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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08. 2024

하야카와 치에, <플랜 75>

죽음을 답례하는 사회

하야카와 치에(Hayakawa Chie), <플랜 75>(Plan 75) - 죽음을 답례하는 사회     

19세기 일본의 어느 한 척박한 산골마을, 69세의 오린이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아주 정정하다. 치아가 어찌나 튼튼한지 억센 직물도 이로 끊어낸다. 팔다리도 성하여 땔감 줍기, 낚시 등의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이런 그녀가 사는 곳은 자연이다. 거기서 죽을 것들과 살 것들은 알아서 죽거나 산다. 겨울에 둔해빠진 뱀은 쥐에게 잡아먹히고, 조금만 느리면 다 잡은 사냥감을 매에게 뺏기는 세계다. 그렇게 사망한 것들은 누군가의 배를 채워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기도 하니, 번성하기 위해서 죽고, 또 그렇게 죽으면서 산다. 그게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마땅한 자연의 섭리다. 그런데 인간은 섭리를 거스르며 욕심을 부린다. 생존할 수 없는 노인들은 알아서 죽고 자손들에게 살과 피를 나눌 테지만, 아직 몇 년은 더 성하게 버틸 수 있는 노인을 나라야마 산으로 데려가 죽음을 강제한다. 즉 인간의 법은 인간을 죽인다. 마을에선 나라야마 산신령의 이름으로 작물을 약탈한 자를 생매장하고, 그것을 주민들끼리 나눠 갖는다. 그러나 주민들의 '분배'는 단지 나라야마 신의 권위와 신성함, 법의 힘만 빌렸을 뿐, 본질 상 약탈과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필요 이상의 탐욕이다. 그리고 여자 아이는 경제성을 따지며 낳는 반면, 남자 아기는 쓸모가 없다며 논두렁에 버리며,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존재들을 죽게 만드는 법, 그 과정에서 멀쩡한 사람들도 위험에 빠트리는 법을, 인간의 원초적인 심연을 카메라에 담아내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주목하였다. 그 법은 19세기의 것, 그런데 과거의 야만사가 21세기에 재현된다. <나라야마 부시코>를 연상케 하는 하야카와 치에의 <플랜 75>에서 말이다.      


1976년 도쿄 태생의 히야카와 치에는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10년>에 수록된 자신의 단편 <플랜 75>를 본 장편으로 확장한다. 단편에서 75살이 되면 안락사를 권유하는 ‘플랜 75’ 광고는 화사한 난색의 조명이 비추는 반면, 플랜 75에 이르게 만드는 현실을 어두운 한색으로 대비된다. 치에는 늙음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치매나 난치병 등의 부담을 오롯이 개인에게 떠맡겨, 노인들을 버려지게 만들거나 길거리에서 죽이는 비정한 국가를 비판한다. 과거의 <나라야마 부시코>가 넉넉하지 못해서 발생했다면, 오늘날에 재현되는 ‘나라야마 부시코’ 곧 <플랜 75>는 인간을 대체한 경제, 통계에 원인을 둔다. 안락사 당하며 발에 인식표가 붙여지는 노인들, 그 직후 태어나는 아기, 똑같이 '돌봄'이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로, 후자는 성장력이 있다는 이유로 운명이 엇갈린다. 약자가 버려지지 않는 것, 뒤처지지 않는 것이 자연과 대비한 문명, 국가의 존재 이유가 아니었나. 그 본령을 저버린 비정한 현실, 어쩌면 닥칠지 모르는 미래를 차갑고도 냉정한 연출로 비추던 치에는 못 다한 이야기를 끝마치기 위해 장편을 연출하는데 과연 어떤 형식과 통찰을 덧붙여질까.      


도입부,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기에 시각은 어둠과 글자뿐인 와중,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삽입된다. 이윽고 ‘페이드인’이 어둠을 걷어내고 시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화면 전체가 ‘아웃포커싱’으로 처리됐고, 심지어 움직이는 인간의 형체는 저 멀리 있어서 까마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형체는 프레임 바깥으로,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곳으로 영영 사라진다. 그 직후, 카메라 앞으로 다른 누군가가 다가온다. 형체가 불분명했던 사람과 달리, 카메라 앞으로 다가온 사람의 피칠갑은 아주 잘 보인다. 포커싱도 회복되고, 수평으로 이동하는 카메라가 따라다니며 정체가 드러난다. 잘 보이는 대상은 총을 든 청년으로, 그는 청년 세대에 부담이 되는 노인들을 살해하고 다닌다. 잘 보일 수 있는 가해자와 달리 살해된 노인은 포착될 수 없다거나 포착돼선 안 된다는 듯 추적하지 않는다. 즉 영화에서 잘 보이는 것은 살인자, 죽음 이후 남겨진 널브러진 휠체어요, 반면 잘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대상은 피해자 노인이다. 한편 피해는 노인한테서 끝나지 않는다. 청년 또한 '국가를 위해' 노인을 살해한 직후 자결한다. 청년도 보이지 않게 된다. 오직 남는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영토 뿐, 정작 국민들은 죽음을 긍지로 여기며 사라진다. 이를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포장한다. 이후 등장하는 플랜 75 전단지나 TV광고도 그렇다. 

그렇다면 단순히 ‘심미적’이기 때문에 플랜 75는 보고 듣기 좋게 느껴지는가? 플랜 75를 주도하는 국가는 미화에 더해 ‘합리화’를 시도한다. 존엄사는 노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에 자유이자 주체성의 보장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치에는 존엄사는 사실상 강제일 것이라 예측한다. 영화의 주인공 미치는 호텔의 청소 노동자다. 호텔에서는 미치와 같은 노인들을 싼값에 고용한다. 이들은 청년에 비해 건강 상태가 불안정하다. 이윽고 이네코라는 동료가 졸도하며 쓰러지니, 기업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노인 노동자들을 보기 좋게 퇴직, 사실상 해고한다. 이후 미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복지 기관에 방문하지만 혜택을 받긴 매우 까다롭다. 이후 '컴퓨터'를 이용해서 다른 방안을 모색해보려 하지만, 70살 넘은 노인에게 컴퓨터는 너무 버겁다. 그래서 직접 복지국에 찾아가지만 생활 지원 상담은 접수가 종료되었다. 즉 복지란 존엄을 유지하기 어려운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데, 정작 국가는 약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며 복지를 축소한다. 이로써 절박해진 노인에게 권유되는 것이 바로 플랜 75다. 영화 초반, 일을 하던 미치는 라디오에서 송출되는 플랜 75 광고를 듣는다. 치에는 이를 '줌인'한다. 취약계층에게 가까워지는 것은 복지 대신 플랜 75로, 삶 대신 죽음을 강제한다.      


이런 끔찍한 사회가 과연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만 국한될까? 치에는 코앞으로 닥쳐온 디스토피아가 과거-현재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여성학자 재클린 로즈는 지금까지 사회가 책임졌어야 할 돌봄, 복지, 안전에 대한 의무를 역사 내내 '어머니'에게 전가시켰다는 사실을 밝힌다. 비극적인 사고, 대재난 등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늘 어머니를 포착했다. 실상 밝혀야 할 대상은 사건의 당사자나 원인,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 많은 몫이 국가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지키지 못해 비탄하고 절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항상 선전해왔다. 이로써 비극, 재해, 재난의 탓은 언제나 어머니의 양육 실패로 직결되었다. 

본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자식들로 뒤바뀐다. 지금까지 국가를 위해 충분히 헌신해왔을,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노인이자 약자로서 마땅히 국가가 보듬고 살펴야 할 노인들은 '폐를 끼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폐를 끼치는 것을 지나치게 미안해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돌봄 의무를 자신들이 아니라, 자녀나 젊은이의 몫으로 전가했기 때문이요, 노인들은 그에게 제 존재가 그저 미안할 뿐이다. 이들은 살기 팍팍해서 노인 사냥을 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실직당한 노인들은 자식들 집에 거저 눌러앉을 수 없어서 '황혼육아'를 자청하거나, 미치처럼 자녀가 없는 노인들은 어떻게든 취업을 시도한다. 약자지만 약자여선 안 된다. 또한 미치는 사회가 떠맡아야 하지만 떠맡지 않는 노인 문제를 자신이 책임진다. 동료 이네코를 자신이 돌보고, 고립사 또한 미치가 발견한다. 

그 모든 선택지가 없는 노인들에게 생계급여가 주어지는 경우는 플랜 75에 참여할 시, 즉 죽음을 선택해야만 가능하고, 영화 속 청년들 또한 '살인자' 내지는 ‘공범’이 되어야지만 돈을 벌 수 있다.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넘어와 돈을 버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그녀는 본래 경로당에서 노인들이 남은 생을 잘 유지할 수 있게끔 조력해왔다. 그러나 플랜 75 센터에서 삶 대신 죽음을 유도하고 유품을 정리하는 일의 급여가 더 많다. 외에도 히로무는 일을 하다가 플랜 75 반대론자에게 수모를 당해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고, 플랜 75 콜센터는 젊은 여성들을 꼬드겨 상담 노동자로 고용한다. 노인들을 죽여서 재정 부담은 줄였다. 그리고 그 몫을 청년들에게 지원하고 그것 외의 돈벌이는 영화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돈을 벌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일할 수 있는 유용한 사람에 그친다. 마리아는 모국에 돈을 보내야 한다. 딸 루비가 심장 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에 막대한 수술비용이 필요하다. 약자의 지갑에서 돈은 항상 줄줄 새고, 오직 '강자'의 배만 두둑해진다. 즉 약자에게 국가의 돌봄 책임을 떠넘기고,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보이지 않는 이들만 배를 불린다.      


본 미래는 흡사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한다. 2차 대전, 나치가 학살한 대상은 다음과 같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우월함, 효율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을 몰살했고, 부의 재분배를 논하는 사회주의자 역시 학살했으며 사후 그들의 부를 약탈했다. 즉 홀로코스트는 강한 사람, 부유한 사람, 월등한 사람만 남겼는데, 그 홀로코스트가 <플랜 75>에 도래한다. 

치에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미치가 동료들과 노래방에 간 시퀀스, 노인들은 재생할 LP판의 제목, 번호를 미치에게 알려준다. 이후 미치는 번호에 해당하는 LP를 골라 재생한다. 이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되어서 운동은 프레임 내에서만 유효하지, 카메라 워킹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LP판은 정해진 이름이나 번호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LP판을 재생하여 노래를 부른다. 이때 카메라는 이동한다. 녹음된 바를 천편일률적으로 재생하는 LP로부터 노인들의 즉흥성과 새로움이 더해지는 ‘실연’의 영역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 머물러 고정된 것을 멈춘 카메라가 가시화한다면, 현재의 생생함과 자유로움, 감정은 카메라 워킹이 표현한다. 물론 국가가 요구하는 노동을 포착할 때도 카메라는 이동한다. 다만 영화 초반, 마리아가 노인들의 삶을 조력할 때 팔·다리의 생생한 떨림과 박동에 상응하는 '핸드헬드'가 동반되었다면, 그 이후 죽음에 협조할 때엔 안정적인 '스테디캠'을 이용한 ‘트래블링 숏’에 담긴다. 즉 국가에 의한 삶은 부동 및 고정이거나, 자신의 발과 다리가 아닌 무언가에 올라타서 강제 이동하는 행위다. 

그 무언가가 플랜 75다. 그렇게 형성된 프레임 안에는 유용한 것들이 담긴다. 초반부에는 호텔에서 청소하거나, 과일을 깎고 가사를 할 수 있는 미치가 촬영된다. 프레임이 요구하는 유용함에 부합해야지만 보이거나 존재할 수 있다. 반면 그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보일 수 없다. 영화 속 노인들은 잘 보이지 않는 문지방 너머로 사라진다. 도입부의 피해자인 노인도 문지방 너머에서 살해됐고, 문지방 너머에서 쓰러진 이네코는 그 이후 고립사한다. 즉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편집’ 역시 국가가 주문한 유용성을 반영한다. 영화의 세 주인공, 미치와 히로무, 마리아는 본래 서로를 몰랐다. 이들을 이어내는 편집은 영화 내에서 이뤄지는 유기적인 연결이 아니라, 단지 형식 상 연결되는 교차편집이다. 그러나 이윽고 이들은 숏 내에서도 연결된다. 벼랑 끝에 내몰린 미치가 플랜 75에 관심을 가지면서 히로무와 접촉하고, 이후 안락사 직전의 미치는 히로무, 마리아와 연결된다. 플랜 75를 통해 죽음으로써 유용한 미치, 그녀의 죽음에 의해서 유용해지는 히로무와 마리아, 즉 유용한 사람들로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위해서, 정작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어 간다. 마리아는 꿈을 꾼다. 플랜 75 센터에 딸 루비가 와있는 꿈이다. 루비는 비록 노인은 아니지만, 경제적, 효율적으로 따졌을 때 노인처럼 죽음이 강제될만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 쓸모, 경제력으로 사람을 재현하는 사회의 마수는 루비를 덮칠 수도 있다. 히로무는 플랜 75에 참여한 노인들의 유해 처리 비용을 어떻게 절감할 수 있을지 계산한다. 수소문 끝에 노인들의 유해를 '산업 폐기물', 즉 쓰레기와 똑같이 취급하면 싸게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런데 우리가 쓰레기를 버릴 때는 별 감정이 들지 않는 반면, 인간의 죽음을 접할 때는 설령 그 사람이 나와 별 상관도 없다거나, 살아생전 악한 감정을 가졌다고 한들, 괜히 마음이 찡해지고 가슴은 뭉클해진다. 나는 스스로를 맹목적으로 귀히 여기고 그런 내가 인간인 이상, 인간으로서 닮은 타인 역시 신성하다.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는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귀하게, 생명 없는 사물보단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그 보편적인 인간의 특별함을 국가는 별안간 떠오르는 쓰잘머리 없는 감정, 생각 정도로 치부한다. 국가에 의해 죽음은 예사로운 것, 인간의 지위 역시 비속하게 실추되고,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서 남긴 값어치 있는 소지품만 우대받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플랜 75를 통해 밥벌이를 하려면 죽음에 감정 이입해선 안 된다. 미치가 사라진다는 감정을 억제하는 하루코, 삼촌에 대한 감정이 심란한 히로무, 둘 다 감정을 억제해야만 사회에서 밥벌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유용함, 쓸모 등의 이성적 척도로만 실존하지 않는다. 이성적 기준이 괄시하는 감정을 억제하면 살아남은 사람 또한 비인간으로, 산송장으로 전락한다. 인간이란 유용한 행위뿐만 아니라 무용하더라도 그저  즐거운 유희를 즐길 수 있고, 또 즐겨야 하는 존재인데, 그러한 삶의 특권을 플랜 75에 의해서 박탈당한다. 그래서 치에는 미치의 그저 예쁜 ‘목소리’, 돈을 더 쓰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거나, 노래방을 즐기는 모습을 부각하며 감정, 곧 삶을 회복한다. 미치는 이네코의 최후를 본다. 죽음보다 잿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시체를 발견했다면, 죽음으로써 남긴 사물들만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치는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이네코를 기억한다. 노인들은 삶이 버거운 자녀들에게 기대기 어렵다. 그래서 외롭고 두려웠던 이네코는 미치를 생전에 집에 초대했고 함께 잠도 처했다. 그 이네코를 미치는 기억한다. 자신에게 어떠한 경제적 이득도 없더라도, 그저 그녀의 존재 자체를. 히로무 또한 마찬가지다. 삼촌 유키오는 히로무 아버지의 장례식에 오지 않아서 정서적으로 불편하지만, 그가 식구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든, 기억되거나 존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인간이라는 조건만으로 충분하다. 비록 유키오가 선택한 플랜 75를 막을 수 없지만, 안락사 직전에 외식을 시켜주고 그의 유해가 산업 폐기물로 치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체를 빼돌린다. 그것은 과속, 곧 플랜 75가 만연한 세상에서 ‘불법’이지마나 그럼에도 지켜야 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하루코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콜센터 직원으로서, 단지 업무 상 미치의 얘기가 가치 있었다. 그러나 하루코는 업무와 무관하게 미치와 만나 시간을 보낸다. 그저 미각이 즐거울 뿐인 음료수를 마시고, 재미 외의 유용함은 없는 볼링을 즐긴다. 미치 최후의 날, 공적으로 연락하면 안 되거니와 연락할 필요도 없지만, 하루코는 사적으로 연락을 시도한다. 인간에 대한 예우로서, 쓸모없고 손해일지 모르지만 그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함으로써. 마리아는 노인들의 소지품을 검토하는 도중, 한 노인이 플랜 75에 참여한 대가로 지급된 돈을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사망했음을 확인한다. 과연 우리가 쓸모 있다고 여기는 돈이 삶과 감정과 비교해서 쓸모가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이성적 쓸모가 아니었다. 진정한 쓸모는 존재 그 자체의 긍정이다.     


도입부 살해당한 노인과 살인자 청년에게 세상은 꽉 막혀 있었다. 전자는 갑갑한 건물 구조물, 후자는 빗물방울이 혼탁하고도 더럽게 남아있는 유리창에 의해 외부와 막힌다. 이들은 불투명한 창에 의해 간접적으로 매개되거나, 심지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78세인 미치의 발걸음을 ‘건널목’이 가로막고, 세상 속에 참여할 수 없는 노인들은 주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으며, 플랜 75가 집행되는 공간에선 망자/산자를 분리하는 커튼에 의해 서로 보이지 않는다. 존재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벽은 청년이 자살할 때 외친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과 관련한다. 국가의 유용성이란 척도와 필터에 의해 개인이 걸러진다. 걸러지지 못하면 죽거나 보이지 않게 되고, 걸러진다 한들 불투명하게 보이고… 

그러나 영화는 장애물들을 뛰어넘는다. 미치는 이네코를, 히로무는 삼촌 유키오를 만나기 위해 건널목과 문을 넘는다. 플랜 75 센터에 도착한 미치는 커튼 사이로 옆자리 유키오의 최후를 목도한다. 미치가 플랜 75 센터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베란다에서 만끽한 것은 '태양'이었다. 불투명한 창과 달리, 태양이 내뿜는 풍부한 빛은 존재에 무언가를 덧씌우기는커녕, 순수한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고 밝힌다. 미치는 국가의 기준과 자격 요건에 따라 재현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나타나는 자신, 무용하게 스스로를 계속 불태우더라도 그저 존재하는 태양과도 같은 삶을 본다. 

순수한 자신을 회복하자 발과 다리가 돌아온다. 마리아가 양로원에서 일하던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안정적인 트래킹 숏이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노인이 되어서도 유용하길 바라는 국가, 자신의 돌봄 의무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국가, 유용하지 않은 노인을 몰아내는 플랜 75에 모두 다 '탑승'한 상태였다. 그러나 영화 말미 모두 다 제도에서 이탈하며, 안정적인 카메라 워킹 대신 급박하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가 복권된다. 미치는 산소 호흡기를 떼고 플랜 75 센터에서 탈출하고, 마리아는 히로무가 유키오의 시체를 빼돌리는 것을 돕는다. 이후 마리아는 2인용 자전거를 '혼자서' 탄다. 2인용 자전거를 혼자서 타는 행위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무용한 행동', 그러나 인간은 무용하더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타인의 죽음으로 연명할 것이 아니라, 내 뒤에 타인을 태울 채비를 갖추며 공존해야 한다. 또 도망친 미치는 연약하지만 강인한 손으로 이 세상을 굳세게 붙잡고, 여전히 숨결을 내뱉으며 태양 앞에서 노래한다. 히로무, 마리아, 하루코의 사무적인 발화가 아닌, 무용하지만 그저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를 말이다. 결국에는 그 무용함이 인간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삶을 빛나게 하리니. 


이렇게 치에는 미래에 다시 도래할지 모르는 <나라야마 부시코>를 경고한다. 신의 권위와 신성함을 빌리던 과거와의 차이는 아름다움과 자유가 선전 전략이라는 점이다. 수단은 달라졌으나 죽음은 여전히 <나라야마 부시코>처럼 강제일 것이라 경고하는 본 작품은 흡사 일본의 켄 로치가 탄생할 것을 예고한다. 국민에게 소홀한 이념과 국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심지어 그 냉담함이 보살펴야 할 약자를 죽음으로 내몬다는 점에서, 끝끝내 인간의 죽음이 국가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치에는 미래를 다룬다. 그래서 지금 당장을 다루는 로치와의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치에는 현재 일본이 맞닥뜨린 초고령화 사회, 청년 실업 및 빈곤, 타인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삼아 본 작품을 연출하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미래로서 로치처럼 리얼리즘을 띤다. 

즉 치에는 장편 데뷔작에서 일본의 오늘을 관통하는 섬세하고도 탁월한 통찰을 선보인다. 한편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편 <플랜 75>에서 청년들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장편 <플랜 75>에서는 도입부를 제외하고선 청년 묘사를 대폭 축소했는데, 어찌됐든 유사하지만 별개의 작품인 단편에 기댈 것이 아니라, 청년 문제 또한 장편 <플랜 75> 내에서 완결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초반부의 충격과 서늘함에 비한다면, 중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진부해지는데, 한편 이는 늘어지고 지루하더라도, 이로써 무용하더라도 존재해야만 하는 인간, 곧 영화의 주제 의식과 맞닿을 수 있기에 수용할만하다. 존재 그 자체로 신성한 인간을 버텨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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