게 나가떨어진다. 또 모나리자와 친해진 보니벨의 아들 찰리는 다른 아이들보다 왜소하다. 그래서 덩치가 있는 세 명의 소년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세 명의 소년들은 나이대도 풍채도 유사하다. 무리의 유사한 전체성이 서로의 빈약한 자아에 확신을 제공한다. 외부에 의존하는 빈곤한 정신을 마찬가지로 모나리자가 지배한다. 이윽고 보니벨은 모나리자를 이용하여 ATM기기에 방문하는 일반 시민들을 정신 지배하여 강도짓을 벌인다. 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닌 사람들, 타자와 약자를 배척하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만족을 얻는 사람들, 그저 외부의 지시에 쉽게 굴복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랴. 그들은 영화 내내 반달이나 초승달의 상태, 자신의 몸을 외부에 빼앗긴 달과 같다.
그러나 빈곤한 상태에 안주해선 안 된다. 달이 제 형태를 전부 되찾는 보름에 모나리자가 주체성을 회복하고 탈출하듯 우리는 보름달, 그것도 제 피와 살까지 회복하여 모든 물질이 완벽한 '적월'에 나를 되찾아야 한다. 지배하는 자, 그리고 지배당하지 않는 자는 언제나 자신에게 솔직함과 동시에 타인에 의해 의지가 쉽게 꺾이지 않는다. 모나리자는 제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자유, 음식, 옷 등임을 확고하게 인지한다. 이를 니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린 아이'다. 어린 아이들이 외부를 의식하지 않고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솔직하게 욕구하는 것처럼, 그 울음소리가 부모를 지배하는 것처럼, 모나리자도 솔직하게 욕구하고 지배한다. 물론 모나리자에게 지배당한 이들도 제 자신의 ‘혀’에 솔직했다. 하지만 그들은 니체적으로 '낙타'다. 그 솔직한 욕구를 위해 외부에 기꺼이 지배당하고 짐을 지며 타협했지, 스스로나 타인을 지배할 수 없는 나약한 노예들이었다. 그들과 달리 모나리자는 지배당하지 않는다. 모나리자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했다고 서류에 적혀있다. 모종의 이유로 국가를 떠났는데, 이후 TV에 트럼프-김정은이 송출되는 것을 상징으로 본다면, 한국인인 그녀가 도망친 대상은 북한, 곧 독재였을지 모른다. 독재 국가를 떠났고, 망명한 미국에서도 마냥 지배에 순종하지 않는다. 국가의 폭압적인 지배의 대가는 TV에서 송출되는 위협적인 안보 위기, 전쟁이기 때문이랴. 이렇게 지배당하지 않고 주체적인 모나리자만큼 강인한 존재는 일단 보니벨이 있다. 스트립 댄서들은 보통 남성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보니벨은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기에 본인만의 신비로움이 있다. 보름달에 깨어난 모나리자처럼, 보니벨도 보름달이 뜨는 날엔 자궁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 곧 자신으로 꽉 찬 기분이라 말한다. 즉 자유로운 사람들은 달이 보름에 자신의 온 형체를 회복하고 빈틈을 없애듯, 보름달처럼 온 몸과 정신에 스스로를 꽉 채워 타인이 파고들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적월의 색채처럼 자신의 피와 살을 오롯이 회복한다.
그래서 권력자의 지배가 파고드는 피지배자들은 보름이 아니라, 반달이나 그믐달이라는 것이다. 보니벨은 아이린이 자신에게 덤벼도 쉽게 굴복하지 않고, 헤롤드가 꾸짖어도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뻔뻔하게 의견을 피력하며, 미혼모로서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로 꿋꿋하게 찰리를 길렀다. 보니벨 밑에서 자라난 찰리 또한 수동적이지 않다. 본인이 입을 옷은 스스로 빨아서 입는다. 또 헤비메탈 음악에 맞춰서 '해싱'이라는 춤을 추며 제 주체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제 생각과 행위를 분명하게 자각한다. 한편 자신의 능동성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보니벨은 영화 속 지배의 해악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보니벨은 모나리자를 이용해 남성들이 여성 댄서에게 지급하지 않은 몫을 취한다. 그것은 나름 정당하다. 하지만 보니벨은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도 강도짓을 벌인다. 그녀는 주체적이고 당당하지만, 모나리자를 이용해 타인을 지배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낸다. 즉 지배는 타인의 자유의지를 착취하고 억제하여 자신의 결핍을 보완한다. 이와 달리 모나리자에게 흠뻑 빠진 퍼지는 호피와 형광으로 이뤄진, 어두운 밤에 반대로 빛나는 자신만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구축한 주체적인 사람, 행동이 조금 과격할 뿐 자신의 '사랑'을 인지하며 연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남자다. 즉 그는 스스로의 선택과 운명, 표상을 몸소 짊어진다는 점에서 보니벨과 차이가 있다. 아미푸르는 보니벨과 퍼지 모두 아름답게 묘사한다. 보니벨의 관능적인 춤을 클로즈업한 숏과 퍼지의 개인 공간을 수놓은 형광 미장센에 감상자가 눈을 뗄 수 없다. 즉 자유로운 것이 진정 아름답다. 하지만 보니벨은 추해진다. 타인을 지배한 여파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말이다. 마지막으로 클럽의 경비 또한 헤롤드가 대변하는 법을 빠져나가는 즉흥적인 창조력, 여성을 착취 및 폭행하는 다른 남성들의 일반성에 좌우되지 않는 고유한 우직함을 지녔다. 이렇게 진정 주체적인 사람들은 솔직하기 위해 외부의 일반성과 타협하지 않고, 이를 위해서 강인하다. 그들은 서로 위협하지 않는다면 먼저 공격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유를 존중하는 연합을 맺는다.
타인에게 아첨하고 굴종하는 유약한 사람들과 달리, 혼자서도 거뜬한 주체적인 사람들은 갓 탈출한 모나리자를 위해 신발과 먹을 것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넉넉하다. 또 찰리는 모나리자를 자신의 주관대로 해석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소묘하며 신비로운 그녀 자체를 긍정한다. 퍼지는 국가가 요구하는 신분증이 아니라 모나리자와 찰리, 스스로가 바라는 여권을 만들어주고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이름'만 물을 뿐이다. 타인의 판단에 나는 지배당한다. 꼬마, 마약상, 중국인으로, 그러나 ‘꼬마가 아닌 찰리’, ‘마약상이 아니라 DJ 퍼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모나리자’로 존중해야 상호 자유롭다. 능동적인 찰리는 모나리자를 위해 공항에서 자신을 희생한다. 그런 '배려와 존중'에서 자유가 꽃피울 수 있음을 아미푸르는 역설한다. 인간은 서로 따라 하기에 상대를 좋아하지 않는 지배는 어느 순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며 상호 자유가 연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 자유를 따라할 때, 최근 퀴어와 소수자들이 존중받는 도시로 탈바꿈한 '디트로이트'로, 피와 살에 주체적인 '적월'로 모나리자는 향한다. 이렇게 아미푸르의 신작에서도 타자 및 광인은 도망 다니고 있다. 그들은 정신병원, 공권력에 반영된 국가의 지배에서 달아난다. 그렇게 달아나서 '보편적으로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실현한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처럼 본 작품의 초자연적 존재도 자유, 주체성이란 인간성을 부각하고, <더 배드 배치>처럼 지배로부터 사랑으로 도주하며, 양자 모두에서처럼 '아이들'에게 인간다운 정신을 계승한다. 아미푸르가 아이에게 전승하는 사랑이란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적절한 사랑, 그런 ‘상호 최선의 사랑’이다. 그 인간성을 자유분방하게 버무리는 것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다만 모나리자가 타인을 정신 지배할 때의 전종서의 연기가 좀 더 완고하고 강단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신 지배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니 강한 존재 모나리자가 약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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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322 cgv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