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ul 17. 2023

베르트랑 만디코, <애프터 블루(더티 파라다이스)>

지구와의 불일치, 타인과의 불일치

베르트랑 만디코(Bertrand Mandico), <애프터 블루(더티 파라다이스)> 

(After Blue (Dirty Paradise)) - 지구와의 불일치, 타인과의 불일치     

“오직 황금과 보석뿐만 아니라 이처럼 고귀한 술의 정수까지도 어둡고 두려운 곳에 숨겨져 있답니다. 현자는 이런 곳을 끈기 있게 찾아보는 것이지요. 밝은 낮에 인식한다는 건 어린애 장난 같은 것, 신비로운 건 어둠 속에 깃들여 있는 법이오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995년 4명의 덴마크 감독들이 선언문을 발표한다. 그 이름은 도그마 95, 세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촬영과 로케이션의 일치, 소품과 세트 금지, 음향과 시각의 일치, 핸드 헬드와 컬러 필름의 사용, 인위적 효과와 조작의 금지, 후반부에 '순결의 서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처럼, 도그마 95는 현실을 왜곡 없이 순수하게 담으려는 리얼리즘 선언이다. 그리고 2018년 이와 정반대의 선언이 발표된다. 그것은 바로 국제 불일치 선언문(International Incoherence Manifesto)으로 ‘베르트랑 만디코’, ‘카트린 올라프스토디르’ 등이 참여했고, 이를 지향하는 시네아스트로는 ‘얀 곤잘레스’가 유명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는 각본을 의도적으로 벗어나야 하며, 사운드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 영화가 어디서 촬영되고 있는지 시공간은 불명확해야 하며, 의도적으로 촬영의 소품, 세트장을 형성해야 하고, 디지털 시대인 작금에 영화는 반대로 필름을 선택하라. 또 하나의 장르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서사를 추구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불일치 선언은 필름을 의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경제, 효율의 원리에서 벗어난 예술의 독립성을 회복하고, 또 현실의 특정한 시공간과 그것이 제공하는 재료를 거부하며 예술 고유의 시공간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이다. 더욱이 각본, 서사에서 벗어나 문학에 종속되지 않은 영화를 추구하며, 카메라로부터 특수효과를 만들어내는 강령도 카메라로 촬영되는, 오직 영화만 할 수 있는 역할을 탐구한다. 이러한 그들의 선언은 오직 영화다운 것을 발굴해내고자 하는, 이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현실에 얽매여있어야 하는 관계를 최대한 거부하는, 21세기에 되살아난 모더니즘 운동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선언을 따라서 제작된 영화는 흡사 음악적이다. 음악이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고, 재현하지 않으며 고유한 추상성을 선보이는 것처럼, 불일치 선언을 따르는 영화도 아무것에도 도움 받지 않고, 빚을 지지 않으며 순수한 추상의 영화로 나아간다.     


이를 따르는 감독들은 국내에는 정식으로 소개된 바가 거의 없지만, 영화제를 통해 간헐적으로 소개된 얀 곤잘레스가 있다. 그는 영화 촬영 현장을 끌어와 현실과 영화의 불일치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칼 + 심장>, 꿈과 현실 및 현재와 과거를 비선형적으로 뒤섞어 놓은 <유 앤 더 나잇> 등에서 국제 불일치 선언을 충실하게 따른다. 현실과 달리 과장된, 인물들의 작위적인 용모, 패션도 그렇다. 그리고 국제 불일치 선언을 창시하고 선언한 기수, 베르트랑 만디코의 신작 <애프터 블루(더티 파라다이스)>가 2021년 공개되었다. 1971년 툴루즈 출신의 프랑스 영화감독인 베르트랑 만디코는 지금까지 무수한 단편 작업을 일삼다가, 2017년 <와일드 보이즈>로 장편 데뷔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문명 속 어른들의 행동을 아이들이 모방하던 원전과 정반대로,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무인도라는 환경이 소년들을 좌우하며 원전과의 첫 번째 불일치를 시도한다. 영화는 술을 마시는 탱귀라는 소년의 초상을 포착하며 시작된다. 이러한 ‘술’처럼 영화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상자의 의식과 불일치하는 연결이 주를 이룬다. 갑작스레 불꽃놀이가 발생하고, 키메라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나타나는 등 말이다. 영화는 문명과 자연에 대한 우리 통념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문명에서 소년(연기자들은 모두 여성이기에 배역과 배우의 성별 불일치가 발생한다)들은 가면을 쓰고 문학 선생을 겁탈, 유린, 살해한다.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란 그들은 오히려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무법자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심판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회복하는 것은 교육을 의뢰받은 선장이 그들을 망망대해, 무인도로 데려가면서 일어난다. 법 그 자체에 다름 아닌 선장이 그들을 구속하고, 파도가 몰아치며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자연환경에서 더 이상 그들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선장이 부여한 역할에 따라 노를 젓고, 그의 규칙에 의해서만 행동한다.    

  

문명에 속한 부르주아는 책임지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실현한다면, 자연에서의 자유는 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다. 갖가지 성행위로 소년들을 유혹하는 섬에서 무수한 체위가 가능하지만, 이러한 행위에 따른 대가로 소년들은 여성이 되어야 한다. 남성적인 섬은 항상 무언가를 돌출시키고 내뿜고 있기 때문에, 성행위가 하고 싶은 소년들은 이를 받아내야 하는 역할을 수락해야 한다. 이러한 <와일드 보이즈>는 하나의 환경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선언문에 따라서 인물, 영화가 어떻게 뒤바뀌는지를 입증한 작품이다. 문명, 배, 섬이라는 각각의 환경이 부여한 규정에 따라 소년들은 아나키스트, 노예, 여성이 된다. 하지만 환경에 마냥 굴복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으로의 이행은 곧 이전 환경이 가진 한계나 불만족에서 기인한 것이요, 또 탱귀는 환경이 부여하는 수동적인 여성화를 거부하고, 몸소 선장이 되어 스스로 법을 만든다. 즉 우리의 환경이나 만디코가 주창한 불일치 선언문은 절대적이지 않다. 불일치 선언이란 ‘환경’도 영화처럼 줄곧 앞뒤의 맥락에 따라 가치가 재평가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또 이에 얽매이지 않은 반항적인 구성원들이 기존의 규칙을 불일치시키며 독창적인 선장이 될 수 있으니. 이러한 본 작품은 저 하늘의 색채로서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적인 파랑과 비이성적인 광인의 색채인 노랑이 주로 사용되어, 우리의 보편적인 이성과 거리가 먼 느낌을 준다. 반규칙이 하나의 규칙이 되어 흑백과 컬러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며, 개인의 물리적인 육체와 의식은 하나의 숏에 중첩되어 함께 공존하는 등, 현실의 법칙에도 구애받지도 않는다. 인체에 자유분방한 훼손, 왜곡을 가하며, 현실 속 감상자의 육체와 불일치하다. 그리고 필름과 둥근 모서리,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초현실적이고도 자유분방한 연출이 가미되어, 작품만 놓고 본다면 고전으로 착각하기에, 즉 21세기와 불일치하기에도 충분하다. 이렇게 관습, 감상자가 놓인 시공간을 불일치시키는 자유분방한 연출은 대단히 고혹적이었는데, 이러한 만디코의 연출이 본 <애프터 블루(더티 파라다이스)>에서도 이어진다.      


만디코는 <와일드 보이즈>에서 문명-프랑스에서 자연-무인도로 멀어졌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는 ‘가부장적인 지구’에서 ‘가모장적인 외계’로 멀어져가며 현실과 불일치한다. 만디코는 현실과 불일치하는 세계관에서 본 작품의 제목처럼 이상으로서 '파랑'을 부각하는데, 이상 또한 현실과 불일치시켜서 가부장제 내에서 파랑이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남성적인 이상'을 '여성적인 이상'으로 뒤바꾼다. 지구에서의 번식 형태가 여성의 단성생식으로 뒤바뀌었기 때문에, 파랑의 느낌은 달라졌다. 나름의 이상이긴 하지만 남성 중심적인 지구에 얽매인 감상자의 시선에서 본 작품의 파랑은 병적으로, 이질적으로 보인다. 한편 파랑은 인간이 지향하고 싶은 색채이기 때문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지향해 볼법한 이상으로서 서서히 친숙해져간다. 이렇게 지구, 남성, 기존의 파랑 너머를 말하는 <애프터 블루>의 강령은 기존 인류, 문명의 법을 모두 재고한다. 기술 발전에 회의적이고 남성들의 폭력성, 야만성 또한 경계한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비일반적인’ 35mm 필름을 사용한다. 우리가 현실을 바라볼 때, 인간의 동공은 16mm 필름이나 35mm 필름처럼 거칠거칠하거나 아스라한 렌즈를 덧씌우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의 동공엔 필름에 끼는 그레인이나 노이즈가 묻지 않는다. 그래서 비교적 선명하고도 투명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동공은 21세기에 부흥한 디지털의 질감과 색채에 더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우리의 일반적인 현실을 벗어난다. 애프터 블루의 여성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 내지는 감상자의 기준에서 ‘이질적인’ 애프터 블루의 질감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35mm 필름을 사용한다. 이러한 우리의 일반성과 '불일치'하는 매체처럼, 영화의 전개도 우리의 기대를 우발적으로 배반한다. 영화 초반에는 록시의 또래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한 소녀는 총을 들고 마구 사격을 한다. 그들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이다. 그렇게 숏에는 ‘거칢’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린 편집으로 이어질 다음 숏에 거친 폭력의 결과가 이어지리라 예측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거친 소녀들은 부드럽게 서로를 애무하고 키스를 나눈다. 폭력적으로 행동하다가 갑작스레 부드럽게 행동이 뒤바뀐 어떤 이유도, 인과도 없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의 태도는 쉽게 이해 되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동물적으로 보인다. 케이트를 알고 있는 모녀를 만났을 때, 다짜고짜 처음 본 사람의 피부를 깨무는 등 말이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감상자의 의식에 따른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 불가해한 미지의 것이다. 그래서 만디코의 작품은 ‘숭고’하다. 숭고에는 거대한 대상을 수용하는 작은 인간과의 크기 대조 속에서 발생하는, 비율과 규모에 따른 '수학적 숭고'가 있고, 상대적이지 않고 그것 자체의 이해, 규정, 예측이 불가능한 속성에서 비롯하는 '역학적 숭고'가 있다. 그중 본 작품은 역학적 숭고에 가깝다. 처음에는 수학적 숭고로 느껴졌다. 애프터 블루라는 행성의 원리는 기존 감상자의 세계와 비교하여 상대적인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거대한 이질성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지구와 불일치하겠다는 애프터 블루 여성들의 선언이 구태의연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동물성은 애프터 블루만의 고유 원리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잠들어 있는, 즉 감상자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즐비한 인간의 야만이다. 그래서 애프터 블루와 지구의 상대성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인간 내면이 불가해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기 때문에 역학적 숭고에 가깝다. 외에도 감상자의 육신이 놓인 세계와 애프터 블루라는 이질적인 세계의 차이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남성들이 사라진다. 공격적이고 야만적이며 거친 남성성이 사라지기를 의도한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되는 원리는 여성의 포용력이랴. 그러나 본 작품에서 여성들은 털이 수북하게 온 몸을 뒤덮는다. 일반적인 여성의 털의 길이, 위치가 아니다. 어지간한 남성들보다 더 북실북실한 털이 자라나고, 지상의 여성에게선 나지 않는 목 부근에 털이 빳빳하게 자라난다. 그것은 곧 지구의 일반적 여성과 비교했을 때 수학적 숭고일지 모른다.      


하지만 애프터 블루 속 여성들의 털, 그리고 털이 자라나는 여성들의 폭력성과 거칢은 지구를 닮아있다. 또 오늘날의 지구에서도 물신 숭배를 받는 샤넬, 구찌, 폴 스미스 등이 애프터 블루에서도 유효한 네임벨류를 지니며, "폴란드인은 나쁜 민족이다"라는 지구에서의 제노포비아도 고스란히 애프터 블루를 따라온다. 또 남성적인 지구와의 불일치를 의도하는 여성들은 그럼으로써 자유를 찾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고유한 개인의 눈'에 상응하는 제 3의 눈을 록시가 개안한 것처럼, 불일치하고자 하는 것은 지구에서 일반적인 맨스플레인과 전체주의다. 그러나 애프터 블루에서도 여성들은 온당 자유롭지 못하고, 제 3의 눈을 개안할 수 있는 여성은 극소수에 그친다. 숭고한 것은 불쾌하고 불안하며 공포스럽다. 이는 수학적 숭고에 따라, 유한한 나를 기준으로 크기 차이나 무지에서 상대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지만, 내가 대상을 익히 앎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발원하는 역학적 숭고일 수도 있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바라보는 인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이 규정한 인간성에서 빠져나가고 달아나며 배신하는, 절대적으로 숭고하여 그 가능성을 품어내지 못하는 존재다. 지구의 원리와 일치하는 인류가 애프터 블루에 즐비한데도, 그들은 여전히 불쾌하고 낯설며 예측 불가한 즉흥성은 언제나 감상자를 위협하고 배반한다. 즉 영화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전개는 지구와 결별하는 애프터 블루의 자유로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어디에 있으나 우발적이고 예측 불허한 인간 본성을 옮겨오면서 비롯한다. 그 예기치 않은 전개가 드러내는 행위는 바로 ‘섹스’다. 영화의 초반부, ‘독종’이라 불리는 록시는 또래 친구들이 케이트를 그냥 묻어두라는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남들과 다른 독종다운 고집, 그 옹골참이 지시하는 포용력으로 케이트를 구한다. 그리고 케이트는 자신을 구하지 않은 록시의 또래들을 모두 살해한다. 이윽고 케이트는 록시를 바라본다. 직후 둘은 키스하고 사랑을 나눈다.      


이때 영화는 반짝거린다. 35mm 필름이 내뿜는 색감은 더더욱 황홀하다. 섹스는 매우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두 사람이 연인이 되어 사랑을 하면, 일상의 둔탁한 감정을 모두 떨쳐내고, 추레하고 평범한 공간이라도 연인이 서로 함께라면 신선한 키테라(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섬, 그곳에서 짝이 없는 청춘들은 연인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로 뒤바꾸며, 이에 어디든 둘만 있다면 그들의 마음은 항상 설레고 두근거린다고 주장한다. 영화 속 사랑도 그러하기에 이들의 애정과 섹스를 35mm 필름으로 찬미한다. 록시는 케이트, 올가-2와 사랑하고, 조라는 스턴버그, 애프터 블루의 토착 생물을 흠모한다. 연모하는 대상은 기존의 규칙을 위반한 살인자와 예술가, 인간을 초월한 안드로이드 및 생물종이다. 그들은 언제나 지리멸렬한 마을에서만 살아온 록시, 조라에게 신선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편 이를 위해선 ‘위반’해야 한다. 록시는 살인자와 공조하고, 스턴버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올가-2를 빼앗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신선함과 동시에 아슬아슬한 것이다. 이는 에로티즘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가 말하듯 위반의 강도에 따른 쾌감이다. 바타이유는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나 성은 불법에 가까웠음을, 그래서 필연적으로 성행위를 해야만 하는 인간은 언제나 금기의 경계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음을 역설한다. 이는 성은 금지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금기를 넘는다는 짜릿함이 쾌감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타이유에게 합법적인 성행위를 가능케 하는 ‘결혼’은 에로티즘의 사형선고였다. 본 작품에서도 그렇다. 록시는 또래 무리, 마을의 룰을 위반하고 케이트를 구한다. 그리고 케이트 또한 살인자, 영화 결말에서 밝혀지길 인간이 아니라 애프터 블루 토착생물들의 시야로 규칙을 정립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서로는 각자의 정상성을 위반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새롭다. 또 스턴버그는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정원에서 애프터 블루에서 금지된 남성 토르소를 전시해놓고, 또 법을 유린하여 '남성'이 아닌 '남성 안드로이드'를 창조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는 자다.      


조라는 초월적인 스턴버그에게, 어머니 세대와 달리 남성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록시에게 반한다. 남근이 촉수로 변형되어 여러 갈래로 돌출된 올가-2는 거대한 위반의 힘을 구사한다. 한편 그래서 성애는 항상 위험천만하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합법의 굴레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살인자임이 분명한데도 케이트를 흠모하는 록시는 <호수의 이방인>의 결말을 연상케 한다. 또 그들의 사랑 이후에는 언제나 스턴버그의 총구가 얼굴 위에 얹혀 있는 등 정사의 대가는 참혹하다. 그래서 성의 파라다이스는 영화의 제목처럼 ‘더티’하다. 하지만 위험을 불사하고서라도 일반적인 법을 불일치시켜 위반해야지만, 나만의 법을 새로이 정립하여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을의 또래들이 케이트에 의해 살해당한 것, 이와 동시에 록시가 케이트와 협조했다는 소문이 퍼진다. 미용사인 조라의 집에 마을 주민들이 들이닥친다. 그 당시 록시는 지하에 있었다. 지상에선 지구의 폭력성,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심이 이어지고, 어머니가 여성들의 털을 미는 ‘기존의 법’이 모녀가 원치 않는데도 강요된다. 한편 지하에서 록시는 지상, 마을에서 금지된 케이트를 상상하며 자위한다. 자위의 환각을 일으키는 담배가 애프터 블루에서는 생명체인 '애벌레'인 것처럼, 쾌락은 생명을 제물로 삼는다. 그리고 일반적인 법은 바로 그 생명을 비호하고, 쾌락을 오롯이 보장하기 보단 일련의 금욕을 주문한다. 이렇게 고유의 법을 생각할 수 있는 자만이 제 3의 눈을 가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 3의 눈은 신화나 종교에서 자주 나타난다. 제 3의 눈은 신, 절대자, 성인 등 형이상학의 비밀을 깨우친, 이로써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만 개안하였다. 그리고 제 3의 눈은 얼굴의 '이마' 부근에 주로 생겨났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제 3의 눈은 유사함과 동시에 다르다. 일단 제 3의 눈을 갖게 되는 것은 케이트와 록시다. 사람들은 케이트를 ‘폴란드인’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케이트는 진작 지구, 폴란드의 정체성을 떨쳐낸 지 오래다. 그녀는 지구의 폴란드인과 더불어, 애프터 블루의 보편적인 여성성까지 초월하여, 애프터 블루 토착민들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지 오래다. 케이트는 인간이 지구에서 옮겨온 전염병이 애프터 블루 토착민족들에게 위협적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영화의 결말에서는 조라와 록시의 마을을 아예 괴멸시켜 버린다. 이렇게 생겨난 제 3의 눈은 이마가 아니라 '음부'에 달린다. 이는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고 금기를 뛰어넘은 성으로 나만의 교유한 법을 창조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애프터 블루의 법을 유린하되, 지구의 남성을 갈망하는 여성의 학습을 뛰어넘지 못한 스턴버그는 개안하지 못한다. 또 나만의 법은 나를 위해서 작동해야 한다. 록시는 내게 솔직하다. 영화에선 미지의 나레이터가 질문하고 록시가 답하는 인터뷰 형식의 연출이 반복되는데, 이는 조라가 록시에게 “무슨 말을 하냐”라고 따지는 장면에서 독백임이, 록시가 집요하게 ‘자문자답’하며 자신을 선명하게 하는 과정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조라와의 관계, 자신의 죄책감에서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솔직함은 외세에 잠식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화 결말, 조라는 잠든 반면 록시는 깨어나 어머니에게 멀어지면서 자신만의 법을 정립한다. 또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던 그간의 록시와 달리, 모든 일이 해결되고 제 자신의 양심에 더는 따가움을 느끼지 않으며, 죄책감을 일으키는 자아와 화해하고 진정한 자신을 실현한다. 이러한 법은 영화 속 디졸브라는 형식으로 가시화된다. 영화 초반의 디졸브는 애프터 블루의 법에 의해 무수한 여성들이 겹쳐지고 중첩되어, 개개인의 모든 개별성, 개성이 말소되는 형식이었다. 개인의 얼굴은 길게 포착되지 못하고 다른 얼굴과 뒤섞이며, 청각으로는 애프터 블루의 법만 되뇐다. 반면 록시가 또래의 말을 무시하고 케이트를 구할 때, 이후 케이트가 자신만의 법으로 또래들을 살해할 때도 디졸브가 발생한다. 록시와 케이트, 케이트와 피해자들의 얼굴이 중첩된다. 록시에 의해 케이트가, 케이트에 의해 피해자들의 세계는 규정된다.      


이렇게 우리는 기존의 법이나 타인에 내가 디졸브되기도 하고, 또 나의 표상에 타인을 디졸브하기도 한다. 또 세계가 나를 디졸브하기도 한다. 애프터 블루로 이주한 여성들은 반지구적인 관념으로 새로운 행성을 디졸브하길 원한다. 하지만 <와일드 보이즈>에서처럼 관념이 계산하지 못한 거대한 실제는 그녀들의 얼굴이 세계에 디졸브되는 것을 거부하고, 역으로 거룩한 세계가 작은 그녀들을 규정한다. 거칠고 황량한 환경에서 모래나 돌을 먹게 된 여성들, 이에 몸에서 유인원 수준으로 털이 자라나는 여성들, 샤넬이나 구찌가 애프터 블루로 이어져 오면서도 그것은 더 이상 패션이 아니라 '총기'가 되는 등 세계가 인간을 만든다. 세계는 분명 거대하고 단단하여 말랑거리는 인간을 규정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세계는 완전히 닫히지 않은 ‘미완’이다. 그래서 미완을 인간이 거머쥐고 규정할 때, 인간이 세계를 만든다. 만디코는 본 작품에서 은하, 오팔을 연상케 하는 오묘하고 복잡한, 단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비규정적인 입체적 색채’를 선보인다. 디지털과 달리 아스라하고 희미한 경계선이 특징인 35mm 필름은 그 복잡하고도 신묘한 색채의 어지러운 감각을 부각하며, 입체적인 색채로 가득한 애프터 블루는 '여러 색채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즐비해있다. 또 애프터 블루는 단단하기도 하지만 도처에 액체가 가득하다. 모든 것은 질질 흘러내리고 있어 축축하고, 또 온전한 육체의 인간도 있지만 무엇으로든 변형될 수 있는, ‘환각을 일으키는 토착민족’, ‘몸통이나 팔, 다리 등을 갈구할 것만 같은 손 모양의 식물 내지는 동물들’, ‘아예 미완의 상태인 살덩이’들이 즐비해있다. 지구도 그렇지만 애프터 블루도 자신들의 기능이 발견되며 발명 및 조립되기를 기다리며 누군가의 디졸브를 위한 질료로서 기다린다. 인간이 말에게 약물을 주입할 때 발생하는 디졸브,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화함과 동시에, 인간의 약물이 말에게 중첩됨을 보여주는 디졸브를 말이다.      


제 3의 눈을 개안하기 전까지의 록시, 또 일반적인 인간들은 세계, 타인에 지배당한다. 총을 든 조라는 자연스레 도망가는 록시를 쳐다봤고, 이에 따라 '사냥꾼과 사냥감의 도식'에 자연스레 지배되어 딸을 죽일 뻔 했다. 즉 세계가 진정 강해서 지배당하지 않는다. 편견이나 통념에 쉽사리 휩쓸리는 나약한 나 자신에게서 ‘지배당함’은 비롯한다. 록시에겐 제 ‘양심’이 계속 소환하는 또래 망령, 먹을 것을 찾으러 나서기 위한 조라에겐 ‘자신의 그림자’가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것은 세계에 맞설 힘이 전혀 없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스스로다. 이윽고 모녀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케이트 사살' 명령을 완수했다고 믿고 마을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목의 풍경은 유달리 지구의 강변과 닮아있다, 그간의 환상적인 세트장과 달리 말이다. 그녀들이 놓인 풍경이 지구, 곧 일반적인 세계와 닮은 이유는 오롯이 고유한 세계를 정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녀는 케이트가 죽지 않았다는 정황과 마주한다. 물론 양자 모두 확실하지 않다. 용병들이 가지고 있다는 케이트의 주검, 케이트의 생존 모두 다 확실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라는 케이트를 죽이고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는 믿음, 록시는 그녀에 대한 흠모와 친구들의 죄책감이 따라다니기에 확신하지 못한다. 그녀들은 '겁쟁이'다. 결말까지 영화는 케이트의 정황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괴멸된 것은 마을이지 케이트가 아니다. 그러나 모녀는 케이트가 죽었다고 단언하고, 록시에게 제 3의 눈이 개안된다. 중요한 것은 미규정적인 세계 속에서 클로즈업된 자신의 얼굴을 얼마만큼 ‘확신’할 수 있고, 또 디졸브로 가득 채울 수 있느냐다. 불확정성 속에서 록시는 자신의 주장, 그리고 죄책감과 화해한다. 그렇게 록시는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건립하고, 기존 세계 및 타인들과 ‘불일치’된 성장을 도모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만디코는 진리를 찾아 해매지 않는다. 단지 환경, 타인과 줄곧 불일치하는 자신으로 우뚝 서서 유동하는 질료들, 곧 세계와 육체를 잘 다룰 수 있길, 이를 성으로 실존하길 바랄 뿐이다. 그러한 유동성과 이질성은 감상자가 놓인 환경과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수학적 숭고이기도 하나,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인간의 불일치에서 발생하는 역학적 숭고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불쾌함,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초상 아니겠는가. 다만 기대에서의 불일치, 그로 인한 숭고와 불쾌감을 보여주기에 영화의 러닝타임은 너무 길어서 처음의 충격은 경감되고, 또 서사는 불일치를 보여주기에 파괴적이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이 세상, 이 시대의 것이 아닌 듯한 고전적이고 환상적인 미장센, 다만 그 연출을 받쳐줄만한 과감한 서사와 인물이었는지 다소 의구심이 든다. 

----

감상일; 230717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마크 젠킨, <에니스 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