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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0. 2023

아키 카우리스마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인간이라면 노래하고 사랑하라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 <사랑은 낙엽을 타고>(Fallen Leaves) 

- 인간이라면 노래하고 사랑하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의해 전 세계는 혹독한 추위에 둘러싸여 벌벌 떨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원자재 공급대란을 촉발했기 때문이요, 특히 러시아에 에너지를 다량 의존하고 있는 유럽은 더더욱 차가운 겨울을 마주했다. 이에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졌다. 공과금을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건 먼지뿐이라고 토로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시선도 차가워져만 간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시대에서 내게 타인은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해야 한다. 차갑지만 따스한, 딱딱하지만 말랑말랑한 카우리스마키의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이다.      


1957년 오리마틸라 태생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냉소적인 무표정'이다.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절제된 연기만이 배우들에게 허용되는데, 이를 두고 누군가는 소심하고 무심한 핀란드 문화의 표현이라 말하지만, 마냥 민족성으로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카우리스마키는 민족성 외의 이유를 영화에서 따로 제시한다. <오징어 협동조합>에서 빈궁한 노동자들에게 도시는 좌절을 안기며, <아리엘>에서 착취당하다가 버려진 노동자들은 끝끝내 자살하거나 교도소로 향한다. 즉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는 무한한 우울과 절망·비극을 보편화하며, 여기서 무표정은 고통을 느끼지 않게끔 단련된 '체념'적인 태도라 진단할 수 있다. 

그래서 카우리스마키는 자본주의가 합리화하는 비인간적인 노동을 고발한다. 노동자들은 제공한 노동력만큼의 몫을 돌려받지 못한 채 잔혹하게 버려진다. 버려진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재취업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또 이들은 지극히 불운한데, 그들을 착취한 사람들은 결코 잡혀가지 않지만, 착취한 대상에게 항변하는 노동자들은 항상 수감된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자본주의 사회는 일해서 생존할 것을 촉구하기에 이들은 불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항상 여행을 떠난다. 카우리스마키의 여행은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인 휴양이 아니라, 기존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탈출한 노동자들은 도시, 마을, 교도소 등의 너머에 분명 희망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본 여행과 탈출에 빠지지 않는 운송 수단은 바로 '배'다. <오징어 협동조합>과 <아리엘> 모두 다 결말에서 '출항'하는 사람들이 포착된다. <천국의 그림자>에서도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탈린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올라타며, 근작 <르 아브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배를 타고 자국 너머로 떠나 생명력으로 가득 찬 ‘물’ 위에서 희망을 꿈꾼다. 또 <르 아브르>나 <희망의 건너편>의 도입은 반대로 '입항'하는데 물 위에서 낙관을 기대했노라면, 끝끝내 도달한 '육지'에선 절망과 비관이 잦지만, 카우리스마키는 이런 가운데서 사랑으로 서로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카우리스마키의 희망은 감각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노래'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음악은 항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대사를 딱딱하게 처리하는 무표정한 인물들 곁에, 고전적이고도 낭만적인 무드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니 괴리감이 느껴진다. <오징어 협동조합>에선 노래와 함께 매우 과장된 표정을 구사하는 ‘무성영화’를 보러 인물들이 영화관으로 향하니 괴리감은 배가 된다. 여기서 음악이나 영화는 무표정한 그들이 현재 불가능한, 하지만 지향하는 표정, 감정을 대신 보존한다. <아리엘>에서 강도를 당해 기절한 카스리넨에게서 음악은 갑작스레 끊기고, 이후 노동을 중단하고 클럽에 갔을 때 노래는 재개된다. 그리고 외부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이윽고 주인공이 직접 연주하는데, 카우리스마키는 노동자들 자신이 직접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 희망의 실현으로서 말이다.     


최근 카우리스마키는 ‘항구 2부작’으로 묶이는 <르 아브르>와 <희망의 건너편>에서 ‘난민’의 삶을 비추고 은퇴를 선언하였는데, 그는 다시 핀란드인 노동자 이야기를 연출하며 은퇴를 번복한다. 그가 기존 색채를 들고 되돌아온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다뤘던 난민 중 일부가 이젠 핀란드의 노동자가 되어 자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건너편>에서 칼레드를 맡았던 셰르완 하지는 여전히 불안정하긴 하지만, 그래도 핀란드에 정착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재등장한다. 이렇게 핀란드 노동자, 그것도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본 작품은 <천국의 그림자>나 <아리엘> 등 카우리스마키의 20세기 대표작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카우리스마키의 특징인 무표정 디렉팅부터, 그들이 사는 어두침침하고 빛바랜 공간, 낙후된 처지 등 모든 것이 유사하다. 20세기 작품들과 2023년에 내놓은 신작의 공통점에서 우린 카우리스마키가 노동자 영화를 소환해야하는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배우들이 세대 교체되며 젊어졌다고 한들, 노동자들은 그제나 지금이나 똑같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처한 부조리는 수면 위로 잘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카우리스마키는 노동자를 비추는 양식을 다시 꺼내온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어째서 1980년대나 2020년대나, 단지 이름만 뒤바뀐 똑같은 ‘노동자 배역’을 맡아야 하는가? 카우리스마키는 이를 질문에 '청각'으로 답한다. 영화는 아주 차갑고 건조하며 딱딱하다. 이는 연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우리스마키가 부각하는 소리도 원인 중 하나다. 영화의 시작부터 차갑고 냉정한 바코드 소리만 들려온다. 분명 바코드를 입력하거나 찍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인기척이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바코드 리더기를 쥔 노동자의 입은 엄격하게 침묵하고, 대신 기계에게 ‘발화 권한’을 내어준다. 근무 중 인간은 언어를 박탈당하며 인간다울 수 없는 것이다. 이후 안사가 퇴근할 시간이 되자 동료와 겨우 한 마디 인사한다. 그러나 퇴근 했어도 발화를 이어가긴 어렵다. 일을 마치니 세상엔 어둠이 내려앉아서, 함께 여가를 즐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후 고립된 안시는 혼자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마트에서나 집에서나 ‘침묵’이 끊이지 않는다. 적적한 그녀는 라디오를 틀어보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병원을 비인도적으로 폭격했다는 흉흉한 소식만 전해진다. 인간을 위한 소리는 송출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장가', 즉 아기를 위한 사운드가 흘러나오지만 그 볼륨은 턱없이 작다. 직후 카우리스마키는 편집으로 홀라파가 일하는 장면을 연결하는데, 해당 숏에서 그가 사용하는 기계 장비의 소음은 자장가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크다. 즉 인간의 소리, 인간을 위한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거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다. 이는 홀라파가 여인숙에 묵을 때도 마찬가지로, 자막으로는 송출되는 노래 소리는 감상자의 귓가에 속삭여지듯 속닥속닥 들려온다. 반면 커다란 것은 기계 소리, 곧 자본주의를 반영하는 소리다.

즉 자본주의가 인간을 역으로 압도한다는 사실이 청각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홀라파는 제 것이 아닌 인생, 자본주의가 주도권을 가진 제 인생에 크게 미련을 갖지 않는다. 술을 흥청망청 마시며, 자신은 일찍 죽어도 좋다고 동료 후오타리에게 말한다. 홀라파는 직장에서도 몰래 술을 마시다가 두 차례나 해고되었고, 안사와 카페에서 데이트할 때도 커피에 술을 섞어 마셨으며, 그녀가 초대한 날에도 술만 찾다가 퇴짜를 맞았다. 동시에 그는 미련이 남아있기에, 자신을 되찾고자 술을 마신다. 그에게 술은 맛있다. 이는 노동현장이 인간의 몸에 가하는 부정적인 감각과 정 반대다. 또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그는 버스정류장에 널브러진 상태로 발견된다. 술을 마시면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있는데, 자본주의는 인간의 의식에 돈을 향한 끝없는 충성과 봉사를 각인시킨다. 그래서 홀라파는 술을 마신다. 자본주의가 세뇌한 의식을 잊고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그렇게 되찾는 과정에서 건강을 잃지만 몸이 튼튼해봤자 착취만 더 당할 뿐이기에.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본주의로부터 느끼는 불쾌는 어떤 연유로 촉발되는가? 안사가 일하는 마트에선 어차피 폐기할 물건조차도 노동자에게 감히 허용하지 않는다. 안사는 물품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소비기한이 지난 상품들을 폐기한다. 그 중 일부를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챙겼는데, 자본주의는 제게 필요가 없는 물건조차도 노동자에게 거저 내어주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폐기할 물품을 챙겼다는 이유로 그녀들을 해고하려 하다가, 안사의 동료들이 함께 들고 일어나니 선심 쓰듯 다시 일하라고 말한다. 분명 노동자들이 노동을 거부하면 손해를 보는 것은 기업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조금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심지어 홀라파는 공장에 폐기 상품도, 더 나은 대우도 아닌, 단지 낡은 장비의 교체를 요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장은 자기 차를 바꿔야 해서 장비를 바꿀 여력은 없다고 답한다. 이후 사고가 났다. 홀라파가 술을 마시고 근무한 것도 맞지만, 그의 지적대로 낙후된 장비도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도 사장은 장비 탓은 쏙 빼놓고, 홀라파가 음주 상태로 노동한 것만 지적하며 그를 해고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소수의 기득권 자신들밖에 모른다. 그들의 착취와 하대 때문에 노동자는 불쾌감을 느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다시 일을 하러 가야한다. 기업은 노동자에게 폐기될 음식조차 내어주지 않을 정도로 박하기에 노동자는 항상 빈곤하다. 심지어 영화 속 라디오에서 반복 보도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원자재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안사는 전기세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랄 정도다. 이에 집안의 모든 전자제품 코드를 뽑아버린다. 또 취업을 하기 위해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빌리는데, 그 비용 또한 몹시 비싸다. 즉 노동자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는 열악한 환경에 속해있기에 착취당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처해야 하며, 심지어 취업하는 과정에서도 돈이 들고 빚이 생기기에 어떻게든 노동 현장에 몸담고 있어야 한다. 그 열악한 환경을 자본주의, 그리고 전쟁이 만들어낸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인간적이고 사악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개개인의 인간다움이 박탈된다. 가장 먼저 인간의 감각을 빼앗는데, 청각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행동 역시 매우 뻣뻣하다. 그 이유는 마트에서의 레일이나 바코드 기계, 공장에서의 중장비 등 기계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느끼지 못하고, 기계와 같은 무감한 사물로 전락한다. 더불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타인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안사가 전기세에 기겁하며 라디오 전기 코드마저 뽑아버린 결과로 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송출되지 않는다. 돈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민, 동정을 잃는다. 안사가 취업한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장은 안사에게 세금이나 보험 관련 서류를 받지 않고 대신 봉급을 현찰로 주겠다고 말한다. 이로써 사장과 안사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타인, 그것도 약자를 위해서 더는 돈을 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혹독한 상황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을, 이로써 사회를 느슨하고도 연약하게 해체한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야만이 20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카우리스마키도 마찬가지로 ‘반복’한다. 노래로써 감각을, 그리고 서로간의 연대를 말이다. 분명 홀라파는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계기로 삶에 열의를 띤다. 바로 안사를 만난 이후부터다. 안사는 그와 영화를 본다. 또 맛있는 음식과 스파클링 와인을 제공해주고, 그녀의 농담도 아주 재치 있다. 특히나 본 작품에서의 웃음은 나는 전혀 생각조차 못할, 오직 타인만 생각할 수 있는 유머에서 비롯하는 '부조화 웃음'이다. 리사가 안사에게 "남자들은 다 돼지야"라고 말하자, 안사가 "돼지는 착하고 똑똑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의 기대나 예측과 부조화한 언행에서 발생하는 웃음이기에 타인이 필요하다. 안사가 선사하는 감각의 즐거움을 깨달은 홀라파는 결말,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정도로 생에 열의를 보이며, 이렇게 느끼기 위해서 나와 타인은 연결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감각이 철학자 질 들뢰즈에 의한다면 ‘힘’이기 때문이다. 즉 내게 어떤 힘이 미쳐야 인간은 느낄 수 있는데, 외부나 타인으로부터 힘이 미쳐지기 위해선 곧 그것과 어떻게든 관계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가하는 힘은 끔찍하고 참혹하다. 카우리스마키는 안사와 홀라파의 노동 현장뿐만 아니라, 육중한 중장비를 영화 내내 부각하는데, 그것이 연약한 인간에게 미칠 힘은 아주 파괴적일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진저리가 난 인간이 단절과 고립을 자처하게 될 때, 카우리스마키는 긍정적인 감각, 곧 영화나 음악의 감각으로 인간 사이의 ‘다리’를 재건한다. 가라오케에서 후오타리가 노래를 부를 때, 편집으로 그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듣는 청중을 연결한달지, 이름도 연락처도 몰랐던 안사와 홀라파가 함께 데이트를 했던 영화관에서 다시 재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렇게 연결된 상대를 ‘사랑’한다. 내 귀에 좋은 노래를 제공해주는 그를, 동시에 내 노래가 듣기 좋다고 해주는 상대방이 소중하다. 이는 단순 배려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안사는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홀라파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서 식기와 와인을 새로 산다. 홀라파는 안사를 기다리다가 신발이 죄다 헤졌으며 그녀가 싫어하는 술까지 끊었다. 즉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이익과 관련한 대상과의 연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무조건적인 이타심과 좀 더 폭넓은 관심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안사는 제게 아무 이득도 없는, 단지 안락사 위기에 놓여 불쌍할 뿐인 떠돌이 개를 입양하고, 채플린이란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애정을 쏟는다. 또 안사와 홀리파가 사랑하자, 그녀는 라디오를 다시 켜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분노한다. 마지막으로 홀라파의 지갑에서 이익이 나오게 만들어야 할 여인숙 사장은 양복을 거저 내어준다. 간호사 역시 홀라파에게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옷가지를 내어주는데, 타인을 향한 사소하지만 다정한 관심이 다시 회복하길 카우리스마키는 간절히 바란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영화의 원제 '낙엽'을 해석할 수 있다. 낙엽은 차가운 계절의 상징이다. 이는 곧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전 세계에 상응할 수 있다. 그 사태는 전쟁, 곧 사랑을 모르는 어느 독재자에 의해서 발발했다. 이런 와중에 카우리스마키는 극의 후반부에 옷가지를 재차 내어준다. 옷가지를 내어준 사람들은 낙엽이 떨어진 나무처럼 황량해질지 모른다. 이 추운 계절에 말이다. 그러나 사랑, 그리고 내어줌은 일방적이지 않다. 상호 헌신이기에 낙엽을 떨어트리는 법을 아는 나무들은 오히려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될지 모른다. 즉 낙엽의 인용은 단순히 차가운 계절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서로 낙엽을 내어주고 떨어트리는 나무의 태도로 확장되며, 그것이 곧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 인간다움의 요건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짐 자무쉬의 좀비 영화 <데드 돈 다이>를 인서트하는데, 해당 작품에서는 트럼프 집권 이후 극심해진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좀비에 빗댄다. 이는 카우리스마키가 본 작품에서 묘사하는 자본주의와 별 다를 바가 없다. 타인에게 측은지심을 품지 않고 오직 본인의 이익만 중시하는 좀비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느낄 때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 물론 사랑은, 곧 연결은 쉽지 않다. 영화 속 둘은 이름도 몰랐고, 전화번호조차 잃어버렸으며, 심지어 만나자고 했을 땐 사고가 났다. 그것이 사랑을 방해하는, 여전히 비인간성으로 얼룩진 핀란드의 노동현장이자 사회를 반영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래서 카우리스마키는 물질성, 곧 유한함이나 쇠퇴가 느껴지는 35mm 필름을 오늘날까지도 포기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물질성, 곧 극에 가득한 죽음을 이겨내는 삶이자 사랑이다. 35mm 필름의 열악함에 비해서 아주 풍부한 카우리스마키의 플레이 리스트처럼,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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