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여, 이동을 두려워 말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들불처럼 번지던 20세기 중반의 일본, 그야말로 야만과 광기가 정상처럼 여겨지던 시대에 '인본주의'를 어떻게든 사수하려 투쟁하던 식자가 있었다. 그 이름, '요시노 겐자부로'였다. 요시노는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의 타성에 '아이들'이 물들지 않기를, 이로써 아이들이 전쟁 이후 인간다움과 희망으로 사회를 재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요시노는 '코페르'라는 10대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청소년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요시노는 해당 작품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로 얽히고설킨 이 세계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가늠할 수 있기를, 이로써 약자 및 타자와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를, 정상이랄지 일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의심'할 수 있기를, 그러한 다원성과 인본주의만을 삶의 우직한 '고집'으로 삼을 것을 역설하였다. 요시노의 해당 저서를 좋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로, 그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에서 모티브를 따온 신작을 연출한다. 이로써 요시노가 후대에 전하고자 한 메시지에 시각적인 생명력과 운동을 불어넣고, 또한 '은퇴작'으로서 자신이 오늘날과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예술적 '유언'을 남긴다. (물론 하야오는 또 은퇴를 번복했다. 본 작품이 유언이 될지, 그의 또 다른 예술적 분수령이 될지는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 또 20세기 중반에 발간된 본 작품이 2020년대에 소환되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1941년 도쿄도 분쿄구 태생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본의 만화 영화감독이다. 하야오는 세계를 바라보는 특유의 철학을 현실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동시에 초자연적인 작화로 승화하여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일단 그의 세계관은 현실에선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두 차원'이 합쳐져 있다. 본래 단절되어 있던 지상/하늘에서부터, 속세/자연, 동양/서양, 인세/신성 등을 '오가는' 구성을 선보이거나, '혼용된 세계'를 창조한다. 그렇게 서로 적대시하는 두 세계가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꿈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야오의 작품은 주인공을 '여성'이 차지하는 빈도가 높다. 그리고 하야오가 생명을 불어넣는 여성들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현실 속 인류가 처한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나약할 것을 어려서부터 세뇌 받는다면, 하야오의 세계는 여성이 주체적인 차원을 오갈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 이상향과 합쳐진 상태다. 이상향과 합쳐진 상태라면 여성은 주체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며, 설령 이상향과 합쳐지지 못한 채 불완전한 세계를 오간다고 한들, 여성들은 쉽게 좌절하거나 순응하지 않는다. 세태는 개인의 '이름'이나 '꿈'을 앗아가려고 무시무시한 손아귀를 뻗치지만, 항상 하야오의 여성들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꿈에 다가선다. 특히 하야오 개인의 꿈이기도 했던 '비행'을 실현하며, 중력이라는 장애물에 좌절하지 않고 광대한 자유를 실천한다. 드물게 남성적인 작품이라 칭할 수 있는 <붉은 돼지>나 <바람이 분다>라 할지라도, 하야오의 태도는 유사하다. 하야오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펼쳐졌던 <붉은 돼지>에선 여전히 비행이라는 꿈을 추구하고, 이상과 조화되지 못한 현실 그 자체였던 <바람이 분다>는 꿈을 향해 아무리 나아가도 세태가 이를 짓밟는다.
개개인의 꿈은 주로 현실을 쏙 빼닮은 '문명'이 앗아간다. 그 문명은 거대한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이거나, 이기적인 욕망으로 추동된다. 이로써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문명의 야만이 도드라지는데, 이와 대립을 세우는 자연은 생명력과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원천으로 묘사된다. <이웃집 토토로>나 <벼랑 위의 포뇨>처럼 자연에서 인류의 삶은 고양되고 피어오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문명은 인간의 가능성을 원초적으로 축소하고 이름을 앗아가는 한편, 자연은 이를 되찾아준다. 하지만 문명은 자연을 향해 야만의 손아귀를 뻗쳐온다. 심지어 약자와 타자 구분할 것 없이 이상적으로 공존하는 <모노노케 히메> 속 에보시의 이상적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인간을 위해서 자연은 서서히 설자리를 잃는다. 문명과 자연의 접촉은 <벼랑 위의 포뇨>처럼 ‘교란’이다. 그래서 하야오는 자연과 문명 간의 '화합'을 요구한다. 자연과 인간의 화합뿐만 아니라,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타자 및 약자들과의 공존, 이로써 그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고 개개인이 꿈을 향해 비행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항상 무언가와 화해하는 하야오의 작품, 그러나 신작의 주인공 '마히토'는 화해하지 못한 존재라 하겠다. 마히토는 ‘현실’,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존재다. 이로써 마히토는 영화 내내 불만족스러운 모습인데, 이러한 심리는 '소년'이라는 애매한 위치에서 비롯한다. 소년은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 속 남성은 '무기'를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기에, 누군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하는 '보호자'임이 사실상 의무다. 마히토는 남성의 소임을 다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빈번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남성이긴 해도 ‘어려서’ 누군가를 보호하기엔 벅차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은 마히토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는 병원에 화마를 불러왔다. 남자라면 응당 어머니를 구해야하기에 소년은 병원으로 질주하지만, 어머니는 화마 속에서 사라지고야 말았다. 하야오는 소년이 병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추상적’으로 그린다. 마히토는 감히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서 어머니의 ‘구체적인 형상’을 지켜내지 못했고, 소년의 바람을 전운이라는 세태가 희미하게 흩뜨려 놓기 때문이다. 즉 소년의 정신은 성인 남성임을 지향한다. 그러나 소년의 육체는 어린 아이라서 말랑거리고 나약하다. 소년은 이런 자신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머니 사후에도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일말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며, 자신의 진실을 적대한다.
마히토는 보호자로서 자신이 엄마와 재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소년은 미숙하여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여성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니, 여성들과 대면하기 위해 연약한 '아들'의 육체를 과시한다. 그러면 모성을 자극받은 그녀들이 다가와주기 때문이다. 마히토는 머리에 자해를 하여 상처를 낸다. 그것을 본 아버지 쇼이치는 득달같이 달려와 불량배들을 혼내주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학교에 기금까지 낸다. 이후 할머니들과 나츠코가 소년 주위로 몰려들어 성심성의껏 간병해준다. 또 마히토가 호수 인근에서 왜가리, 민물고기, 두꺼비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니 나츠코가 화살을 쏴서 소년을 구출한다. 이렇게 고통에 쉽게 좌절하는 소년의 주변에는 항상 일을 대신 해결해주겠다고 ‘유혹’하는 존재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마히토는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엄마를 만나고 싶고, 또 자신이 도움을 받기 보단, 이젠 도움을 주고 싶다. 그 모든 꿈은 남자가 아닌 소년 마히토한텐 불발한다. 즉 마히토가 추구하는 '이상'은 육체가 묶여있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한다. 소년은 현실을 뛰어넘어서 이상으로 이동하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안 되는 자신의 처지를 외면한다.
그래서 하야오는 본 작품에서 '이동'을 탐구한다. 운송수단이나 신발 등을 단독으로 클로즈업할 정도로 말이다. 일단 마히토에겐 주로 '부동'이나 '수동적인 이동', ‘어색한 이동’이 나타난다. 엄마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달려 나가려는 마히토, 그러나 옷도 챙겨 입어야 하고 신발도 신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이 서툴고 매끄럽지 못하다. 끝끝내 이동은 지연되어 살아있는 엄마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이후 쇼이치에 의해 시골로 이사하고, 새로운 학교로의 전학 가며, 나츠코와 새엄마로 대면하게 되는 등 수동적인 이동이 연이어진다. 그 소년은 나츠코의 집 인근에 있는 기묘한 탑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탑에 가는 것은 금지라며 나츠코와 할머니들이 막아선다. 물론 소년은 점차 성장하며 능동적인 발걸음을 뗀다. 실종된 나츠코를 찾기 위해서 여러 시간과 꿈이 뒤섞인 그 탑으로 기어코 진입하니 말이다. 그러나 소년의 발걸음을 여러 장애물들이 막아선다. 앵무새 대왕이 소년이 올라오는 계단, 통로를 모조리 박살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소년의 처지와 대비를 이루는 대상은 일단 ‘여성’이다. 그런데 소년은 착각한다. 남자라면 어디로든, 특히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칼을 들고 길길이 날뛰는 쇼이치 또한 나츠코와 마히토가 있는 탑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앵무새 무리가 그를 향해 날아오자 발걸음은 가로막히고, 애초에 그는 아내가 생존해있는 병원에 도착하지 못했다. 쇼이치뿐만 아니라 큰할아버지 또한 자신이 지향한 완전무결한 이데아에 결코 도착하지 못했고, 앵무새 대왕은 그 세계를 아예 박살내기에 이른다. 마히토가 이동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실종된 나츠코를 찾고, 이미 죽어버린 어머니와 재회하고 싶어서, 즉 목적지는 '삶'이다. 그런 점에서 남성들은 삶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삶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들은 장소를 빌리거나 떠도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집 대신 나츠코의 집으로 향하는 쇼이치는 더군다나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을 목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츠코의 저택에 둔다. 이러한 남성들이 구축한 세계인 도입부의 도심이나 앵무새 대왕의 권역은 무수한 인파가 소년의 발걸음을 방해한다.
이와 달리 여성들은 이동이 유연하다. 영화 초반 입덧으로 인해 누워있는 나츠코에게 마히토가 방문한다. 이에 여성은 머물러있는 사람처럼 묘사되지만, 정작 나츠코는 남자들이 뒤따라오지 못할 탑으로 기꺼이 몸을 숨긴다. 나츠코 이전, 선조 여성 또한 똑같은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동이 원만한 이유는 이미지에 있어선 칼 같이 각이 져 있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둥글둥글'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둥근 얼굴형부터 임산부의 볼록한 배까지, 그녀들은 공처럼 삶이란 목적지에 도달한다.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히미'는 불 속을 뛰어들며 여러 차원을 오가고, '키리코'의 젊은 날의 모습은 '뱃사공'이며, 나츠코는 원하는 산실을 선택한다. 그녀들은 항상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착한 '집주인'으로 등장하고, 또 탑 내부에서 특정 차원은 결계를 쳐서 이방인의 침입을 거부하는데, 이런 와중에도 꿋꿋하게 걸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탑으로의 진입이 금기라고 말하던 나츠코가 정작 산실로 향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이동할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그녀들은 타인까지 능수능란하게 이동시킨다. 히미는 나츠코와 마히토의 관계를, 키리코는 와라와라와 펠리컨의 이동을 통제한다. 그 여성들이 향하는 장소는 ‘시간’이다. 탑 안에선 여러 시간이 뒤섞여 있고, 각각의 시간대를 ‘문’으로 선택할 수 있게끔 4차원으로 펼쳐져 있다. 그 시간은 이동에 따른 대가로서 존재를 '변형'시키는데, 여기서 남과 여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남성은 변신을 두려워하는 반면, 여성은 노화나 젊어짐, 부풀어 오름 등의 변형을 수용하기에 이동이 원만하다. 이렇게 무수한 시간을 거친 여성들은 많은 지식을 축적하여, 탑의 역사를 모조리 꿰뚫고 있다. 즉 이동하지 못하는 소년이 화해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의 남성이 아니라, 어디로든 이동하는 여성이어야 한다.
또 소년은 '자연'과 화해해야 한다. 인간이 이동하기 위해선 운송수단에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마냥 순탄하진 않다. 또 자신이 지닌 다리가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고, 기차나 인력거 등 외부 운송 수단을 빌린다. 이런 와중에 자연은 시동을 걸 필요가 없는 '날개'나 '지느러미'를 자체적으로 지닌다. 왜가리는 별 다른 준비동작 없이 순탄하게 하늘로 날아오른다. 또 소년의 부적절한 이동이나 부동은 '중력'에 발이 묶인 처지에서 비롯하는데, 영화 속 자연물들은 '조류'이거나 '수중 생물'이기에 중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설령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왜가리는 어찌나 유연한지 형체를 변화시켜 좁은 공간을 쏙 통과한다.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왜가리는 현실에서는 실제와 꿈, 탑 내부에서는 존재 이전과 이후의 차원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 자연은 왕성하고 풍요로우며 사치스러운 이미지다. 두꺼비, 펠리컨, 앵무새, '와라와라', 생선의 내장 너나 할 것 없이 무수한 개체가 스크린을 빼곡하게 채운다. 이들이 스크린을 한가득 채울 수 있는 이유는, '왕성한 식욕'이 설정하는 목적에 언제나 도달하기 때문이다. 펠리컨이나 두꺼비는 '게걸스러운 입'을 지녔고, 앵무새들은 취식을 위한 식기인 칼, 포크, 접시를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취식을 위한 목적지에 날아서, 또는 헤엄쳐서 어떻게든 도달하기에 이동하지 못하는 남성과 달리 늘 번성한다.
그래서 탑 내부의 초현실적인 여정은 마히토가 여성 및 자연과 화해해가는 과정을 반영한다. 이로써 능수능란한 이동이 가능하게 된 소년은 인간이 자체적으로 지닌 가장 파격적이고도 효과적인 이동 수단, '꿈'을 긍정한다. 꿈은 아주 손쉽게 현실을 뛰어넘어서 과거, 미래, 평행 우주, 현실 너머의 차원 등으로 이동한다. 초반부의 마히토는 바로 이 꿈을 부정했다. 왜가리와의 꿈속 조우가 현실로 일련 이어져도, 진실이 아니라 생각하는 눈치다. 대신 이동하지 못하는 남성들을 따라했다. 할아범한테 담배를 팔아서 칼을 갈고, 활을 들고 설친다. 그러다가 키리코 할멈이 마히토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비록 키리코는 소년에게 이동을 금지하면서도, 여성과 동행하는 소년은 속세에서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 현생이 펼쳐진 차원에서 그 이전과 이후로 향하는 '구덩이'를 통과한다. 젊어진 키리코가 거처에 남은 이후에는 히미와 동행한다. 이렇게 무언가를 창조하는 여성과 여러 차례 접촉한 소년은 삶을 해치는 칼로 마개를 만들어서 왜가리의 부리를 치료한다. 이후 왜가리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라면, 또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장소에 날고 기어 어떻게든 도달한다.
그렇게 꿈을 긍정하며 적극적으로 이동하는 소년은 더 많은 것들과 화해한다. 바로 현상의 ‘이면’이다. 소년은 펠리컨이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생명체로 여겼다. 그러나 죽어가는 펠리컨의 유언은 사뭇 다르다. 그들이 아무리 날아오르고 이동해도 '지옥'과도 같은 탑 내부를 떠날 수 없었다고, 먹을 게 없는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와라와라를 먹어야만 했다고, 이로써 그들의 비행은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반강제로 설정된 목적지에 도달한 것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 인간의 말을 따라하는 앵무새들은 이계에서 날갯짓을 포기하고 아예 걸어 다니기에 이른다. 심지어 당대 인간의 군국주의나 전체주의를 선망하고 모방한다. 즉 인간의 눈에 자유로워 보이는 자연물들의 이동은 다만 편리했을 뿐, 전적으로 자유롭진 않았다. 오히려 몇몇 자연은 인간을 선망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연에 더해 인간의 이면까지 접한다. 마히토는 엄마가 되기 이전의 히미, 집안에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키리코 할멈의 능동적인 젊은 시절, 떠맡겨진 마히토가 부담스러운 나츠코의 고백 등 타인의 비가시적인 측면과 마주한다.
이로써 소년이 자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이 결함으로 여기는 것들을 탑 내부에서 미화하며 지향하는 자연을 마주함으로써 결코 완전한 세계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완전함을 꿈꾸는 탑 내부는 질서와 조화는커녕, 불화와 충돌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완전함이 불가능한 이유인 ‘다양함’이다. 이로써 원하는 완벽과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시작한 이동은 그저 하나의 삶이 발현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으로 향하는 행위임을 자각하고, 이는 다른 환경에 진입했을 때 발현됨을 확인한다. 와라와라가 하늘을 뚫고 올라가 탑 바깥으로 나가면 다른 생명체로 윤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각 차원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불구덩이에 뛰어들거나, 공격적인 펠리컨 및 앵무새를 피하거나, 결계의 저항이나 날카로운 가시를 참아내야 하는 온갖 역경이 가득하다. 보통의 인간은 그 변화를 거부하거나, 금기 및 불법이라고 설정한다. 초반부의 소년은 어른으로 넘어설 수 있는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약한 기존 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쇼이치 또한 나츠코의 방랑을 부정한다. 이를 직면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을, 곧 삶을 원하는 소년은 고통을 참아내고 넘어서기에 이른다.
이로써 소년은 자신을 무한하게 변형시키는 현실과 화해한다. 마히토는 탑 내부의 세계를 계승해달라는 큰할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한다. 탑은 기본 조형들로 이뤄진 아슬아슬한 모형의 균형으로 지탱되고 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공식에서 조금도 틀어지면 안 된다. 그 세계에선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이 각자의 목적지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즉 변화를 거부하는 세계다. 분명 소년도 자신이 생각하는 어머니와 나츠코의 이상적인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세계로 이동하길 바랐다. 그러나 소년은 정작 세계의 원형도, 또 왜가리가 보여준 엄마의 이상적인 이미지도 모두 물처럼 흘러내리거나 붕괴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이동은 완전무결함이나 영생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대신 어디서나 보편적인 변화와 죽음으로 기어코 향하고야 만다. 이로써 죽음이 나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 세계의 본질이자 숙명임을 수긍한 마히토, 히미, 나츠코 모두는 죽어야 하는, 또 원하는 것이 자유자재로 펼쳐지지 않고 한사코 변화하는 부조리한 세계로 돌아간다. 거기서 무언가의 변형과 죽음, 곧 새들의 ‘배설물’을 흠뻑 맞아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 언젠가는 가야 할 곳, 되어야 할 형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히토는 자신과도 화해한다. 초반부의 마히토는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나츠코가 궁금하고, 또 동시에 나츠코를 선뜻 엄마라 인정할 수도 없었다. 더불어 관념대로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도 실망스러웠다. 어쩌면 당연하다. 무수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것이 삶이라면, 마찬가지로 감정이나 상대방과의 관계 또한 수많은 모순을 품을 정도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 모순들을 차마 이해하거나 수긍하기 어려웠는지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자신한테 부정직하게 된 마히토는 제 삶을 어디로 향해야할지 의문에 빠졌다. 이에 멈췄고, 또 다른 이들이 지시하는 목적지에 수동적으로 걸어갔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탑 내부에서 다양성을 경험한 소년은 이제 자신이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모두 다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이로써 모순이나 역설이 아주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내내 부정하던 사실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인정한다. 마히토는 나 자신을, 곧 제 삶을 되찾은 것이다. 이에 시골로 향하게 된 도입의 시큰둥한 표정과 달리, 탑 내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결말의 마히토는 담대한 표정을 띠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또 가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문장들은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진실한 사람에게 풍기는 죽음의 냄새” 등이다. 본 대사들은 현재의 나는 살아있지만 점차 죽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애초에 과거의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유일무이한 진리를 환기한다. 그래서 나를 배운 사람은 유와 무, 삶과 죽음 그 사이의 무수한 가능성들을 인정하며, 살면서도 죽고 죽으면서도 산다. 그것이 ‘다름’을 역설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을 하야오가 빌려온 이유라 하겠다. 이는 곧 하야오의 삶이 반영되어 있는 지금까지의 무수한 작품을 달리 보고, 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감상법으로 이른다. 그래서 하야오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본 작품에서 이전 작품들의 모티브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야오는 어떤 본질이나 이상에 귀착되지 않고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자신의 작품, 곧 삶을 시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무수한 다름에 도달하며 살아야 한다, 심지어 나 자신이 낯선 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마저 인정하면서”라는 철학을 몸소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