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거나 바라봐지거나
키메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얼굴과 상반신은 사자요, 하반신은 염소며, 날개 죽지에는 독수리가 튀어나와있고, 꼬리에는 뱀이 달린 키메라는 여러 동물이 합쳐진 무시무시한 괴수였다. 키메라와 같은 괴이한 혼종들은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 걸쳐져있던 타 원시·고대 문명의 신화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키메라 개념을 ‘도굴’에 빗대는 영화감독이 있다. 늘 추억과 상상력을 동화적으로 연출해낸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과연 그녀가 비추는 키메라는 어떤 존재일까?
1981년 피에솔레 태생의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다. 그녀의 작품에 매번 등장하는 배우, 알바 로르바케르와는 자매 사이로 둘이서 함께 이탈리아 영화계를 선도하고 있다. 로르바케르는 분명 오늘날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영화는 매우 복고적이다. 그녀는 16mm 필름을 선호하고, 20세기 초반의 영화관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고 둥근 테두리를 매번 선택한다. 이런 복고적인 양식에 그녀의 자전적인 유년시절·청소년기를 담아내고, 더불어 "머나먼 옛날 옛적에~"로 운을 뗄 것만 같은 동화, 우화를 선보인다.
로르바케르의 초기 작품인 <천상의 육체>와 <더 원더스> 모두 그녀 자신의 기억을 반영한다. 주요 경제 수단인 양봉과 농업에 가장 효율적인 대가족 구성과 오밀조밀한 마을 형태가 연속된다. 이러한 생활 풍습을 이루는 가톨릭의 세가 강했음에,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견진성사를 받아야 했던 풍습도 반영되어 있다. 영화는 로르바케르가 이러한 구조 내에서 성장해왔음을 밝히지만, 여기서의 성장은 단순히 어른들의 답습, 모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기 두 작품에서 소녀들은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하고, 또 어른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집안의 중대사를 몸소 결정해보거나, 노동을 그들이 주도해본다. 자연, 타인과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스스로가 추구하는 얼굴로 화장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폭압적인 가장이나 어른들에게 따귀를 맞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직하게 제 선택을 고집하며 자아를 찾는 여정이 로르바케르의 성장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우람한 육체로 존재는 온전히 건너가지 못한다. <더 원더스>의 결말처럼 성장하고 난 이후의 현재는 황량하리만큼 텅 비어있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성체가 되듯, 성장 과정에서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그 유실이 너무나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너나 할 것 없이 과거에 천착하며 영광과 그리움을 더듬듯 말이다. 이들은 현재라는 시간을 착취하지 못하며 과거에 머무른다. 즉 로르바케르의 시간론은 모순적이다. 분명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로 나아가야하지만, 그 현재는 공허하며 풍요롭고 충만한 것은 과거에 가득하나니, 그 사이에 끼어서 움직일 수 없는 유령과도 같은 영화를 늘 연출한다. 복고적인 양식과 그녀의 영화가 늘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현재성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위치하여 교란을 일으키는 유령처럼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그런데 신작에서 로르바케르는 약소한 변화를 가한다. 바로 ‘전개 순서’를 뒤집는다. 일반적인 로르바케르 영화가 과거에서 현재로 향하는 반면에, 본 작품은 극의 출발부터 <더 원더스>나 <행복한 라짜로>의 결말을 연상케 하는 황량한 현재가 펼쳐진다. 그 현재엔 유의미한 것을 길어낼 수 없는 숏들로 가득하다. 기차에 이상한 티켓을 들고 탑승한 아르투의 정체, 그가 어떤 목적으로 이탈리아로 향하는지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한데, 의문에 대한 답은 과거로 향하는 중반부에서야 겨우 드러난다. 또한 과거로 향하지 않고 현재에 속박된 아르투의 삶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플로라 부인의 저택 역시 딸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현재는 담배연기로 뒤덮여 아름다운 것들이 은닉된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는 매우 공허한 '죽은 시간'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가 이토록 권태로운 이유는 아르투가 소속된 '툼바롤리' 단원의 노래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일한 자는 마땅히 행복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가사가 반복된다. 에트루리아 초원은 대기업의 공장에 의해 오염되었고, 낙후된 마을은 일자리가 넉넉지 않은 모양인지 늘어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도굴에 목을 매지만, 밀수꾼들은 툼바롤리 및 다른 도굴꾼들에게 푼돈을 지불하여 유물을 밀매한 이후 큰 값으로 되팔며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 또한 도굴꾼들은 아르투처럼 범죄자가 되어 수감되는데, 이런 그에게 스파르타코가 보석금을 내어준다. 이로써 빚을 진 아르투는 그녀를 위해 도굴을 하고, 또 다시 잡혀가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다시금 보석금을 받고…… 이로써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경제뿐만 아니라, 아르투의 연인 베냐미나는 현재 사망했다.
그래서 이들은 풍요로웠던, 또한 연인이 생존해있던 과거를 갈망할 수밖에 없다. 과거가 보존되어 있는 플로라 부인의 집은 참으로 풍부한 이미지를 자랑하며, 그녀가 가르치는 노래 역시 아름다운 과거를 담고 있다. 숏 역시 툼바롤리 단원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점차 보이는 물질 이상의 가치와 의미들이 들어찬다. 연출 또한 현재를 다룰 땐 지지부진하더니, 도굴을 할 때 화면비는 변화하고, 음악에 맞춰 편집은 현란해지며, 수어 배울 때의 연출이 명랑하고 귀여운 것처럼 현재의 일상을 넘어설 때 다채로워진다.
이들이 과거로 향하는 이유는 '내가 바라봄'/'응시를 당함'이라는 문제, 즉 ‘시선의 딜레마’도 포함한다. 도입부, 좁다란 1.33:1 화면비에 아르투가 “잃어버린 여자의 얼굴”이라고 규정하는 베냐미나의 얼굴만 '클로즈업'된다. 이 장면은 아르투의 '시점 숏'으로서, 죽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그녀의 얼굴을 그가 바라보고 있으며, ‘렌즈 가리개’를 통제하여 볼지 말지를 몸소 결정할 수 있다. 베냐미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기 이전, 영화의 도입부는 귀뚜라미 및 늑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해괴하고 깜깜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기에 베냐미나를 따라다니는 '태양'처럼 보고 싶은 무언가를 밝혀내고 싶은 열망이 가득 차기 마련이다. 그 열망은 아르투의 ‘꿈’에서 충족된다. 그의 꿈은 보고 싶은 것들을 비논리적으로 마음대로 이어낸다. 가령 베냐미나는 초원에 위치해있는데도 불구하고, 흡사 그녀가 기차에 탑승한 것 마냥 차창 안에서 바라본 태양 푸티지를 이어낸다. 이러한 분방한 편집이 꿈뿐만 아니라 도굴, 음악이 반영된 시퀀스도 관통한다. 즉 보고 듣고 싶어서 꿈꾸고 땅 파며 노래한다.
이후 현재-현실은 1.66:1, 1.88:1 화면비에 담기는데, 더 넓어진 화면비엔 그만큼 더 많은 변수가 침투한다. 통제를 벗어난 변수가 이제 역으로 아르투를 응시한다. 그는 같은 칸에 탑승한 여자 승객을 ‘고대의 얼굴’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본인 역시 규정을 당한다. 기차에 동승한 승객들, 양말 상인, 검표원 등이 아르투를 바라보며 ‘의심스럽고 난폭하며 악취가 나는 사람’이라 표현한다. 영화 중반, 스파르타코가 출입을 결정하고 유물을 평가하는 CCTV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린 아르투는 불쾌한 시선에서 달아나고자 ‘롱숏’과 ‘프레임 바깥’으로 그들의 동공에서 멀어지지만, 그마저도 피로한테 붙잡혀 집 대신 툼바롤리 아지트로 이송되고, 그들의 동료로서 보이게 된다. 즉 바라보는 사람, 곧 태양의 특권이란 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좁아서 변수가 끼어들 틈이 없는 1.33:1의 꿈, 이미 완결된 기억, 노래 등에서나 가능하다. 반면 현재는 바라봄과 바라봐짐의 완력이 서로 대치·충돌한다. 우리는 바라볼 수만은 없고, 어떻게 바라봐질지 전전긍긍하거나 값을 더 매겨달라며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원하는 순간을 온전히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과거를 회고하게 된다. 우리는 기억을 바라보지, 기억에 의해 우리가 바라봐지지 않기 때문이다. 백골 및 유물들의 눈은 멀었기 때문에, 과거란 우리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올랭피아>가 아니라 지오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처럼 순종적인 감상의 대상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될 때 대상은 자유로워진다. 영화에서 자주 인서트되는 조류의 비행처럼, 시선에서 멀어져 이곳저곳을 유랑한다. 도입부에서 아르투는 담배 한대를 제대로 피우기도, 또 온전히 잠들거나 쉴 수도 없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그를 바라보는 타인이 아르투가 그렇게 보일 수 있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수한 방해꾼의 시선에서 벗어나 집으로 향한다. 집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낡고 누추한 거처, 하지만 그곳에서 아르투는 그 이전 더 좋은 환경에 있던 어떤 순간보다도 온전하다. 추워서 덜덜 떨어야하지만 충분히 편해 보인다. 더는 롱숏으로 달아날 궁리를 않고, ‘미디엄 숏’으로 가깝게, 비교적 신체 전체가 온전히 포착된다. 이전까지의 클로즈업은 타인의 시선에 아르투가 가까웠음을 가시화했기 늘 달아나는 모습이 이어졌다면,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집에서의 미디엄 숏은 그가 제게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아르투는 담배를 피우거나 휴식을 취함에 있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제 욕구에 근접한다.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안식처에 머무는 존재는 그야말로 진공상태에 빠져 제 모습을 완벽하게 보존한다. 툼바롤리 일당이 발견한 '신전'은 맨 처음에는 완벽하게 당시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시선이 동굴에 침투하자, 벽에 그려진 벽화가 순식간에 흐려지고 변색된다. 신전이라는 집은 그 시대를 고스란히 보존하는 벽화의 의중을 충실하게 지켜낸 반면, 벽화의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이 더 중요한 인간의 시선이 그것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 인간의 시선은 ‘경제’가 기준이다. 경제라는 목적이 여신상의 얼굴을 잘라내고, 마땅히 보여야 할 목적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 내내 숨겨져 있는 집에 지켜내고 싶은 것들은 시선을 피해 꼭꼭 숨겨져 있다. 플로라 부인의 딸들은 제 야욕을 위해 보존할 이유가 충분한 어머니의 저택을 팔아넘기려 한다. 그 시선이 미치자 플로라 부인의 집에 물이 새는 것은 아닐까. 또한 플로라 부인은 타인을 규정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위치해있다. 즉 그녀들의 시선은 매우 폭압적인데, 그래서 이탈리아는 제 딸들을 꽁꽁 숨겨둔다. 그 사실이 탄로 난 이후에는 그녀들이 어디에 머무는지 그 누구에게도 유출하지 않는다. 툼바롤리 일당과 틀어지고, 이후 아르투가 머무는 장소가 당국에 노출되자, 바로 공권력이 그 집을 허물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찍고 다닌 ‘사진’ 역시 스파트라코의 음흉한 계략의 근거가 되어 툼바롤리를 와해시킨다.
이렇게 시선으로 가득한 현재는 변색되고 철거되며 훼손됨에 등장인물들은 도굴하고 회고할 수밖에 없다. 플로라 부인은 현재엔 잠들어있으며, 기억 속의 아르투가 방문하고서야 비로소 기상한다. 이후 그 기억이 ‘귀빈’이라며 이탈리아에게 따뜻한 커피와 식사를 내오라며 지시한다. 즉 과거 때문에 현재를 버틴다. 그래서 과거는 죽거나 지나가버렸어도 현재에 의해 여전히 '끈'을 유지하지만, 감히 닿을 수 없고 그저 간접적으로 매개될 뿐인 불가침의 시공이기에, 로르바케르는 인터뷰에서 도굴 행위에 ‘신성함’을 느꼈다고 말한 것이리라. 멜로디는 모권이 강했던 에트루리아 문명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에 마초가 판치지 않았을 것이라며,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 말한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짧든 길든 지나간 과거이며,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는 현재에 산다. 지금의 문제, 남성 우월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그녀는 해답이 내재한 과거를 스크린 바깥의 현재로 꺼내려 한다. 그렇게 스크린-객석은 간접 매개되지만, 객석의 관객은 스크린으로 직접 뛰어들 수 없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의 관계다. 또 툼바롤리가 전통적인 유랑극단 퍼레이드를 신명나게 펼쳐 보이고, 발굴한 유물을 실생활에 사용하며 영화는 감각적으로 변한다. 연출 역시 이에 일조하는데, 20세기 초반의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에서 사용되었던 '패스트 모션'이 영화 초반에 간헐적으로 아르투의 걸음걸이에 사용된다. 즉 잿빛 현재에 과거의 신성한 유산은 심미적이다. 이 즐거운 것은 ‘수익’으로 직결된다. 유물을 팔아치워서 생활비를 버는 툼바롤리와 이를 밀수하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스파르타코를 보듯.
현재는 디스토피아요 과거가 유토피아인 로르바케르의 이번 작품에서도 매체는 ‘필름’일 수밖에 없다. 로르바케르는 16mm 필름을 촬영의 구심점으로 삼고, 간헐적으로 35mm 필름을 섞는다. 본 작품의 필름은 단순히 신비롭고 흐리며 아스라할 뿐만 아니라, 그레인과 노이즈가 제어되지 않아서 혼탁하고 거칠다. 선명할지언정 따분한 현재 대신 향하는, 지하를 파서 길어냈기에 흙이 묻고 흉이 이곳저곳 나있지만, 그런데도 신비로운 과거의 미감이 바로 필름인 것이다. 필름에 더해 모서리까지 둥글다. 둥근 모서리는 필름과 마찬가지로 훼손된 매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필러박스와 레터박스를 형성하여 검은 화면이 프레임을 에워싸는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둥근 모서리는 감상자의 시선을 프레임 너머가 아닌, 안쪽으로 응집시키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지금 보이는 것 너머가 아니라, 지금 보이거나 무언가가 보였던 중앙만을 응시하게 된다. 그 중앙에 과거가 모여들어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여기서 영화의 제목이 '키메라'인 이유도 드러난다. 아르투가 소위 ‘신 내림’을 받고 매장지를 찾았을 때 ‘키메라 상태’에 빠졌다고 표현하는데, 과거/현재, 속세/천상 등 ‘두 차원의 경계’에 머무는 이들을 키메라로 지칭하는 것이다. 툼바롤리 단원들은 대부분 남자다. 일상에선 남성이라는 성 관행 및 역할에 맞는 행동, 복장, 용모를 추구한다. 그런데 퍼레이드가 펼쳐지면 여성성으로 일컬어지는 화장을 하고 복장을 입으며 '드랙퀸'이 된다. 현재를 거부하고 과거로 향하는, 그런데도 육체는 현재에 머무는 도굴단의 특징을 남성의 몸으로 여성 젠더를 수행하는 이미지로 가시화한다. 반대로 아르투는 <행복한 라짜로>의 라짜로처럼 늘 똑같은 옷을 고수한다. 그의 육신은 현재에 얽매여있지만 그의 관념은 과거를 바라보기에, 현재의 흐름 속에서 쇠락하는 육체와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는 불변의 옷차림이 혼합된다. 영화에서 교차하는 ‘다양한 언어’ 역시 아르투가 영국인인지 아일랜드인인지 불분명하긴 하지만, 여하간 앵글로색슨인 것은 확실하고 영어가 입에 더 착 달라붙는다. 그런데 아르투는 이탈리아인 베냐미나와 사랑하고, 에트루리아의 유적에 매혹된다. 또한 현재엔 수어를 하는 이탈리아와 호감을 쌓아가며, 그야말로 두 문화권이 혼합된 존재로 재탄생한다. 단순히 그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인류학자이자 연인으로서 깊이 동화되기에 이른다. 이런 아르투가 무덤을 발견한 순간 카메라가 180도 뒤집힌다. 대지에 서있던 아르투가 일순간 천장에 매달린 듯 거꾸로 서며, 이윽고 쓰러져서 추락하는 듯한 이미지가 완성된다. 매개자로서 키메라는 기존 세계를 뒤집고 다른 세계로 뚝 떨어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 속 문자 그대로의 키메라, 더해서 키메라와 유사한 존재들은 매개자와 거리가 멀다. 이들은 조물주의 목적이 투영된, 이로써 그들 자신의 목적이 철저하게 짓밟힌 가련하고도 무시무시한 피조물이다. 유물과 벽화는 항상 무덤 속 백골 옆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무덤 주인의 사후세계를 구성하는 의무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유물은 아르투 기억 속의 ‘붉은 실’처럼 과거를 현재로 매개한다. 이러한 목적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회의와 죄책감을 느끼는 아르투는 유물 주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환영을 본다. 그런데 이 망자들은 도입에 등장한 승객들이다. 그렇다면 현재 죽지 않았겠지만, 그런데도 죽은 것처럼 표현된다. 이는 유물들이 해쳐지면 기억으로서 잔존하던 최후의 것마저 죽고 사라져서 유령으로 전락함을 상징한다. 신전에서 피로가 조각을 옮기기 위해 머리 부근을 훼손하고, 스파르타코는 봉헌물인 조각을 부르주아지의 수집욕을 위해 판매한다. 조각 본연의 목적이 아니라, 조각을 손에 쥐게 된 소유자들의 목적이 팔이 잘린 <밀로의 비너스>, 머리가 잘린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같은 키메라를 만들어낸다.
훼손되고 오염된 키메라를 만들어내는 이들 또한 매개자로서 키메라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들을 포식한다. 현재의 에트루리아 초원에는 적지 않은 군인, 경찰들이 툼바롤리 일당을 곁눈질하고 있다. 이후 신전을 파헤칠 때도 마찬가지인데, 이때 경찰의 정체가 스파르타코의 사주를 받은 또 다른 도굴꾼 일당임이 탄로 난다. 이로써 앞서 보았던 군인, 경찰 역시 신뢰할 수 없다. 플로라의 딸들 또한 어머니를 좋은 요양병원에 모시겠다고 말하지만, 실제론 귀찮은 노인네를 치워버리고 유산을 모조리 처분할 속셈을 음흉하게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유물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선량한 외면에, 유물을 갈취하려는 탐욕스러운 내면이 결합된 피조물들이 오늘날에 득실거린다. 이때 아르투의 뒤집힘과 실신도 달리 보인다. 본 작품의 회화 포스터처럼 이 탐욕스러운 키메라들이 고고학자인 그에게서 금화가 떨어지게끔 매달아 착취하는 것이다. 그를 매장시켜버리는 스파르타코의 도굴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매장되자 현재와 과거를 잇는 끈이 끊어진다. 아르투는 베냐미나를 만났을지언정, 더는 현재에 베냐미나나 고대를 이어낼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 목적을 대상에게 투영하지 않고, 다만 순수하게 대상을 경탄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이때 대상은 키메라로 퇴행하지 않고, 주체성을 고결하게 유지한다. 아르투는 유물이 훼손되었을 때, 또한 보존되지 못하고 팔려가거나 야욕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때 절망한다. 다시 툼바롤리와 협조한 이유도 수감 기간 동안 그들이 제 유물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료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돌변한다. 그래서 자신이 쥐고 있던 여신상의 머리를 강물에 떨어트려 버린다. 조각과 무관한 자본이라는 목적이 신성한 대상을 더는 도륙내지 않도록, 또한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봉헌물로서 제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로르바케르는 <행복한 라짜로>에서처럼 결국엔 현재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투의 꿈에서 베냐미나는 땅에 파묻혀있는 붉은 실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후 결말에서, 지하에선 붉은 실을 아르투가 잡고, 지상에서 베냐미나가 끌고 있음이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를 잇는 끈은 기어코 끊어지고야말고, 이후 베냐미나와 아르투는 재회한다. 그 끊김과 재회는 현재를 연결하던 아루트가 과거로 향했음을 의미하며, 이 시공의 초월은 사후에나 가능하다. 아르투가 매장됨과 동시에, 줄은 끊어졌고 땅은 파헤쳐지지도 않았는데 아르투는 지상으로 올라와 베냐미나와 재회하니, 현실의 이치와 맞지 않은 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를 도굴하거나 회고하는 이들이 바라는 꿈이란 살아생전엔 불가능한, 그렇기에 더더욱 신성한 것이다. 이와 달리 현재에 참여하는 이탈리아는 버려진 역을 개조하여, 다른 미혼모들과 그녀들 아이들의 삶을 이어낸다. 도굴꾼들이 이미 존재했던 것을 반복한다면, 이탈리아는 주인 없는 건물을 유익하게 재생성하며 현재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한다. 그 현재엔 새 생명들이 자라나고 있다.
동시에 로르바케르는 본 주장이 낙관론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경탄하는 대상은 현실-현재에 있지 않다. 과거가 되었든, 노래가 되었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차원 바깥에 위치한다. 아르투는 이탈리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한 채 도굴 현장으로 향하며 끝끝내 죽음을 맞는다. 이탈리아와 재회하기 위해 복식을 갈아입었지만, 결국에는 베냐미나와 함께하던 시절의 복장을 다시 꺼내 입으며 불가능한 과거에 중독된다. 더욱이 순수한 경탄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서로의 눈빛이 오가는 현재엔 결코 시선의 힘을 배제할 수 없다. 이탈리아에게 향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이발하던 아르투는 결국 자신을 바라보는 이탈리아의 시선에서 저 멀리 달아나, 오직 자신만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회고와 꿈의 영역으로 침잠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본질이란 ‘끊김’이다. 로르바케르의 연출도 그렇다. 계속 변화하는 아르투의 심리 상태에 따라 연출 또한 한 동향으로 연속되지 아니하고 일렁이는 수면처럼 지속해서 변한다. 각 시퀀스 전후엔 비행하는 푸티지가 필히 침투하여, 그야말로 이전을 온전하게 초월한다. 그래서 여러 연출이 혼재된 본 작품 역시 키메라라고 말할 수 있고, 이야말로 인간이 담기기 가장 적절한 그릇이다. 현실의 인과를 어떻게든 끊어내고 감미로움만을 취합하고 싶은 존재가 인간이기에, 그 과정에서 어느 시간대에도 오롯이 정착하지 못하며, 과거와 현재가 결합된 키메라가 인간이기에.