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프레임, 어디에 머물 것인가?
사랑은 정치적이다. 법에 의해 가능한 사랑과 불가능한 사랑이 결정된다. 이성애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항상 가능했던 것은 두 남녀의 사랑, 반면 두 여성이나 두 남성의 사랑은 오랜 시간(또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또 민족이나 인종 간 위계가 나뉘는 국가에선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른 사랑이 금지되었다. 불과 한 세기 전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의 결합이 금지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법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관습이나 개인의 욕구에 따라 사랑은 정치적인 행위로 변모한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에서 결혼은 연인들의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유사한 계층 간의 결합으로서, 계급 재생산 과정임을 밝혀낸다. 인간은 사랑과 결혼에 있어 계급과 집단적 궤적을 고려하고, 설령 이를 눈여겨보지 않더라도 본성적으로 나와 유사한, 그럼으로써 결국엔 내가 속한 계급에서 연인을 만난다. 이에 결혼에 의한 계급 이동은 수직이동이 아니라, 동 계급 내에서 이름만 달라지는 횡단이동에 그친다. 즉 사랑은 개인을 희생하여 법을 강화하거나, 현재의 만족스러운 나를 대물림하고 재생산하는 횡단이동의 수단이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지지부진한 일상을 탈피하는 즐거운 경험이자, 세상을 달리 보는 특별한 렌즈여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법이란 장애물을 넘어서고, 자기 보존의 환각에서 벗어나 타자를 긍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파나히의 첫 번째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는 <노 베어스>에서 그가 집중하는 것도 ‘사랑과 정치의 관계’다.
1960년 미야네 태생의 자파르 파나히는 이란의 영화감독이다. 이란의 전설적인 시네아스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그는 스승의 작품 세계를 이어받아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를 줄곧 연출한다. 또 이란 영화의 전통 중 하나인 ‘아이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아이 영화의 관습이나 전형성에서 벗어나, 영화가 담아내는 아이 이미지가 과연 아이의 진실을 반영하는지 고민한다. 즉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 경계를 허물고 오가는 파나히는, <서클>에서부터 <오프사이드>까지 현실과 밀착한 리얼리즘 영화를 연출했다.
그러나 그 직후, 파나히의 영화 세계는 거대한 지각 변동을 겪었다. 2010년대에 이란 당국이 그를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란 문화부는 2010년 3월에, 대통령의 비위를 기록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였고, 국가 안보 혐의를 씌워 그에게 6년형을 선고하였으나, 다행히 2011년 가택 연금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하지만 최근 2022년 7월 11일 이란 당국은 파나히를 또다시 체포 및 구금하였고, 그래서 본 글에서 다루는 신작이 프리미어된 베니스 영화제를 방문할 수도 없이 수감되었다. 이렇게 2010년대부터 그의 이동에 제약이 가해졌고, 또 촬영금지형에 처했기에 이란 당국이 '영화'로서 승인하는 문법을 어기고, ‘영화가 아닌 영화’를 연출해왔다. 이란 당국이 요구하는, 심미적이고 보기 좋게 다듬어진 영화를 의도적으로 거부함에 최근 그의 영화는 거칠고 산만하다. 또 수감 이후 그가 바라는 관념을 당당하게 실현하기엔 제약이 가득하다. 그래서 비교적 큰 규모였던 <서클>, <오프사이드>에 비해 약소한 규모로 선회한다. 파나히는 영화 촬영을 공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기 위해, 일반적인 <택시>인양 위장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소한 카메라로 몰래 중요한 것들을 담아낸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와 <3개의 얼굴들>에서는 전문 장비 대신 ‘휴대전화’로 촬영한다. 연출 또한 발이 묶인 파나히의 현실을 반영한 고정된 구도, 고개만 까딱거리는 패닝 및 틸트, 당국이 금지하지 않은 대사 읊기 및 연기 등 매우 단출한데, 이러한 형식과 장비가 당국의 탄압을 증언한다.
이러한 연출로 포착하는 것은 진실한 삶이다. 파나히의 아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현실을 운운하며 회유한다. 이에 아이가 본래 지향했던 목표를 잊게 만들지만, 궁극적으로 파나히는 타락한 사회에 물들지 않은 길을 되찾고, 아이를 매개로 연대의 힘을 역설한다. 아이 영화의 여정을 마친 이후엔 페미니즘 영화를 연출해왔다. 여성들의 진실은 항상 ‘유폐’되거나 ‘소멸’되거나 ‘고립’되는데 파나히는 그녀들이 길을 떠나는 <서클>이나 <오프사이드>를, 자신 또한 진실을 향해 굽이굽이 어려운 길을 떠나는 <택시>와 <3개의 얼굴들>을 연출하며, 여성과 예술가 모두 사회의 탄압을 받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또 이란 내 예술가에겐 특권이 주어지는데, 이를 상대의 진실을 존중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파나히의 철칙이다. 그는 신작에서도 예술가에게 주어진 특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당국의 방해를 피해 어떻게 영화를 연출할지, 그렇게 촬영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뇌한다.
파나히가 구금 직전 완성한 작품 <노 베어스>에선 그가 받는 핍박과 이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저항이 구성과 연출에 반영된다. 당국의 검열로 인해 그의 손에서 가능한 장르는 기껏해야 '실내극'에 그친다. 감시가 삼엄한 테헤란을 피해, 튀르키예와 국경을 맞댄 외진 마을, ‘자반’에 머무는 파나히, 하지만 여전히 그는 감시에서 온전히 달아날 수 없다. 숙소 인근 정도는 직접 촬영할 수 있지만,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약혼식, 튀르키예에서의 촬영은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그렇게 타인의 손을 빌려 촬영한 결과물은 파나히의 성에 차지 않는다. 난생처음 카메라를 들어본 간바르의 촬영은 아주 조악하고, 튀르키예 촬영에 계속 관여하기엔 자반의 전파가 열악하다. 이에 파나히는 튀르키예 현장에 드문드문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파나히는 이란 당국의 탄압을 형식에 반영한다. ‘불완전함’, ‘창작자의 의도와 상반된 결과물’, ‘고립 및 열악한 연결’로서 말이다.
이는 외의 형식에도 이어진다. 영화 초반, 숙소에 머무는 파나히는 핸드 헬드와 달리 숏을 결합한, 즉 '촬영감독'의 흔적이 느껴지는 숏에 담긴다. 프로패셔널한 촬영감독은 파나히가 어디로 가든 그의 발걸음을 뒤처짐 없이 따라다니고, 그 덕분에 파나히는 카메라를 배려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쏘다닌다. 부드러운 워킹뿐만 아니라 구도 또한 그가 어디로 가든 안정적이다. 그런데 밤이 되었다. 오후의 연출과 상반된다. 카메라의 화질이나 카메라 워킹, 구도 등이 꽤 안정적이었던 낮과 달리, 저녁의 카메라는 파나히의 발길을 따라다니기는커녕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덩그러니 방치된다. 영화 촬영이 워낙 제한적이기에 촬영감독 또한 오롯이 머물지 못하는 탓일까? 밤에 파나히는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고, 카메라가 머무는 곳에 제한적으로 위치한다. 구도는 단조로워지고, 자연광이 조명감독을 대신 하던 오후와 달리, 저녁에는 따로 조명을 손볼 여유도 없는지 화질도 조악해진다. 즉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찍어보려는 파나히는, 능수능란하게 제 모든 의도를 실현하기보단, 어떻게든 환경에 영화를 끼워 맞춘다. 이에 파나히가 바랐을 균질한 연출은 불가능하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제작 환경에 따라 형식은 이전이 이후로 연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파나히는 연출의 꾸밈이나 정돈에 크게 신경을 쏟지 않는, 어떤 형식이든지간 항상 '진실'을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감독이다. 연출은 영화 내내 제한적으로 퇴보하지만, 파나히의 정신만은 늘 올곧다. 파나히는 ‘프레임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거짓이 팽배한 프레임에서 진실이 보존된 프레임으로 뛰어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다. 영화 내내 보편적인 1.85:1 화면비 안에는 파나히가 속한 현실이 담긴다. 이 1.85:1 프레임 안에 파나히가 노트북으로 접하는 좁다란 세계, 즉 기존 프레임을 대체하는 또 다른 프레임이 이중적으로 공존한다. ‘프레임 안의 프레임’은 크게 두 유형으로, 하나는 파나히가 조감독 시난의 조력을 받는 튀르키예의 촬영현장이 담겨있고, 다른 하나는 파나히가 창문을 넘어서 직접 촬영하거나 간바르의 도움을 받아 마을 어귀에서 촬영한 자반 푸티지가 해당된다. 일반적인 프레임을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프레임은 간헐적이다. 프레임을 한가득 채웠다가도 이내 곧 거대한 현실의 프레임에 잠식되어 축소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튀르키예 촬영 현장은 자반의 열악한 통신 환경에 의해 파나히가 계속 연출에 관여할 수 없고, 또 자반에서 촬영한 사진이나 푸티지는 그것이 진실이라 한들 마을을 지배하는 전통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검열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바라고 지향하는 '관념'을 저지하는 '물질'로 가득 찬, 더욱이 동의한 적 없지만 선천적으로 부조리한 제약과 불가항력적인 계약을 맺은 프레임은 아무리 달아나도 항시 파나히를 뒤따라오는 ‘근원적 프레임’이라 칭할법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를 따라오는 ‘당연한’ 프레임, 그러나 그 프레임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함과 거리가 멀다. 근원적 프레임은 항상 파나히를 뒤따라오며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지, 대체 무엇을 촬영하는지, 그를 자기 안에 품어두고 감시한다. 밤이 되어서 고정된 카메라가 형성한 프레임 안에 파나히는 자신을 욱여넣어야 하고, 그의 움직임은 프레임에 의해 둔탁해진다. 즉 인간의 천성인 자유를 억압하는 근원적 프레임은 오히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든다.
일반적인 프레임에 머무는 것은 파나히 뿐만이 아니다. 파나히가 이란 당국에 의해 발이 묶였다면, 파나히가 머무는 숙소에서는 무릎이 불편한 연로한 여인이 그의 숙식을 신경써준다. 걷는 것이 불편해서 냇가에서 진행되는 약혼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파나히처럼 프레임 내에 머문다. 프레임 바깥이 아니라 프레임 안에 당연하듯 놓이는 그녀는 항상 '전업주부' 상태로 포착된다. 전업주부로서 여성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젊고 하반신이 멀쩡한 고잘이 전통이라는 부조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프레임은 항상 사람을 감시하듯 따라다니며 특정한 형태를 요구한다. 간바르에게는 ‘친절함’을, 파나히와 마을 구성원들에게는 '부조리한 전통' 및 ‘희생’에 따른 얼굴을 말이다. 즉 우리를 당연하게 뒤따라오는 근원적 프레임은 당연하지 않은 '거짓 이미지'로 피사체가 보이기를 주문한다. 이를 강요받는 파나히, 고잘, 솔두즈 등의 진실에 이는 당연하지 않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는 것이 익숙하다. 피사체를 촬영하거나 감시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전통 및 이데올로기를 반영하여, 그들이 보고 싶은 '프로파간다'로 대체한다.
그래서 파나히는 근원적 프레임을 뛰어넘는다. 몸은 자반에 묶여있지만 시야는 튀르키예를 응시하며 다년간 망명을 시도해온 자라-박티아르 연인의 삶을 기록한다. 근원적 프레임에는 항상 시야에 노출되어야 하는 '죄수'로서 파나히가 강제된다. 프레임을 이루며 그를 따라다니는, 흡사 ‘교도관’ 같은 카메라에 의해 말이다. 그러나 튀르키예 촬영 현장에선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 움직임은 기껏해야 패닝 수준이어서 한 인물에 주목하다가도, 피사체가 프레임 바깥으로 대책 없이 사라지면, 거리에 있는 또 다른 인물에게 주목하는 등 대상을 항상 쫓아다니지 않는다. 가까울 수도 멀어질 수도, 나타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는 자유로운 진실을 반영한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항시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려 하기 때문이다. 현 상태에서 변화하고 싶고, 또 보여야 한다는 의무를 거부하며…
밤이 되자 튀르키예에서 머물던 조감독 시난이 파나히에게 몰래 들렀다. 그는 파나히가 이란 당국이 ‘출국 금지’로 설정한 프레임에 더는 갇히지 않게끔, 밀수업자들이 튀르키예-이란을 오가는 길을 알려준다. 파나히는 시난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오르며 저 하늘에 비친 '우주'를 본다. 파나히는 가택 구금을 당하는 정치범으로 보여야 하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어떤 제한도 없는 무제약의 우주로 초월하고 싶은 것이랴. 그런데 우주는 바라볼지언정 국경은 넘지 않는다. 파나히는 대낮에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 즉 진실을 은닉하고 가리는 밤에만 국경을 몰래 건널 수 있다. 그 길을 통과한다는 밀수업자와 인신매매범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진실을 가리거나 거짓말한다. 그런데 파나히는 거짓말하기 싫어서, 진실을 검열받기 싫어서 이란 정부를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란 정부의 악습을 몸소 실천하지 않는다. 이는 파나히가 촬영하는 자라 역시 마찬가지로, 가짜 여권 및 신분을 도용하는 것에 불만이 있다.
간바르의 촬영도 그렇다. 손님 파나히 앞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간바르는 마땅히 친절하게 보여야 하는 일련의 의무를 지닌다. 그런데 카메라 다루는 솜씨가 미숙한 나머지, 기기가 꺼진 줄 착각하고 파나히를 스파이로 의심하는 뒷담을 깠다. 이를 접하게 된 파나히는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간바르의 촬영은 조악하다. 몹시 흔들려서 뭐가 뭔지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신랑, 신부가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의식에 참여하러가는 '길목', 즉 약혼식이라는 촬영의 목적에서 벗어난 잉여, 불필요한 것이 함께 포착된다. 하지만 그 길목이 자반 주민들의 생활사라는 진실, 흔들림은 약혼식의 들뜬 감정과 간바르의 아마추어리즘이란 진실을 표현한다. 파나히가 집 주변에서 촬영하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보고 싶은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촬영하지 않고, 프레임 바깥으로 금방 사라져버릴 주민들의 '감정', 곧 자라나서 현재 모습을 잃어버릴 '아이들'을 찰나만 붙잡아둔다. 또 집 주변만 반복되는 사진들은 그 이상으로 나갈 수 없는 파나히의 처지를 반영한다. 즉 파나히는 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보고 싶지 않더라도 진실을 포착해야 하는 것이 영화임을, 그 진실에 따른 적합한 형식을 고안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파나히는 다큐멘터리나 모큐멘터리로서 영화, 즉 현실과 밀착한 영화를 지향한다. 자반에선 여아의 탯줄을 끊을 때 남아의 이름을 외치면, 해당 이름을 가진 남아와 여아가 미래에 강제로 결혼해야 하는 ‘악습’이 있다. 남아의 이름은 당연히 여아가 외칠 수 없고, 식구들을 통솔하는 가장이 외칠 것이기에, 여아는 가장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래서 고잘은 야굽이라는 끔찍한 남자와 강제로 혼인될 위기에 처했는데, 이런 와중에 그녀는 솔두즈라는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파나히는 고잘과 솔두즈가 호두나무 아래 함께 있는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데, 부조리한 풍습을 따르는 야굽과 마을 주민들은 고잘과 솔두즈를 갈라놓기 위해 파나히에게 증거로서 사진을 내놓으라고 닦달한다. 또 영화 후반부, 이란 당국은 간바르에게 파나히의 신분증과 계약서를 요구하며, 결국 이를 확인한 당국에 의해 파나히는 자반에서 쫓겨난다. 즉 진실이 존재했다. 그러나 거짓말하기 위해서 진실을 처벌하고 말소한다.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곰'은 마을의 맹세 중 거짓말을 하면 혀를 뽑아가는 괴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파나히는 제목에서 곰을 부정한다. 그가 보기엔 거짓말을 할 시 혀를 뽑아가는 곰이 없다. 오히려 마을 주민들에게 보고 듣기 좋은 거짓 맹세를 할시 혀는 뽑히지 않고, 반면 솔직하게 전통에 대한 견해를 밝히려고 하면 입을 막는다. 즉 진실을 말하면 혀를 뽑아가는 곰으로 가득하다.
파나히가 튀르키예에서 연출하는 영화도 그렇다. 자반에 몸이 묶인 파나히는 해당 현장이 자신이 보고 싶은, 희망찬 '해피 엔딩'이 되길 바란다. 더욱이 영화 촬영을 금지당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 그래서 파나히가 '보고 완성하고 싶은 영화'가 두 연인의 현실을 압도하고, 그 과정에서 자라와 박티아르는 서구로 망명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밝은 연기를 해야 한다. 이에 현실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프레임에도 갇히게 된, 이로써 이중으로 부조리한 프레임에 구금된 자라는 파나히에게 따진다. 당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위해서 우리를 희생하지 말라고, 이 말은 파나히 본인의 자기 성찰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위해서 희생되는 현실이 '감상자'에게 건네는 말이다. 자라의 시선은 카메라 너머의 파나히와 더불어, 그 카메라가 연결하는 스크린 너머의 감상자와도 눈을 맞추기 때문이다. 감상자 또한 보고 싶은 이미지를 위해 진실을 희생해선 안 된다. 파나히가 촬영하는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뻔 했지만, 정작 자라는 비관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파나히는 영화 촬영을 중단한다.
즉 파나히는 현실과 다른, 이로써 진실과 무관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의 특권을 경계 및 반성한다.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구성한 프레임에서 악습을 똑같이 답습해선 안 된다. 반성하는 그는 순수한 사랑을 다큐멘터리로써 보존하고자 하지, 전통 및 이데올로기라는 픽션을 위해 사랑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 사실상 파나히가 처음으로 연출한 멜로극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곧 나처럼 소중히 여기며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헌신적이고 연합적인 관계이자 행위이다. 자라는 박티아르를 내버려두고 홀로 망명할 수 없는 반면, 박티아르는 자라가 자신 없이도 먼저 망명했으면 싶다. 즉 상대를 나처럼 배려하는 숭고한 감정이 사랑이다. 또 고잘-솔두즈 사례처럼 외부의 이데올로기가 개입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이 사랑이다. 탯줄 전통과 더불어, 여성의 베일을 잡은 남성의 손아귀에서 여성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자반의 문화다. 이로써 여성의 감정은 항상 남성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고잘은 자신과 무관한 사랑이 아니라, 내면의 호감에 따라 솔두즈를 사랑한다. 파나히는 이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사랑을 자신의 영화론으로 삼으며 나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영화가 무엇일지 고심한다.
이 고민에 대한 파나히의 답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진실을 박해하는 사회에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일 수 없다. 검열하는 사회, 거짓말로 가득한 사회를 기록한다면 거짓말에 일조하는 셈이기에, 다큐멘터리에 의해 역으로 진실이 해를 입는다. 그래서 파나히는 진실을 보호하기 위해 '가짜로 맹세'하는 '픽션'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촬영한다. 튀르키예 촬영 당시에도 박티아르로 위장한 튀르키예인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듯, 파나히가 허용하는 픽션은 '진실을 수호하는 거짓말'이다.
또 다른 답은 그럼에도 진실의 근원을 기록해야 하는 예술가의 사명이다. 도망치듯 자반을 빠져나가는 결말의 파나히는 국경을 넘으려다 사망한 솔두즈와 고잘의 주검을 목도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아꼈기에 그 최후를 함께 애도하고 싶지만, 또 죽음의 진실과 고인의 명예를 추적하고 싶겠지만, 현실은 그에게 빨리 빠져나가라며 재촉한다. 그런데도 파나히는 영화가 막을 내리기 직전에 차를 멈춰 세운다.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도 그가 마을에 남아있는 것을 암시하는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실에서 피사체를 외면하거나 왜곡하라고 주문한다면, 현실과 다른 것을 지향하는 예술의 사명은 피사체를 마땅히 사수해야 한다. 이렇게 파나히는 거짓이 팽배한 현실과 '다른' 진실을 보는 예술가의 사명을 자신의 난감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히 천명한다. 보고 싶은 욕망을 투영하며 거짓에 일조하는 픽션이 아니라 진실을 수호하기 위한 픽션으로 전환하고, 사회가 보지 말라고 쉬쉬하는 것을 용감하게 바라보며, 반면 보라고 유혹하는 것을 등질 때, 비로소 우리가 처한 근원적이고도 부당한 프레임을 뛰어넘어 자유롭고 새로운 프레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