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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29.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불살라지지 않고, 그저 제 삶을 운행하라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괴물>(Monster) 

- 불살라지지 않고, 그저 제 삶을 운행하라

우리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은 착각이다. 인간은 감정과 사상과 이념을 시각에 투영한다. 그래서 똑같은 것을, 동일한 시간에 보더라도 각자는 달리, 각각의 주관성으로 본다. 같은 시간 속에서도 인류는 제 멋대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여기에 시간의 흐름이 가해지면 객관적이던 시각은 더한 수모에 처한다. 똑같은 것을 봤어도 각기 다른 시간의 맥락 속에서 진술하는 것은 더 판이하게 달라진다. 몇몇 영화는 바로 이 시야의 함정을 카메라와 편집으로 탐구하였다. 20세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 등이 대표적이고, 21세기에는 홍상수의 <오! 수정>이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후보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또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 루스탐 캄다모프의 <밑 빠진 가방>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나의 객관을 무수한 주관으로 변형하여 수용하는 우리의 동공과 뇌리, 이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괴물>에서 탐구한다.      


1962년 도쿄도 네리마구 태생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가족 영화와 아이 영화로 유명하다. 통념 속에서 가족극과 아이 영화는 희망적이다. 그런데 히로카즈의 작업은 그리 낙관적이지도, 밝지도 않다. 그 이유는 '어른들'에게 있다. 어른들은 자녀나 식구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을 자녀에게 맞추려 하거나, 자녀를 판단하는 외부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걸어도 걸어도>나 <태풍이 지나가면>처럼 부모 자식 간 관계는 서먹하다. 혈연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친자가 뒤바뀌자,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아들에게 품었던 정이 뒤숭숭 흔들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말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선 어른의 이익을 위해서 아이들을 내팽개친다.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처럼 자식이 나이를 잔뜩 먹어 중년이 되었어도, 보듬어지지 못한 섭섭함과 서운함이 남아있다. 반대로 다 큰 자녀도 부모에게 부모다움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런 어른들은 ‘이혼’이 잦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태풍이 지나가고> 모두 다 부모는 이혼한다. 상대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도구화하거나, 목적을 투영하는 태도가 이혼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부부 관계, 더 확장되어서 시댁과의 관계에서 이들은 부담을 느낀다. 그래서 어른들의 관계는 늘 불순하다. 대상과 진실하게 이어지기는커녕 항상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고 투영하기에 그 부담을 떨쳐내고자 단절된다. 그런 어른들로 이뤄진 히로카즈의 세계가 암담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욕심이나 외부의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있지 않다. 아이들은 <브로커>에서처럼 어른들의 행위를 맹목적으로 따라 하기도 하지만, <어느 가족>이나 <아무도 모른다>처럼 인간 본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선함과 인간성을 우직하게 실천하기도 한다. 그 아이들이 타락한 어른들에 의해서 단절되었던, 사회적이고 친절한 인간들의 끈을 이어 붙인다. 

그래서 히로카즈의 가족극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에서 '대안 가족'으로 뒤바뀌는 사례가 잦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브로커> 모두 다 그렇다. 이데올로기에 따른 공동체나 연합이 아닌, 순수하고 본연적인 인간의 연합을 아이로써 회복한다. 한편 연결되어선 안 되는 존재가 강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타자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면, 그 희생이 자신의 진실한 의지가 아니라면 <환상의 빛>처럼 그 희생을 거부하고 불현듯 떠나가기도 한다. 히로카즈가 이례적으로 스릴러를 연출한 <세 번째 살인>에서도 형사는 제 직업적 사명과 목적에 따라 진실을 밝히고자 하지만, 멀어져야 하는 것이 진실인데 목적을 위해서 닿으려고 하니 끝끝내 진실을 알 수 없다. 이렇듯 멀어져야 하는 진실이라면 그것조차 긍정하는 너그러움을 히로카즈는 반영하는데, 그가 <브로커> 이후 1년 만에 다시 아이 영화로 돌아온다. 

     

본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서두에서 운을 뗀 것처럼 ‘다시점 구성’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분명 똑같은 사건을 접했고, 또 동일한 시간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위치 및 각도 때문에 인식과 판단에 큰 편차가 발생하는데, 히로카즈는 이를 3부 구성으로 가시화한다. 1부는 사오리의 시점, 2부는 호리 선생의 시점, 3부는 미나토의 시점이 주가 되지만 중간 중간 교장 마키코와 요리의 시점이 뒤섞인다. 즉 각자의 시점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며, 이로 발생한 오해를 풀고 진실로 나아가는 감상이 감상자에게 요구되지만, 3부 구성 못지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설정과 연출이 있다. 

먼저 극의 전체에 거쳐 반복 언급되는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사람이 아니야?"라는 문장이다. 해당 구절은 인간이라면 응당 어떤 정신을 지녀야 할지, '자격' 문제를 거론함과 더불어, 내 육체를 자신의 정신이 지배하는지, 아니면 다른 것에 지배받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도입부에서 대비를 이루는 '발'과 '얼굴'의 대립적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가장 먼저 카메라는 요리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을 촬영한다. 이후 화재 현장으로 출동하는 소방차들이 연이어진다. 불이 나게 달리는 소방차의 ‘바퀴’는 발과 일맥상통한다. 또 캄캄한 나머지 미나토가 잘라낸 머리카락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밟은 사오리의 발도 부각된다. 이들의 행동은 앞선 문장에 따른다면 돼지 뇌로 작동한다. 제 뇌가 육체를 지배하지 아니하고, 타인의 정신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얼굴이 아닌 발로 접한 사오리는 교칙 위반으로 이발했다는 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실제론 괴롭힘에 따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다른 가능성을 감히 의심조차 못한다. 즉 발은 자신의 뇌가 아닌 돼지 뇌, 곧 타인에 의해서 작동되는 이미지다. 그 뇌가 돼지라는 것은 지배 주체가 멍청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가리킬지 모른다. 왜냐하면 지배하는 이들은 타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얼굴 이미지는 다르다. 뇌가 위치한 얼굴은 사오리가 소방관들에게 "불을 잘 꺼라!"라고 베란다에서 지시할 때, 또 등교하는 미나토에게 이것저것 당부할 때 부각된다. 즉 발만 놓인 이미지와 달리, 얼굴 이미지는 발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결정한다. 그리고 그 얼굴이 사라지면 수동적인 발처럼 무기력해진다. 죽은 아버지에게 일상 보고를 하려는 미나토는 아버지와 공유하고 싶은 비밀을 사오리가 듣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서 사오리의 얼굴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고, 그렇게 미나토를 판단하지 못하게 된 사오리의 정신은 아들의 돌발행동에 대처하지 못한다.

본 육체와 정신의 대립은 촬영에도 반영되며, 그것이 3부 구성 및 발/얼굴 이미지와 더불어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영화의 장치다. 도입부의 현란한 구도는 감상자의 지적 호기심을 열렬히 자극한다. 맨 처음 요리의 발로 추정되는 이미지는 기울어짐이 거의 없는, 물론 일반적인 시점은 아니지만 '아이 레벨 숏'이라 말할 수 있는 구도다. 경사가 없어 편평하다고도 할 수 있고, 동등한 눈높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아이 레벨 숏은 미나토와 요리가 함께 자전거를 탈 때 재차 사용된다. 요리의 발이 포착된 이후에는 소방차가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는 롱숏이 이어지고, 해당 장면은 지상에서 불이 난 3층 건물을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이다. 로우 앵글은 화재 현장에 올라가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밑에서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또 더 높은 곳에서 소방관과 소방차를 부르고 있다. 즉 거대한 위에서 지배받는 아래의 억눌림을 가시화한다. 이후 먼발치, 더 높은 곳에서 화재 현장을 관망하는 사오리와 미나토의 모습이 이어진다. 이들은 '하이 앵글' 구도로 건물을 내려다보며, 소방관들에게 불을 잘 끄라고 '지시'한다. 즉 하이 앵글 구도는 지배를 반영하며, 이후 사오리가 체벌 정황을 따져 묻기 위해 학교에 갈 때도 사용된다. 물론 이 때는 학교의 누군가가 사오리를 내려다보는 하이 앵글로 바뀌고, 실제로 사오리는 학교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다. 자신이 화재 현장을 내려다보던 것과 달리, 학교 구성원의 의중이 사오리를 통제한다. 즉 로우 앵글과 하이 앵글은 지배 관계를 드러내며, 이와 무관한 미나토와 요리의 아이 레벨 숏은 종속과 무관한 동등한 우정을 표현한다.     


정면에서 상대의 얼굴을 직면하면 기울어짐이나 왜곡이 없는, 상대의 정확한 이목구비를 응시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진실에 상응할지다. 키가 작은 요리와 달리 키가 좀 더 큰 미나토는 서로의 신장 차이를 해소하게끔 앉아서, 또 함께 엎드려서 동등한 구도로 상대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 '보기'가 영화에서 쉽지 않다. 하이 앵글이나 로우 앵글이 직접 사용되지 않더라도 이에 준하는, 주관적인 영향을 투사하는 왜곡된 보기가 주를 이룬다. 가장 먼저 히로카즈는 인간의 시야가 필연적으로 단편적인 맥락밖에 접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사오리는 미나토의 몸에 난 상처를 본 게 전부다. 즉 가해자라기 보단 피해자에 가까운 미나토의 정황밖에 보지 못했다. 반면 호리 선생은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거나, 난폭 행동을 일삼는 모습을 재차 접한다. 사오리의 시선보다는 좀 더 확장되어 있지만, 요리가 넘어진 이유가 학생들 때문임은 인지하지 못한다. 이렇게 대상이 어긋나있다고 판단한 사오리와 호리는 자꾸 개입하지만 이들은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했음에,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이 쏟는 영향은 그릇된 결과를 낳는다. 이에 영영 정확한 진실을 접할 수 없다. 즉 사오리의 시선은 학교로, 호리 선생의 시야은 미나토가 이상 행동을 하게 된 이전 맥락이나, 요리의 가정환경 및 교우 관계로 확장되지 못한다. 정확한 맥락은 3부에 가서야 겨우 드러나지만, 이마저도 감상자만 정확히 접할 수 있을 뿐 영화 내에 속한 미나토나 사오리의 접근은 다소 제한적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단편적인 이미지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인간은 보지도 않은 것을 봤다고 왜곡하거나, 대상의 편견에 비추어 거짓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사람들은 이미지가 현실에 대응한다고 믿는다. 그림이나 사진, 영화 등의 이미지가 현실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설령 그것이 허구라 한들 이미지의 모태가 된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에선 원형 없는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닌다. 아이들은 호리 선생이 걸스바에 갔다는 실체 없는 루머를 퍼뜨리는데, 사실 검증도 되지 않은 이 소문은 학부형들과 선생들의 귀에도 사실인양 퍼져간다. 호리 선생의 루머는 다소 나쁜 그의 관상 때문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며 고스란히 수용한다. 뿐만 아니라 호리 선생의 체벌, 교장이 남편에게 손녀 사고를 덮어씌웠다는 등 그 누구도 직접 보지 못한, 단지 의심과 추측만 난무할 뿐인 이미지가 난립하고, 그것들이 흡사 직접 본 양 호도된다. 

보기의 함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본 것도 사실이라 확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요리는 아버지 덕분에 돼지 뇌를 치료했다고, 이제는 남자애 대신 여자애를 좋아 한다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요리가 사실을 실토하기 전까진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트에서 아이들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교장은 사오리의 방문에 앞서 교무실을 정성스럽게 세팅하고, 심지어 대본까지 쓴다. 장소는 교직원들이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주게끔, 대본은 책임 소재에서 학교가 빠져나갈 수 있게끔 추상적으로 처리한다. 그 이미지의 결과는 잘못이 없는 호리 선생이 다수의 학부형 앞에서 공개 사과를 하는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렇게 내가 본 이미지는 사실도 아니거니와, 전체 맥락을 알 수 없기에 모호하고 미심쩍다. 1부 사오리의 시점에서 교직원들의 해괴한 태도, 2부 호리의 관점에서 마니토의 이상 행동이 말이다. 즉 우리는 하나의 진실이 속한 전체 맥락을 볼 수도 없고, 아예 그 진실의 편린조차 접할 수 없으며, 그나마 본 것도 오류로 가득하거나 무지하다. 이에 히로카즈는 디지털인 본 작품의 질감을 흡사 16mm 필름이나 35mm 필름처럼 자글거리게 처리한다. 그레인이나 노이즈가 낀 것처럼 선명하지 않게, 이로써 감상자가 본 흐릿한 것들을 자꾸 의심하게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왜곡된 이미지가 전달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히로카즈는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봐지는 사람’이 나뉘고, 바라봐지는 사람은 바라보는 사람이 원하는 시각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만약 이를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호리 선생 사건이 공론화되어 윗선까지 올라가면 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큰 불이익을 받는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무마하려고 호리 선생을 희생양으로 내세우고, 교장 본인은 학교 바닥에 단단히 달라붙은 '껌'을 열심히 청소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연기한다. 요리와 미나토도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리는 '폭군'이라 칭할 법한 아버지와 함께 산다. 요리 아빠는 온순하고 여리여리하며, 또 사내아이에게 끌리는 자신의 아들을 '괴물'이라 칭한다. 괴물에서 인간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물고문을 일삼거나, 요리의 몸에 난 상처로 보건데 직접적인 폭행도 가할 것이다. 교우 관계 또한 아이들, 특히 소년들은 남자답지 못한 요리를 '외계인'이라 칭하며 따돌린다. 폭력적인 남자애들이 주도하는 학급에서 폭행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나토는 자신을 엄격하게 검열한다. 요리와 붙어 있고 싶지만, 학교 내에서는 말도 걸지 말라는 등 말이다. 즉 바라봐지는 사람은 보는 사람에 의해 괴물로 규정되어 박해당하지 않게끔 제 진실을 은닉한다.

아이 영화인 <괴물>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부모이거나 그에 준하는 보호자 및 교사다. 그리고 본 작품은 히로카즈가 오랜만에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초장부터 내세운 작품이다. 히로카즈는 다수의 작품에서 일본 내 보편적인 아버지상을 주인공으로 상정했고, 어머니를 중점적으로 탐구한 작품은 <환상의 빛>이나 <아무도 모른다>,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에 그쳤다. 그마저도 후자는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강제하는 보편적인 어머니 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이에게 온 생을 바치기보단,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나간 주체적인 여성을 탐구하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간의 히로카즈 영화와 본 작품을 비교하자면, 자연스레 사회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특히 본 작품에선 미나토를 남편과 사별한 사오리가, 요리는 아버지 혼자 키우기 때문에 성 관행에 따른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일단 어머니는 명백히 잘못된 것만 고치려 한다. 미나토의 상처와 진술이 있었기에 학교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미나토가 실종되거나 이상행동을 보였기에 어머니는 개입했다. 그러다가도 선생이 말한 대로 미나토가 토치를 지니고 있어 가해자로 의심되자, 요리의 집에 사과 및 진상파악을 하러 방문한다. 뿐만 아니라 교장 또한 호리 선생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실토하는 미나토를 악기로 관용해주니, 여성은 명백히 잘못된 것에만 개입하고 그마저도 품는다. 물론 사오리 역시 사회에서 정상적이라 통용되는 행복의 기준과 가정의 모습을 미나토에게 의도치 않게 강요하지만, 이는 죽은 남편의 바람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반면 요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기준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그러나 요리 자신으로는 충분히 멀쩡한 아들을 뜯어 고치려한다. 호리 선생 또한 콘돔이 없어서 섹스를 거부하는 여자 친구에게 관계를 강요하고, 책의 오타를 지적하여 우월감을 느끼는 취미가 있다. 또 영화 속 남자들은 정원장어나 금붕어를 키우고, 그 중에서도 요리는 집을 정리하는 와중 금붕어를 버리려고 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즉 아버지들은 자신의 기준에 대상을 맞추고자, 멀쩡한 것을 굳이 손대서 아작 낸다. 애초에 어긋나 있던 것이라 한들 대상을 위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영향을 쏟는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시각을 볼 수 없다. 요리의 아버지가 고주망태인 것처럼, 자신이 주관적으로 왜곡한 욕망의 이미지를 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 작품은 권력과 아버지들의 개입이 도드라지는데, 이는 영화의 사운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괴물>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지만, 그 점이 아니더라도 감상자의 고막은 쉴 새 없이 진동한다. 왜냐하면 불길한 사이렌 소리나 사라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목청 높여 부르는 고함, 사물이나 인물이 충돌함에 발생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전례 없이 강렬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각은 바라보는 이의 눈에 보기 좋게끔 멀쩡한 것을 굳이 뜯어 고치는 폭력의 청각화라 말할 수 있다. 아버지들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선 죽고 불태워져야 한다고 말하니, 변형의 에너지에 따른 거친 소리가 발생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영화 후반부의 '태풍'으로도 이어진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맑은 날씨는 가시고, 대신 격렬하게 휘날리거나 변형시키는 거친 날씨가 닥쳐온다.     


그래서 아이들은 '빅크런치' 개념을 인용한다. 변형 이전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진실을 되찾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정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발이 아닌, 스스로 운행하는 발과 다리를 되찾고 싶다. 그래서 히로카즈는 이들이 능동적으로 조종하는 자전거나 기차를 부각한다. 또 어른들이나 악독한 남자애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아지트’를 꾸미고, 거기서 자신들의 진실과 서로를 향한 애정을 보존한다. 이를 앗아간 것이 시야의 한계이기에, 히로카즈는 상대의 관점을 접할 수 있는 3부 구성을 취하고 심지어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광활한 화면비인 2.39:1을 선택한다. 좌우로 어떤 시각도 잘려나가지 않게끔. 3막 구성과 더불어 아이들이 아지트에서 즐기는 게임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타 동물의 신체로, 또 내가 타인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본다. 이렇게 아이들 역시 3막 구성에 준하는, 타자의 시야를 접하며 시선의 한계를 극복한다. 만약 3막 중 일부만 봤다면 진실을 되찾은 결말은 감히 허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3막을 전부 다 접하고 나니, 이성애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가 설파하는 남성성에 물들지 않은 미나토와 요리가 등장한다. 흉흉한 날씨가 갠, 맑고 화창한 날씨 속 있는 그대로.

그러나 3부를 전부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영화 바깥의 감상자에 그친다. 아무리 호리가 시야의 한계를 극복하여 아이들의 시점에서 암호를 풀고, 또 선생과 사오리가 오해를 풀어 서로의 시선을 확보했다고 한들, 그들의 눈앞에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호리나 사오리를 제외하면 여전히 편견 가득한 사회 속에서 새로 태어나야 하는, 그래서 죽어야만 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이에 결말은 태풍으로 인한 미나토와 요리 사후이거나, 3막을 모두 다 접한 감상자에게만 허락된 진실인 것이다. 즉 제 정신으로 운행되는 주체적인 육체, 곧 자신의 진실을 회복하기 위해선 어떤 한계도, 장애도 없는 시야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유한하고 주관적인 시야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시선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괴물>이라는 영화에 그쳐선 안 된다. 감상자의 눈 속에서만 밝고 활기차게 뛰놀 수 있는 순수한 존재는 어디에서든 제 삶을 자유롭고도 명랑하게 운전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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