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운명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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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7
“이 몸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그 대답은 이것뿐이다. 물어볼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크리스타 볼프-
1966년부터 1996년까지 프랑스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일으켰다. 본 사실은 2000년까지도 외부에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프랑스 당국은 내내 이 사실을 쉬쉬하였고, 그나마 밝힌 보고서에도 핵실험 규모와 피해 사실이 심각하게 축소·은폐되어 있다. 정작 현장의 피해규모는 보고서의 수치를 비웃듯 크게 웃돌았고, 약 11만 명의 주민들이 피폭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실제 보상을 받은 피해자는 불과 60명 정도에 그쳤다. 이마저도 오롯이 드러난 게 아닐지 모른다. 당국이 은폐하고 잘라내는 비밀 사이에 더 추악한 진실이 숨겨져 있을지도… 알베르 세라는 본 프랑스 폴리네시아 핵실험을 모티브로 한 <퍼시픽션>을 연출한다.
1975년 바뇰레스 태생의 알베르 세라는 스페인 카탈루냐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동시대에 가장 급진적인 연출을 선보이는 시네아스트라고 평가 받는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 그의 색채를 살펴보자면, 일단 세라는 주로 과거로 향한다. <루이 14세의 죽음>이나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리베르테>,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서사보단 당대 고증에 초점을 맞춘 <기사에게 경배를>도 그렇다.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바로크의 화가 ‘카라바조’처럼 일상적으로 옮겨오는 <새들의 노래>, 카사노바와 드라큘라를 비교적 세속적으로 영상화하는 <내 죽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과거를 다루는 세라는 누구나 아는 과거가 아니라 덜 알려졌거나 숨겨진 과거를 매우 정밀하게 고증한다. 이 고도의 시간적 정밀함 속에서 즉흥과 우발, 잉여의 행위가 가득한 과거의 현실까지도 함께 고증한다. <새들의 노래>의 소재가 ‘성경’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감상자는 동방박사나 요셉, 마리아에게 기대하는 행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배역임과 동시에, '인간'이다. 세라는 그들 자체론 무목적적인 인간으로서 즐길만한 무료한 나날, 행위를 재현한다. 이로써 그는 자연에 가까운 당대의 시간 그 자체에 도달한다. 그래서 과거를 동시대에 이해할 수 있게끔 인지적 가치를 정돈하고 함축하여 보여주는 일반적인 시대극과 달리, 그의 영화는 낯설고 풍부한 여지로 가득 차있다.
그렇게 재현한 당대의 현실을 카메라로 왜곡하지 않는다. 그의 촬영은 기교가 적고, 편집조차도 컷이 드물어 ‘롱테이크’에 포착한 시간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왜냐하면 그는 작품 속에 ‘자연’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감상자에게 보여줄 것을 의도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전시될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라의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형체와 공간을 구분하기 어려운 어둠, 그늘, 밤을 무심하게 포착하고, 인물들도 무의미하고 별 상징도 없는 듯한, 심지어 동물로서 추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은 각자의 지식에 따라 프레이밍하여 아름다움이나 의미를 능동적으로 찾아야 한다. 세라의 영화는 자연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위치를 환기한다.
이렇게 순수 시지각적인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영화, 하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이나 세계는 작위적이다. 물론 공간은 순수 자연 그 자체다. <기사에게 경배를>이나 <리베르테>처럼 자연이 무대이기도 하고, 인위적인 세계라 한들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강조하는 일출과 일몰이 항상 등장한다. 하지만 감상자인 인간이 자연에 아름다움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영화 속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널따랗게 펼쳐진 들판과 개울에서 갑옷을 입고, 엄격하게 계급을 분리하는 돈키호테와 산초, 에덴동산을 도래시킬 것이라 말하며 평범한 물에 기독교적인 상징을 부여하는 <기사에게 경배를>이 그렇다. 그들은 인위적인 기독교 왕국을 도래하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여정은 모호하고, 마침내 다가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죽음이다. <새들의 노래>도 종교적 여정을 떠나지만 가는 길은 모호하고, <기사에게 경배를>처럼 어둠이 자욱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 처음, 곧 자연으로 향하기에 부질없어 보인다. 또 <루이 14세의 죽음>에서는 죽기 직전까지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몸을 불편하게 하고,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질 루이 14세의 육체를 보존하려는 허망한 발악이 대두된다.
이러한 인위성 가운데서 세라는 언제나 죽음을 부각한다. 그에게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것, 인간이 만들어난 관념과 환상의 세계를 배반하고 끝끝내 찾아오는 것, 그래서 인간이 끊임없이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는 것들은 부질없고 덧없다. <내 죽음의 이야기>에서 실존 인물 카사노바는 계몽주의를 대표한다. 그리고 정념과 본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대변인은 가상의 인물 드라큘라다. 문명에서 실존시키려 하는 것은 카사노바다. 하지만 식자로서 방탕한 지난날을 회고하고 제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는 카사노바라 한들, 그의 입은 지식을 발설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탐식하고, 그의 하반신은 동물적인 배설물을 내뱉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끝끝내 영생하는 드라큘라가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인위성이나 인간의 이상 및 신화는 덧없고, 남는 것은 드라큘라에 의한 만연한 죽음, 쾌락, 탐닉 등 포유류로서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한편 <리베르테>에서는 인위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연으로 향해 인위적인 성 통념을 위반하는 난교를 즐긴다. 상징과 의미에서 멀어진 동물로서 인간은 쾌락을 위해 죽음조차도 감내한다. 이전까지의 작품이 작위적인 인간을 순수하게 관조했다면, 이제 순수한 세계를 순일하게 바라본다. 거기서 동물적인 리베르탱들의 행위는 충만한 반면, 인위적인 의상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세라는 본성을 이겨내고자 하는 시도를 마냥 덧없게 보지는 않는다. <리베르테>에서 동물로서 인간에 순응한 리베르탱들이 추했고, 적나라하게 펼쳐진 난교가 감상자의 어떤 쾌감이나 육욕도 자극하지 못한다면, 세라의 다른 작품에서 자연에 저항하는 인물들은 아름다워서 매료될 것만 같다. <새들의 노래>는 여정의 목적 자체가 ‘미’다. 동방박사들이 비대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태함·게으름을 이겨내고, 아기 예수를 만나 사막을 넘는 행위가 아름답다. 세라 또한 세상의 운명적인 색채에 저항하는 우아한 흑백을 덧입히는 것처럼, 누워있는 본능으로부터 이성의 일으킴을 아름답게 본다. <기사에게 경배를>에서 구도를 신경 쓰지 않고 숨어서 관조하던 카메라는, 에덴동산을 도래시키기 위한 그들의 여정을 아름답게, 음악을 삽입하며 바라본다. <루이 14세의 죽음>에서 태양왕은 미래의 왕을 바라보며 과거를 반성하고, 신하와 의사, 귀족들도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미래를 다짐한다. 즉 추한 운명을 어떻게든 유예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아름답다.
세라의 연출 자체도 이러한 경향에 일조하는 측면이 있다. 그는 되살린다 한들 부질없는, 이미 죽어버린 과거를 지속적으로 되살리므로. 그것이 덧없고 황망하다고 하여도 유의미하고 중요하다, 단지 아름답기에… 그리고 세라는 신작에서 아름다운 세계와 추한 현실의 갈림길에 선다. 과연 그의 여정은 어디로 향할까?
세라는 그간의 연출에 변화를 가하며 본 작품의 여정을 떠난다. 그의 시그니처와 같았던 롱테이크가 <퍼시픽션>에선 극도로 드물다. 물론 시퀀스 자체는 여전히 긴 호흡이다. 하지만 그 시퀀스는 여러 숏을 모으고 연결해서 형성한 것이지, 이전 작품들처럼 하나의 테이크나 매우 적은 숏으로 구성하지 않았다. 변화의 원인은 ‘시간’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과거’를 다루던 세라는 <퍼시픽션>에서 폴리네시아의 ‘현재’를 다룬다. 과거는 ‘완결’된 운동으로서, 그 힘이 어디로 향하고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결정되어 있다. 그 값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연출에 이를 반영하자면 과거는 컷으로 조작하거나 무언가를 덧붙일 수 없는, 그 자체로 완결된 롱테이크와 같다. 다른 과정이나 결과를 이어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또 한 인물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 계측한 기댓값을 너무나도 쉽게 배반하는 시간이 현재다. 그래서 세라는 본 작품에서 컷을 많이 사용한다. 현재의 운동이 우리의 예측을 가볍게 배반하고 다른 결과를 이어 붙이듯, 이를 반영하는 영화 또한 기존 숏을 자르고 또 자르며 새로운 결과를 이어 붙인다.
또 롱테이크는 시공간을 초월하기 어렵다. 롱테이크가 10분이라면 다룰 수 있는 시간도 10분, 공간 또한 10분 동안 누빌 수 있는 장소만 허용된다. 과거에 소요된 시간, 과거에 일어났던 운동의 여파 또한 롱테이크의 ‘제한’처럼 뒤바뀔 수 없는 유형이다. 그러나 여러 숏으로 이뤄진 10분짜리 시퀀스는 10분이라 하여도 10분 이상을 함축할 수 있고, 공간 또한 여러 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포착한 숏을 연결하며 말이다. 현재는 과거와 달리 그런 제한이 덜하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로 향할 수 있는 잠재로 가득하다. 이렇게 무엇이 닥쳐올지 알 수 없는 현재를 다루는 세라는 본 작품에서 제한된 시공간에 갇히지 않는다.
세라가 컷을 적극 사용하는 이유는 현재라는 이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금껏 ‘하얀 양복’을 갖춰 입고 폴리네시아에 프랑스의 영향을 흩뿌리던 주인공, ‘드 롤러’의 힘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죽음>에서 늙은 태양왕은 ‘자연의 섭리’인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순간까지도, ‘인위적인 왕가의 법도’를 반영한 롱테이크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신하들은 절대적인 왕가의 예법을 반영한 롱테이크를 감히 끊어서 바깥의 시공간이나 섭리로 초월할 수 없었다. 드 롤러 또한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쭉 이어진, 감히 거부하거나 자를 수 없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폴리네시아에 쏟을 때는 롱테이크에 담긴다. 작가 ‘아티아’의 수상을 축하하는 장면이 그렇다. ‘판무관’으로서 드 롤러는 축하 연설을 하는데, 횡설수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긴 하지만, 판무관의 통치 아래 놓인 백인 거주자와 원주민은 어찌됐든 해당 테이크에 속해 있어야만 한다. 그의 지배를 거스르거나 잘라서 다른 시공간, 곧 다른 숏을 이어낼 수 없다. 그러나 드 롤러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잘려나가고, 그를 대신하거나 혹은 그와 대등한 힘들이 이어 붙여진다. 그를 대체하고 연결된 숏들은 ‘원주민의 자치적인 정치’, 프랑스를 몰아내고 폴리네시아를 접수하려는 ‘영미권의 압력’ 등이다.
또 폴리네시아를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 또한 롱테이크에 담긴다. 도입부, 카메라가 좌측으로 이동하며 이중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항구에는 인위적으로 멈춰진 화물이 가득 쌓여있지만, 그 뒤편의 바다와 수평선, 하늘은 붉은 석양을 물들이며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즉 멈춘 인위성/변화하는 자연이라는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운동이 하나의 테이크 안에 공존하는데, 그것이 폴리네시아의 현실을 압축한다. 이후 카메라는 오른편으로 이동하며 해군들이 도착하는 모습을 촬영한다. 항구의 인위성과 석양이라는 자연의 섭리, 그리고 해군의 도착은 롱테이크에 담긴다. 운동은 잘리거나 외부 숏이 이어 붙여지며 발생하지 않고, 오직 롱테이크 내에서만 유효하다. 폴리네시아의 운동은 백색 문명과 무위의 자연, 그 이중적 속박에서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는 듯이.
그래서 <퍼시픽션>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연출은 '편집'이다. 본 작품에서 원주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성 노동자’로서 백인의 기호에 봉사하는 반면, 백인은 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늙고 뚱뚱한 권력자로 등장한다. 각각의 숏에 담긴 이들의 얼굴이 편집으로 연결되는데, 백인들끼리 만나 대화하고 이후 동행 하는 숏으로의 연결은 유기적이고 매끄럽다. 이전 숏에서 보여줬던 행동이나 시선이 다음 숏에 자연스레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원주민간의 연결은 어색하다. 정확히는 섬에 새로 도착한 군인들과 원주민들의 연결이 그렇다. 클럽 내 여자 화장실 부근에서 뚱뚱한 백인 남자가 기다려도, 해군들이 여성 원주민을 바라봐도, 원주민은 그 시선이나 행동에 따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클럽에서의 편집은 파편적이고 단절적이다. 세라는 클럽의 구조나 공간을 비출 뿐, 인물들의 행동이나 시선, 관계에 따른 연결은 클럽 시퀀스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원주민은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드 롤러의 요구는 숏에 반영해주기에 양자를 이어내는 편집은 꽤 매끄러운 한편, 이제 막 도착한 해군들은 원주민을 매혹할만한 힘을 아직 보여주지 않았으니, 원주민은 그들의 소망을 이어주지 않는다. 또 원주민은 해군의 방문으로 이원화된 두 개의 백색 힘 사이에서 둘 중 무엇을 택할지 망설이는 것이랴. 여하간 원주민은 그들의 숏을 중단하며 새로운 백인들의 바람을 잘라낸다.
그래서 해군이 힘을 드러내기 전까지, 드 롤러와 원주민의 연결이 영화를 지탱한다. 드 롤러가 원주민들과 회의하는 시퀀스에서, 두 가지 안건이 제기된다. 하나는 폴리네시아에 핵실험이 재개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를 저지해달라는 것, 다른 하나는 원주민의 카지노 이용을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둘 중 하나의 안건만 드 롤러에게 연결되는데, 핵실험은 드 롤러가 해석할 수 없는 '폴리네시아어'로 발화되어 그와 연결되지 않는 반면, 카지노는 그가 즉각 이해할 수 있는 '불어'로 발화되어 그와 이어진다. 드 롤러는 원주민의 카지노 이용을 저지하는 교회를 찾아가 엄중하게 경고한다. 이렇게 연결된 이유는 드 롤러가 안건을 이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지노의 수익 중 일부가 세금으로 드 롤러의 지갑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는 이익을 잇기 위해 회의장을 뛰어넘어서 교회로 향했다. 즉 본 작품에서 이어짐을 좌우하는 조건은 ‘이윤’이다. 앞서서 원주민이 해군들의 시선을 깔아뭉갠 이유도 그들이 아직까진 제게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드 롤러의 장광설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타인이 중단할 수 없는 이유도 그에게 아첨하여 이익을 뜯어내기 위함이다. 드 롤러의 이득과 하등 상관없는 핵실험 문제는, 그가 본격적으로 지위를 위협받기 전까지는 소문의 진원·당사자들과 이어지지 않는다.
백인들은 항상 이득을 이어내면서, 보고 싶은 과정과 결과를 필히 보고야 만다. 드 롤러는 원주민들이 출연하는 '투계 연극'을 연출한다. 세 차례 등장하는 투계 연극 시퀀스는 모두 다 드 롤러의 지시로 좌우된다. 첫 번째 시퀀스의 도입에서 원주민들이 내는 소리나 몸동작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이후 극장에 방문한 드 롤러를 원주민이 환대하며 설명해준다. 점차 그가 ‘이해’하는, 또 백인의 눈에 ‘보기 좋은’ 연극으로 바뀌어간다.
두 번째 리허설 시퀀스는 분명 여러 숏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원주민과 투계는 그들이 서있는 연극 무대, 닭장, 분장, 정해진 행동을 뛰어넘지 못한다. 롱테이크와 별 차이가 없는 시퀀스 안에 갇혀있고, 이로써 속박된 그들을 드 롤러가 객석에서 바라본다. 백인은 원주민이 통제할 수 있는 장소에 순순히 머물러있길 바라고, 그 바람은 항시 그들의 동공에 연결된다. 그래서 연극 외의 시퀀스에서도 원주민은 백인만큼 여러 공간을 자유롭게 쏘다니지 못하고, 주로 동일한 시공간만 반복되는 시퀀스에 갇혀있다.
이후 세 번째 시퀀스에서 드 롤러는 원주민에게 더 사납고 난폭한 연기를 주문하고, 그 주문이 반영된 숏 사이사이에는 언제나 드 롤러의 시선이 끼어든다. 드 롤러의 요구대로 연극을 하다가 투계가 중상을 입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도 백인은 투계의 모습을 원주민에게 더 극적으로 따라하라고 지시한다. 해당 연극은 관객들에게 원주민의 정체성과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백인이 연출한 원주민의 전통은 서로 싸우다 죽는 민족, 충동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자멸하는 문화, 이에 합리적인 누군가의 지배가 필요한 역사로 왜곡된다. 즉 드 롤러가 편집으로 잇는 것은 '백인의 지배 합리화'도 포함한다.
원주민이 드 롤러의 요구를 고분고분 따르는 이유는 ‘공간성’이란 원인도 포함한다. 백인의 공간이 '지상'이라면, 백인들이 원주민 뒤에서 보호받는 공간, 원주민들이 지배하는 공간은 '바다'다. 세라는 바다에서 넘실거리는 파도의 광대함을 널따란 2.39:1 화면비 안에 숭고하게 담아낸다. 바다에서 생업을 하는 원주민들은 본인들이 죽음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바다의 불안정성과 대비되는 지상의 안정성, 제약을 대가로 보호하는 '중력'을 백인이 부여한 것이랴. 무거운 중력은 인간이 출렁거리지 않게 붙잡아둔다. 그것이 앞서 바라본, 드 롤러의 지시에 따라 완전무결하게 닫혀있고, 그의 시선이나 행동에 따라서 다음 숏이 규정되는 편집이다.
그런데 백인의 욕망을 철두철미하게 이어내던 ‘꽉 짜인 편집’에, 점차 듬성듬성 틈이 벌어진다. 동시에 지금껏 폴리네시아를 엄격하게 통치하던 유럽계 백인들이 나태해진다. 드 롤러, 페레이라, 제독 모두 다 ‘고주망태’다. 타인을 지배하기는커녕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해이해진 백인에 의한 편집은 흐트러지고 느슨해진다. 낮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술을 들이마신 제독은 진탕 취했다. 이후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제독이 향한 곳은 연결되지 않고, 대신 드 롤러가 아침에 바다로 향하는 숏으로 단번에 연결된다. 이전 숏에 내재한 백인은 흡사 ‘필름이 끊기 듯’ 다음 숏까지 미치지 못한다. 페레이라는 술에 진탕 취해 널브러진 상태로 여권을 잃어버렸다. 그가 의식을 잃은 틈을 타서 원주민이 여권을 갈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을 마이크라는 영미권 남자가 후원한다. 즉 흐느적거리며 저물어가는 유럽의 벌어진 틈 사이로, 원주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새로운 패권 영·미가 파고든다.
그간 원주민은 백인이 힐끗거릴 때, 아름다운 물질만 ‘눈요깃거리’로서 살짝 드러났을 뿐이다. 백인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또 수동적으로 나타나는 원주민과 달리 지배자로서 백인은 재개발이나 정신을 토론했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드러나던 이들이 이제 전면에서 요구하기 시작한다. 마이크라는 영미권 남자가 원주민들에게 핵실험이 재개되고 있다는 말을 흘린 모양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드 롤러에게 찾아가 이번에는 핵실험 반대 시위를 일으킬 것이고, 진압을 살살해달라며 사실상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드 롤러는 백인과 원주민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며 엄포를 놓지만, 실상 원주민들의 경고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지금까진 드 롤러가 샤나를 선택했다. 샤나가 드 롤러에게 방문한 것도 자의가 아니라 백인 페레이라가 규정했다. 원주민은 백인의 시선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그러나 이젠 샤나가 옆이나 뒤에서 함께 비행기에 탄 드 롤러를 바라본다. 바다가 원주민의 영역이라면 ‘하늘’은 백인만이 비행기로 누리는, 하얀 것들의 영토다. 이후 비행기에서 내려 지상에 발을 디딘다. 그 지상은 원주민 시장이 관할하는 공간으로 드 롤러는 핵실험 단서를 찾기 위해 시장에게 도움을 청한다. 즉 원주민에 의해서 발걸음이 규정되고, 그렇게 도착한 목적지에서도 백인이 원주민의 도움을 받는다. 드 롤러는 시장에게 비서를 내어주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비서가 되고 싶은 샤나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다.
심지어 드 롤러는 감시와 검열의 특권인 '쌍안경'을 잃어버린다. 지금껏 드 롤러의 시선에 의해서 원주민들이 좌지우지되었지만, 이젠 원주민들의 얘기를 그냥 넘길 수 없는 드 롤러가 핵실험 재개가 의심되는 바닷가를 감시한다. 바다를 응시하는 그를 뒤편의 누군가가 몰래 바라본다. 원주민일까, 아니면 그 원주민들에게 영향력을 불어넣은 마이크일까? 유리창 너머에서 그를 감시하는 듯, 숏은 선명하지 않고 살짝 불투명하며 거기에 빨간 불빛이 반사된다. 드 롤러를 감시하는 시선은 그의 신원을 자명하게 파악한다. 하지만 드 롤러는 바다에서 핵실험과 관련된 명확한 징후를 찾지 못한다. 단지 제독의 성매매 단서만 확인할 뿐이며, 그마저도 ‘익스트림 롱숏’으로 까마득하게 포착되어 확신할 수 없다. 또 연극은 그가 통제할 수 있지만, 리허설 직후에 찾아간 군사지역의 철창 너머로는 향할 수 없다. 원주민의 요구에 부응해야만 권력을 유지시켜주겠다. 그러나 원주민이 기대하는 시선에 부응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발걸음은 몰락이 예정되어 있다.
세라는 본 작품에서 프레임의 모서리 부근을 '검게' 처리한다. 또 화면에 안개가 껴있는 것처럼, 흡사 폴리네시아의 습한 기후를 반영하듯 미장센이 아주 흐리고 뿌옇다. 그런데 이러한 미장센이 단순히 폴리네시아의 환경만을 반영한 것일까? 영화 초반 클럽에서도 인물들의 얼굴이 '거울'에 의해서 매개되거나, 조명에 의해서 뒤바뀌는 ‘가변적인 초상’이었던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이나 ‘필터’에 의해서 매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형식은 아닐까? 흡사 유리창으로 누가 감시할 때, 모서리 부근에 먼지나 때가 낀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 속 존재는 특정 시선과 필터가 한번 걸러서 매개하는 형국이기에 불투명하게 비춰진다.
그 필터는 구 권력을 의미하는 프랑스 백인의 몰락을 비추고 매개한다. 후반부의 드 롤러는 떠돈다. 그는 샤나를 흠모하지만, 정작 그녀는 페레이라의 집에 있다. 드 롤러는 샤나를 쟁취하지 못한 채, 페레이라의 집을 나와 우두커니 길가에 멈춰 선다. 또 드 롤러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히 찾아내야만 하는 핵실험 증거는 어둠 속에 파묻힌 채, 무언가를 밝히고 촬영한 ‘숏’으로서 연결되지 못한다. 권력을 잃어가는 백인들은 원하는 식민지를 개척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 미아로 전락한다. 수색에 실패한 드 롤러는 환한 운동장으로 향한다. 그곳의 새하얀 빛은 그가 밝힌 것이 아니다. 그를 기다리는 마이크의 것이다. 적나라하게 그를 쏘아본다. 드 롤러는 이전에도 마이크와 페레이라가 자길 쳐다봐도 그저 멀뚱멀뚱 바라볼 뿐 항변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빛이 드 롤러에 더해, 잠수함 소음도 밝혀내지만 그가 밝힌 것이 아니니 어떻게 할 수 없다. 마이크에게 적발된 그 순간, 드 롤러는 스콜, 곧 '물'에 굴복하며 흠뻑 젖는다. 지상의 이성과 달리, 바다의 물은 본성과 비합리성에 상응하지 않던가. 드 롤러는 제독이 불러오고자 하는 본성적인 쾌락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런 그는 갇힌다. 그간 드 롤러는 이곳저곳 쏘다니고 직접 발품을 팔며, 원주민의 요구를 다음 숏에 어떻게든 실현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드 롤러를 신뢰했다. 하지만 후반부의 드 롤러는 "클럽, 곧 정치를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라고 입만 나불거린다. 이전 같았으면 그의 말은 행동으로 옮겨져 다음 숏에 이어지거나, 아니면 숏 내에서 충분한 위엄을 뽐냈겠지만, 현재의 그는 ‘허풍’만 놓인 숏에 갇혀 뱅뱅 맴돌 뿐이다. 말이 행동이 실현된 롱테이크는 드 롤러 대신, 마이크의 지원을 받아 폴리네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제독이 이끈다. 지금껏 드 롤러가 시작과 끝을 규정하던 롱테이크에 원주민들이 갇혀있었다면, 이젠 제독의 길고긴 파티를 촬영한 롱테이크에 드 롤러가 귀속된다. 그의 롱테이크를 중단해서 다른 걸 이어보려 한다. 하지만 제독의 퇴폐적인 클럽에서 퇴장하고 바깥으로 나와 다른 숏을 연결하니 이젠 ‘현기증’이 인다. 더는 원하는 것을 이어낼 권력이 전무 하다. 드 롤러는 제독의 클럽에서 흰 옷을 입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양복이다.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드 롤러는 이제 완전한 원주민으로, 핵실험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폴리네시아 정치는 분명 백인의 이익과 결부된다. 하지만 오늘날 백인이 이윤을 챙기기 위해선 원주민의 ‘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드 롤러는 원주민 시장이 탄생하는데 일조했고, 샤나의 요구를 묵묵히 들어줬으며, 그 또한 핵실험에 반대하며 폴리네시아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것이 원주민이 일련의 권력을 되찾은 폴리네시아의 현재다. 식민 지배에 처한 과거와 전혀 다른 결과를 이어낼 수 있는 현재, 그러나 핵실험을 소환하는 새로운 패권으로 권력축이 이동한다. 겉으로는 원주민을 지원하지만, 뒤에선 음흉하게 착취하는 영·미는 폴리네시아에 식민주의 내지는 군국주의라는 망령을 소환한다. 이때 폴리네시아는 새로운 결과를 이어낼 수 없는 롱테이크에 또 다시 갇힌다. 무기력해진 원주민은 롱테이크가 잠재한 핵실험의 해악을 막연히 기다릴 뿐이다. 이렇게 세라는 자신의 그간 연출을 변형하면서까지 식민주의를 경고한다. 다만 그 메시지가 영 석연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폴리네시아의 민주주의라는 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미라는 최악을 피해 프랑스의 식민통치라는 차악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 작품에서 오색찬란한 색채를 부각하며 아름답게 승화하는 대상은 백인도 식민주의도 아닌(오히려 후반부 클럽의 색채는 매우 단조로워진다), 폴리네시아와 원주민이 주권을 되찾은 순간이기에, 어찌됐든 그는 주체적인 자유를 예찬하는 것이 틀림 없다.
감상일: 230816 집에서(MUBI 스트리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