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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19. 2023

도미닉 그라프, <파비안>

시대와 나

도미닉 그라프(Dominik Graf), <파비안>(Fabian: Going to the Dogs) 

- 시대와 나     

“도덕이야말로 최선의 신체 위생이었다. 옥시풀로 양치질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에리히 케스트너-

파비안은 신문을 읽는다.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가득하지만, 더는 그 무엇도 파비안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악덕과 추함이 보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파비안은 언제나 완고하게 보편에 잠식되지 않는다. 반대해도 뚫고 나가고, 해야 하는 일은 고집스럽게 밀어붙인다. 이 파비안이 거리에 나가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타인들의 손에 이끌린 온갖 기막힌 광경들이 눈에 띈다. 교양 있는 중산층 가정 이면의 주체하지 못한 욕정, 허위라는 것을 증명하고 까발리기가 어려우니 마음껏 허위를 배포하는 언론, 강자는 더욱 권세를 누리고 약자는 끝없이 착취당하는 구조 등 거기서 인류는 '개'로 전락하고 있었다. 가장 큰 비극은 인류의 발전이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린다는 것, 그래서 권력자들의 야욕을 위한 지금의 빈곤이 풍요로 발전하기는커녕 다시금 탐욕에 의한 궁핍으로 되돌아온다는 것, 그렇게 되돌아온 악덕이 체제를 형성한다. 인간은 돈과 탐욕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래서 진정 인간인 파비안이 나아갈 수 있는 곳이 없다. ‘돈을 위한 자신’은 있어도 ‘나 자신을 위한 자신’은 모호하니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지도 알 수 없다. 파비안과 친구들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부르는 것을 받아서 썼고,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징병 됐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내던져졌고, 그저 유리병 속에 놓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착각한 채 발버둥을 치고 있는 형국이었을 뿐. 그 유리병은 나날이 더 커져서 만인을 삼켜버리리. 이러한 좁다란 유리병에선 사랑조차 강제된 사육일 뿐이다. 사랑은 목적이 있는 선물, 향후 이에 대한 계산서가 연인에게 통지된다. 서로는 각자의 미래를 계산하며 상대를 수단화한다. 각자는 오직 자신밖에 모른다, 타인은 미화하거나 낭만화한다. 이런 사회에서 출세와 절망은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출세를 위해 세계의 진리 대신, 오직 아첨만이 필요하다. 그 상태가 정신박약, 곧 정신 질환이 아닐까. 그러나 도시 어느 곳으로 향해도 정신 질환이 보편이니, 반대되는 결과가 증명되기 전까진 파비안이 미친 사람이다.      


그 부조리가 소설을 지배한다. 파비안이 이를 해결해보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봐도 헛수고다.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몸부림치고 고군분투하다가, 결국에는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며 삶을 마감할 뿐이다. 이는 에리히 케스트너의 『파비안』을 요약한 것이다. 이를 언급한 이유는 도미닉 그라프가 이를 영상화하기 때문이다. 1952년 뮌헨 태생의 도미닉 그라프는 독일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무수한 TV 시리즈를 연출하며 영상 경력을 쌓았고, 2014년 국내에도 개봉한 <연인들>로 인지도를 국제적으로 넓혔다. <연인들>에서 그라프는 뛰어난 연출을 보여준다. 낭만주의자 쉴러와 그의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에 담긴 수려하고도 풍부한 문체를 뛰어난 미장센과 촛불, 폭포와 같은 상징으로 섬세하게 구현한다. 활자화된 글이 이미지로 변환되는 과정, 즉 다른 매체로 뒤바뀌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폭력이 수반된다.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그라프는 최대한 같거나 그 장점을 살릴 수 있게끔, 쉴러와 자매가 영화의 풍경을 보고 마찬가지의 묘사와 글을 쓸 수 있게끔 섬세히 촬영한다. 촛불은 매우 경건하고도 온유하고, 폭포는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질풍노도, 거대한 숭고함을 과시한다. 쉴러가 두 자매를 '강의 여신'이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문학의 섬세한 묘사에 빚지지 않으려는 듯, 아주 수려한 풍광으로 거룩한 언어를 영상화한다. 그라프는 정돈된 듯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으로 리얼리즘을 가미한다. 또 그라프의 실력이 발군으로 작용하는 것은 18세기를 구현한 미술로, 이는 루치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에 필적할 정도로 풍부하다. 흘러넘칠 듯한 디테일, 그러나 이는 미어터질 듯한 협소한 자리를 꿰차고자 서로 격돌하는 형국에서 발생한다. 미묘한 흔들림은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 내에서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한 유동적인 정념을 반영한다. 이성과 정념, 두 축이 충돌하는 시대상을 인간의 실내/외부의 자연, 갇힘/자유, 느리고 우아한 워킹으로부터의 흔들림, 평온한 일상의 파기, 돈을 위한 결혼/사랑을 위한 결혼 등의 대비로 보여준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에 따른 폭력과 파열도 포착한다. 또 같은 시대의 서로 다른 이념처럼, 아무리 자매가 혈연관계로 함께 묶인다고 한들 서로는 필연적인 타자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이념, 시대, 마음 사이에 맞물려 발생하는 긴장감과 균열을 고전적인 문법으로 포착한다. 이러한 그라프의 터치가 <파비안>에서도 이어진다. 『파비안』 또한 두 시대와 이념 사이에 끼인 패기 넘치지만 절망스러운 젊은이를 포착하며, <연인들>처럼 긴장감이 묘사되는데, 과연 그라프는 갈림길에 놓인 인물을 어떻게 그려낼까? 또 <연인들>의 낭만주의적 연출은 부조리하고 미천한 것들을 담아낸 신즉물주의 소설 『파비안』을 영상화할 땐 어떻게 변화할까? 본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형식은 화면비다. 영화의 화면비는 아주 좁다란 1.37:1이다. 레터박스가 많이 노출되는 만큼 폭이 좁아 포착되는 공간이 많이 잘려나간다. 본 화면비는 영화가 다루는 시대인 1931~1933년에 성행한 매체로서, 화면비는 나름의 고증, 그 당시의 ‘액자’와도 같다. 그 액자 안에다가 지하철 곳곳을 누비는 카메라가 과거를 담아낸다. 물 흐르듯 유려하고 역동적인 촬영,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연출에만 그치지 않는다. 카메라가 촬영하는 대상도 주목을 끄는데, 바로 1930년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현대화된 지하철역이 포착되고 있다. 즉 과거를 포착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날의 흔적이 곳곳에서 노출된다. 한편 1930년대와 오늘날은 오롯이 뒤섞이지 않는다. 1931년으로 거슬러 내려간 배우들은 '과거의 인물', ‘다른 시간’을 소환하기 위해서 과장되고 키치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반면, 지하철역의 행인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의 행인들은 영화를 위한 행동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 현실을 위한 행동을 골똘히 옮길 뿐이다. 영화의 도입은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오늘날에 『파비안』의 1931년으로 이어지기에 과거의 작품을 오늘날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현대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최근 독일 영화계의 ‘아나크로니즘’ 물결에 올라탄 것처럼도 보인다.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트랜짓>이나 부란 쿠바니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선례처럼 말이다.      


아나크로니즘이 사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몰아닥칠 나치즘과 2차 대전을 앞둔 1930년대가 오늘날에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기우일까? 그 과거가 아직 현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음에 우린 안심해야 할까? 아니면 파비안이란 1930년대의 망령이 오늘날에 접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제 할 일을 하며 경고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명쾌한 하나의 해석으로 귀결하기엔 정보가 부족하지만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정보가 부족한 이유는 아나크로니즘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본 작품에서 두 시대가 맞물리는 것은 지하철역 외부로 나가서 파비안을 마주하는 순간과 중반부, 파비안이 꿈을 꾸는 장면에서 오늘날의 지하철역 입구가 노출될 뿐이며, 이후에는 줄곧 1930년대에 머무른다. 그래서 도입부 이후에는 1930년대만 포착되는 작품이기에 1.37:1의 화면비는 당대의 시대상을 지칭하는 양식으로 충분하겠지만, 분명 찰나라 한들 오늘날 또한 1.37:1에다가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매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본 화면비를 선택한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1.37:1의 화면비가 주는 효과, 바로 숨이 턱하고 막힐 것만 같은 답답함, 폐쇄성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원작, 본 작품 모두 다 사적인 영역이 공적으로 환원된다. 개개인의 자유가 숨 쉴 만한 자유로운 사적 시공간을, 전체의 보편성을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전체주의의 물결이 감시한다. 원전에서는 이를 '유리병에 갇힌 형국'이라 묘사한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매체로 1.37:1의 화면비는 적절하다. 1.37:1의 화면비에는 개인을 숨 막힐 듯 검열하며 조여 오는 유리병에 갇힌 1930년대가 담기고, 그 과거가 소환됨과 동시에 이와 유사한 오늘날을 끼워낸다. 화면비와 더불어 본 작품은 슈퍼 8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흐릿하고 고즈넉하며 아스라한 슈퍼 8mm 필름은 빛이 바랜 과거, 혼탁한 기억의 속성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또 당시에 16mm 필름이나 35mm 필름보다 훨씬 값싸게 선택할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런데 8mm 필름이 오직 시간성에만 상응하는 매체는 아닌 것 같다. 8mm 필름의 거친 질감, 자글거리는 그레인은 매체의 물질적인 감촉을 부각한다. 이는 자극적인 육체적인 쾌락만을 위해 일회적인 만남이 주를 이루는 영화의 도입부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또 8mm 필름은 물질성을 구현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육체적 쾌락만을 갈구하다가 정신과 자아가 흐려지는 상황을 혼탁하고 불명확하게, 잠시 머물다 사라져 커다란 공허와 상실만 남기는 쾌락의 뒷맛을 불완전한 특징으로 가시화한다. 영화는 8mm 필름으로 촬영된 시퀀스 곳곳에, 당대의 흑백 푸티지를 인서트한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아카이빙 푸티지가 특징인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마틴 에덴>이 떠오르며, 본 작품과 <마틴 에덴> 양자를 모두 국내에 배급하는 알토미디어의 취향도 엿보인다.(안타깝게도 배급사 대표님의 우환으로 <파비엔>은 국내 배급이 어려워질 듯싶다. 그간 유수의 작품을 소개해주신 알토미디어 대표님이 기적 같이 병마를 털어내실 수 있길 본 글을 빌어 기도한다) 본 푸티지의 역할은 화면비나 필름과 마찬가지로 시대성이랴. 그라프는 도입부에 오늘날의 풍광을 비춤으로써, 과거를 소환하는 토대가 현대라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오늘날에 간접적으로 재현되기에 불완전한 1930년대의 풍경, 그 불완전함을 극복하여 당대에 더욱 밀착하고자 단단한 다큐멘터리 푸티지를 흩날리는 픽션에 덧대는 것이랴. 또 인서트는 외부 푸티지가 침투하는 것이다. 분명 오늘날과 1930년대는 공존하면서도 분리되어 있다. 롱테이크로 포착된 하나의 숏엔 동시대와 1930년대 분명 둘 다 내재한다. 1930년대의 파비안이 오늘날과 접경한 지하철역에서 얼굴이 함몰된 사람과 만나는 꿈을 꾸듯 말이다. 이와 동시에 오늘날이 지하철역 내부라면 1930년대는 외부로서 양 차원은 분리되고, 인서트 또한 오늘날과 별 다를 바 없는 영화 속 베를린의 풍경을, 과거라는 것이 자명한 이질적이고 거친 푸티지로 분리한다. 또 푸티지의 거칠고 조야한 물질성에 비해 오늘날의 진보한 물질성은 윤기가 좔좔 흐르지만, 9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전 없는 정신성은 하나의 테이크에 공존한다.      


즉 시대는 구분이 되지만, 그 시대의 질적 차이는 구분되지 않는다. 물질만 진보했을 뿐, 정신성은 퇴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나크로니즘과 아카이빙 푸티지를 사용하는 것이랴.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본 작품은 나레이션이 이따금 사용된다. 누군지 짐작할 수 없는, 영화 외부에 있는 중년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간혹 울려 퍼진다. 무질서하게 가끔씩 튀어나오는 나레이션의 역할과 목적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이는데, 이를 유추하게 해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파비안은 현실을 보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가 수첩에 적는 글자를 나레이터가 따라 읽는다. 그가 종이에 옮겨 적는 부랑자 친구, 스테판은 그에게서 사라지고, 또 수첩의 주인인 파비안 조차 결말에서 사망한다. 심지어 과거를 기록한 서적들이 영화 결말에서 나치에 의해 집단적으로 방화되며 소실되지 않던가. 그렇게 현실은 일순간 머물렀다가 상실되지만 특정 순간의 현실을 옮기고 보존한 그의 수첩은 생존하고, 그 수첩을 나레이터가 읽으며 특정 순간을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온다.’ 오늘날에 놓인 카메라가 과거로의 향함, 영화 바깥의 나레이터가 과거의 내부를 해설하는 형식은 유한한 시공간을 무한하게 초탈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당연시된 오늘날에 당연하지 않은 자극과 인식을 제공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외에 영화의 형식으론 쾌락을 추구하는 와중 급박하게 흔들리는 육체, 헐떡이는 호흡을 반영한 핸드 헬드, 이후 코넬리아를 만나며 정서가 안정적으로 변화함을 반영한 온건한 촬영을 꼽을 수 있다. 핸드 헬드는 인물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당대의 급박한 정치 또한 반영한다. 또 인물들의 시야를 구현한 아주 거친 시점 숏과 즉흥적이고 산만한 일상적 구도, 거리감을 꼽을 수 있다. 현실을 담은 푸티지 인서트와 더불어 당대의 인물들이 가졌을 법한 시야와 구도를 구현하며 현실에 찰싹 다가선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보자. 원전에서도 주된 화두는 성(性)이었고,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1931년으로 향한 영화는 밤을 포착한다. 파비안은 거리를 전전하며 어느 클럽으로 향한다.      


이윽고 이렌느라는 중년 여성을 만난다. 파비안은 성에 아주 능동적인 이렌느에게 이끌려 그녀의 자택으로 향한다. 이후 도착하니 이렌느의 남편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고, 파비안에게 계약서를 들이민다. 남편은 이렌느의 넘치는 정력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으니, 돈을 받고서라도 그녀의 육욕을 파비안이 해결해달라는 것이다. 철학자 바타이유에 의한다면 성은 이성적으로 따지고 계산한다면 무수한 에너지가 낭비되고, 또 맹목적인 ‘낭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을 따르는 인간은 법과 이성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누린다. 이런 관점에서 파비안은 이렌느에게 이끌리며 이성적인 인간의 상태에서 동물적인 인간으로의 해방을 노렸다. 그런데 이성의 해방을 의도하다가 다시 이성에 붙잡힌 상황이다. 이러한 본 장면은 빛이 차단된 단조로운 연극무대처럼 펼쳐진다. 무대 같은 공간에 서서 계약서대로 행동해야 하는 인간은, 흡사 무대 위에서 배역과 대사를 단조롭게 줄줄 읊는 배우와도 같다. 그래서 자유롭기는커녕 어두컴컴하고도 암담한 제약이 가시화되는데, 이는 이성, 작위성이 개입하며 변질된 성을 가시화하는 장치라고 말할 수 있으랴. 한편 또 다른 관점으론, 우리가 성에 대해 갖는 환상은 ‘속세 이탈’이다. 우리의 기존 상태를 넘어서서 불가능하거나 고양된 경험을 꿈꾼다. 그래서 성은 현실의 관객석에서 우두커니 지켜볼 수만 있는 ‘무대로의 초월’이다. 그 어두운 무대에서 많은 디테일들이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추상적인 상태이기에 우리는 환상에 관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다. 즉 무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거기는 환상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어두운 무대처럼 이후에도 영화 속 환상의 시간으로서 ‘밤’이 잦다. 밤의 어둠을 고찰하기 위해서 작품 속 낮을 먼저 살펴보자. 낮은 일상의 모든 세부를 밝힌다.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그것을 규명하고자 상상하고 그려보며 호기심을 품지만, 익히 다 드러나면 심심해지는 법이다. 또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 대상을 규정해보려 하지만, 반면 밝혀져서 보이는 것들은 우리를 둘러싸서 행동이나 목적을 강제한다.     

 

그래서 영화 속 낮에 인물들은 노동하고자 고군분투하고, 편집장의 흉터를 치료해주기 싫어도 보이는 이상 치료해 줘야한다. 낮에 드러난 공간에서 인간은 보이는 것에 지배되지만, 밤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어둠 속에 은닉되고, 그렇게 추상적인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무언가를 그려본다. 그런데 이러한 어둠·무대에 계약서가 들이밀어진 것이다. 속세에서 멀어지고자 한 환상은 다시 세속으로 추락한다. 이후 셋방으로 돌아온 파비안, 그는 아침에 신문을 읽는다. 신문에는 어느 한 미성년자 소녀가 범죄자들과 결탁하여 남자들을 유혹하고 강도 및 살해했다는 소식이 담겨있다. 이렌느와 교제해야 한다는 의무, 성에 얽힌 계약에 의해 환상에서 추락한 파비안은 또 다시 환상으로서의 성이 속된 경제로 추락한 현장을 목도한다. 원전에서도 낙담하는 파비안,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파비안은 다시 일어서서 스테판과 대학교로 향하는데, 거기서 신화 속 여신들을 조각해놓은 ‘부조’가 눈에 띈다. 이를 바라보는 파비안은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다시 속세 너머의 여성과 환상을 갈망하는 것이랴. 그런데 이러한 환상은 자기 폐쇄적이다. 내가 꿈꾸는 환상은 오직 나 자신만 알고, 이를 모르는 상대방에게 무리하게 강요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 또 이렌느의 남편이 파비안에게 계약서를 들이민 순간에도, 이렌느는 수음하며 자신만의 정욕에 갇혀 있었다. 환상은 자기만의 만족이다. 이후 또 다시 클럽으로 향하는 파비안과 스테판, 거기서 영화는 분할 스크린이 활용된다. 베르트랑 보넬로의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이나 자크 오디아르가 <파리, 13구>에서 시도한 연출, 유리되어 있는 타자, 표상을 이어내는 기법,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방금 나열한 작품들은 화면비가 평균적이거나 넓은 편이지만, 본 작품은 좁은 1.37:1이다. 안 그래도 좁은 화면에서 두 개, 세 개, 네 개 가량으로 분할되는 숏에 담긴 대상들은 더더욱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된다. 심지어 분할된 숏들은 줌아웃으로 더 쪼그라들어, 세분화된 화면들보다 검은 화면이 더 크고 많게 느껴진다.   


이러한 분할 스크린으로 포착하는 대상은 클럽에서 각자의 환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다. 고립된 사람들을 분할 스크린으로 이어내지만, 결코 서로 이어질 수 없을 거란 듯이 줌아웃으로 멀어지고 서로에게 아득해진다. 즉 일반적인 분할 스크린은 유리되어 있는 타인과 표상을 효과적으로 이어낼 수 있지만, 본 작품은 그러한 본래의 역할을 비틀고 산만하게 만들어 반대로 ‘결코 이어질 수 없음’을 가시화한다. 그렇게 빠져든 각자만의 환상은 마냥 달콤하지 않다. 나만의 환상에 필요한 폭력에 의해서 다시 불쾌해지고, 결국 고통스러운 현실로 추락한다. 무대에서 시를 낭송하는 폴 뮐러는 관객들의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지루한 시 낭송을 그만두길 바라므로 그에게 각설탕을 던지고, 속세를 초월하여 관념에 놓이길 희망하던 폴 뮐러는 물질을 맞고 지상으로 추락한다. 이후 환상이 좌절된 그는 이젠 다른 환상을 간접적으로 충족하고자 어느 한 여성 관객을 폭행한다. 여성에게 물리적인 힘이 엄습한다. 그렇게 각자가 공유하거나 합의하지 않은 쾌락을 위해 상대를 해하는 환상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폭력이 판을 치는 현실을 자아낸다. 앞서 포착된 부조 또한 처음에는 파비안이 계속 환상을 만들어나갈 것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읽혔지만, 나치즘이 창궐한 이후 재차 포착됐을 때는 상반되게 다가온다. 히틀러가 선호하는 고전 미술을 현재로 돌려놓을 거라는 듯이, 세속은 미래로 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로 퇴행할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는 나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치에 찬동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파비안의 환상이 미래를 지향한다면, 다른 이들의 쾌락은 반동적이다. 이미 지나간 속세를 되풀이한다. 이에 가담하지 않고 파비안은 코넬리아와 만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으로 전락한 성, 세속적인 성을 초탈한다. 합리적인 사고로는 낭비에 가까운 '선물'을 코넬리아에게 어떠한 이익도 바라지 않고 건넨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의 순수한 ‘마음’은 본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다.      


코넬리아와 만나기 이전, 그는 이렌느에 의한 도구, 자신의 성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장치로 전락했다. 있는 그대로의 파비안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불안에 벌벌 떨었다. 이렌느에게 흥분과 자극을 주면 버려져 어둠에 파묻혀도 아무 상관없을 그런 얼굴이었다. 코넬리아도 섹스 후의 무력감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 소용없는 것들이 노곤하고 권태롭다. 그런데 소용없는 서로는 시대 속에서 자신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간 무용했던 솔직함이 더 이상 무용하지 않음에 이들의 얼굴은 어둠에 파묻히지 않는다. 파비안과 코넬리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타인이 지배하고, 이데올로기의 수단과 목적이 된 성으로부터, 내게서 발원한 솔직한 성을 회복하고, 상대도 이를 긍정한다. 사실 파비안은 코넬리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그녀는 추상적으로 상상하던 환상이었다. 상상의 대상이 알고 봤더니, 그의 옆방에 살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레코드를 틀어놓던 여성, 파비안이 그저 뇌리로만 그려보던 여성이 바로 코넬리아로서 현실이었다. 파비안은 환상과 코넬리아가 일치하여 사랑한 것일까, 환상을 갖지 않았더라면 과연 사랑했을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비안은 환상을 위해서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고, 현실 속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긍정한다. 자기 폐쇄적인 욕망과 환락에 갇힌 인물들을 포착한 분할 스크린은 연결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분할에 더 가까웠다. 안 그래도 동떨어진 서로는 자기 폐쇄적인 표상에 파고들며 더더욱 분할, 이후 고립되었다. 그러나 환상적인 대상의 모든 것을 열렬히 존중하며, 자기 폐쇄적인 환상은 외부로 확장된다. 자기 폐쇄적이어서 도무지 극복되지 않던 끝없는 외로움은 비로소 서로의 정서까지도 열렬히 어루만지는 실질적인 정사로 해소된다. 그렇게 개인으로서 서로를 허락하는 파비안과 코넬리아, 서로 안에서는 보존되는 연인들의 진실, 그러나 이와 달리 당대의 사회, 국가는 개인의 진실을 허락하지 않는다.      


코넬리아와 보냈던 즐거운 밤은 지나고, 파비안은 출근한다. 이후 어느 한 동료가 파비안의 아이디어를 훔쳐갔다. 그렇게 파비안은 '나'를 빼앗겼는데, 언론사에서 그의 예술성은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해고하고, 봉급조차도 기업의 규정을 내세워 후려쳐서 지불한다. 자신의 정당한 가치를 잃고, 심지어 내가 놓이고 싶은 장소에서 추방당한 그는, 이후 국가한테서 버림받아 변변찮은 삶을 이어가는 퇴역군인들과 함께 재취업하고자 줄을 선다. 국가는 파비안만의 특유한 삶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법에 따라 천편일률적인 줄에 세운다. 당대 사회의 획일화된 일반성에서 벗어난 이들을 모조리 홀로코스트하는 야만은 이렇게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 파비안은 코넬리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매우 즐겁다. 이들과 함께 놓여서 춤을 추는 그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느린 연출에 포장된다. 비로소 이들은 개인임을 평화롭게 회복한 것이요, 또 무목적하게 춤을 추는 그들은 유용하게 빨라야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자유롭다. 하지만 식당에서 코넬리아가 영화 프로듀서와 만난다. 이후 파비안, 어머니, 코넬리아의 무용하지만 다만 즐겁던 사적인 대화는 '무성 영화'로 처리되어 그 청각을 허락하지 않고, 오직 보이고 매개될 수 있는 것은 영화 프로듀서 및 관계자들과의 공적이고도 유용한 대화다. 그 와중에 사회적으로 지위가 없는 파비안의 어머니는 소외된다. 출세하고자 유용한 대화에 합세하는 코넬리아와 달리, 사적인 것과 개인을 중시하는 파비안은 어머니에게 향한다. 그렇게 코넬리아에게 동참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밤에 유유자적 산책하는 파비안, 그들의 느긋한 시간을 나치 야간 경비대원들이 방해한다. 그 전에도 식당에서 나치가 사람들을 체포해가는 만행이 목격되었다. 나치는 유용하지 않은 느긋함, 휴식 등을 허용치 않는다. 이렌느는 파비안에게 돈을 줄 테니 제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녀 밑에는 빈곤한 청년들이 이미 많은데, 자본주의에선 돈으로 사람을 소유하는 유용한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걸까? 스테판과 함께한 매춘부가 사디스트에게 폭행을 당하고도, 의사는 부르지만 경찰은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돈에 의한 지배가 마땅한 법일까?     


유용한 돈을 사람들에게 지불한다면 머물게 만들 수 있지만, 어떤 소득도 없는 수사를 위해선 사람들을 묶어놓을 수 없다. 매춘부들은 경찰이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스테판이 자살한 현장에 더는 머물지 않겠다고 고함을 고래고래 지른다. 고객들에게 유용한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하던 매춘부들은 결국 스테판의 죽음조차도 수용자에게 유용한 요깃거리로 전락시킨다. 쾌락과 유용함이 보편이 된 사회에서, 소득 없이 타인을 배려하며 공존하는 인간성은 비보편으로 전락한다. 스테판의 자살 또한 마찬가지다. 유용성을 판가름하는 정치적 당파성이 개입했다. 그의 논문은 파비안과 교수의 눈에서 매우 독창적으로 평가될 정도로 학문적인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웨커런이란 작자가 교수의 명의를 도용하여 스테판을 좌절시켰다. 정치적으로 스테판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나치즘에 이득이 없다는 이유로 진실한 연구는 폄하되고 그는 내몰렸다. 즉 당대에 나치즘에 소득이 되지 않는 이들은 사회에서 내몰린다. 앞서 부랑자가 부르주아지들만 모인 식당에 출입할 수 없는 것도 이와 연관되리. 보편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서명을 위조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처벌당하지 않는다. 경찰보다 돈과 이득, 법보다 보편성이 우선한다. 그럼에도 파비안은 경제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가치와 개인성을 지향한다. 술집 웨이터가 ‘가지 마라’고 해도 가야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스테판의 죽음 이후 드레스덴의 집으로 갔을 땐 부모님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코넬리아와 만날 수 있는 사적인 장소를 구축한다. 물론 이러한 장소는 쉽게 적발당하거나 매우 좁다랗다. 부모님이 항시 드나들거나, 코넬리아와 함께한 차안에서는 음악을 크게 틀어 그들을 도청하는 기사의 귀를 막아야 하며, 허용되는 공간이란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본인들조차 잘 안 보이는 어두운 클럽이나 좁다란 전화 부스 등에 그친다. 그마저도 감시하는 사람들이 따라다닌다. 그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지만, 그런데도 타협하지 않는 꿈을 꾼다. 그의 꿈에선 얼굴이 함몰된 전우가 전쟁을 규탄한다. 또 꿈에서 두 연인은 앙상해진다.      


즉 진실을 거짓으로 대체하는 현실과 달리, 꿈에선 진실을 현시한다. 그래서 꿈꾸는 파비안처럼 코넬리아도 꿈에 참여한다. 바로 영화라는 꿈에 말이다. 그러나 항시 제 눈과 마음, 통찰을 포기하지 않는 파비안의 진실한 꿈과 달리, 코넬리아는 가짜 세트장에서 반유대주의와 나치즘에 일조하는 꿈을 꾼다.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쾌락의 환상에 가담한다. 이에 침잠하지 않는 파비안은 허위의 출구로 항시 빠져나간다. 출세를 원했던 코넬리아는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가담해 권세를 누리고 잡지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큼 자기소외를 느끼고, 그녀가 어떤 상태든 지지해준 파비안이 그리워진다. 파비안도 잡지 속으로 사라진 그녀, 솔직함과 순수함이 환상으로 전락해 버린 그녀와 재회하고 싶다. 그래서 이들은 만남을 약속한다. 하지만 강물에 빠진 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파비안이 물에 뛰어든다. 스테판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수영을 못하는 본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희망, 하지만 맥주병인 파비안은 가라앉아 익사하고 코넬리아의 만남은 영영 불발된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바꾸려는 희망이 세상을 바꾼다. 소년을 다이빙하게 만들었던 친구들은 파비안이 위험에 처하자 그를 구하려 고군분투 한다. 이전의 소년들과 마을사람들의 냉소와 대비를 이루며 말이다. 또 나치가 온갖 서적을 불태우는 와중에 스테판의 수첩은 살아남은 소년의 손에 들어간다. 그렇게 파비안은 개인과 진실이 보존되는 희망을 본다.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에게 희망이란 마냥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결여를 극복하고자 현실 너머에다가 목표를 상정하고 이를 위해 행동을 옮기는 구체적인 행위다. 현실의 문제, 전체주의와 자본주의, 이기적인 쾌락과 남을 돕지 않는 시대로부터, 파비안은 남을 돕고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며, 돈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시켜 누군가를 돕는 희망을 실현한다. 물론 그 희망은 좌절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가 잉태한 희망을 소년들이 이어간다면, 그렇게 그의 이상이 점점 더 구체화된다면 현실은 그의 목표에 다가서리. 다만 그라프는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못한 희망을 비관한다. 비참한 과거는 오늘날과 유사성을 공유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오늘날과 접경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이렇게 오늘날과 과거를 이어내는 그라프는 당대의 매체를 충실하게 구현한 실험적인 연출로 『파비안』을 영상화한다. 이러한 형식과 함께, 최근 과거를 다루는 독일 영화들의 길고 긴 러닝타임을 짚어볼 수 있다. 그라프의 <연인들>도 국내 판본은 120분이었지만 국제 버전은 180분이었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가 미상>, 앞서 언급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도 3시간을 훌쩍 넘는데, 현재와 다른 시간에 몰입하기 위해 이정도의 긴 호흡은 필요하다고 독일의 시네아스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한편 연출의 실험이 초반부에만 집약되어 긴 러닝타임을 살리지 못한 점, 다양한 연출이 다만 현란하기만 할 뿐 명쾌한 합목적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이 본 극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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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19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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