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퇴장할 것이냐, 내일을 잉태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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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예술가가 그의 작품을 만들 때는 자신이 말할 필요가 있는 사실을 확연히 자기 가슴 속에 파악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빛은 모든 것을 세세하고도 정확하게 밝힌다. 반면 어둠은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덮고 은닉한다. 빛 속에서 우리는 대상을 정확하게 인지하지만, 반면 어둠 속에선 피사체를 상상해야 한다. 빛 속에서는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되던 것들이, 어둠 속에선 개인지 늑대인지 도통 분간이 안 된다. 또한 따스한 빛은 유한한 대상을 조금이나마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반면, 차가운 어둠은 끝과 죽음에 상응한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삶에 무언가를 더하려면 필히 어둠을 거쳐 상실을 각오해야 한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빛나던 별이 서서히 꺼져가다가 이윽고 폭발을 일으켜 암흑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별의 유해를 품은 우주가 새로운 별들을 출산해내듯이 말이다. 본 빛/어둠, 낮/밤의 관계를 난니 모레티가 <일층 이층 삼층>에서 탐구한 바 있었다. 그리고 모레티는 본 신작, <찬란한 내일로>에서 빛과 어둠의 관계를 자신의 '예술론' 내지는 '창작론'에 빗대어 확장한다. 그는 OTT 스트리밍 서비스에 의해서 급변한 제작 및 배급 환경에 대한 견해를 그야말로 신랄하게 논평한다. 그가 아주 날 선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작금의 세태가 자신의 ‘1인 제작 시스템’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1953년 브루니코 태생의 난니 모레티는 동시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네오리얼리즘과 펠리니의 사적인 영화로 유명한 20세기 이탈리아 영화사 계보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리얼리즘으로 높게 평가를 받는다. 바로 각본, 편집, 연기, 배급을 직접 담당하며, 외부의 영향을 극도로 낮추고 자신의 철학과 예술론을 오롯이 반영하는 ‘1인 제작 시스템’으로 말이다. 1인 제작 시스템으로 국제 영화계에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던 20세기의 모레티는 주로 소박하고 사적인 영화를 연출했다. 1인 제작 시스템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작비를 끌어 오기도 어렵고, 솔직할지언정 완성도는 떨어지기가 쉽다. 하지만 예술가는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창작을 시작한 것이기에, 모레티는 1인 제작 시스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영화에 흠뻑 투영했다. 또한 권력에 아첨하지 않는 적나라한 정치 코메디도 20세기 그의 대표적인 동향이다.
21세기 들어서 다소 ‘얌전해진’ 가족극을 연출하는 모레티는 항상 구성원의 '상실',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한다. <아들의 방>, <나의 어머니>, <일층 이층 삼층> 등 다수의 작품에서 가족의 핵심적인 구성원이 실종되거나 사망한다. 식구들은 그 사실을 직면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상이 여전히 잔존해있는 꿈 및 기억으로 퇴행한다. 21세기의 모레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시간의 필연적인 흐름을 갖가지 사건을 일으키며 긍정하면서도, 그 시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고집을 함께 포착한다. 그리고 항상 아집을 덧없게 처리한다. 그는 떠나거나 변해야만 했던 대상을 긍정하고 빈자리에 새 살을 돋우는 삶의 태도를 긍정한다. 모레티에게 시간은 상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탄생이기에, 현재에 참여해야지만 삶은 더해지고 이어간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대상을 존중하는 그의 윤리이기도 하다. 모레티의 21세기 작품들에서 대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집착이 연이어지는데, 그는 이것이 이기적인 소유욕임을 폭로한다. 이에 모레티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와 <일층 이층 삼층>에서 변덕스러운 인물들을 긍정한다. 삶은 변화무쌍한 현재에 참여하고 있고, 그 삶을 사랑하는 인물이라면 마찬가지로 충동적이고 우발적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변신을 긍정하며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나의 즐거운 일기>와 <일층 이층 삼층>에서는 타인에게로 시선과 관심을 확장한다. 모레티는 변덕스러운 타인을 긍정해야 한다고, 심지어 때로는 죽음이라는 변화를 겪는 그들의 공허까지도 수긍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서로가 진정 해방된다고 역설한다. 이런 그가 생각하는 예술론은 <나는 자급자족한다>, <나의 즐거운 일기>, <악어>에서 도드라지는데 그는 자신의 시선에 솔직하되, 그 시선으로 타인과 세계에 관심을 갖고 사실을 적확하게 묘사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그가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하는 과정이 담긴 <찬란한 내일로>에서 모레티를 둘러싼 세계, 타인,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도입부, 지상에 어스름이 깔리자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며 활동을 시작한다. 그들은 오후 내내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던 밋밋한 장벽에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구호를 칠한다. 낮과 빛이 '오늘'을 항구적으로 유지했다면, 그것을 지워내는 어둠과 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로운 변화나 '내일'을 불러온다. 즉 어둠을 거쳐야만 무언가를 탄생시킬 수 있고, 그것이 영화에선 20세기의 신 이념인 ‘사회주의’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어둠은 친숙한 '현재'를 몰아내어 낯설어진 '과거'를 소환하고, 뻔한 '현실' 대신 생경하고 신선한 '예술'도 길어온다.
이 어두운 영역은 현재 및 현실과 분리된 상태다. <찬란한 내일로>에선 주로 '밝은 숏'들이 현실에 상응하고, '어두운 숏'들은 과거나 ‘영화 속 영화’에 상응한다. 밝은 숏과 어두운 숏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통합되거나 조화되는 일이 드물다. 어느 한쪽이 등장하기 위해선 다른 한쪽을 ‘컷’으로 잘라내기에, 양자는 엄격하게 나뉘고 분리된다. 또 이따금 '흑백 사진', '흑백 다큐멘터리 푸티지' 등을 ‘컬러’로 촬영된 본 작품에 인위적으로 '인서트'하기도 하니, 어둠은 확실히 현실과 다른 '이계'라 하겠다. 모레티가 본 작품에서 '이단'이라는 단어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편적인 세계에서 박해·추방당해서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이 어둠 속에 거주한다.
모레티는 현실과 분리된 어둠을 손 놓고 방치하지 않는다. 초반부까진 건재하던 지오반니(난니 모레티)의 영화 촬영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 그는 어둠 속에서 영화를 창조하고 이를 현실에 이식시키기에 이른다. 현실과 영화가 컷으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프레임' 안에 영화가 현실로, 현실이 영화로 공존하며 말이다. 그가 전동 퀵보드를 타고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며 영화를 촬영할 장소를 열심히 물색하는 이유는 현실과 분리된 허황한 만족에 그치기 위함이 아니다. 따분하게 흘러가는 현실에 새로움을 일깨우기 위해서, 심지어 부정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그토록 어둠을 조물거리며 무언가를 주조하는 것이다.
모레티가 어둠 속에서 길어오는 것들, 밤이 열어젖히는 내일은 ‘진실’을 품고 있다. 이로써 사실이 추방당한 현실에 진리를 되찾아온다. 그런 점에서 모레티가 투영된 배역 지오반니는 주세페(주세페 스코디티)란 젊은 감독에게 불만이 아주 많다. 지오반니의 영화는 일반적인 대중들이 모르는 진실을 어둠 속에서 건져내어 전달한다. 지오반니는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에 대한 영화를 기획하고 연출한다. 그런데 한 제작진이 의문을 품는다. "이탈리아에 공산당원이 있었어요?", 이어서 "공산주의하면 스탈린이 대표적이지 않나요"라고 말이다. 그것이 빛이 일반적으로 비추고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우리의 선입견이다. 그러나 모레티는 어둠, 곧 '흑백'으로 향한다. 거기서 독재 및 전체주의로 오염된 스탈린주의 이전 ‘사회주의의 본령’을, 소련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인도적인 공산주의자’를, 매카시즘 때문에 흔적을 숨긴 ‘서방의 사회주의자’를 밝힌다. 반면 주세페의 영화는 대중들이 머릿속에서 그려만 본 것들, 심지어 너무 상스럽고 추악해서 차마 생각조차 꺼리게 되는 '저열한 욕망'을 기어코 실현하고야 만다. 둘의 영화 중 후자가 전자를 잠식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후자는 거짓말로 가득한 주제에 '네오리얼리즘' 계보를 잇는다고 설쳐대며, 진실을 지켜내기 위해 파시스트에게 맞선 20세기 숭고한 선배들의 이름을 더럽힌다. 이에 지오반니는 화가 나서, 그의 영화는 인간의 진실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며, 건축학자나 수학자들을 불러와 논박한다. 뿐만 아니라 네오리얼리즘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승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1960)이 본 작품에 직접 인서트되기도 하고, 현실과 꿈·상상을 오가는 펠리니의 연출을 모레티가 형식에 반영한다. 더욱이 펠리니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소재 '서커스'를 영화의 중심 소재로 다루며, 그를 잇는 것은 주세페와 같은 '골빈 감독'이 아니라 자신임을 천명한다. 외에도 시칠리아에서 네오리얼리즘을 이어간 ‘타비아니 형제’의 이름도 언급되고, 네오리얼리즘 외에도 인간의 진실을 반영한 '스콜세지'라는 성이랄지, 자크 드미의 <롤라>(1961)가 작게 인서트되기도 한다. 즉 예술이 아무리 현실과 분리된 것일지라도, 현실에서 예술이 상영되고 영향을 미치는 만큼, 더욱이 인간을 반영한다고 다들 믿는 만큼 진실을 포기해선 안 된다.
또한 예술은 '주관적인 것', 이로써 예술가 본인만 알거나 느낀 특유한 것들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모레티는 자전적인 영화를 개척한 펠리니에게 헌사를 바치며, 예술은 창작자의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영화에선 지오반니란 옷을 모레티가 걸치며 감독 본인을 영화와 분리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지오반니가 말하는 것들은 배역의 발화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레티답다. 누군가는 지오반니를 두고 20세기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노장'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는 보편적인 영화감독의 모습과 차이가 많다. 외부 자본이나 영향을 극도로 꺼려하는 모습과 주관적인 괴팍함 및 까다로움이, 1인 제작 시스템을 완고하게 밀어붙이는 난니 모레티의 지문과도 같다. 그 지오반니는 영화에서 "인용 대신 자기 생각을 말해줘"라며 주관성을 높게 산다. 외에도 영화 속 지오반니를 지지하는 피에르(마티유 아말릭)를 통해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오는 모습은 '까이에 뒤 시네마'를 필두로 프랑스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모레티를 반영한 것이요, 파울라(마르게리타 부이)와의 불화는 <악어>부터 그의 작품에 빼놓지 않고 참여해온 뮤즈, ‘마르게리타 부이’와의 관계를 투영한 것이다. (이는 펠리니와 연계해서 생각한다면 펠리니와 줄리에타 마시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의 관계를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 펠리니는 마스트로얀니가 타 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질투할 정도로 그에게 집착했고, 마시나가 펠리니와 작품을 이어가다가 다른 영화감독들과도 협업한 것이 영화의 설정과 닮아있다)
즉 모레티는 타인의 저열한 욕망과 거짓말로 얼룩져가는 예술이, 다시금 진실과 창작자의 주관을 반영할 수 있도록, 찬란했던 예술이 다시 깨어나기 위해서 필히 거쳐야 하는 암흑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하지만 올해로 70세인 영화의 ‘노인’ 모레티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길어내기는커녕, 어둠에 파묻혀 '퇴장'하는 형국이다. 젊고 정력적이었던 20세기 모레티를 투영한 배역들은 자존감이 아주 높았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서슬 퍼런 눈초리로 쏘아보는 정치권력한테도 휘둘리지 않는 완고한 판단력, 제 삶을 꿋꿋하게 혼자서 개척하는 우직함이 특징이었는데, 2023년의 모레티는 바로 그 '초인'과도 같은 힘을 잃어간다. 그간 뮤즈이자 부인으로서 지오반니의 비위를 맞춰주던 파올라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이젠 다른 영화감독과도 작업을 하고 싶고, 까다로운 그와 이혼하고 싶다. 그래서 지오반니가 생각도 않고 있던 이혼을 그에게 먼저 통보한다. 또 20대 가량으로 추정되는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지오반니보다 더 늙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 예르지(예지 스투흐르)와 결혼하겠단다. 지오반니가 엠마에게 의뢰한 OST를 의뢰인이자 아버지인 자신보다 예르지가 먼저 접했다. 더욱이 파올라와 엠마는 더는 지오반니에게 관심이 없다. 지오반니는 영화 촬영에 앞서 '의례'처럼 자크 드미의 <롤라>를 다 함께 모여 감상하는 습관이 있는데, 지오반니가 <롤라>를 감상하는 프레임에서 파올라와 엠마 모두 화면 바깥으로 퇴장한다. 즉 지금껏 제 삶을 엄격하게 지배하던 지오반니, 곧 모레티의 영향력이 저물어가고 있음에, 더욱이 타인이 그에게 호기심을 더는 보이지 않음에 모레티의 '사적인 영화'는 암초에 부딪힌다.
더불어 영화 제작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지루함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오직 '도파민'만을 생성하기 위한 자극적이고 오락적인 컨텐츠가 범람하는 오늘날에 ‘진지한 모레티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외면 받아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넷플릭스’가 지오반니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제작비를 거저 주진 않는다. 넷플릭스는 190개국에 그의 작품을 배급하기 위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와 오락적인 도입부로 선회해달라고 요청한다. 만약 넷플릭스와 손을 잡는다면 모레티만의 영화는 190개국 사람들에게서 겨우겨우 찾아낸 공통점으로 만든 통속적인 영화로 전락할 것이다. 영화관이 아니라 OTT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이유로 '파라마운트 판결'(하나의 기업이 배급과 제작을 겸할 수 없게끔 조치한 미국의 판결이다. 판결 이전에는 영화관을 소유하여 배급까지도 독점한 제작사가 “어떻게 만들어도 황금시간대에 걸릴 수 있는” 영화의 질을 등한시했다면, 판결 이후에는 배급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영화를 고심했다)을 교묘히 비껴가는 제작사들은 다시금 틀에 박힌 공산품만도 못한 영화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이런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주세페는 손에 메가폰을 쥐고 있는 반면, 자신의 영화가 190개국 사람들에게서 겨우겨우 찾아낸 공통점으로 만든 통속적인 영화로 전락하길 원치 않는 지오반니는 주세페의 촬영 현장을 무기력하게 관찰하는 '구경꾼'으로 추락한다.
그러다보니 감독으로서 모레티의 진두지휘에 균일이 발생한다. 그간 모레티의 영화는 현실을 대체할 정도로, '현실보다 더 정확한 진실과 비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거부하는 오늘날의 제작 및 관람 환경이 그의 창작에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다. 1960년대를 재현하는 지오반니의 영화 세트장에 자꾸만 전자 담배나 헤드폰 등 2020년대의 '첨단 기기'들이 침투하니 말이다. 현실과 영화는 분리되다 못해, 현실에 의해서 모레티의 영화가 짓밟히고 오염된다.
하지만 모레티는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만의 영화를 고집한다. 아첨할 바엔 차라리 영화를 찍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가 주세페의 촬영 현장에서 ‘꼬장’을 피우는 시퀀스에서 완고함이 강하게 드러난다. 딱 한 테이크만 더 촬영하면 영화 촬영이 끝난다. 그 와중에 지오반니는 주세페의 영화가 폭력적이기만 할 뿐, 인간에 대한 조금의 윤리와 예의가 없다며 난동을 부린다. 단 1분이면 끝날 촬영을, 밤부터 아침까지 몇 시간을 지연시킨다. 그 과정에서 태초의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과 작가주의를 이끈 거장들의 말을 인용하여 “영화는 진실을 반영하고 주관적인 독특함으로써 특별해야 한다”라는 제 가치관을 묵묵히 설파한다. 그러나 지오반니가 벌인 소동은 그저 '꼰대'의 투정에 그쳤고, 끝끝내 주세페의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와 달리 지오반니의 영화는 완성까지 난항을 겪는데, 그런데도 묵묵히 버텨내며 외세에 타협하지 않은 영화를 연출하고야 만다. 그가 제작사의 기준에 따를 것이 아니라, 기어코 제작사가 창작자를 존중하게 만든다.
모레티는 언뜻 보기엔 휘황찬란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꿈을 꾸는 세계화의 물결, 곧 전 지구적인 전체주의에 반대한다. 그는 현실도 타인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꿈, 그리고 진실을 담은 꿈을 꾼다. 네오리얼리즘이 파시즘에 대항하며 지켜낸 '진실'이라는 가치를 괄시하면서도, 자기 좋을 대로 네오리얼리즘의 후광을 빌려오는 파렴치한 오늘날의 후배들, 그러나 모레티는 몸소 펠리니의 형식을 <찬란한 내일로>에 적용하며 무엇이 네오리얼리즘인지 증명한다. 불친절하게 이어지는 지오반니의 꿈 시퀀스, 현실과 꿈이 구별되지 않는 공상적인 시퀀스가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상상을 모조리 통합시키고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펠리니의 유산이다. 현실에서 지오반니는 자주 방해를 받는다. 그 누구도 <롤라>를 함께 봐주지 않고, 파올라는 이혼을 제안하며, 촬영 현장에선 다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 숏이 등장한 이후에 필히 지오반니가 꿈꾸는 숏으로 이어진다. 모레티는 타 예술과 차별화되는 영화만의 ‘편집’을 현실을 과감하게 잘라내어 영화, 곧 ‘꿈’을 이어내는데 사용한다. 그렇게 이어진 꿈에 지오반니의 '각본'과 '디렉팅'대로 연기하는 '젊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지오반니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사랑과 철학을 발화나 행동으로 옮긴다. 이로써 그가 생각하는 진리가 내일로, 곧 미래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또 그의 감정이 담긴 노래와 춤을 만인이 따라하며 공감해주길 꿈꾼다. 주세페의 영화가 공감 없는 ‘폭력’으로 얼룩져 현실을 오염시킨다면, 지오반니는 인간의 유대가 다시 회복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지오반니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는, 현실에서 지워진 인간다운 진실을 거짓말을 자르는 편집으로써 이어내며, 그것이 바로 꿈과 예술의 미덕이다.
또 주관적인 예술을 지향할 때, 예술다운 형식이자 카메라만의 움직임인 '줌인'이 부각된다. 파올라가 감정에 솔직하기 위해서 이혼을 결심할 때, 영화 촬영이 재개된 지오반니가 미소를 지을 때 모레티는 이들의 표정을 줌인한다. 그럼으로써 현실보다 더 가깝고도 상세하게 인간의 심리나 영혼을 가시화한다. 영화가 완성된 이후 만인이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결말에서도 모레티는 줌인에 준하는 ‘클로즈업’으로 그들 각각의 주관을 일일이 부각한다. 그 무수한 주관성의 총체가 영화다. 제 연기 철학을 결코 꺾지 않는 배우 베라(바보라 보불로바)부터, 지오반니의 견해를 무작정 수긍하지 않는 제작진 등 다양한 주관성의 총합이 혼자서 만들 수 없는, ‘공동 창작물’로서 영화다. 이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의 영화를 다르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예르지와의 만찬에서 환상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지오반니는 자신만의 닫힌 결말을 모두의 '열린 결말'로 수정하여, 영화에 참여한 모든 주관성이 반영될 수 있게끔 처리한다. 이렇게 영화가 영화다워지는 식사 및 퍼레이드 시퀀스에선 그 누구도 멈춰있지 않다. 모두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영화의 본질이자, 모레티가 오마주하는 펠리니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운동'이 부각된다. 그 운동은 영화가 담아낸 진실로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20세기엔 값비싼 필름으로 소박한 영화들을 연출하던 모레티, 이후 디지털이 태동한 21세기 직후까진 35mm 필름을 사용했지만, 이내 곧 적응하여 값싼 매체로 누구에게나 중요한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즉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변화에 모레티는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심지어 근작 <일층 이층 삼층>만 하더라도 그는 관객들에게 변화를 긍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런 그가 2010년대에서 2020년대로의 이행은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전 지구적인 배급 시스템을 구축한 OTT 스트리밍 서비스는 분명 기술의 미덕이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니, 초국가적인 OTT 기업이 제작에도 적극 관여하여 80억 인구의 보편적인 입맛과 구미만을 맞춘 단순한 결과물만 양성하고 있다. 모레티는 OTT 기업에 의한 영화가 전 세계인의 공통된 본성만을 좆으며 저속해질 것이라고, 이로써 인간의 다양한 진실을 반영하던 지난 세기까지의 예술이 모두 저물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이런 와중에 모레티는 20세기의 도발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를 자처한다. 21세기엔 비교적 정숙하던 모레티가 도발적인 ‘악동’으로 돌아가서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예술이란 솔직하고도 진실하며 자유분방하게 꿈꾸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