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을 위탁할 때 발생하는 전체주의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소탐대실'을 경고하는 독일의 동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멜른이란 마을에 쥐떼가 창궐하여 다들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나타나 사례금을 주면 해결해주겠다고 제안했고, 마을 사람들은 흔쾌히 그와 계약했다. 이후 피리 부는 사나이는 피리 연주로 쥐떼를 강물에 빠트렸으나, 정작 마을 사람들은 대뜸 태도를 바꿔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피리 부는 사나이는 사례금보다 더 소중한 마을의 '아이들'을 납치하여 어디론가 데려가 버린다. 탐욕을 경고하는 본 이야기는 여러 예술가들의 손에서 재해석되었다. 그 중 흥미로운 해석은 ABBA의 <The piper>로 무수한 쥐떼와 아이들이 사나이의 연주, 단 하나에 맞춰 '전체'로서 행동한 것을 파시즘에 빗대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파시즘의 지도자요, 쥐떼나 아이들은 거기에 홀린 군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024년,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또 다른 관점으로 영상화한다. 오늘날의 참신한 독해가 예시카 하우스너의 손에서, <클럽 제로>로 이어진다.
1972년 빈 태생의 예시카 하우스너는 오스트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초현실주의 화가, ‘루돌프 하우스너’의 딸이자 자국의 거장 ‘미카엘 하네케’의 조감독 출신으로서, 이들의 영향 아래서 영화 문법을 발전시켜나갔다. 하우스너의 초기 시기에는 둘 중 하네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하네케가 영화적인 기교를 거두고 롱테이크만을 적극 활용하여,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프레임에서 발생하는 운동이나 행위에 집중하였듯, 하우스너 또한 카메라를 고정시켜 카메라 워킹을 배제하고 대신 피사체의 운동에 주목하였다.
그 프레임 안에 내재한 주제 역시 스승과 유사하다. 하네케가 미디어 매체에 의해 악순환되는 ‘폭력’을 경고했듯, 하우스너 역시 폭력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폭력의 원인이나 동기는 하네케와 판이하게 달랐다. 하우스너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종교, 이데올로기, 가부장제, 계급 등 불가항력적인 지배에서 발생한다. 하우스너의 작품에서 이 같은 '전체'를 '개인'이 거스르기란 쉽지 않다. 개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광인으로 전락하여 ‘마녀사냥’당하고, 결국 전체의 폭력성이 잘림이 없는 롱테이크에 담겨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이렇게 하네케를 떠올리게 만드는 건조한 영화를 줄곧 연출해온 하우스너는 최근 작품 동향을 조금 뒤틀어서, 그녀 아버지의 회화를 영상화한 것만 같은 초현실적이고도 전위적인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 <리틀 조>부터 본 작품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최근 연출, 일단 아주 고운 시각을 직조하고, 여기에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실험적이고 불쾌한 음악을 결합한다. 그녀에게 전체주의란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는 ‘심미주의’요, 이를 의심하는 개인들은 불쾌하고 낯선 아방가르드 형식이다. 그리고 하우스너가 지향하는 것이 후자로서 폭력을 미화하는 전체주의를 의심하고,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날카로움이나 추함을 적극 긍정한다. 그 시도가 <클럽 제로>에서 이어진다.
도입부, 하우스너의 카메라는 텅 빈 교실을 포착한다. 이 공허한 숏엔 어떤 내용도, 의미도 없다. 그래서 카메라는 조급해질 것이다. 사진이나 영화를 찍는 카메라는 피사체를 담아냄으로써 어떤 내용과 의미를 창출하고, 이로써 제 존재 의미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카메라는 무언가를 촬영하고자 열심히 현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파헤친다. 그러나 본 작품의 카메라는 알맹이 없이 빈껍데기만 남은 공간만 포착하고 있기에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셈인데도, 아이러니하게 아주 여유 만만해 보인다. 왜냐하면 피사체가 카메라가 안으로 진입할 게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빈 공간엔 노백과 그녀의 수업을 신청한 학생들이 알아서 들어온다.
이로써 어떤 내용과 의미가 창출될 직후의 시퀀스에서 노백은 학생들에게 수강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지금껏 가만히 멈춰 있던 카메라는 '패닝'하며 일련의 운동을 시작한다. 회전하는 카메라의 리듬은 아주 일정하여 모든 학생에게 공평하다. 특정 학생에게 편향적으로 더 길게 혹은 짧게 머물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만 허용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카메라가 자신을 비출 때 입을 열고, 카메라가 타 학생에게 넘어가면 재빨리 발화를 중단한다. 모두에게 일정한 시간이 대화의 '양'을 결정한다. 즉 카메라가 형성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것이 예정되어 있던 도입부 이후로도, 학생들은 여전히 카메라에 의해 행동이 규정된다. 카메라가 결정한 발화의 양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질' 역시 학생들을 에워싼 동시대의 이념이 반영되어 있기에, 그들의 입은 카메라와 이념이라는 ‘외재적 원리’에 의해 좌우된다. 학생들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도'에서 더더욱 부각된다. 하우스너가 도입의 공간을 전능한 '하이 앵글' 구도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 구도는 절대자가 피조물들을 내려다보며 영향력을 투사하는 시선 내지는 CCTV의 감시를 환기한다. 이러한 시선에서 학생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 시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시퀀스에 힌트가 있다. 바로 노백이다. 청소년들은 카메라를 지배하지 못한다. 카메라가 자신에게 부여한 짧고 일정한 시간에 제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여 욱여넣어야 한다. 그런데 노백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학생들을 촬영하던 순간과 태도를 달리한다. 아이들과 달리 노백에겐 발언 시간이 무제한 보장되어 있고, 그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도 않는다. 즉 카메라의 위치나 이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노백이다. 그녀는 이후에도 도입부의 하이앵글처럼 학생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전능한 존재로 묘사된다. 급식실에서 벤을 마주쳤을 때, 감히 소년이 올려다보기 어려운 그녀의 거대한 권위가 프레임 바깥으로 삐져나가는 거대한 육체로서 가시화된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발걸음이 카메라 워킹을 좌우하고, 노백의 시선이 이어질 다음 숏을, 즉 편집을 규정한다.
노백은 학생들에게 '의식적인 먹기'를 강의한다. 일반적으로 인류는 ‘본능’에 따라 먹는다. 때론 건강을 생각하면서 이성적으로 먹지만, 대체로는 혀에 감도는 다양한 미각을 즐기기 위해서 취식하고, 심지어 심하게 갈증이 나거나 허기가 질 때면 생각하거나 판단할 겨를 없이 허겁지겁 음식을 주워 먹는다. 그런데 노백은 본능을 억제하고, 대신 '정신'으로 먹게 한다. 본능을 따르는 인류가 먹는 행위로 제 '혀'에 봉사한다면, 노백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어떤 사회적·정치적 파장을 낳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즉 사회적으로 먹을 때 영화의 카메라는 줌인하거나 줌아웃한다. ‘줌인’은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식적으로 먹을 때, 학생들의 두 눈은 음식의 시각을 응시하니 나름 가까워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후 숏에서 엘사는 음식을 모조리 게워낸다. 또 먹는 행위에 비로소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하우스너는 재빨리 현재 숏을 잘라내고 다음 숏을 잇는다.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먹는 행위를 대체로 ‘줌아웃’하며, 먹는 사람의 혀나 입에서 멀어지게 처리한다. 심지어 행위자의 육체를 둘러싼 거대한 공간이 부각될 정도로 말이다. 하우스너는 노백의 의식적인 먹기가 본능적이어야 마땅한 행위를 이성적으로 뒤집는다는 것을, 육체를 괄시하는 연출로써 가시화한다.
학생들은 의식적으로 먹으며 학교와 사회가 요구하는 평가 기준에 맞춰 급속도로 성장한다. 노백은 의식적으로 먹으면 섭취량을 줄이고,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저항할 수 있어서 친환경적이라 설명한다. 또한 덜 먹으면 건강 및 학업,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교육한다. 실제로 노백의 주장은 절반가량 맞다. 체조를 하는 라그나, 발레를 하는 프레디의 기록이 더 나아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우스너는 라그나의 '얼굴'을 포착하지 않는다. 하우스너는 체조하기 적합한 그녀의 몸만을 클로즈업하며 얼굴을 실종시킨다. 체조라는 기준에 알맞은 그녀의 ‘물질’은 완성되었지만, 정작 그녀의 얼굴, 곧 영혼은 소외된 것이다. 또 프레디의 육체는 현실이 아니라 '거울' 속에 잠겨있다. 그는 무언가를 '모방'하는 영역으로 추방되어, 육체는 제 본성을 따르지 못하고 대신 따라해야하는 무엇에 좌우된다. 즉 영화의 프레임 구성은 의식적인 먹기의 부작용인 ‘자기 소외’를 드러낸다.
이들과 상반된 태도를 보였던 학생은 벤이다. 노백을 충실하게 따르는 이들과 달리, 벤은 급식실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을 양껏 먹고, 또 달콤함을 즐기고자 평소에도 쿠키를 입에 달고 산다. 혀에 솔직한 벤은 라그나, 프레디와 달리 육체가 분절되거나, 현실 바깥으로 추방되지 않는다. 그러나 벤 또한 어쩔 수 없이 노백의 수업에 충실하게 된다.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명문 사립학교다. 노백이 막 고용되었을 때, 교장은 학교의 학생들이 성실하고 '경쟁적'이라고 표현한다. 또 노백은 학부모 회의를 거쳐서 임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를 고용해 식습관을 개선하면 아이들이 더 좋은 역량을 펼칠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부모를 지배하는 사회적 기준에 인정받고자 학교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인 벤은 부르주아에 비해 조건이 불리하니 어떻게든 경쟁에서 살아남아 전액장학금을 받으려면 노백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권위적인 부모가 임용한 노백은 프레임이 미처 다 품지 못할 정도로 아주 거대하고, 학생이 어디에 위치하든 쉽게 추적하니, 위압적인 그녀를 감히 거스를 수 없다. 즉 부모들은 아이의 본능을 거세하여 자신들이 인정하는, 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인재로 거듭나길 바란다.
그러나 하우스너는 체조, 연극, 음악회 등에서 나타나는 아이들의 좋은 모습을 미처 다 보여주지 않고 편집으로 재빨리 '잘라' 버린다. 아이들이 좋은 역량을 증명하는 현장엔 선생이나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 등 무수한 시선이 즐비하다. 그 눈은 바라봐지는 사람을 평가, 검열, 통제하며, 결국 바라보는 사람이 상대를 원하는 이미지로 둔갑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개개인이 본능을 억제하고 타인에게 귀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선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과감하게 거세해야 하나니, 이에 하우스너의 카메라와 가위는 그 욕망을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자른다. 물론 본 작품의 미장센은 아주 질서정연하고 수려하나니, 심미적인 것을 원하는 보통의 관객층의 욕구에 봉사하는 셈이다. 사립학교의 정갈한 디자인, 학생들의 깔끔한 교복, 부르주아지들의 우아한 복장뿐만 아니라 제니가 벤을 위해 구비한 맛있는 음식 등 그 모든 시각이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유혹한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마냥 감각적이진 않다. 그 이유는 <리틀 조>부터 변화한 하우스너의 디렉팅에 있는데, 요르고스 란티모스나 로베르 브레송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건조한 디렉팅을 배우들에게 주문한다. 아름답지만 단조로워서 쉽게 매력을 잃고, 오히려 질서정연한 시청각을 깨트리는, 벤이 무질서하게 쿠키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소리가 감상자의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여기서 하우스너는 이 아름다움이야 말로 전체주의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학생들 각각한텐 결핍이 있다. 집착하는 부모에게 갑갑함을 느끼고, 또 사랑받거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아주 크다. 특히나 영화 속 ‘사랑’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그야말로 모든 진실을 자애롭게 끌어안는 이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벤은 엘사를, 라그나는 프레디를 흠모하는데, 애정을 받기 위해선 연인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교정해야 한다. 여기서 이들을 사랑하는 대상, 인정해주는 대상은 극소수다. 다수의 학생을 통솔하는 보호자나 선생이므로, 자연스레 다수는 한 명의 권위자의 요건을 충족하고, 이로써 특유한 제각각의 개인임을 포기하며, 모두가 하나로서 다 똑같이 행동하는 전체주의가 기원된다. 노백이 들어오자마자 찻장의 다른 제품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제 얼굴이 박힌 홍차만 가득 채워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영화의 촬영은 주로 '롱숏'에 다수가 우글거리고, 권위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집단의 '불신자'들을 검열하고 탄압하여 전체의 질서를 수립하는 형태가 눈에 띈다.
그 롱숏은 매우 아름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을 인정해주는 권위자, 노백의 목소리가 아주 달콤하게 귀를 휘감기 때문이다. 노백은 사립학교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아이들의 욕망을 능수능란하게 만족시켜줌과 동시에, 부모한테 소외된 학생들의 마음속까지 교묘하게 침투한다. 이에 노백 선생의 질서는 학생들의 눈과 귀에 지극히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 아름다움은 비판 의식을 무력화한다.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주장으로서, 나치즘이나 파시즘 그 외의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프로파간다는 독재자들의 궤변을 심미성으로 포장하여 대중들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고, 이로써 '절대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하우스너는 아름다움을 예찬하지 않는다. 노백이 프레디와 함께 관람한 오페라, 입술에 선사한 키스는 소년의 욕망을 '좋게' 만들며 '안 좋게' 볼 여지를 말소한다. 소년은 선생을 감히 의심조차 하지 못한다. 본 아름다움에 따른 부작용으로 엘사가 구토한 것을 다시 집어먹는, 보기 괴롭고 역겨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이어낸다. 또 오페라의 청각과 거리가 있는, 다소 우악스럽게 들리는 쿠키 씹어 먹는 소리, 노백을 불신하는 친구들이 수업에서 이탈할 때 삽입되는 '전위 음악' 등 질서를 무시하고 제 본능을 따르는, 그래서 혼란스럽고 불쾌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형식을 예찬한다.
즉 전위음악은 진실이다. 달콤함에 이끌리는 혀의 솔직함,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위장의 메아리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바로 그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시켜,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이라 포장한다. 애초에 학생들의 성취는 자신들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와 노백의 욕구였기에 제 자신한텐 거짓이었고, 이에 더해서 노백의 주장 역시 현실에서 모순을 자아낸다. 노백은 의식적으로 먹으면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의식적으로 씹고 잘라 냄새만 맡기 위해 음식을 낭비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이 배출하는 모순을 낳는다. 또한 의식적인 먹기가 건강에 좋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론 프레디의 당뇨를 악화하는 등 학생들의 건강에 심각한 지장을 준다. 이런 노백은 오리엔탈리즘 풍의 제단 앞에서, 믿음을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기도한다. 여기서 노백의 제단은 실제 아시아의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서구가 기대하는 허구의 아시아로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다. 즉 노백의 믿음이 시작되는 제단부터 실체가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 속의 믿음이자 사기의 달콤함이다.
이는 현실과 무관한 동화가 아니다. 전체주의의 우화임과 동시에, ‘식이장애’의 측면에서 말이다. 영화 속 여성인 라그나와 엘사,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의도적으로 절식한다. 그것이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요구한 미적 기준이자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실제로 식이장애는 여성만 걸리는 정신질환이자, 자연 상태에서는 발생할 일이 없는 문화고유장애로 규정된다. 여성만의 식이장애가 확장된 영화 속 세계관에선 학생들 다수가 절식으로 인해 질환을 앓고, 이는 생존이나 삶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노백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가부장제가 예찬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 오히려 전체주의는 강자들이 약자들을 지배하는 수단이기에 약자를 더 취약하게 만들고, 부르주아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 다수가 부르주아인 학부형들은 잘못된 선택의 대가를 몸소 치르는 것이라면, 발언권이 없다시피 한 프롤레타리아 제니는 부르주아가 형성해놓은 체제 속에서 살아남으려다 벤을 잃은 것이니 말이다.
비로소 부모들은 문제를 인지한다. 그런데 지적하는 것은 노백의 잘못된 교육이 아니라, 노백이 교칙을 위반하고 학교 바깥에서 프레디와 단독으로 만났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들어 노백을 해고한다. 이는 자신들이 노백을 임용한 이유와 그녀가 이룬 성취는 인정할 만 하다는 태도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옳은 길로 이끌었다는 자신들의 믿음이 틀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패배하면서 종식된 줄 알았던 전체주의가 실상 다른 껍데기를 입고 이어지는 오늘날을 환기한다. 노백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는 지적되지 않고, 오히려 해고 이후에도 학생들은 노백에게 매달린다. 더욱이 노백은 교사 신분이 아니니 학생들과의 만남이 이젠 교칙 위반도 아니라서, 해고 이후 노백의 잘못된 수업은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이윽고 아이들은 생명이 탄생하는 ‘성탄절’에 사라졌고, 노백에게 인도된 네 제자의 모습은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화’ 속에 담긴다. 안온한 이미지, 그러나 영화 내내 아름다움의 배후엔 소름끼치는 사실이 숨겨져 있었듯, 성탄절과 풍경화의 온화함 이면엔 끔찍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하우스너는 이 아름다움이 포장하는 전체주의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삼아 경고한다. 그 경고는 영화 내에만 머물지 않고,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는 헬렌을 이용하여 스크린 바깥으로, 감상자와 시선을 마주치며 현실로 확장된다. 다수가 소수 권위자의 허튼 소리에 인도되어 부조리한 악습이 누구나 다 하는 보편으로 자리 잡고, 그 문제의 핵심인 전체주의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자유와 진실을 위협하는 최악의 이념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