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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3. 2023

클레어 드니, <정오의 별>

식민주의의 알레고리

클레어 드니(Claire Denis), <정오의 별>(Stars at Noon) - 식민주의의 알레고리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4

“다른 사람들의 노고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는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한가하고 잘못된 짓이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존 맥스웰 쿳시-

후기식민주의 및 탈식민주의 담론은 식민주의가 식민지에 어떤 여파를 남겼는지, 또 21세기 새로운 열강들의 식민주의는 어떤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원주민의 시선에서 조명한다. 이로써 정치인, 군인, 식자의 시선에서 비서구를 마음대로 규정하던 백인 남성이 집필한 오리엔탈리즘, 식민사관을 극복한다. 그런데 후기식민주의 담론은 항상 원주민에 의해서만 전개되진 않았다. 원주민은 아닌, 그렇다고 해서 서구 백인도 아닌, 혼종적인 백인도 후기식민주의 담론을 이끄는 주체다. 나딘 고디머, 존 맥스웰 쿳시가 이에 대표적인 작가다. 나딘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은 작가가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낸 자전적 경험을 담아낸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이전부터 백인이 흑인을 규정하는 선입견, 젊은 백인들은 대학교에 가서 평등한 인종의식을 갖추지만 이를 관철시키는 현실의 괴리, 경제적 격차가 만들어낸 교육의 질과 환경, 흑인에게 온건하게 대하려하는 태도가 은연중에 우월의식으로 비춰지는 등 반성하는 백인이 담겨있다. 『보호주의자』에서도 마찬가지다. 보호주의자인 백인이 보호하는 것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아프리카 내 백인이라는 우월적 지위와 권위다. 이를 위협받으면 그들은 굳이 아프리카에 머물지 않는다. 한편 백인이라는 인종 자체는 불로소득이지만, 식민지에서 나고 자란 백인들은 유럽인, 서구인, 즉 ‘1등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길 잃은 정체성, 이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백인이 보기에 이상한 흑인들의 말소리, 굉장한 식욕, 수치심 없는 행위, 싸움, 악취는 본질로 보인다. 그러나 착취를 당하는 환경에 백인이 직접 처해보니, 백인이 규정한 흑인들의 특징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닫는다. 백인은 흑인을 고문해서 원하는 자백을 받아내고, 이로써 흑인의 진실을 왜곡한다. 쿳시는 이를 욕망과 엮어 사디즘으로 진단한다. 이렇게 고디머나 쿳시의 작품에서는 머나먼 유럽에서 묘사된 아프리카를 본토에서 반박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클레어 드니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머물 수 없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백인들의 후기식민주의를 전개한다.      


1946년 파리 태생의 클레어 드니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으로, 누벨바그 이후 세대를 지칭하는 ‘신극단주의’로 묶이는 그룹의 일원이기도 하다. 브루노 뒤몽, 가스파 노에, 프랑수아 오종 등이 속한 신극단주의의 특징은 정신보다 우선하는 육체와 욕망,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인데, 드니의 카메라도 끈질기게 물질들을 추적한다. 한편 그녀의 관심은 욕망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드니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후기 식민주의적 관점’을 영화에 투영하는 작업으로도 주목받았다. 그녀의 자전적인 유년기를 반추한 장편 데뷔작인 <초콜렛>이 그렇다. 드니의 어렸을 적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플래시 포워드 구성의 <초콜렛>에선 언제나 백인이 주인이요, 흑인은 피착취자다. 백인 운전사에 의해 옮겨지고, 백인의 명령에 의해 배치되며, 백인 외지인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변두리로 몰려나고 화상을 느끼지도 못하는 '죽은 존재'가 착취당하는 흑인이다. 드니는 이를 두고 가치 판단을 할 수 없었던 유년기의 객관적인 시선을 고스란히 옮겨온다. 드니의 영화는 엄격한 서사를 추구하지 않으며, 파편적인 기억과 시간의 흐름을 드문드문 따라간다. 드니의 대표작이자, 가장 최근에 후기식민주의 작업을 시도한 <백인의 것>도 그녀의 자전적인 계보를 이어가는 작품이다. 드니는 아프리카의 특정한 장소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전이 발발했다. 정부군과 반군이 충돌한다. 백인과 부패한 정치세력에서 해방되려는 반군과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정부군이 충돌한다. 이러한 와중에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어려서부터 농장이 그들의 땅이었던 마리아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어느 편도 아닌, 커피를 수확해야 하는 자신의 편에 설 뿐이다. 그녀는 대피하려는 주민들을 불러 모아 커피를 어떻게든 수확한다. 드니는 어느 정치 세력에도 서지 않지만, 제 이익을 위해서 아프리카 내지인들을 회유하고 고용함으로써 생존을 위협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식민주의를 고찰한다.      


서구 백인의 정신이 흑인의 몸을 규정하고 착취하는 세계, 그러나 몸과 욕망은 아무리 잠식당해도 솔직하게 꿈틀거린다. <초콜렛>에서 멀리 있는 것은 마크, 프로테이의 약혼녀요, 가까이 있는 것은 에이미와 프로테이다.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사랑해선 안 될 기혼자와 미혼자, 흑인과 백인은 애욕을 느낀다. 몸은 자연스럽게 이끌렸지만, 두 몸을 인위적으로 부대끼게 만든 장치는 ‘후기식민주의’다. 그래서 프랑스령에서 해방되어 흑인을 특유하게 규정하지 않는 땅이 된 아프리카, 이로써 눈앞에 바다가 펼쳐짐에도 대지에 발이 묶였던 프랑스는, 실로 과거의 기억에서 달아나 자유로워진다. 프랑스 내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탐구한 <35 럼 샷>에서 드니는 여전히 백인 중심적 경제원리, 공간, 이념에 의해서 규정되는 흑인의 삶을 담아낸다. 그것은 이탈할 수 없는 ‘철로’ 위의 기차와 지하철, 고객의 응대에 맞춰서 운전하는 택시와 같다. 이러한 와중에 르네라는 한 흑인 노동자가 은퇴한다. 은퇴 선물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의 전통 장식물이다. 그는 비로소 정체성을 회복한다, 백인에게서 해방된다, 하지만 해방이 아니다. 지금껏 백인에 의해서 규정된 흑인의 삶은 서구의 경제 체계를 이탈해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생존해야할지 너무나도 암담하다. 이에 백인 중심적 구조에의 의존이 극심해지는 딜레마를 고찰한다. 하지만 드니는 끝끝내 이탈을 선언한다. 고객 없는 운전, 기차나 지하철이 아닌 오토바이, 콘서트에 가려고 한 계획이 우발적으로 불발됨에 발생하는 자유를 말이다. <백인의 것>에선 내전이 발발함에, 공간이 새롭게 육체를 규정한다. 다들 전쟁에 참여하거나 피난민이 되고, 심지어 마리아의 아들도 반군에 가담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변한 환경에 안주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내지인을 고용하고, 커피 교역으로 부를 창출하던 과거를 계속 소환한다. 어려서부터 아프리카 커피 농장의 주인임이 내면화된 마리아는 아프리카의 내지인들 스스로가 주인 되고자 하는 내전에 ‘훼방 아닌 훼방’을 놓는다. 특정 정치세력에 서지 않는다고 해도, 백인들의 행동은 내지인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부군에 간접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떠나야 할 땅에 계속 머무르다가 아들이 반군이 되고, 심지어 백인에 의해 아들이 죽는 결과를 낳는다. 즉 공간을 거슬러서 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 이를 깨달은 마리아는 이제 공간을 따른다. 이렇게 공간과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드니의 작품들, 그렇다면 <정오의 별>에선 니카라과와 육신의 어떤 관계가 이어지고, 그 사이에 있는 이념은 무엇일까? 일단 본 작품에서 백인들의 정체성부터 확인해보자. 영화 속 국적을 잃어서 나풀거리는 두 주인공은 트리시와 다니엘이다. 일단 트리시, 그녀는 기자로서 미국에서 니카라과로 취재를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기자처럼 행동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기에 정체에 의구심이 들지만, 자격이 있든 없든 ‘여권’과 ‘PRESS CARD’가 기자임을 일단 보장한다. 여하간 그녀는 미국 국적의 여인이지만 자신의 '고객' 중 하나인 군인에 의해서 여권을 빼앗기고, PRESS CARD도 하필 만료된다. 그녀는 니카라과에 미국 국적의 기자로서 머물 수 없는 존재, 이와 동시에 여권을 빼앗기고 빈털터리라서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니카라과와 미국,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 백인의 특권을 좌우하는 국적, 직업, 자본이 그녀에게는 없다. 드니 자신도 마찬가지로 겪어본 피식민지의 혼종적인 백인은 ‘그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로 신작에서 이어진다. 그녀는 자신의 답답한 처지에 화가 나서, 미국 탱크가 쳐들어와서 니카라과를 짓밟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지만, 정작 미국의 고용주 내지는 후견인에게도 버림받고, 니카라과 내의 군인, 정치인 등 고객들에게도 버림당한다. 그녀는 분명 하얗다. 본 작품에서 묘사되는 니카라과는 철창이 가득한 도시이자 마을 곳곳에 군인들이 즐비해있다. 그들은 칙칙하고 어둡다. 그 가운데 트리시는 하얗고 빨간 원색으로 통통 튀어 다니지만, 그 하양은 특권이 되지 못한다. 다니엘도 마찬가지다. 다니엘은 트리시보다 더 하양에 집착한다. 단정하고도 멀끔한 하얀 양복이 다니엘의 트레이드마크다.      


영국인인 그는 왓츠 오일이라는 다국적 기업 소속이다. 니카라과에는 사업 상 방문했다. 미국이 중남미를 경제적 식민지, 속국으로 삼아가는 와중, 영국 기업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경쟁에서 다니엘은 미국 국적의 히스패닉 정보원, 유대인 요원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다. 백인이 히스패닉과 유대인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적인 히스패닉과 유대인이 백인을 막다른 길에 내몬다. 이후 버림당한 다니엘은 기업이 힘을 보장하는 법인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미국인들이 범죄자로 누명을 씌워서 강제로 도주한다. 이 둘 모두 백인이지만 사실상 백인이 아니게 된다. 분명 드니의 그간 작품들에 비한다면 백인의 설정이 조금 달라졌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 나고 자란 백인, 그럼으로써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고 자란 백인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던, 그간 드니의 백인과 다르다. 하지만 아프리카 백인이었던 드니의 시선과 경험이 여전히 투영된다. 백인의 특권이 마냥 당연하진 않았던 드니는 하얀색은 절대적이지 아니하고, 그 하양이 일반적으로 지졌던 힘의 중요함을 지적한다. 자신이 가진 하얀색은 보잘 것 없다. 트리시와 다니엘 모두 다 기자 및 컨설턴트로서 능력이 묘사되지 않는다. 이로써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다. 그 빈곤한 하양을 외적인 국적이나 자본이 숭배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하얀색은 국적이나 자본을 잃어버렸을 땐 아무것도 아니다. 즉 후천적인 특권이 역으로 피부색을 규정한다. 영화 결말에서 미국인들에게 체포된 다니엘은 항상 고수하던 하얀 양복 대신, 엷은 갈색 죄수복이 입혀진다. 여전히 피부색은 하양일지 몰라도, 하얀 특권을 말소당한 다니엘에겐 원주민의 색채인 '갈색'이라는 계급적, 인종적 색깔이 새롭게 입혀진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정오의 별>의 촬영은 두 운동을 오간다. 영화의 시작은 핸드 헬드였고, 이후 비교적 안정적인 트레블링 숏으로 카메라 워킹이 교차한다. 도입부에서 트릭시는 자신의 고객인 니카라과 고위 군인에게서 도망치는 눈치다. 이때의 경쾌한 흔들림, 또 정치나 경제에 구애받지 않은 육체가 섹스를 하며 헐떡거릴 때도 핸드 헬드를 동원한다.      


반면 스테디캠에 올라탄 카메라가 선사하는 부드럽고 온유한 촬영은 미적으로는 분명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우나, 정작 해당 촬영이 사용되는 장면은 불길하다. 안정적인 연출은 트릭시가 매춘부로 전락할 때, 남성에 의해 그녀의 육체가 소유되고 규정될 때 사용된다. 불안하면 경쾌하고 자유로운 반면, 안정적이고 아름다우면 그만한 대가를 수반한다. 백인은 백인으로서 특권을 누리는 만큼 이를 보장하는 권력에 복속되거나 자격을 갖춰야만 했다. 이렇게 드니가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는 본 작품은 미국의 소설가인 데니스 존슨이 1986년 발간한 동명의 소설을 영상화한다. 데니스 존슨의 원전은 니카라과 혁명 말기인 1984년이 배경이다. 그러나 본 작품은 2020년대임을 명시하는 코로나 이미지-마스크, 방역 수칙 알림판, 발열체크기, PCR 검사소-를 비추며 오늘날을 환기한다. 1986년을 2020년대로 옮겨오는 드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가 <트랜짓>에서 2차 대전을 오늘날로 옮겨오며 반복되는 암담한 역사를 경고한 것처럼, 1986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무엇을 ‘아나크로니즘’으로 비추는 것이리라. 니카라과 혁명이 냉전으로 간접 대치 중이던 소련과 미국의 직접적인 대리전이었듯, 이로써 열강이 거대 이념을 선교하려는 식민지화가 중남미에서 자행되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사건이듯, ‘열강의 개입’과 ‘중남미의 식민화’가 오늘날에 반복되는 역사의 무엇이다. 다만 그 열강은 오늘날에 새로운 얼굴을 갈아 끼운다. 트리시는 미국인이다. 그렇지만 미국 국적임을 증명할 수 없다. 자본이 있어야만 미국 국적의 여권을 돌려받거나, 미국으로 돌아갈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다니엘은 영국인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영국 국적은 항상 식민지에서 관리자, 대지주로 숭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 국적 자체만으론 더는 가치가 없다. 거대한 자본력을 동원하는 미국과의 싸움에서 효력을 잃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새로운 열강은 하얀색이나 서구 국적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그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가 오늘날의 식민주의라고 드니는 진단한다.      


자본은 빈곤한 사람들을 식민화한다. 국적도 돈도 없는 트리시와 다니엘은 식민제국 미국의 법, 식민지 니카라과의 법 양자 모두에 지배된다. 반면 부유한 미국인인 두 요원들은 PCR 검사를 무시하거나 니카라과의 법을 교란하는 등, 과거 식민지의 법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던 백인의 모습을 다시 소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스크나 빽빽한 방역 수칙은 코로나 펜데믹 반영임과 동시에, 법에 의한 자유/부자유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언제나 마스크나 방역 수칙에서 자유로운 패권국의 국민들, 반면 대체로 마스크를 쓰는 편인 트리시는 택시 안에서 갑갑함을 느끼다가, 이윽고 마스크를 벗고 창문을 열어 풍경을 응시한다. 그렇게 해방감을 느낀다. 후술하겠지만 트리시의 몸 또한 식민지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을 따르지 않는 식민주의자들은 과거에 식민지를 관리하던 폭군들보단 덜 폭력적이다. 요원들은 트리시와 다니엘을 숨 막히게 조여 오지만 그 방법은 피상적으론 온건하고 부드럽다. 그들은 ‘경찰’이자 ‘컨설턴트’이기 때문이다. 즉 법을 집행하고 정당하게 조언하며 식민주의의 마수를 은밀하고도 조용하게 뻗쳐온다. 식민 지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만 차이라면 이젠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으로 닥쳐온다. 외에 드니는 중남미의 축축하고도 뜨거운 기후를 조명으로 탁월하게 옮겨낸다. 백인들의 냉정하고도 이성적인 호텔에서 벗어나, 동물로서 본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뜨겁고도 정열적인 온색 미장센으로 가시화한다. 또 스콜로 인한 변덕스러운 날씨를 비유기적인 편집에 반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날씨와 식민지화의 여파일까, 니카라과에서의 삶은 우발적인데다가, 무언가가 자꾸만 침투하고 지배함에 올곧게 이어지기가 어렵다. 이러한 연출로 드니는 식민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바로 가부장적인 젠더를 빌려서 말이다. 이로써 시대와 무관하게 항상 남성에 의해서 식민지화된 여성의 몸을 함께 탐구한다. 트리시는 다니엘에게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니카라과의 주민들에겐 자신의 기원과 소속을 알리는 '존슨'이라는 성으로 불린다. 피부색과 더불어 백인 가문, 백인 남편의 권위를 빌리고 부각한다.      


외부에서 권위를 빌려와야 하는 이유는 본 작품에서 백인 여성은 백색 특권을, 그것을 좌우하는 자본을 주체적으로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경쾌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던 트리시는 어느 한 식당에 들어간다. 하지만 거기에 군인이 들이 닥친다. 매춘부인 트리시의 고객이다. 후다닥 화장실로 숨은 그녀는 그와 강제로 섹스를 해야 하는 운명에 눈물을 흘리지만, 이윽고 눈물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군인이 그녀에게 기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와 섹스한다. 군인은 섹스 중에는 "날 쳐다봐"라고, 섹스가 끝난 뒤에는 "살을 더 빼지 말라고" 그녀의 눈과 몸을 강제로 규정한다. 그가 그녀에게 강압적일 수 있는 이유는 PRESS CARD를 관리하고 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식민제국-남성은 식민지-여성의 몸을 규정하고, 목숨도 쥐고 흔든다. 식민지-여성은 국적이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제국-남성에게 의존한다. 영화 결말에서야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여권을 돌려받지만, 이조차도 국적의 힘이나 다른 남성에게 의존한 결과다. 군인과 매춘을 한 이후 택시를 타고 호텔에 가지만, 남성 기사는 그녀가 요구하는 길로 들지 않는다, 남성이 바라는 길로 여성은 인도된다. 이후 호텔에서 다니엘과 에로틱한 관계로 발전한다. 다니엘은 영국에 부인이 있고, 결혼 생활을 깨트릴 생각은 없다. 트리시와의 만남은 단지 재미를 보기 위함이다. 그녀의 몸은 남성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서 식민지다. 이와 관련하여 트리시와 다니엘이 성 관계 하는 시퀀스의 리버스 숏에 주목할법하다. 다니엘이 담긴 숏에는 오직 다니엘 혼자 놓인다. 그러나 트리시가 담긴 숏에는 다니엘의 등, 어깨의 일부가 작게나마 걸쳐져 있다. 당시 경제력이 있던 다니엘은 홀로 있을 수 있지만, 이와 달리 트리시는 그의 지위나 경제력에 기대거나 걸쳐야만 한다, 혼자 있을 수 없다. 물론 트리시는 매춘으로 남성에게서 돈을 뜯어낸다. 그러나 뜯어낸 돈을 향해 다시 남성의 손아귀가 뻗쳐온다, 식민제국은 식민지에 지불한 돈을 다시 징수할 제도 또한 갖추고 있다.      


니카라과 군인이 트리시의 여권을 관리하고 있음에 그녀는 행동이나 거주가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니카라과에 머물고자 남성 공무원에게 번 돈의 적지 않은 일부를 뇌물로 쥐어준다. 또 여권 없이는 자신이 번 ‘코르도바’를 외화로 환전할 수 없는데, 그 여권을 남성이 쥐고 있다. 여성이 가진 돈은 남성이 좌우한다. 즉 남성에게서 여성은 돈을 받지만, 남성은 그 돈을 다시 징수하기 위해서 여권과 법을 이용하여 협박한다. 식민제국-남성은 식민지-여성에게 나름 합당한 돈을 쥐어주지만, 그 돈을 다시금 수탈하는 제도를 음흉하게 이중적으로 작동시킨다. 식민제국-남성은 식민지-여성을 이용하여 성적 쾌락도 누리고 지불한 돈까지 돌려받으며, 심지어 돈을 더 번다. 식민제국이 식민지에게 합당한 보수를 지급했다는 것은 허상이다. 심지어 형식적인 법조차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들에게 섹스를 대가로 법처럼 약속한다. 그러나 쾌락을 누린 남성들은 섹스 직후에는 고개를 휙 돌리고 냉대한다. 트리시는 자신을 니카라과로 보내준 고용인 내지는 후견인과 영상 통화하며 돈을 부탁하지만, 그는 매몰차게 그녀의 요구를 거절한다. 미국인이었던, 식민지가 아니라 식민제국의 위치였던 트리시는 남성에 의해서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후 니카라과에서 트리시는 자신과 나이차가 현저히 많이 나는 늙다리 정치인과 교제하지만, 그는 선거 때문에 바쁘다며 그녀의 부탁을 계속 미룬다. 트리시는 코스타리카에서 기사를 쓰겠다고 미국 고용인에게 장소를 옮겨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기자로서 요청은 거부되고, 그녀를 기자이게 만들어주는 PRESS CARD는 만료된다. 기자로서 그녀는 남성에 의해서 불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남성이 착취하며 즐긴 것에 따른 약속을 유예함에, 여성은 식민지처럼 항상 가난하다. 국적, 기자로서의 지위, 자본 등 약속한 모든 것을 남성들이 앗아가 그녀들은 오직 앙상한 몸만 남는다. 모든 것이 수탈당해 황량해진 식민지처럼. 식민제국-남성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빈곤하고 의존적인 매춘부 내지는 식민지 외의 여성은 바라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트리시의 성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녀를 소유한 군인이 언제나 따라붙고, 그녀의 방문을 쿵쿵 두드리는 등, 그녀의 성은 남성에 의해 좌우된다. 또 호텔에서 다니엘은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다니엘이 머무는 호사스러운 호텔은 높다. 그러나 트리시가 머무는 낙후되고 너절한 마을의 지대는 낮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내려다봄, 심지어 동일하게 낮은 곳에 살고 있더라도 남성은 여성을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 여성들을 향해 평가하듯 불쾌한 추파를 던진다. 드니가 그간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을 고찰했듯, 남성들이 지배하는 땅, 구조에서 여성은 자유로울 수 없다. 또 똑같은 백인임에도 발생하는 차등은 드니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다. 백인 남성이 식민제국 백인이라면, 백인 여성은 식민지의 백인이다. 식민지의 백인은 식민제국의 백인과 똑같은 위치에 서있을 수 있는 동일한 백색이 아니었거니와, 식민제국 백인이 짊어져야 할 몫을 식민지의 백인이 대신 짊어졌다. 그런데 트리시는 다니엘을 마냥 경제적 의존 대상, 고객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분명 둘의 관계를 경제적으로 묶고 위계를 설정한다. 하지만 트리시는 다니엘에게 순일한 연모를 품는다. 섹스 중에 군인을 쳐다보지 않은 것과 달리, 그녀는 다니엘을 반듯하게 응시하며 마음을 내비친다. 섹스 이후 다니엘은 깨어있고 트리시는 잠들어있다. 다니엘이 트리시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트리시는 잠든 것이 아니라 잠든 척을 하고 있다. 그녀는 눈을 힐끗 뜨며 그가 자신을 바라보게끔 의도, 즉 그녀가 그를 만들어낸다. 이후 호텔에 재방문했을 때도 다니엘 주변을 맴돌고 그를 은밀하게 쳐다보며, 그가 그녀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매춘부는 그간 남성에 의해 간택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트리시는 자신을 매춘부, 식민지로 규정하는 일반화에서 벗어나 본능을 따르며 다니엘을 바라본다. 드니는 식민주의에 규정당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의 회복에서 자유를 엿본다.      


그것 또한 공간에 따른 결과다. 일관적이고 이성적인 서구의 공간성과 달리, 비일관적인 스콜과 기후, 피부를 끈적거리게 만드는 높은 습도와 더위에 의해서 ‘충동적인 몸’이 깨어난다. 하지만 그 몸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트리시는 코스타리카 비밀경찰인 '오히호타'가 다니엘을 미행하는 것 같다고 알려준다. 이때 다니엘은 안정적인 경제력이나 권력을 갖춘 군인이자 정치인인 남성들과 달리 유약한 상태다. 그런데도 트리시는 그의 외부 조건을 신경 쓰지 않고 제 마음만을 따라서 사랑하는 상대와 동행한다. 빈자를 더 유약하게 식민화하지 않고, 대신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간 남성들에 의해서 인도되던 그녀가 역으로 그를 인도한다. 하지만 식민제국-남성처럼 파멸로 인도하지 않는다. 상대를 지키기 위해서 ‘은신처’로 인도한다. 오히호타로 오인된 미국인 요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택시 기사와 함정을 짜고, 시장으로 숨어드는 것을 트리시가 주도한다. 그녀가 식민제국에 대적하는 힘은 다니엘을 순수하게 연모하는 마음, 바로 식민주의에 지배당하지 않는 ‘순일한 감정’에서 비롯한다. 이는 영화 속 대사처럼 ‘위험’하다. 다니엘과 시장 안으로 숨어드는 과정에서 ‘도축장’이 포착된다. 순수한 존재는 식민주의자의 목적에 따라 서걱서걱 썰리게 되리. 또 다니엘의 핸드폰을 대신 지녔던 택시기사가 살해되고 그의 법인카드가 정지되며, 호텔에서는 강제 퇴실당하고 구매한 차는 불탄다. 트리시도 미국인 요원에게 협박을 당한다. 매춘부로서 트리시라면 무장 해제된 다니엘과 동행하기 보단, 미국인들의 회유에 굴복하여 서류에 서명을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약속한 몫은 유예되거나 또 다시 수탈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다니엘과의 동행은 더더욱 위험하기만할 뿐 아예 이득이 없다. 그러나 이득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그녀 몸의 주권이기에, 트리시는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서 다니엘과 동행한다. 그녀는 영화 내내 독한 ‘럼’을 연거푸 들이킨다. 그렇게 비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현실에서 초현실로 이탈하며 성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니엘과 하룻밤 자고 돈만 받으면 끝인 소비적 관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또 일회적 쾌락이 아니라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감싸 안으며 진정 대상을 '사랑'하는 아내가 될 수 있길 열망한다. 트리시는 다니엘에게 항상 아내는 어땠냐고 질문하며 자신을 비교한다. 드니가 우주로 향한 <하이라이프>에서도 번식욕이나 정욕은 지상에 거세해두고 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 작품에서도 드니는 모든 이념을 무시하는 솔직한 몸의 본성을 강조하지만, 그 본성은 이전 작들에서 아프리카의 야성적인 날것의 자연, 혁명이 발발한 현실이 자극했듯, 본 극 또한 문명을 차단하는 정글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윽고 극의 후반에 ‘미국의 정보력이 미치는 땅’으로 전락하자 이들의 사랑은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서 방해받는다. 그리고 미국은 영국 남성을 식민지화, 남성 매춘부로 전락시킨다. 그간 영국 백인 남성 다니엘은 고객이자 매수자로서 식민제국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더 막대한 자본을 갖춘 미국과의 대결에서 다니엘이 패배한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 그러나 그 영국의 후광을 보증하던 자본력을 상실하자 해가 지는 나라로 전락하고, 다니엘은 백인 남성 식민지로 전락한다. 영화 후반부, 도망치는 트리시와 다니엘은 정글의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잠이 깼다. 트리시가 먼저 일어나 식당에 간 사이, 혼자 잠에서 깬 다니엘은 트리시의 소지품이 든 가방을 부여잡는다, 그녀의 몸이 아니라 사물을. 이제 다니엘은 자신이 즐겁기 위해서 그녀의 몸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트리시에게 보호받기 위해서, 그녀가 가진 일말의 힘을 보장하는 사물에 기댄다. 이후 미국에서 파견된 컨설턴트와 대화를 나누는 트리시를 식당에서 찾았다. 그 과정에서 다니엘은 ‘발언권’이 없다. 트리시가 대신 말한다. 매춘부 상태의 트리시가 식민주의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던 것처럼, 다니엘도 미국의 자본이 만들어놓은 덫에 걸려 남성 매춘부로 전락한다.      


미국인이 쳐놓은 덫은 다음과 같다. 다니엘과 트리시의 타이어를 펑크 내어 그들이 타이어를 파는 밀입국 딜러들에게 접근하게 만들기, 그 과정에서 다니엘의 흰 양복을 벗기고 대신 ‘검은 옷’을 입히기, 이후 군인들이 급습하여 트리시와 다니엘을 몰아서 체포하기… 매춘부로 전락한 다니엘, 매춘부임을 지양하지만 그렇다고 남성 고객과 같은 지위나 경제력을 얻지 못한 트리시는 농락당하며, 그렇게 우리의 솔직한 본성은 지배당하며 무기력해진다. 트리시의 마음이 다니엘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면, 정치와 경제가 트리시와 다니엘에게 강제 이별을 선고하고, 트리시가 다니엘을 넘기게끔 서류에 서명시킨다. 영화 제목인 '정오의 별'은 앞서 언급한 존슨의 동명 소설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틴더스틱스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해당 노래 가사에서 정오의 별은 서로의 꿈을 공유하는 특별한 연인들이 함께 있을 때 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영화에선 식민주의로 묶이지 않은, ‘순수하게 결합한 두 연인의 사랑’이다. 제 마음이 가리키는 순수한 사랑을 식민제국이 뚫어놓은 길 대신 따라감에, 식민지는 자신의 마음을 ‘주권’으로 삼아 독립한다. 또 식민지를 사랑으로 보듬어 착취하지 아니하고 구원으로 이끈다. 

다만 드니는 오늘날의 순수한 사랑이 경제, 정치에 의해 찢어발겨지기에 찰나적이고 비일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단한다. 그리고 1984년을 배경으로 하는 원전을 2020년대로 옮겨오며, 여전히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젠더론, 오늘날에도 여전한 자본주의라는 열강의 식민화를 고찰한다. 또 유럽 본토의 백인들로부터 차별당하는 아프리카계 백인이었던 드니는, ‘순수한 백인’들의 특권을 만들어냈던 정치와 경제를 고찰한다. 이로써 여성, 유색인종을 뛰어 넘어서 ‘빈곤’이라는 조건으로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더 치밀해지고 교활해진 자본에 의한 식민화를 경고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이를 극복할 '정오의 별'이 아득하고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내면에 남아 있다. 일반적인 백인에게선 볼 수 없는 흥미로운 관점과 탐구, 다만 긴 러닝타임에 비해서 담론이 그리 깊지만은 않다. 또 밀입국 과정에서의 김빠지는 급습에서도 느껴지듯, 위태로운 사랑의 짜릿한 감각을 논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연출에서의 감각성이 특출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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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428 전주국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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