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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29. 2024

흘리뉘르 팔메이슨, <갓랜드>

각자의 심원한 이계

흘리뉘르 팔메이슨(Hlynur Palmason), <갓랜드>(Godland) - 각자의 심원한 이계 

불의와 악덕 앞에서 양심은 정신을 쿡쿡 찌르고,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며 옳은 길로 인도하려 애쓴다. 이 양심은 선천적으로 선한 인간의 원초적 능력일까? 프로이트에 따른다면 'NO'다. 프로이트는 양심을 초자아가 집행한다고 주장한다. 양심과 죄의식의 근원, 내면세계의 변호사인 초자아는 '보호자의 교육'으로 형성된다. 양심이란 게 없던 것이 틀림없던 유년기의 우리는 아무데서나 뛰어놀고 목청 높여 떠들며 마음대로 먹고, 수틀리면 억지를 부렸다. 그럴 때마다 양심 대신 부모가 중재했다. 부모뿐만 아니라 무수한 어른들,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이 호되게 훈계했다. 그렇게 훈육이 반복되며 해선 안 되는 일,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을 깨우친다. 그럼에도 살다보면 악덕의 수렁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초자아는 “너 그러면 혼나!”라며 보호자의 권위와 공포를 빌려 존재를 문책한다. 그래서 초자아는 무수한 권위자 및 법, 종교 등도 근원이다. 우리의 초자아는 절대자의 심판이 두려워 악을 저지한다. 그래서 초자아는 '징벌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또 '법 집행자의 권위'가 여전해야만 유효하다. 징벌에서 저 멀리 달아난다면, 권위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면 숙달된 초자아, 이로 인한 양심도 흐지부지 힘을 잃는다. 흘리뉘르 팔메이슨의 신작 <갓랜드>는 양심에 대한 이야기, 기독교적 초자아가 약해지는 딜레마를 다룬 영화다.    

  

1984년 회픈 태생의 흘리뉘르 팔메이슨은 아이슬란드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장편 <겨울 형제>로 2017년 데뷔한 이래로 아주 독창적인 미장센을 선보이며 아이슬란드 영화계를 대표하고 있다. 팔메이슨은 오늘날에 필름을 활용한다. <겨울 형제>에서는 16mm 필름, <화이트 화이트 데이>에서는 35mm 필름을 사용하며, <갓랜드>에서도 35mm 필름으로 돌아온다. 그는 단순히 탐미주의를 위해서 필름을 선택하진 않는다. <겨울 형제>의 험준하고 척박한 광산, <화이트 화이트 데이>에서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불명확한 경계성, 아이슬란드의 희멀겋고도 차가우며 칙칙한 풍경, 단편 <둥지>에서의 가변성을 효과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해 필름의 질감을 적극 활용한다.

필름으로 구현된 세계는 차갑고 거칠며 피사체가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다. <겨울 형제>에서 에밀의 개인적 일탈과 광산에서의 보편적 규율 사이에서 그가 바라는 삶이 대체 무엇인지 혼미하고, <화이트 화이트 데이>에서 아내의 죽음 이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잉기뮌디르의 일상, 아내의 거짓과 진실 등 식별되지 않는 것들이 어지러이 뒤엉킨다. 현재-과거, 주체-객체 사이에서 개인들은 어중간하게 얽매여있다.

그 원인은 ‘비극’이자 ‘시련’이다. 단편 <화가>에서 예상치 못한 방문, <둥지>에서의 추락사고 등 팔메이슨 작품에선 시련이 반복된다. 그래서 시련을 극복하며 주인공들은 개인성을 되찾는다. 개인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련이 연이어지고, 보편적인 섭리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런데도 각자의 주체성을 존중하며 개인을 회복하려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서로는 드러난다. 또한 팔메이슨은 '변화'를 긍정한다. 과거에 집착하느라 현재를 놓치는 일이 빈번하니 말이다. <둥지>에선 촬영과 구도라는 본질은 같되, 그 가운데서 쓰러지고 건립되며 잃어버리고 채워지는 변화를 긍정한다. 이렇게 독창적인 미장센으로 춥고 거칠며 비정한 세상 속에서 개인을 되찾는 여정을 담아내는 팔메이슨은 <갓랜드>에서 어떤 형식과 인간을 보여줄까.      


본 작품은 타이틀이 두 번 떠오른다. 첫 번째 타이틀은 덴마크어, 두 번째로 떠오른 타이틀은 아이슬란드어다. 땅은 하나다. 그러나 제목 '신의 나라'를 지배하는 절대자는 둘이다. 각각의 언어가 각기 다른 신을 형성한다. 덴마크어는 덴마크에서 다수가 믿는 ‘루터교’에 상응하고, 루터교 전파 이전 아이슬란드의 자연 친화적인 토속 신앙을 아이슬란드어가 가리킨다. 각기 다른 신을 믿는 두 집단은 번역이 되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의 화면비는 1.33:1인 것이다. 단순히 좁은 것뿐만 아니라 레터박스, 필러박스가 확연하게 노출되어 있다. 1.88:1이나 2.39:1 화면비는 상·하단이 되었든 좌우측이 되었든, 어느 한쪽만큼은 검은 화면이 가로막지 않고, 숏이 채워진다. 이로써 프레임 내의 운동이 그 너머로 자연스럽게 확장될 것만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와 달리 본 작품의 검은 화면은 영화적으로 연결될법한 ‘연작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1.33:1의 사방을 에워싸 단 하나의 이미지만 바라보면 그만인 ‘사진의 감상법’을 요구한다. 심지어 모서리까지 둥글게 안쪽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프레임 중앙으로 유도한다. 그 이유는 본 작품이 아이슬란드에 선교를 간 신부가 촬영한 '사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파편적인 사진 이상의 것을 함부로 상상하기 어려운, 그 사진에서 제한적으로 이어지고 확장되는 이야기가 <갓랜드>다. 더욱이 서로의 종교로 개종되지 않거나, 언어가 번역되지 않는 이상 서로에게 이어질 수 없는 각자의 폐쇄적인 신념도 좁다란 화면비의 근원이다.      


오직 하나의 숏에만 집중을 요하는 화면비에 더해, 영화의 편집 역시 ‘불연속’적이다. 그래서 아무리 숏이 연결되어도 때때로 각 숏은 전후의 맥락에서 느슨한, 고유한 존재감을 뽐낸다. 도입부, 루카스는 회랑을 걷고, 그 끝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그러나 평면적으로만 이동하는 카메라는 수직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윽고 루카스가 2층에서 다른 신부와 식사한다. 1층과 2층을 평면적으로 포착하는 숏 사이에는 채워지지 않은 수직적인 틈이 있다. 이후 아이슬란드로 선교를 떠난다. 루카스가 사진기로 촬영하는 선원들로 연결되는 편집은 비교적 연속적이다. 그렇게 안정적인 숏이 이어지다가 대뜸 세차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 숏이 연결되거나, 범선을 포착하다가 갑작스레 불안정한 나룻배를 이어낸다. 즉 전후의 숏이 급격하게 변화하는데, 불연속적이고 느슨한 편집은 그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확실한건 루터교를 믿는 덴마크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는 것이요, 그 연결에 아직 '번역'이나 '개종'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연속은 되지만 설명하긴 어렵다. 

또 루카스를 기준으로 덴마크적인 숏들은 연결이 불충분할지언정 설명은 되었다. 계단을 오를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고, 아이슬란드에 막 도착한 이후 덴마크인들이 고용한 라그나르와 주민들은 퉁명스럽긴 해도 그들에게 말 타는 법을 알려주고 여정을 함께한다. 즉 연결이 불충분하긴 하지만, 덴마크인들이 포착되고 있을 때는 비교적 논리적이고 연속적이다. 대체로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는 만큼, 그들의 행동은 명확하게 제시되고, 또 프레임 안에서 행동이 완결된다. 이는 그들의 ‘시점 숏’이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더러워진 사진기를 보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인지한다. 그의 눈은 더러워진 사진기를 청소하고 씻는 숏으로 연속한다. 라그나르가 개를 봤으니 부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전 숏에 내재된 가능성이 다음 숏을 추동한다.     


그러나 영화의 카메라는 인간의 시점만 반영하지 않는다. 흡사 거대한 절대자 내지는 그들을 에워싼 자연의 시선을 가시화한 듯한 전지전능한 시선이 이따금 인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은 인간의 유한한 시선보다 더 무한한 연결을 가능케 한다. 지금껏 주관적인 시선은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루카스의 시야에 동행하는 개가 보였다. 그러나 보기 싫어 졌다. 그래서 보이지 않게 가림막을 친다. 또한 주관적인 시선은 본 작품에서 ‘친밀함’을 드러내는 ‘클로즈업’이나 보고 싶은 것을 회고하는 ‘플래시백’에 상응하며 감정을 투영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카메라는 감상자가 보기에 잔혹하다 싶을 정도 양 도축 과정을 적나라하고도 상세하게 기록한다. 주관적인 시야가 보고 싶건 보기 싫건, 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 어떠한 존엄도 감정도 없는 즉물적인 태도로, 그저 싸늘히 식어버린 물질인 시체 위에 또 다른 물질인 흙이 덮여지는 동료의 장례식을 응시한다. 주관적인 의미는 조금도 투영되지 않고 말이다. 더욱이 루카스의 시선은 프레임 안에 담아야 할 모델들의 포즈와 얼굴을 고정시켜 가둬둔다. 해변에서 모래사장에 떨어진 새싹을 발견했고, 제 시야 안으로 그것을 들어오게 만들어, 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연은 다르다. 루카스가 교회가 지어질 마을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항시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주관이라면, 빠져나가야 할 대상들을 굳이 붙잡지 않는 것이 객관적인 자연의 태도다. 반대로 주관적인 시선에서 찾을 수 없던, 루카스가 잃어버린 말을 자연의 전능한 시선이 발견한다. 

그래서 자연에서의 편집은 더더욱 불연속적이다. 초원에서 카메라를 씻은 이후, 그걸로 촬영하기는커녕 루카스가 잠든 숏이 연속된다. 그는 대자연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거나, 현상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를 더 잘 아는 라그나르, 동료를 앗아가고 사진 촬영을 방해하는 자연이 루카스의 ‘다음’을 규정한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루카스가 주체적으로 보고 밝히며 참여하였다. 그러나 루카스가 동료와 함께 주변을 탐색하는 장면에서 그의 시선이 아닌, 더 전능한 누군가의 ‘하이앵글 구도’, 두 남성이 작고 무기력해 보이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뒤바뀐다. 그들이 밝히지 못한 자연에 의해 객체로 전락한다. 더불어 하나의 행동만 담은 숏과 달리, 롱테이크가 품은 가능성은 너무나 많은 나머지, 다음 숏이 어떻게 펼쳐질지 그들도, 감상자도 가늠할 수 없다. 이름 모를 야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 이후에 잔해가 포착되고, 직후 널브러진 루카스가 연결되리라 누가 감히 예측했을까.

루카스와 동료가 폭포를 탐색하는 시퀀스에선, 장어 번식에 충격 받은 아이슬란드인 이야기를 말하는 라그나르의 나레이션이 교차된다. 라그나르의 발화엔 장어 번식과 추한 육욕이라는 자연의 구체성이 있다. 반면 루카스와 동료를 촬영한 숏에선 인간의 청각이 사라진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폭포를 구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연을 구술하고 가리킬 수 있는 라그나르의 암송이 침투하는 것이다. 루카스와 동료는 핸드 헬드로 포착되지만, 라그나르의 나레이션은 담담하고 안정적이다. 라그나르에겐 숭고하고 심원한 자연을 설명하는 말이 남지만, 이 때 정작 그 자신은 사라진다. 신화는 인간을 치켜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루카스와 동료는 포착되지만 그들이 자연을 바라보고 밝히는 시점 숏은 부재하거니와, 그들은 폭포를 촬영하는 카메라에 의해 어부지리로 포착된다. 그렇게 루카스는 루터교가 아닌, 자연이 지배하는 아이슬란드를 거치며, 미약한 인간의 한갓 부질없음을 경험한다. 카메라를 망가뜨린 설원에서 십자가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카메라는 인간한테선 불가능한 극단적인 부감 숏으로 멀어져 설원 횡단을 포착한다. 또 루카스가 삼각대를 고정시켜서 만들어낸 안정적인 프레임은 무자비한 바다의 핸드 헬드로 인해 파기되며 난생 겪어본 적 없는 배 멀미를 불러온다.     


‘시선’에는 힘이 있다. 언짢은 눈빛은 상대를 검열하고, 또 우리는 바라보면서 사물이나 공간에 잠식되지 않으며, 상대를 통제할 수 있는 행동을 골똘히 강구한다. 그러나 루카스는 더 전능한 무언가에 의해 바라봐지며 역으로 통제를 당하고, 그가 아무리 치열하게 바라봐도 밝혀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후 텐트에 들어가 촛불을 켜서 기도한다. 근세 회화에서 촛불은 기독교적 정신의 상징이다. 영국의 화가 호가스의 촛불은 기독교에서 규정한 나쁜 행실을 폭로하는 장치였다. 촛불은 육체적 욕구를 포함한 야만 속에서 거룩하게 빛났으나, 너무 흐렸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화가, 죠셉 라이트는 촛불로 과학적인 오브제를 비추었는데, 이로써 촛불은 계몽이자 전능한 우주, 절대자의 빛이었다. 루카스가 촛불을 밝힌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로, 절대자에게 야만을 몰아내달라는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촛불은 밖에서 불어오는 싸늘하고도 잔혹한 바람에 의해 손쉽게 꺼진다. 아이슬란드에서 선교 및 계몽을 원하던 덴마크인의 의지는 무기력하게 저물어간다. 

루카스는 여정 도중, 지평선 너머에서 뜨겁게 반짝이던 ‘화산’을 보았다. 그 화산은 객관적인 자연의 시선이 아니라 루카스의 시선에서 포착되는데, 그 주관적인 시점 숏은 촛불을 드넓게 확장시키고자 하는 뜨겁고도 정열적인 신념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라그나르를 비롯한 사람들은 떠나고, 초원을 비추는 롱테이크에 루카스는 쓰러진 채로 굴복한다. 이후 화산 시퀀스가 연결된다. 화산이 폭발하여 마그마가 흘러내린다. 이내 곧 마그마는 아이슬란드의 냉혹한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굳는다. 이후 이와 상반된 숏을 팔메이슨은 연결한다. 바로 바다 속에서 해초를 따는 아나와 이다의 하반신을 말이다.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두 숏의 연결은 사탄이라 명명된 자연에 버려진 줄 알았던 루카스가 라그나르에 의해 어영부영 ‘마을’에 다다른 극적인 이동을 의미한다. 루카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이슬란드를 맞닥뜨리고 절망하는 전반부를 1부라 한다면, 마그마가 여러 형태로 변화하듯 덴마크인-아이슬란드인 혼혈이 살고 개종될 준비가 되어있는 마을이 2부다. 

여기서 팔메이슨이 35mm 필름을 선택한 이유가 나타난다. 오늘날에 16mm 필름이나 35mm 필름을 사용하는 감독들은 그레인의 유/무를 선택한다. 필름으로 촬영을 하더라도 이를 DCP로 변환하여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인 만큼 그레인을 통제할 수 있는데, 팔메이슨은 필름이 훼손된 징후인 그레인을 강조한다. 필름의 아스라한 질감은 불가항력적이고 숭고한 자연의 미지를 부각하는 1부에 국한되지, 전체에 거쳐 사용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레인을 강조하는가? 그레인은 어제의 필름, 오늘의 필름, 내일의 필름이 상대적일 수 있음을,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보였던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불완전하게 변할 수 있다는 진리를 환기한다. 본 작품도 그렇다. 루카스에게 확고부동한 줄만 알았던 일신교적 믿음이 흔들리는 반면, 역으로 루카스 일행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던 라그나르는 루터교에 매료된다. 협곡을 오를 때 라그나르는 루카스에게 고삐를 느슨하게 잡으라며 말과 함께 위로 향한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 위로 다다를 필요가 없다는 듯 포기하고 싶어 한다. 교회 건설 현장에서 위로 향하는 라그나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원하는 반면, 아래로 널브러지며 마을에 도착한 루카스가 깨어나서 맨 처음 마주한 제 모습은 동물적인 '나체'였다. 즉 두 신,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의 유동성을 가변적인 필름의 그레인으로 보여준다. 또한 초자아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와 환경의 변화로 인한 양심의 가변성이기도 하다.     


그간의 여정에서 라그나르의 아이슬란드어는 루카스에게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에는 양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혼혈 통역이 존재한다. 그래서 소통이 원활한 2부의 편집은 연속적으로 변한다. 의식을 잃은 루카스가 깨어나, 빈센트 가족과 식사한다. 빈센트가 루카스에게 질문하고, 또 그를 응시하면, 1부와 다르게 그 시선과 질문에 타당한 숏이 이어진다. 이다, 아나와의 대화도 마찬가지로, 2부에서는 연속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 숏으로 구성된 시퀀스뿐만 아니라 롱테이크도 그렇다. 1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 불통에서 비롯한 숏이 연결되었다. 잠에서 깬 루카스는 자신이 쫓아낸 개를 보았고, 또 의중을 이해할 수 없는 라그나르의 체조와 신체를 본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그의 요청에 따라 여자들이 넥타이를 메주고, 당시의 젠더에 맞춰 여성은 음식을 만드는 등 행위가 뚜렷하다. 충동적인 동물적 신체는 성 역할 및 관행에 따른 뻔한 행위로 축소된다.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눕거나 앉는 반면, 남성들은 합의된 폭력인 씨름을 즐긴다. 또 1부에서는 보기 싫은 잔혹한 양 도축을 봐야만 했다면, 2부에서 이다는 암탉 도축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눈을 가린다. 더욱이 1부에서 프레임 바깥으로 계속 이탈하는 롱테이크와 달리, 피로연을 포착한 롱테이크는 사람들을 머금고 보존한다. 아기가 어린이로 이어지고, 그 아이들은 성인으로 이어져 남과 여는 춤을 추는 등 연속이 탄탄하다. 

라그나르는 루터쿄에 의해 연속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래서 루카스에게 고해성사한다. 라그나르는 용서받고 싶어 하며 자연의 느슨한 양심 대신 루터교의 엄정한 초자아를 따른다. 그러나 루카스는 확고부동하게 가능할 줄 알았던 계몽이 불가능하고, 오직 가능한 것이란 야만과 죽음임을 깨닫는다. 망자를 추모하던 그의 엄격한 양심은 자연을 거쳐 느슨해진다. 그는 빈센트와의 저녁식사에서 아이슬란드에서 실현하려 했던 계획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코피를 쏟는다. 당시의 계획을 현재의 육체가 더는 실행하지 못하겠다는 듯 백기투항한다. 루카스는 씨름으로 빈센트를 이겼다. 루카스는 마을의 신부이기에, 그 권위자에게 수혜를 입는 구성원들은 일부로 져준다. 이후 루카스는 라그나르와 씨름을 하고 승부가 나지 않는다. 루카스는 기독교에 의해 야만적이라 평가 된 자연을 직접 겪어보고 인간의 나약함을 체감했다. 한편 구원을 바라는 라그나르도 그를 꺾지 않으며 봐준다. 어떻게 상대하라고 말하지만, 라그나르를 자연의 화신으로 보는 루카스는 소극적이다.      


본 2부의 장면들은 아무래도 1부에 비해 감각이 따분하다. 루카스처럼 문명에 속한 감상자들은 예측할 수 없던 자연이 생생하고 숭고하던 반면, 마을은 익히 사회화과정 속에서 몸에 밴 행위들이 틀에 박힌 듯 이어지기 때문이다. 철학자 들뢰즈가 현실을 구현하기 위해 일상적 진부함을 늘여놓는 네오리얼리즘을 성명하기 위해 창안한 용어인 '죽은 시간'이 2부에 가득하다. 그런데 라그나르에겐 1부가 죽은 시간이요, 2부가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다. 라그나르에게 현실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즉 각자의 죽은 시간이 다르고, 지금 여기에 속한 태도도 다르며, 상대방도 달라졌다. 

그 변화 속에서 변화한 주체와 기대되는 객체는 충돌한다. 루카스는 촛불과 화산의 뜨거운 종교적 열정을, '시뻘건 현상실'의 정욕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마을에선 루카스가 여전히 신부이길 기대한다. 그래서 완공된 교회 안에서 설교하지만, 자연에 상응하는 개가 그를 향해 밖으로 나오라는 듯 시끄럽게 보채며 짖는다. 또 루트교에 예속되지 않는 아기는 경건하고 적막해야 할 교회에서 귀 따갑게 운다. 이후 진흙탕에 미끄러져 선한 신부의 얼굴이 아니라, 난잡한 사탄의 얼굴로 뒤바뀐다. 루카스의 사진도 변화한 주관성을 반영한다. 1부에서 찍은 사진들은 그의 기독교적 이상을 선전하고 있었다면, 2부에서는 정념적이다. 라그나르는 2부의 루카스가 여전히 1부의 루카스일거라 생각하고 사진 촬영 및 고해성사를 요청하여 사단이 났다. 안나는 신부로서 루카스를 사랑한다. 그러나 루카스는 신부로서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빈센트는 신부임을 포기한 루카스를 응징한다. 

즉 나는 넘실거리는 주체이길 바라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의 욕망이 내게 특정한 객체를 투영하고, 이로써 각기 바라는 구원은 영영 유예된다. 이를 가시화한 시퀀스는 교회 건설현장에서 라그나르와 이다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다는 목재더미 위에서, 즉 지상보다 조금 위에서 뛰어논다. 그러다가 이다는 라그나르에게 질문하고, 목재더미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나 이다가 라그나르에게 듣고 싶은 답은 들리지 않고, 또 이다가 땅에 오롯이 착지하기 전에 아나가 위치한 숏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하늘과 지상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또 궁금한 질문은 있지만 원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는, 주체와 객체의 중간 지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팔메이슨은 객체의 확고하고도 구체적인 항구성이 아니라, 주체의 '변화'를 관대하게 긍정한다. 이다는 혼혈이다.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모두에 속한다. 이다는 루카스에게 라그나르의 아이슬란드어를, 라그나르에겐 루카스의 덴마크어를 번역해준다. 또 빈센트가 루카스를 죽였다. 그러나 덴마크인 아버지와 루터교의 지배에만 놓이지 않는 이다는 루카스를 찾기 위해, 그가 죽은 아이슬란드 대평원으로 향한다. 이후 주검을 보고 눈물을 흘리되 크게 구슬퍼하지 않으며, 단지 그 육체가 꽃과 풀과 다른 생명체로 변화할 가능성에 고개를 숙인다. 인간은 멈추게 한다. 라그나르는 자연의 잔혹함만을 믿으며 살릴 수 있는 것을 굳이 살리지 않았다. 일신교가 지배하는 문명에선 이교도는 삶을 거두고, 라그나르의 회개 가능성을 부정하며, 가장에게 소유된 두 딸은 그가 바라는 상태로 멈춰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은 산 것을 죽임과 동시에, 죽인 것을 다른 형태로 살게 한다. 팔메이슨은 고정된 카메라로 긴 시간을 할애하여 말의 사체를 비춘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비교적 멀쩡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윽고 파리가 들끓고, 분해되어 뼈만 남는다. 루카스의 주검도 마찬가지로, 살과 털가죽이 붙어 있던 그의 외피가 사라지고, 대신 백골과 그 주변의 꽃이 피어오른다. 자연은 인간이 멈춰놓은 죽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말에서 팔메이슨은 덴마크 국가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하는 와중, 이와 불일치하는 아이슬란드의 시각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더해서 배경음악의 시간적 흐름과 달리, 시각의 흐름은 아주 재빨라 아이슬란드의 사계를 온전히 담아낸다. 팔메이슨이 긍정하는 변화는 아이슬란드어와 덴마크어 오가기, 음향의 시간과 시각의 시간 또한 넘나들고 뒤섞일 수 있는 범신론적 가능성이다. 이로써 믿는 것 혹은 아는 것은 확고한 진리가 아닌, 변덕스럽고 심원한 세계의 불가해함과 다중 차원·시간이다. 루카스는 동료가 사망하자 그를 플래시백으로 회고하고, 또 그가 살아있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러나 회고 이후엔 땅에 묻혔던 동료의 시체가 파도에 의해서 파헤쳐지고, 영화 사이사이엔 물결이나 지렁이 등 유연하게 곡선적으로 굽이치는 피사체가 인서트된다. 고정되지 못한 십자가가 파도에 떠다니는 유연함, 사진을 위해 얼굴에 분칠을 할 수 있음과 동시에, 이다처럼 말 위에 서있거나 카메라를 등지거나 말 머리에서 반대로 포즈를 취하며 사진 촬영의 평범성을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양심과 초자아는 특정 환경에서 통용됨을 넘어서, 그 너머로 확장해야 한다. 

그 모든 형태를 긍정할 때, 삶과 죽음도, 자연과 문명도 화해하며, 하나가 아니라 두 개, 더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화의 좁다란 화면비와 같은 시야에 갇혀있다. 그렇기에 팔메이슨은 인간의 시야와 그 너머의 드넓은 시야를 대비하여 변화무쌍한 숭고와 불가항력을 긍정한다. 이를 아주 빼어난 편집, 미장센으로 탐구하고, 효과적인 매체를 선택하며, 영화와 감독 몸소 그 변화를 지향하고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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